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7.12.01 23:57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후원행사를 맞이하여 쓴 글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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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운동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요?

한때, 청소년운동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의 궁핍함을 상징하는 것은 교통비, 컵라면, 삼각김밥 등이었습니다. 경제적 약자인 청소년활동가들은 밥을 사 먹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한 돈조차도 없어서 어렵게 연명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당장의 돈이 없어서 활동을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넉넉한 이들만이 활동을 할 수 있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물론 지금도 유효하고, 청소년활동가들에게 교통비, 외식비, 통신비와 같이 활동에 드는 최소한의 실비를 보장하는 것은 아직도 다 풀지 못한 과제입니다. 하지만 청소년운동의 발전에 따라, 그리고 청소년활동가의 확대에 따라 좀 다른 문제도 부상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청소년운동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청소년운동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청소년운동을 길게 하는 이들도 늘어났습니다. 20대가 되어도 계속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청소년운동의 활동가’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려는 이들도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청소년운동에 전념하면서 살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월 150만 원(2018년 최저임금으로 따지면 주 40시간 일했을 때 월급은 1,573,770원입니다.) 이상의 돈을 지급하며 상근활동가를 둘 수 있는 청소년운동 단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생계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활동가들은 다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계속 청소년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을 때는, 앞으로 몇 년 후에는 그래도 운동이 확대되고 발전해서 좀 다른 길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청소년운동의 성장은 더디고 특히 재정적 열악함은 심각합니다. 2005년에 운동을 시작한 제가 그때 이미 “앞으로 몇 년 안에 청소년운동에서 상근비를 받을 수 있게 만들겠다”라고 생각했지만, 12년이 지난 지금도 최저임금 수준을 받는 전업 활동가를 둘 수 없는 상황이니,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청소년활동가들은 처음에는 다른 파트타임 임노동을 병행하면서 운동을 하거나, 가정 사정이 좀 나으면 부모나 양육자의 생계 보조를 받으며 운동을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경제적 독립과 생계 문제는 삶을 압박해 옵니다. 청소년운동에 생계 보장 전망이 안 보인다는 느낌이 짙어지면 전업 운동을 지향하는 것을 지속할 수 없는 순간이 옵니다. 19살에서 20대 초반 시기가 청소년기를 벗어나면서 청소년운동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첫 번째 시기라면, 이처럼 생계에 대한 불안과 고민이 턱 밑까지 차올 때가 사람들이 운동을 떠나게 되는 두 번째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청소년운동에 필요한 지원이 최소한의 교통비, 식비를 해결하기 위한 돈이라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렇게 말할 때 상상하는 청소년활동가들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청소년활동가들을 주 생계 책임자, 또는 부양 가족이 있는 경제 생활 인구로 은연중에 잘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그런 의심을 품곤 합니다. 지금 청소년활동가들이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말 최저임금 수준으로라도 ‘소득’을 가질 수 있는 단체입니다. 또는, 본인이 당장 그렇게 벌지는 못하더라도, 청소년운동을 계속하면 그런 식으로 삶과 운동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전망’이라도 갖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단 1명이나 2명이라도 청소년운동에서 전업 활동가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청소년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청소년활동가는, 청소년운동의 이후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운동의 역사가 길어지고 영역이 확대되고 담론이 축적되면서, 운동에 대해 전문성과 역량을 가진 활동가의 존재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청소년운동에서는 이런 전문성과 역량을 길러나가면서 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활동가들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런 활동가를 운동 차원에서 둘 수도 없습니다.

