어설픈꿈2017.09.08 17:33

이유 없음


그때 나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저 습관 같은 것일지 모른다
힘내야 할 것도 인내해야 할 것도
이유도 없이 정해진 노선 따라
아무도 정해주지 않은 목적지로
굴러가고 있었으니까

어깨에는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모르는 사람의 머리가 얹혀있다
고작해야 나란히 앉았을 따름인
다른 사람의 무게를
머리칼을 조금의 알콜냄새를 숨소리를
입을 다물고 지지하며

휘어질 때마다 빨라질 때마다
남겨져서 휘청이고 무거워진다
가속도는 무게다
가속도는 만남이다
죄도 없이 대가도 없이
이유도 없이 짊어져야 한다

삶은 이유가 없어도 기각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유 없이 정한 목적지면 된다
나는 곧 일어나야 하겠지만
어깨에 놓여있던 무게에
주저하긴 할 것이다
사실 나는 슬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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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7.04.29 20:09

도망


  불광역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던 길, 거리는 이미 태양으로부터 뒤돈 지 오래, 모래가 흐르는 듯한 광대뼈, 아킬레스건은 여느 때처럼 걸은 시간의 무게에 시달려
  도망치고 싶어지는 그런 밤.

  몇 해 전 애인과 갑작스레 4호선을 타고 오이도까지 갔던 밤이 있었다. 도망치고 싶은 충동과 그럼에도 고작해야 만들어진 해안선으로 실려가던 막차. 그날 전철 안에서는 빌려쓰고 나온 사무실에 불이 났더라는 소식을 전화로 들었더랬다. 우리는 바다냄새 섞인 대나무통술을 마시며 모래를 토해냈을 조개들을 뒤적였다.

  망친 일은 많은데 도망칠 곳은 없고, 어디로 훌쩍 떠나기엔 너무 많이 떠나왔고, 온탕에 몸을 담아도 조개들처럼 모래를 토해내지도 못하고, 불려 나오는 때조차 없이, 이미 불가역적으로 떼어낼 수 없는 나이 시간, 도망칠 곳은 없고 도망칠 방법은 오직 없어지는 것뿐임을 이해한 지 오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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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6.08.22 14:27




햇빛 아래서

당신을 보낸 뒤 정류장에 앉아 햇빛에 절여진다
똑같은 햇빛이 폐 속까지 스며들지만
우리가 흘리는 땀의 냄새조차 같지 않고
태양조차 평등하지 않더라는 소문이 섬뜩하게 떠다닌다

하얀 햇빛에 탈색되는 공기 선명해지는 세계의 색깔들
나는 그저 모든 것이 좀 더 선명해지길 바랐는데
아무리 공기가 투명해지고 아무리 색깔이 선명해져도
볼 수 없는 너의 세계, 적록부터 다른 시각,
유아적인 두려움은 여백 사이로 선뜻하게 떠오른다

당신을 보낸 뒤 정류장에 앉아 이별을 되뇌인다
나는 그저
말과 맘이 표정과 감정이 좀 더 나란한 관계를 바랐는데
태양은 원래부터 나란하지도 않았고 지구는 언제부터 기울어져 있었고
나는 그저 다른 각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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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6.02.04 18:12




사레들린 삶

가끔 숨 쉬는 방법을 잊을 때가 있어
아무렇지 않은 나에게 의문을 가지는 순간
멈춰선 자전거가 넘어지듯이
곧잘 가슴 속을 무어로 메울 때가 있어
들인 것과 뱉은 것을 맞추지 못한 잠깐
사레처럼 잘못 든 경로의 도중

질식할 것 같은데 기침도 못하겠는 시간이 있어
수없는 호흡 중에 따져보면 약간이지만
무수한 감정들이 갈비 속에 쿵쾅대고
사실은 알고 있어, 너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음을
너와 나의 공통점,
사레들린 삶과 질식하는 아픔




---------------




들인 것과 뱉은 것
삼킨 것과 뱉은 것
삼킨 것과 토한 것

뭐가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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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5.12.24 11:02




꿈을 이룬 삶에 대하여



  어느새 이십대 후반에 접어들고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서른 즈음에’를 흥얼거리면 면박을 받던 것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인데, 이제는 ‘서른 즈음에’를 부르면 다들 어쩐지 짠한 시선을 보내와서 부담스럽다. 그런데 이런 나이가 되어서도 십대 때와 변함없이 받는 질문이 있다. 바로 “꿈이 뭐예요?”, 혹은 “꿈이 있으세요?”이다. 조금 더 뻔뻔하게 발전하면 “꿈을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나요?” 같은 질문까지도 받고는 한다.


  물어본 사람에게는 미안하게도 이에 대한 나의 한결 같은 대답은 상당히 김이 빠지는 것이다. “저는 이미 꿈을 이뤄서요.” 묻는 사람마다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꿈’의 개념은 아마도 조금씩 다르겠으나, 나 자신의 사전 속에서 꿈이란 이러이러하게 살고 싶다고 바라는 삶의 목표를 뜻한다. 예컨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든지,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인정받는 삶을 살고 싶다든지,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되고 싶다든지. 직업을 무엇을 갖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그 대표적인 내용 중 하나일 터이다. 그런 개념으로 본다면 나는 지금 살고 있는 방식이 내가 살고 싶은 목표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나의 개인적인 꿈은 이미 이루어져 있는 셈이다. 지금 사는 대로 활동가로 활동하고 글도 쓰기도 하고 덕질도 적당히 하면서 사는 것이 내가 살고 싶은 목표이다.


  물론 추가로 이루고 싶은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단독 저자로 내가 쓴 책을 하나 내고 싶다든지, 기타를 배워서 노래를 해보고 싶다든지, 개랑 같이 살고 싶다든지.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저 작은 허영심이거나 취향 같은 것이다. 내 삶의 꿈이라고까지 하기에는 어색하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부가적인 소품이나 양념 같은 것들이다. 사나흘에 한번씩 찾아가도 질리지 않는 동네에 있는 단골 맛집처럼 말이다. 그런 것들이 있으면 행복감이 많이 올라가겠지만, 없으면 뭐 그렇구나 싶은 것들. 중요하긴 하지만 꿈은 아닌 것들.


  좀 더 큰 단위의 목표야 있긴 하다. 뭐 인류의 평화라든지, ‘미성년자’의 해방이라든지, 사회의 변혁이라든지…. 한국의 두발자유 같은 경우는 내가 죽기 전에 꼭 보고야 말겠다고 오기와 독기를 품고 다짐한 바 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내 삶의 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는 이상이고 사회적 과제일 수는 있어도 내 인생의 꿈으로 삼기에는 지나치게 거창하다. 나는 내가 그렇게 대단하지 않음을 알고 내 인생이 그렇게까지 큰 것에 걸 만큼 값어치가 높지 않다는 것도 안다. 어떤 이들은 혁명을 자기 꿈으로 삼고 ‘혁명가’로서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내가 한다고 상상해보면, 오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다른 이들과 나누고 함께 추구해볼 만한 목표이긴 하지만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라고까지 하는 것은 좀 사기 같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내 꿈의 자리로 올려놓으면 결국엔 너무 나만의 아집으로 빠질 듯싶기도 하다. 여럿이 함께 만들어갈 일이고, 그 과정에서 내 뜻을 숙여야 할 일도 왕왕 있을 텐데, 그걸 '내 꿈'이라고 해버리면 좀 애매해지는 부분이 있다는 느낌이다.


  ‘내 꿈이 아닌 것들’ 이야기에서 ‘내 꿈’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면, 내가 나는 이미 꿈을 이루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다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한다. 마치 꿈이 없이 살면 가치가 떨어지는 인생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하나의 꿈을 이루고 나면 다시 그 다음의 꿈을 정하고, 또 다시 그 다음의 꿈을 정하고…. 마치 학교 진학하고 레벨 올리듯이 끊임없이 꿈을 정해서 좇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꿈이라는 것이 하나의 도달점이 아니라 삶의 모습, 상태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삶이 꿈을 좇는 여정 같은 것이라는 도식적인 생각이 나는 잘 이해가 안 간다. 그래서야 꿈을 이루는 것은 한 순간뿐이고 삶은 계속 불완전한 추구의 과정일 뿐이지 않은가. 그렇게 무언가를 좇고 추구하면서 살고 싶고 그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런 삶 자체가 그들의 꿈이라고 불러야 맞지 않을지. 


  굳이 여기서 더 뭘 이루려고 하지 않아도 내가 살고자 하는 모습 그대로 쭉 살아간다는 것은 가장 행복한 삶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내 경우에 목표가 있다면, 지금 살고 있는 모습대로 이 삶을 유지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경제적인 문제부터 해결을 해야 할 텐데,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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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5.09.01 01:52




비가 내리면

비가 내리면 모든 것이 빨라진다
피할 곳을 찾아서 뛰어가는 사람들
떨어져 내리는 낙엽들 바람들
새겨진 발자국과 조각들의 자취도
빈틈없는 비에 맞아 빠르게
희미해진다

비가 내리면 모든 것이 느려진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신발들 바짓단들
습기속을 헤쳐가는 벌레의 날개짓
말려놨던 아픔들과 추억들의 망각도
가라앉는 비에 맞아 느리게
희미해진다