사실 청소년운동이 돌아가는 대부분의 매커니즘은, 공식적 용어로 말하면 ‘자원봉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간혹 연대체 회의 같은 데 가서 주위를 둘러보면 속으로 쓴웃음을 짓습니다. 바로 옆에서 같이 이야기하는 다른 운동의 ‘활동가’들은 상근활동가들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청소년운동 활동가들은 다들 ‘자원활동가’ 내지는 ‘자원봉사자’인 거니까요. 거의 대부분을 무급-봉사에 의존해야 하는 운동의 안정성이나 깊이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청소년운동으로 먹고살 수 있다는 게 확실해진다면, 막 운동을 시작한 다른 청소년활동가들 역시 자신의 진로로 청소년운동을 계속하는 걸 더 적극적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고 운동을 더 오래할 수도 있는 선순환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고등학생운동 또는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더 발전하고 커지는 운동을 한 번이라도 꿈꾸었던 분이라면, 저희의 절박함에 한층 더 공감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연대할 청소년단체, 섭외할 청소년 주체를 찾아 헤맨 적이 있는 사회운동가라면 왜 청소년활동가들이 청소년운동으로 먹고사는 게 필요한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1-2명이라도 전업 활동가가 있는 게 운동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해보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꼭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청소년활동가들이 청소년운동으로 먹고살 수 있도록, 청소년운동을 후원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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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는 아수나로 10주년 후원행사를, 올해는 활기 후원행사를 준비하면서 후원을 여러 차례 호소드렸습니다.
한낱 님이 이런 문장을 썼지요. "이 운동의 처량함이 아니라 이 운동의 정당성으로 당신에게 가닿고 싶습니다."
그래서 청소년활동가들은 어떤 일들을 하는가 우리 운동이 평소에 무엇을 하고 왜 필요한가 그런 이야기를 담아 보았습니다. 청소년활동가들이 만들어온 변화에도 주목해주시고, 또 잘 보이진 않더라도 계속 만들고 있는 움직임의 의미를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보통 사람들은 눈에 잘 띄고, 변화를 당장 만들고 있는 운동에 더 관심을 두고 후원을 해줍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눈에 잘 띄지 않고, 공론화조차 잘 하지 못하고, 큰 투쟁을 벌일 수도 없는 여건의 운동이야말로 더욱 많은 이들의 관심과 지지와 연대가 필요한 운동일지도 모릅니다. 청소년운동도 그중 하나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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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청소년활동가의 하루는 이보다는 덜 빡빡한 일정이고 좀 더 분담이 되긴 합니다만, 실제로 오전에 기자회견 - 오후 면담 - 저녁에 생계 관련 일 등의 일정을 소화하는 경우를 최근에 본 적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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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어느 청소년활동가의 하루

아침 7시 반. 휴대폰 알람을 황급히 끈다. 다른 방에서 자고 있는 활동가가 어제 일정이 늦게 끝나 밤 11시에야 들어온 것을 알고 있다. 나도 조금 더 자고 싶고 팔다리가 뻐근하다. 하지만 오늘은 10시에 국회에서 청소년 정당 가입 보장을 위한 정당법 개정에 대한 토론회가 있다. 사무실에 들러서 자료집이나 단체 소개 브로셔 등을 챙겨 가려면 8시 반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짐을 싸들고 전철을 타고 국회의사당역에 내린다. 택시라도 탔다면 좋았으련만, 짐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라서 택시비 지원을 단체에 요청하기도 좀 그렇다. 시간이 빠듯해서 종종걸음 친다. 국회는 왜 이렇게 쓸데없이 넓은지... 의원회관에 들어가서 신분증으로 청소년증을 내니 안내 직원이 "고등학생이니? 국회 견학 왔어?" 하고 말을 건다. 기분이 상했지만 우물우물 입 속으로만 몇 마디 하고 만다. 마음도 급했고, 한마디 쏘아 붙여 줄 기력도 없다. 아직 하루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지칠까.

지난 주말에도 단체 회원들과 청소년인권과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모임을 가지고, 캠페인을 했다. 그런 식으로 제대로 쉬는 날 없이 13일째. 휴일이 시급하다. 공부모임에서는 회원들이 겪는 차별 발언이나 경험들을 나누었고, 그중 어떤 것들은 문제 제기를 하기 위한 계획도 세웠다. 잘 준비해야 할 텐데...

토론회가 끝나고 간담회실을 나와 로비에 앉아 노트북을 주섬주섬 꺼내든다. 토론회 보도자료를 배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기자들 몇 명한테서 보도자료를 보내달라고 연락이 왔다. 직접 취재하고 써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기사라도 실어주는 언론사가 많지 않으니까 고마운 마음이다. 발언 내용들을 정리하면서는, 사심을 가득 담아서 학교에 체험학습신청서를 내고 시간을 내서 온 청소년 토론자 발언을 가장 길게, 가장 앞에 넣는다. 그 다음 순서는 법안 발의를 다짐하는 국회의원들의 발언이다. 청소년 참정권 문제도 참 오랫동안 씨름해 왔는데 아직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 해묵은 과제인데도, 여전히 '18세 선거권'이 전부인 줄 아는 국회의원들을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점심을 먹으러 간 이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얼른 끝내야지.

같이 토론회를 한 사람들에게 점심을 얻어먹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 덕에 오늘은 도시락을 안 싸와도 되었다. 잠시 뒤 오후 2시에는 소지품 압수 사례 문제에 대해 교육청 조사관을 만나기로 했다. 경기도, 광주, 서울, 전북 4개 지역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고 있고 변화한 것도 많고, 조례에서는 안전을 위해 긴급한 경우가 아니면 소지품을 압수하는 행위가 금지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학생의 소지품을 함부로 압수하는 경우들이 많다. 우리 단체 조사에서 수집된 것 중에는 학생들의 악세서리를 압수해서 눈앞에서 부숴버리는 등 모욕적인 행위들도 열 건이 넘는다. 서울시교육청에 학생인권조례조차 지키지 않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대책 마련을 요구하기 위해 면담을 요청했다. 조사관은 관심과 노력을 약속했지만, 교육청이 많은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며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조례나 교육청 권한의 한계, 그리고 사회적 인식의 한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법을 만들기 위한 운동도 하고 있는 것이지만, 교육청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좀 최선을 다해 주길 바랄 뿐이다.

면담을 끝낸 뒤 시계를 보니 3시가 넘어가고 있다. 단체에 회원 가입 신청을 한 사람들 목록을 정리해서 연락을 돌린다. 중고등학생인 분들은 학교에 있는지 대부분 통화가 되질 않아서 문자메시지를 남겨두고, 몇몇 연락이 된 분들에게는 단체에 대한 안내를 하고 활동 참여 방식을 알려드린다. 저녁 때 연락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6시부터 나도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단체 페이스북 페이지에 새 메시지가 있다고 알림이 뜬다. 아, 어제 밤 11시에 왔는데 미처 답을 못 한 메시지다. 학교에서 교사가 방과후학교 참여를 강요하는데 인권침해가 아닌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메시지다. 문의해온 학생분이 사는 지역은 마땅히 활동하는 청소년 단체가 없어서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보니 아직 답변도 못 하고 있다. 아르바이트에 가려면 5시엔 나가야 하고, 이제 1시간밖에 안 남았다.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후원 회원 배가를 위한 연락을 돌리기 위해 계획은 짜뒀는데 진행을 못 하고 있고, 현장실습 중 사망한 청소년 노동자분 사건에 대한 단체 성명서도 작성해야 하는데... 메시지가 온 것을 그냥 못 본 체하고, '읽음' 표시 안 뜨게 한 채 지나치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그래도 기다리고 있을 학생분을 먼저 생각해야지 싶어서, '그건 인권침해가 맞지만 학교에 항의해도 묵살할 가능성이 높고 우리 단체에서는 어떤 걸 도와드릴 수 있고 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목소리를 모아 문제제기하는 게 가장 좋고...' 그런 장문의 메시지를 답변으로 보낸다. 답장은 아마 이 학생분이 학교 일과가 끝나고 밤에야 올 것이다. 이런 일들은 보통 사건을 공개하지 않고 학교 안에서 싸우고, 단체에서도 비공개로 공문을 보내 압박하거나 교육청 민원을 내는 등의 형태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 밤 10시, 세상은 벌써 캄캄하다. 집에 도착하면 방 청소도 해야 하고 성명서도 써야 한다. 버스 안에서 휴대폰으로 단체 게시판을 확인해보니, SNS에 무슨 학교에 성추행과 혐오/차별발언으로 대자보를 붙였던 사건이 올라왔다고 연락해봐야하지 않겠냐는 글이 올라와있다. 가능하다면 그 학교 앞에 가거나 학생분들을 온라인으로 연락해보고 만나서 대처를 해야 할 것이다. 그나마 내일 오전에는 일정이 없어서 다행이다. 30분이라도 머리를 좀 쉬게 하기 위해, 버스 창가에 기대어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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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7.11.05 20:11