둔탁해진 세상 속에
씻겨 내려가는 많은 것들
때로는 자취가 떠내려가고
때로는 망각이 떠내려가고

비가 내리면
나의 마음이 남는 것이 아니고
남은 것이 나의 마음이다
차마 씻기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많은 것들아



------------------------------


빈틈없는 비에 맞아 빠르게 / 빠르게
가라앉는 비에 맞아 느리게 / 느리게
라고 쓸까, 희미해진다로 통일할까 하다가 이렇게 갔는데 더 나은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원래 처음 시작은 비가 내리면 옛날 기억들이 떠오르고 망각이 느려진다 하는 생각과, 비가 내리면 많은 흔적이 지워지고 흘러내려가고 깎여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면서 시작된 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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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5.08.19 12:12



실려가며

눈꺼풀을 내리고 고개를 숙이고
몇센치의 동작으로 블라인드를 친다
잠드는 법을 잊은 듯하다
눈꺼풀 뒤편에 숨어 쉬는 와중에
끌어안은 꿈들이 가위 눌린 듯 쓰러지고
숨을 쉬는 법도 한번씩 재활이 필요한 법이다

내려둔 차양에도 새어들어 오고만다
인기척 웃음소리 어떤 고백
방 안을 헝클며 튀어다니는
당신의 여린 마음들

내릴 곳을 앞두고야
걱정들이 날아다닌다
눈 뜨기를 망설이다 지나치진 않을까
너무 많은 짐들이 끼이진 않을까
이제는 나를 안아온 맘들을 배웅하며
내가 알아온 것들로
눈꺼풀을 들어올려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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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5.03.27 01:25



여행을 떠나면서



여행을 떠나면서 손톱깎길 챙긴다.
멀리에서도 손톱은 자라므로.

모르는 땅에서도 매일이 계속된다.
달라진듯이 낯익은 이름으로.
신발속에서 파고드는 발톱처럼.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 속에서도
고집스레 이어지는 모국어의 사유.
같은 별의 같은 삶이 있을 뿐이다.
자라나는 손발톱을 깎아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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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5.03.07 00:28

옛-날 한 10년 전에 썼던 글









생일

 

 나는 생일을 1년에 3번은 맞을 수 있는 몸이다. 주민등록번호로는 2월 25일로 되어 있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2월 25일에 축하를 해주곤 한다. 그러나, 사실 2월 25일이란 음력으로 올린 생일이라, 양력으로 하면 4월 11일이어야 맞다. 그래서 가족들 같은 경우 4월 11일로 해준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 중 일부는 음력으로 2월 25일인 날로 해주기도 해서 생일을 3번이나 맞이하는 사태도 가끔은 일어나는 것이다.

 

 생일이란 것은 어릴 적부터 뭔가 굉장한 것처럼 느껴지는 무언가인 걸까. 여하간 내가 태어난 날이니 어쩌니 하는 것보다는 뭔가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친구들도 초대할 수 있고 선물도 받을 수 있는 날이라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생일에는 대체 뭘 한단 말일까. 생일이 대체 뭔데? 부모님들은 내게 생일이라며 친구들을 초대하라고 말하곤 하셨지만, 왜, 누굴 초대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조금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태어났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마냥 기쁜 일이 아니므로 생일에 축하만 하는 것은 부당한 것 같다는 결론을 낸 적이 있었다. 제법 오래 전 일이었던 것 같다. 여하간 슬픈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으니까 누군가는 위로도 좀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생일에 축복을 해대는 것은 삶에 대한 자기 암시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어서 즐거워, 좋아, 기뻐." ... 그런 자기 암시는 오히려 삶에 힘든 점도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지도 모른다. 생일이라는 하루 동안 존재를 축복함으로써 인생의 부정적인 면들을 외면하려는 걸지도.

 

 부모들이 "난 너를 낳아서 기뻤어."라던가, "넌 왜 태어났냐."라면서 축하나 저주만을 고집하는 것은, 결국 자식의 입장에서 고려해주려는 의지가 별로 없는 태도다. 애초에 부모들도 종종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러고보면 걸리버 여행기에서도 릴리프트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부모들이 자식을 멋대로 낳은 것이므로 자식들이 부모에게 낳아준 것을 감사할 이유가 없다는 식의 논리가 등장한다.

 얼마 전에는 생일에 대한 독특한 견해와 만날 수 있었다. "선물할 구실, 축하할 구실, 표현할 구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언젠가 우연히 같은 책이 두 권 생겨서 그 책을 다른 사람에게 팍 선물했다가 "구실 없는 건 부담스러워서" 라면서 거절당한 적이 있는 나로서는, 동감하고 싶어지는 해석이긴 하다. 그러나 왜 사람들은 일상적인 선물에 당황할까. 날짜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주고 싶어지면 줄 수 있는, 그런 게 아무래도 편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일이기에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해서 주는 것" 쪽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래도, 거절당하는 일도 있다. 슬픈 일이지만. 상처 받아도 상처 받지 않는 척 하는 것 정도는, 누구나 다 습득하고 있는 위장술인가?)

 

 대체 "내가 태어난 날"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내가 태어난 날은 단 하루뿐이다. 다른 날들은 그저 날짜라는 반복되는 숫자 놀음의 결과물일 뿐. 시간이란 계산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 문화를 지닌 사람들은 1년마다 돌아오는 생일이란 개념을 아예 생각지 않는다고 한다. 지구가 한 바퀴 돌았다는 '과학적' 설명에는 그래도 같은 자리는 아니라는(지구가 그 공전 중심으로 삼고 있는 태양도 운동하니까.) 역시 '과학적'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사실은 양쪽 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생일을 마냥 축하하기에는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것 같다. 삶이 뭐기에! 죽음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죽는다는 것이 살아있다는 것에 비해 정말로 안 좋은 상태인지는 영 모르겠다. 나는 죽으면 내세 같은 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만일 내가 그 소망을 별 근거 없이 믿는다면 죽음이란 것은 아예 없어지는 것이니까 어찌보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는 것 아닌가? 특별히 죽음 쪽을 택할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삶 자체를 무조건 긍정해야할 가치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울지 않고 악기를 연주하며 즐겁게 노래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대체 왜 힘겹게 죄를 지어가면서 삶을 이어가는지 우리는 회의할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가 철이 들어있을 때, 우리는 이미 살아있었다. 어쩌면, 그것 뿐이다.



 "우리는 도중이야."

 (중략)

 "아마 어디에 있더라도 마찬가지겠지. 무한의 암흑밖에 존재하지 않는 항성간 공역의 절대진공 속이라도,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평범한 인생 속에서도 틀림없이 어디라도 마찬가지야. 다들, 도중에 태어나서 어중간하게 살다가 도중에 죽어가지. 자신들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정확히 알 수도없어. 하지만."

 그는 반쯤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하지만 나머지 반은 결코 무릎 꿇지 않을 것 같은, 모순을 안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그의 입가에는 될 대로 되라는 듯한, 그렇지만 힘찬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중략)

 "우리에겐 아무 것도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실한 게 있어. 우리는 이, 우리가 어중간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긋지긋하지. 그럼 어중간한 게 싫다면 발버둥을 쳐서라도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는 얘기지."

(카도노 코우헤이 지음, 나이트워치 시리즈 3-너는 허인과 별에서 춤춘다

(김지현 옮김, 대원 CI)中)


 이런 불성실한 기분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내 생일을 그다지 축복하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의 생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태어났다는 것이 정말 기쁘다. 진심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축하를 해주기에는, 좀 이기적인 것 같지 않은가? 내가 기쁘다는 것, 내가 그 사람을 원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는... 여하간 나는 그저 하루하루가 소중할 뿐이다. 생일이 좋지도 않다. 하루를 소중하게 여길지언정 그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내가 살아간다는 것 때문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살아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희망.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 같다. 애초부터 땅 위에 길이란 없다."(루쉰) 비관적인 나로서는 삶이란 길도 보이지 않으며, 마치 검은 밤의 가운데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현실 상황이라거나 그런 것에 관계없이 말이다. 마치 눈을 감고 나 자신과 내 주변과 일상을 들여다볼 때 느껴지는 그 위태로움, 세계라는 것의 허위, 근거 없는 그런 '느낌'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희망을 만들어보려고 해본다. 아직은 젊으니까 발버둥치는 거다.

 

 만약 생일을 축하하는 게 삶을 건강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라면, 결국 생일문화가 지향하는 이상은 생일축하가 필요없는 세상일 터이다. 굳이 생일축하 같은 걸로 자신을 긍정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거의 매일매일이 삶을 긍정할 수 있을 만큼 충만한 세상 말이다. 그런 점에서 어쨌건 생일문화는 언젠가는 사라져야 할 작위다.

 

 혹시, 죽음은 슬픈 거고 끔찍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생일은 축복해야 할 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주겠다. "이봐이봐, 저기 말야... 당신, 그렇게 삶이 좋다면 매일을 생일날처럼 살면 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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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5.02.05 21:32


결혼식



  지지난 주말에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아니, 친구'들'의 결혼식이었다. 신랑과 신부 둘 모두 친구인 드문 경우였던 것이다. 덕분에 축의금을 낼 때부터 어느 쪽에 내야 할지 난감한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결혼식은 왜 신랑측과 신부측 축의금을 따로 받는 것일까? 누구에게 축의금이 더 많이 들어오는지 경쟁이라도 한단 말인가. 여하간 그 문제는 부모님이 대신 내라고 준 축의금과 내 축의금을 각각 양쪽에 냄으로써 해결했다. 부모님도 그 친구들과 면식이 있는 사이였던 것이다.