그것이 바로 내셔널리즘 아닌가?

※ 〈아이 캔 스피크〉 미리니름(스포일러)이 가득합니다.


추석 연휴 직전에 〈아이 캔 스피크〉를 보았다.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최근 〈리얼〉이나 〈VIP〉나 〈군함도〉로 내려가 있던 한국 상업 영화에 대한 기대치와 상호 작용하여, 상대 평가를 한다면 꽤 높은 평가를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일본군 ‘위안부’ 내용을 다룬 대중적인 영화의 계보 속에서 이 영화가 실현한 미덕이나 진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어쨌건 〈아이 캔 스피크〉가 한국 상업 영화의 역사 속에서 의미 있는 가치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재미있는 것 이후에라도 이 영화의 문제점이나 ‘해로움’을 좀 더 말해야겠다고 느꼈다. 어느 쪽으로든 말하고 싶어지는 욕망을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주변이 온통 〈아이 캔 스피크〉 칭찬 일색이기에 긴 글로 문제점을 다 짚으려고 했지만, 그 사이에 나와 비슷한 관점에서 〈아이 캔 스피크〉의 문제점을 짚은 글들이 몇 편 나왔기에, 단상들을 모아놓은 정도로 적고자 한다.


박민재의 서사


〈아이 캔 스피크〉에서 나옥분이 이야기상으로도 배우의 연기로도 압도적인 주연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이 캔 스피크〉는 상당 부분 박민재(이제훈)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관객이 박민재에게 감정 이입할 것을 기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므로 나옥분 만큼이나 박민재의 서사에 대한 비평이 필요하다.

먼저, 나는 박민재 캐릭터에 대한 일각의 오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예고편이나 포스터에 적힌 것과 달리 박민재는 ‘원칙주의자’가 아니다. 박민재는 초반에 나옥분에 대해 대응할 때 원칙과 절차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했을 뿐이다. 이는 단지 곤란한 민원인에 대한 대처 방침을 선언한 것으로 봐야 한다. 오히려 박민재는 이후 구청장에게 재개발 추진에서 구청이 책임을 벗기 위한 꼼수를 제시하고, 구청장 앞에서는 지금 자기 직급에 만족한다고 겸손한 체하면서도 바로 진급 시험 준비를 하러 가는, 상당히 속물적이면서도 책략가의 일면을 가진 인물이다. 나옥분이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할 때 궤변을 구사하며 일부러 어려운 단어로 시험을 치는 것도 그런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다.

그러므로 박민재에 초점을 맞춘 영화의 서사는, 속물적이며 개인주의적이고 복지부동 자세의 공무원 박민재가 나옥분을 만나면서 변화하고 나옥분을 매개로 열의와 공적 책임감을 갖고 나서게 되는 이야기다. 박민재가 미국까지 가서 의회에 난입할 때가 그 변화의 절정을 찍는 순간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그렇다. 〈아이 캔 스피크〉의 중심 이야기 중 한 축은 〈변호인〉 등 최근 한국 영화에서 여러 차례 변주되었던 ‘소시민의 각성’ 테마를 담고 있다.