  신랑인 친구는 나와 알고 지낸 지가 이제 16년째이다. 지금은 그 이름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모 통신서비스의 포켓몬스터팬클럽에서 만난 사이다. 직접 얼굴을 보고 만난 건 아마 중학교 때였던가? 한때는 MSN 채팅으로 밤 늦게까지 수다를 떨곤 했었고, 함께 보낸 시간의 총합이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순전히 사적인 관계로 내가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신부인 친구는 내가 고등학교 때 같이 만화동아리에 있었다. 알고 지낸 것을 햇수로 따지면 12년째이다. 그림을 그려달라고 몇 번 부탁을 해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한때 좋아했어서 고백을 했다가 차였다는 나의 흑역사가 있다. 시간이 흐르고 쌓여 지금은 별로 어색할 것도 없는 사이지만.


  둘이 연애를 하게 된 것은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원천적으로 둘이 만나게 된 것은 나 때문이다. 만화동아리 사람들과 서울코믹월드에 갔을 때 내가 내 친구를 불렀고, 그렇게 해서 여차저차 알게 된 사이인 것이다. 딱히 소개해줬다고 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참 복잡하고 예측할 수가 없다. 어쨌건 10년도 더 전의 일인데, 그때만 해도 오늘 같은 결혼식은 당연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적어놓고나니 무슨 만화 오타쿠들의 인맥 이야기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휴.


  그래, 셋만 놓고 봐도 참 많은 것이 변했다. 포켓몬스터 팬클럽 게시판에서 시덥잖은 글을 쓰던, 그때까지만 해도 꿈이 (자연)과학자였던 나는 대학거부에 병역거부를 했고 청소년인권활동가가 되어 있다. 만화동아리에서 일러스트를 그리던 키가 큰 게 약간 고민이었던 친구는 벌써 교사가 되어 있다. 빨리 돈을 적당히 벌어서 40대에 은퇴해서 적당히 사는 게 목표라던 시니컬하던 친구는 오타쿠 느낌을 숨기지도 않고 있고 수험에서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한의사가 되어 병역 대체복무 중이다. 요즘 만나보면 어쩐지 시니컬하다기보다는 뭔가 열혈적인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재미있다고나 할까.


  그밖에도 이것저것 격세지감을 느끼는 게 있지만, 그들에게도 사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으니 일단 생략하도록 하자. 청첩장을 받았을 때부터, 결혼식장을 나올 때까지, 내내 했던 생각이 그거였다. 아아, 우리가 이만큼 나이를 먹었구나. 결혼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우리가 서로 알고서 지내온 시간은 인생의 대략 절반 안팎이나 되고, 우리 안엔 그만큼의 공유된 시대가 쌓여 있는 것이다.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나이 서른에 우린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 이렇게 물을 날이 코앞이다. 워낙 나이 열여덟부터 별로 변화한 게 없이 살아오다보니 잊고 있었다. 아마 결혼이니 뭐니 하는 것으로부터 거리가 먼 세상에 살다보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결혼식장에서는 한번은 신부 친구들(내 고등학교 지인들이 상당수였다.) 틈에 끼어서 사진을 찍고, 한번은 신랑의 "포켓몬 및 취미생활 관련 친구들"(신랑 본인의 표현) 틈에 끼어서 사진을 찍었다. 결혼식을 올 때마다 했던 생각이지만, 결혼식이란 과정은 참 신랑과 신부를 피로하게 하는 의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각종 절차와 의식과 소개와 인사와…. 피로연이라고 하던가 여튼 그 밥 먹는 곳에 와서도 여기저기에 인사를 하고 다니던데, 앉아서 쉬고 이야기할 틈도 없이 그렇게 여러 테이블을 도는 것도 피곤할 터이다. 그래서 참, 나는 역시 결혼식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


  아마 신혼여행도 이제 끝났을 테고, 그 둘은 이것저것 바쁜 시기일 듯싶다. 그래도 결혼식 준비하던 때보다는 조금 한가하고, 재미있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이야기는 나중에나, 이제는 '부부'가 된 둘을 만나서 나눌 수 있겠지. 애초에 나도 워낙에 바쁘니까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알고 지낸 시간보다, 앞으로도 더 긴 시간을 알고 지내야 될 테니, 잘 부탁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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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5.01.13 02:03


비누처럼

비누처럼 따가워라
부러진 기대들아
스쳐가는 얼굴들은
무구하게 거칠어라

비누칠한 얼굴처럼
뽀드득 비추어라
닦여나간 외면 밑에
사람이란 부끄럼아

물에 던진 비누처럼
부서지는 맥박들아
새하얗게 묻어나는
나만의 아픔들아


오늘도 물에 쓸려

울려지는 향긋한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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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3.08.30 01:49

깊이가 없고 높이가 없고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 중에 자기 바닥을 보았다는 표현이 있다. 나는 그 표현의 의미를 대충 알고는 있지만 그게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른다. 난 바닥이 구체적으로 내 심리의 어떤 부분이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하겠고 그 바닥이 “보인다”라는 것도 어떤 개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건 어쩌면 내가 깊이가 없는 인간이라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예전부터 계속해서 의식적으로든 습관적으로든 나 자신을 단순화하려고 해왔다. 뭐 그냥 쉽게 말해 솔직하게 살려고 해왔다는 얘기다. 가능하다면 ‘겉’과 ‘속’에 별 차이가 없을 것. 패턴은 가능한 한 단순명료할 것. 그러니까 ‘깊이’라는 걸 표면과 바닥 사이의 거리라고 해본다면 나는 그 깊이를 없애거나 줄여가기 위해 노력했던 셈이다.


  그 결과 나는 내가 깊이가 별로 없는 사람이 됐다고 여기고 있다. 물론 표면과 바닥 사이의 거리는 있지만, 그 거리는 꽤나 짧은 편이라 바닥도 쉽게 들여다볼 수 있다. ‘깊이’라기보단 ‘얕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린달까. 물에 비유하면 찰랑찰랑 흔들이는 접싯물 정도. 비록 완전하진 못해도 나는 내 내면의 자아라는 관념도 버리고 내 그때그때의 언행이 곧 나라는 식으로 인식하고 살고 싶다. ‘속 깊은’ 사람이 아니라 ‘얕은’ 사람이 되고 싶다. 좀 많이 탁할지언정 자주 바닥이 보일 만큼 얕은 사람. 특별히 어떨 때 바닥이 드러날 것도 없이 평상시가 바닥이거나 바닥에 가까운 사람.


  (어차피 다 비유지만) 깊이의 이야기는 높이의 이야기로 변주할 수 있다. 스스로를 단순화하려는 노력은 내 높이를 없앴다. 내 안에 무엇이든 복잡하게 쌓고 짜놓기보다는 흩어놓고 내버려둘 것. 집에 빗대면 고층 빌딩이 아니라 1층 주택이나 야외 거주지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내가 스스로 고(高) 엔트로피라고 부르는 그런 상태는 헝클어지고 산만할지언정, 쉽게 붕괴하지 않는다. 자존심이 됐든 신념이 됐든 기대가 됐든 그것들 각각이 망가지고 부서질 순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심리 전체가 무너지진 않는다. 가라앉는 것도 쉽지만 거기서 회복하는 것도 쉽다. 높게 쌓아올린 건조물 같은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구성이랄지 유연성이랄지 보수․관리의 용이성이랄지 교체․조정 가능성이랄지 그런 속성이 강하다. 높이가 없는 마음엔.


  한편 그 구조의 특성상 내 마음의 수용능력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위로 쌓지를 않고 여기저기 벌려 놓기만 하니 금방 차버릴 수밖에. 난 편협하고 단순하며 박정하다. 여러 가지를 다 마음에 받아들여서 품고 있지도 관리하지도 못하는 편이다. 한 번에 몇가지를 동시에 활동시키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애초에 많은 걸 넣어두진 못한다. 단점이라면 단점인 셈이다.


  깊이와 높이, 둘 다 수직적인 개념이다. 수직성을 줄인 내 마음은 그럼 수평적인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얕고 낮은 사람? 그것이 흔히 말하는 ‘평정심’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이건 그냥 자기합리화나 허세일 수도 있다. 속 좁고 직설적이고 못된 성격에 대한 합리화 또는 찌질하고 게으른 것을 꾸며보려는 허세. 아니면, 내가 스스로의 깊이와 높이를 없애기 위해 취해온 조치들이 층층이 또 다른 차원에서 깊이와 높이를 형성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뭐, 괜찮다. 그래도 그게 내가 살고 싶은 방식이니까. 꽤 실용적 장점도 많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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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3.08.17 10:31


감옥에서 10
     - 2013년 6월 20일


하늘이 너무 무거운 날이야
쏟아지는 햇살도 1기압의 대기도
삶의 가장자리마다 묻어온 우울의 냄새도
너무 무거워 땀이 나
얼마나 삭혔던지 군내가 나고 시어진 땀

아주 잠깐은, 세상을 용서하고픈 맘이 고였던 적도 있었어
당신이 내 안에 찍어논 발자국엔
나를 속였던 배신의 감촉들도
내게 박혔던 교정의 못질들도
용서할 수 있었던 맘, 세상이 날 용서치 않더라도