공무원과 국가

그런데 기존의 비슷한 이야기들과 박민재의 이야기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바로 박민재가 ‘공무원’이라는 것이다. 박민재는 본래 공적 책임감을 가지고 일해야 할 책무가 있는 국가의 대리인이다. 그럼에도 (현실의 많은 공무원이 그러하듯이) 그가 공적 관심이 별로 없다는 것이 〈아이 캔 스피크〉의 이야기 배후에 숨어 있는 갈등이다.

이런 문제는 나옥분과의 대비를 통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화 속에서 재개발 문제를 비롯해 시장과 거리의 온갖 공적 문제들에 ‘오지랖’ 넓게 개입하고 다니는 것은 그저 한 개인인 나옥분이다. 반면 〈아이 캔 스피크〉에서 개그 장면처럼 지나치는 공무원들의 일상을 보자. 명절 맞이 인사 이벤트를 하고, 계단에 소비 kcal 표시를 (그것도 거꾸로) 붙이는 그런 쓸모없어 보이는 전시성 사업들이나 하고 있다. 중간중간에 다소 뜬금없이 끼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씬들은, 사람들의 삶과 유리된, 공적이지 못한 공무원-국가를 보여 주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박민재가 시장에 가서 법원 판결이 나기도 전인데 행패를 부리는 깡패들을 제지하는 장면에서 비로소 공무원으로서의 박민재는 존재 의의를 찾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이 캔 스피크〉가 공무원–국가의 의미를 회복시키는 것은 바로 민족의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나서는 것을 통해서다. 나옥분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밝혀지고 난 뒤 구청 공무원들은 그가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나서서 서명을 받고, 박민재의 설득으로 구청장도 움직인다. 그래서 〈아이 캔 스피크〉는 국가와 민족, 내셔널리즘에 관한 영화이다.



나옥분의 서사

이승한이 비평했듯, 〈아이 캔 스피크〉의 미덕은 일본군 ‘위안부’ 소재를 다룬 영화들의 계보 속에서 피해자인 인물을 입체적이고 인간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나옥분은 ‘도깨비 할머니’이기도 하고, 또한 ‘위안부’ 피해자로서 어머니와 동생 등에게도 외면당하고 자신을 감추고 살아왔다. 나옥분의 사연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광복 후 한국 사회의 적대적인 반응을 간접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참고 : 피해자도 엄마도 아닌 ‘개인’의 초상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812211.html/)

그런데 나는 나옥분을 박민재와 대비되는 면을 통해 해석하고 싶다. 나옥분이 온갖 문제점을 찾아내서 시정하게 하고 민원을 내고 다니는 모습은 공무원들 입장에서는 일을 늘리는 악성 민원인인 것으로 그려지고 시장 상인들 역시 나옥분이 트집이나 잡고 다니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을 한다. 박민재의 동생 박영재는 나옥분의 그런 행동을 ‘외로워서 그러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그 ‘외로움’이 단지 가족 없이 혈혈단신으로 사는 처지의 외로움일까?

극중에서 나옥분이 민원을 제기하고 지적하는 것들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옥분은 재개발 추진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건물을 일부러 훼손하는 행동을 고발하고, 입간판을 치우라고 할 때 역시 간판이 통행을 방해하고 있다고 하며 어린이들이 그 입간판에 부딪혀서 사고가 날 뻔한 사례들을 거론한다. 반면에 미성년자에게 술을 판매했단 이유로 단속을 당한 식당 주인이 “할머니가 신고했죠?”라고 따질 때는 자신을 뭘로 보고 그러냐고 한다. 나옥분은 (적어도 자기 생각에는) 이것저것 다 트집을 잡고 신고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름대로 공공의 복리와 정의를 위해서, 이웃들의 공생을 위해서 필요한 규범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구청에 민원을 제기하여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가 나설 것을 촉구하는 사람이다. ‘공무원’도 아님에도.