그러나, 저토록 좁은 하늘이 너무나 무거운 날이야
발자국의 높이도 뭉개질 만큼, 맘은커녕 땀만 나올 만큼,
귀퉁이마다 묶어논 자유의 매듭도 끊어지고
용서하기엔 하루가 너무나 무거워
하루 아래서 거듭 예리해진 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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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3.08.17 10:29


감옥에서9
    - 괜스런 죄스런



귤껍질을 찢다가 소름이 돋았다
주황색 귤도 살구색 나도
내가 뜯어낸 하얀 살점들의 울음이
목덜미를 훑고 메아리쳤다
귤껍질에 돋아있는 소름의 의민
두려움인지 아픔인지 원망인지
괜히 죄스러워 입을 닫았다

죄스러움은 언제나 괜스러웠다
나는 다음에도 귤껍질을 찢을 테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나에게 사과받을 이들이
저 멀리 어딘가 많다는 소문이 돌았다
귤껍질보단 좀 덜 뜻밖이고 좀 더 나와 닮은
하지만 역시 나와 다른

사과할 이들도 없는 데서 죄인이 돼있다
나 역시 괜스레 찢겨지고 있다
찢겨짐은 대개가 자연스러웠다
사람들은 다음에도 나를 잊을 테니까
그리움이 인삿말이 될 테니까

아파함도 언제나 괜스러웠다
그러니까 내가 사과할 이들도
소문보단 가까이에
여전히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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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3.01.23 11:45



감옥에서 8

    - 그립다, 늦잠이



   그립다, 늦잠이. 물기 짜듯 몸을 비틀어 잠을 짜내도 폐부 어디쯤 남아있는 잠의 씨앗들이 덜그럭거린다 숨쉴 때마다 이물감 썩어 발효되며 열기가 손발에 머리에 오르고 다시 뒤척인다 아침을 뒤적거린다 괜스레


  그립다, 늦잠이. 남이 정한 같은 시간에만 잠을 깨는 일 단 하루의 일탈도 없이 좀 역겨운 일이다 역시 내일과 어제와 오늘이 아파트 단지처럼 도열한다 몹시 혼란스럽게 규칙적이라 울렁이는


  보고싶다, 늦잠이. 부드러운 거품 같은 여유가 목마르다 이번명절 특식은 늦잠으로 주시지요 감칠맛 나는 늦잠을 맛보게 안기고픈 사랑 숨쉬고픈 공기를 늦지 않아야 한다고 짧게 당겨진 가늘어진 잠 속에 늦잠을 꿈꾸고 다시 꿈꾸고


   그립다, 늦잠이. 햇살의 기척에 이유 없이 문득 눈을 뜰 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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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3.01.01 15:50




감옥에서7

       - 걱정이 없다



눈송이들은 무슨 걱정이 있는지 급히 갈길을 재촉한다

무수한 걱정들을 연료로 날아가는 희끗한 숨결들

걱정이 없다, 나는. 눈이 쌓여도

걸을 수 없으니 막힐 길이 없으니 밀어나를 사상도 잡아줄 동지도 없으니

비가 퍼부어도 우산을 챙길 필요가 없다

난 참, 아무 걱정이 없다

그래서 눈송이보다도 느리다

그러니 눈송이보다도 하찮다

억지로 불러낸 이 모든 걱정들도 나를 날려주지 못한다

걸어가지도 기어가지도 굴러가지도

걱정을 걱정을 한다 걱정 없는 삶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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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2.11.25 16:29



감옥에서6

       - 금지된 것은 죽음



내가 밥을 적게 먹는 것은 굶어 죽기 위해서다

온몸이 맥박치도록 달리는 것은 숨이 차 죽기 위해서고

살을 빼는 것은 좁은 창살 사이로 투신해 죽기 위해서고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것은 지겨워 죽기 위해서며

겨울에도 찬물로 씻는 것은 얼어 죽기 위해서

여름에도 불볕을 쬐는 것은 쪄 죽기 위해서

잠을 자는 것도 잠을 깨는 것도

수음하는 것도 눈물 흘리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모두가 다 죽기 위해서다


나는 단지 빼앗기고 금지당한 걸 되찾으려는 것 뿐이다

나는 매일 아침 안개 속에 어슬렁대는 죽음을 보며

내 안으로 그것을 불러들여올 궁리를 한다

몰래, 죽을 수 있는 능력이 내 속에 술렁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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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2.10.07 00:49





감옥에서 5

    - 접속사



어느 시인은 시는 부사로 쓰는 거라 했고

아마 동사라고 말한 누구도 있었을 법하다


이곳에선 접속사로 시를 쓰고 싶어진다

진작부터 접속사를 사랑하긴 했지만은

말과 말 문장과 문장을 잇는

접속에의 욕망으로 시를 쓸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너와 나란히 서고

그러나, 너를 마주보고

그러면, 너를 꿈꾸고

따라서, 너를 안고


하나만 더 욕심을 부려봐도 된다면

거기에 의문사를 보태는 건 어떨까

너에게 대답을 바라는 마음을

더하는 게




(2012. 0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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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2.09.26 11:46




버림 받았단 착각을 못 버린 사람의 미련

 


   업으로 삼고 있는 청소년운동의 성격상, 지금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여러 사람들이 청소년일 때 당사자로서 청소년운동에 함께하다가 나이를 먹고 청소년이 아니게 되면서 운동을 떠났다. 어떤 이들은 내게 또는 운동에 작별 인사를 남기고. 더 많은 이들은 인사도 없이. 내가 원체 사람 이름이나 얼굴을 잘 기억 않는 성격이라서, 그 사람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단 식의 뻥은 차마 못 치겠다. 그러나 나로선 이례적이게도 많은 사람들, 수십명 단위로 헤아려야 할 만큼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물론 안다. 알고 있다. 그 사람들 중 청소년운동이나 나를 버린사람은 아마 없으리란 것을. 그들은 대부분은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았을 뿐이고, 일부는 운동에 실망하거나 상처받고 떠났을 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버림받은 듯한 서러움에 몸을 태우곤 한다. 버린 이는 없는데 버림받은 사람만 있다. 요구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다.



  언제부턴가 나는 사람들에게서 과거에 내가 떠나보낸 사람들의 모습을 겹쳐보곤 한다. 인권캠프에 온 청소년에게서, 학내투쟁을 하고 싶어 하는 고등학생에게서, 거리에서 홍보물을 받고 가입한 열의가 넘치는 회원에게서, 과거에 그와 비슷하게 찾아오고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지금 이 학교의 서명운동 계획을 이야기하며 나는 동시에 두발자유 1인시위를 했던 어느 고등학생과, 학칙 개정을 위해 설문조사를 했던 어느 중학생 학생회장과 얘기했던 과거의 메아리를 듣는다. 그럴 때 나는 몰래 감상적인 기분에 잠긴다. 감상의 상이 상처를 뜻한단 걸 알고 있는가?


  감옥에서 시간이 남는 동안 나는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전보다 더 많이 말이다. 그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싶은 것들, 또는 그 사람들에게 듣고 싶은 말들, 내 소식을 듣고 그 사람들이 느꼈을 것들, 학생인권조례나 최근 운동 소식을 들으며 했을 생각들. 이 글을 보고 누군가 그런 이야길 전해주면 좋으련만.

  

  최근엔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을 읽고, 또 몇몇 시들을 생각하다가 한 사람이 다시 떠올랐다.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활동을 같이 했던 이슬이란 사람이다. 단체에서 같이 소풍인가를 갔다가, 잔디깎기에 잘린 풀 내음을 맡으며 내가 피 냄새 같다라고 하자, 이슬이 자긴 별로 안 그런 것 같다고 말했던 일이 있었다. 좀 심통이 난 내가 상상력이 부족한 거라고 무례하게(!) 말했는데, 이슬은 그럼 넌 ~~생각한 적이 있어?’ 라고 대꾸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당시 꽤 충격적이고 신성한 연상이고 표현이라고 느꼈던 건 분명하다. 내가 느끼고 생각한 대로 안 느낀다고 해서 타박을 준 나의 어리석음을 단번에 깨닫게 해줄 만큼. 부끄러운 나의 흑역사이고 다시금 사과하고 싶은 과오이다. 여하간 그래서 지금도 시를 쓰려 할 때면 이슬이 생각난다. 밖에선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백서 만들기가 한창일 텐데, 소식 들었을까.


   이슬 말고도, 찰기, 스칼리, 루돌프, 주댕이, 빅뱅, 찬연, 바라나기나열하기 힘들어서 차마 더 못 쓸, 아니면 내 마음의 맺힌 것 때문에 이름을 쉽게 못 부를 많은 사람들, 내게 많은 걸 가르쳐주기도 했고 상처를 주기도 했던(연락하고 지냈던 사람들은 뺐다.). 아직까지 짧은 소식이라도 받아보길 기대하고, 청소년운동에 대해 관심 가지고 있을 걸 바라는 내가 어리석은 걸까. 그저 내 미련인 걸까. 감옥에선 참, 미련도 생각도 많아지나 보다. 그래, 그렇게 감옥 탓으로 돌리며, 마무리 하자. 얘기할수록 미련만 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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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12.09.26 11:41



감옥에서4

      - 플라스틱



철조망의 알람소린

비둘기에 읊어주는

무감정한 자동경보

스위치는 철문 밖에

점호 때야 밝혀주는

무표정한 형광등들

수저들은 플라스틱

무심하게 합성수지



- 2012. 0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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