다소 과잉의 해석일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상상해 본다. 나옥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경험이 있다. 또한 광복 이후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이를 감춰야 할 ‘사적인 수치’로 부정당하고, 국가로부터도 소극적으로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나서서 공적 규범을 지키고 국가의 적절한 개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재개발을 추진하려는 시장 건물주의 ‘합법적’ 횡포에 맞서서 구청이 나서서 상인들을 지켜줄 것을 요청하는, 그러나 구청은 오히려 건물주의 편인 상황에 좌절하는 나옥분의 모습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겹쳐 보게 된다. 물론 나옥분이 기본적으로 같이 사는 이웃들을 챙기려 하고 정이 많은 인물이라는 것도 분명하지만 말이다.

나옥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수치’를 숨기고 살기를 바란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이를 감추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친구의 설득과 위독함 등 여러 과정을 거쳐 어머니와의 약속을 깨고 증언을 하러 나서기에 이른다. 따라서 나옥분의 서사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남의 일에 오지랖 넓게 나서는 – 공적인 일에만 관심을 갖던 캐릭터가, 자기 개인의 경험과 기억을 돌아보고 화해하고 극복하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다. 박민재가 사적 세계에서 공적 세계로 나아간다면, 나옥분은 공적 세계에만 주로 걸쳐 있다가 숨겨져 있던 사적 세계를 꺼낸다. 그런데 나옥분이 갖고 있던 비밀은 바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것이고 이는 이제 온 민족의, 국가의 이슈가 된 문제였다. 그래서 나옥분의 이야기에서 후반부는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가 통합된다.



‘죄송합니다’에는 무엇이 담겼나

나옥분이 제기해 온 그 많은 민원과 문제들은 그저 ‘악성 민원인의 심술’이라고 무시당하다가, 나옥분이 숨겨 온 개인사를 드러내자 그것은 대단히 공적 사안이 되고 박민재를 비롯하여 국가와 구청이 나서게 되는 것은 참 역설적이다. 시장 상인으로서의 나옥분, 노인으로서의 나옥분의 문제제기는 정당하지 못하게 취급되었지만, 민족이 공격당한 사건으로서 위안부 ‘피해자’인 나옥분의 존재는 갑자기 거대해진다. 나는 이것이 민족-국가의 소유물로서의 여성의 몸과 성이라는 관념이 (과거 민족의 ‘수치’로 생각하고 덮으려 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는다.

〈아이 캔 스피크〉의 연출 중에 무엇보다도 박민재와 족발집 사람이 나옥분에게 사과를 하는 시점이 나옥분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이 알려진 이후인 점이 아쉬웠다. 마치 나옥분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서 사과를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특히 박민재가 울먹이면서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장면은 껄끄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재개발에 관한 민원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것이나 폭언을 한 것을 사과하는 것이라면 그런 점에 대해 좀 더 분명하게 해명을 하거나 사과를 하는 게 더 맞지 않을까.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박민재의 “죄송합니다”에,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죄책감을 투영하기를, 관객이 감정 이입하기를 의도하는 것처럼 느꼈다.

(좀 더 나아가면 이는 박민재라는 남성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고 화해를 청하는 장면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구청 공무원들이 대부분 남성이고 박민재 옆자리의 여성 공무원은 거의 역할이 없이 박민재에게 연애 감정을 우스운 방식으로 드러내는 캐릭터로만 소비되는 것이 그저 우연일까? ‘여성부’보다도 구청장이 나서서 일을 처리하라고 박민재가 말하는 것이 단지 설득을 위한 언변일 뿐인가?)

(참고 : "나(I)"는 꼭 '위안부'여야만 하는가.
 https://brunch.co.kr/@like-orwell/35 )


적대와 봉합

많은 사람들이 〈아이 캔 스피크〉가 전반과 후반의 서사가 잘 이어지지 않고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이것이 만듦새의 엉성함이 아니라, 이 영화가 깔고 있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높은 개연성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면?

초반부와 중반부까지 영화가 제기한 갈등 요소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나옥분이 노인으로서 겪는 차별이나 문제들, 재개발을 둘러싼 문제들, 민원인 나옥분과 구청 공무원 사이의 갈등, 박민재와 박영재 사이의 긴장 등. 그러나 후반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그 모든 갈등은 뒤로 물러난다. 아니, 밀려난다. 그리고 주된 갈등은 일본을 대표하는 외교관(인가? 너무 외교관 안 같아서….)과 나옥분을 비롯한 한국인들 사이의 문제로 바꿔치기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미국 의회 장면은 더 극적이어야 했고, 일본 외교관은 더 단순하고 악해 보여야 했을 것이다.

이 ‘외부’에 대한 적대는 내부의 여러 이해관계 문제와 갈등을 봉합해버린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재개발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건물주와 깡패(일명 ‘용팔이’)들을 비롯한 재개발 추진 세력, 구청 공무원들, 나옥분 사이의 대립이다. 문제들 사이에는 위계가 생겼고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아도 괜찮거나 어쩔 수 없는 것이 된다. 재개발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구청이 낸 소송도 전망이 잘 보이지 않는데, 영화가 재개발 문제를 결말부에서 다루는 방식은 무책임할 정도이다. 이럴 거면 굳이 재개발 문제를 왜 플롯 안에 포함시킨 것인가? 첫 장면을 재개발에 관련된 건물 훼손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을 떠올려보면, 속았다는 배신감마저 든다.

그리고 이는 영화 외적으로 확대해 보아도 그렇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정부(박정희든 박근혜든)가 일제 강점기 문제에 대해 잘못된 협상을 한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얽혀 있다. 또한 일본은 총리 명의로 일단은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를 표명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은, 단지 공식 인정과 사과만이 아니라 일본 사회 전반의 반성과 법적 책임 인정 문제 등 더 구체적인 논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아이 캔 스피크〉는 이런 맥락을 축소하고 “일본은 사과하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더 단순화한다. 한국 정부의 책임도 사라지고, 한국인들은 그저 나옥분(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힘을 모아주고 여비를 보태주는 협력자로만 그려진다. 따라서 이 영화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다루는 데서 긍정적 측면이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 그 자체를 다루는 데는 퇴행적인 면마저 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소재를 통해서 공무원-국가의 존재 의의를 보이는 데서 더 가서, 일본에 대한 적대를 바탕으로 한국 내부의 단결을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내셔널리즘, 국가주의-민족주의가 작동하는 고전적인 방식이다. 공무원들은 여전하지만, 나옥분을 서포트함으로써 국가의 공적 일을 하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얻는다(고 착각한다). 영화가 상영시간 전체에 걸쳐 나옥분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어냈음에도, 결국 최종적으로는 나옥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증언자로 단순해지고 만다. 결국 이 영화가 내셔널리즘의 역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이지 않을까?

(참고 : 후 캔 스피크 / 후지이 다케시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4569.html )


세대 간 문제

사족으로, 나는 영화를 본 직후에 〈아이 캔 스피크〉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대표되는 노인 세대와 박민재 등으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 간의 문제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경제적으로도 발전하고 국제적으로도 위상을 가지게 된(영어 실력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현재 젊은 세대가, 이전의 식민지 시기 기억을 가진 세대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관점을 담고 있다. 박민재, 박영재, 나옥분이 이루는 유사 가족 관계도 그런 틀로 생각해볼 면이 있다. 어쩌면 가부장적 국가의 모습은 더 나이 많고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젊고 유능하면서 나옥분에게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나옥분을 돕는 박민재의 얼굴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

이 부분은 공부가 부족하여 아직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이런 관점에서 이야기를 더 풀어간다면 흥미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비슷한 관점으로 읽을 수 있는 다른 영화들과 비교 대조를 해 가며. 그러나 어쨌건, 〈아이 캔 스피크〉에서 나옥분은 스스로 말할 수 있고 과거 자기를 침묵하게 했던 것과 싸울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우리가 더 나아진 구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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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