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에 해당되는 글 42건

  1. 2014.11.15 청소년운동에 영감을 줬던 페미니즘 입문서
  2. 2012.04.20 소위 여성부 관련 루머/비난들에 대해 일일이 반박? 정리? (32)
  3. 2010.11.17 사랑은 19금이 아니다 - 청소년학생 연애탄압 (2)
  4. 2010.10.13 [페미니즘인(in)걸] ‘여성+청소년=여성청소년’이란 공식을 넘어서자
  5. 2010.09.08 [페미니즘인(in)걸?] "부모님 모셔와"가 무섭지 않은 세상을 만들려면?
  6. 2010.08.04 [인권오름] [페미니즘인(in)걸] 납량특집 -공포영화
  7. 2010.07.30 [인권오름] 생식기 차이가 가져온 엄청난 결과 / 『아주 작은 차이』, 알리스 슈바이처 저, 김재희 역, 이프, 2001
  8. 2010.07.07 [페미니즘 인(in) 걸?] 잔혹한 소년만화의 테제 (11)
  9. 2010.06.28 "패륜적 기본소득" 격월간 사람 용으로 수정한 원고 (2)
  10. 2010.04.12 [논평] 아동청소년 대상 성폭력‘만’ 비친고죄? 국회의원들과 여성가족부의 꼼수를 비판한다! (3)
  11. 2010.03.06 “여성의 임신․출산 및 몸에 대한 결정권 선언” (2)
  12. 2010.02.28 낙태금지에 반대합니다 (3)
  13. 2010.02.13 [페미니즘인(in)걸?] 왜 소수자들은, 여성/청소년들은, 오지랖이 넓은가
  14. 2010.02.13 우리 사회가 아직 남자들에게 수컷 역할을 맡겨야 할 만큼 원시적이라는 사실에 고마워하도록 해라! (1)
  15. 2010.02.01 남보원(남성인권보장위원회) 단상 (5)
  16. 2009.12.22 크리스마스가 '깜깜'한 사람들은 많다... 안티크리스마스! (4)
  17. 2009.12.19 '솔로부대'의 성별은? (4)
  18. 2009.11.11 [페미니즘인(in)걸] 괴물들과 공주님들? - 아동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12)
  19. 2009.10.16 [인권오름] 페미니즘인(in)걸 : 여학생은 성적이 “너무” 우수하다. 도대체 어쩌라고~
  20. 2009.09.30 나XX 사건이라고 부르지 맙시다 (3)
흘러들어온꿈2014.11.15 23:43
페미니스트라는 낙인페미니스트라는 낙인 - 10점
조주은 지음/민연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저는 이 책을 2007년에, 나온 직후에 집어들어서 읽게 됐었습니다. 그때도 꽤 깊은 인상을 받았던 걸로 아는데... 제가 갖고 있는 페미니즘에 관련된 관점이나 센스는 이 책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을 받았더군요. ㅎㅎ;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관점도 가지게 됐지만, 이 책에서는 아동이나 청소년에 관련된 내용, 사회운동-노동운동 등에 관한 내용들도 많이 다루기 때문에 그런 것들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또한,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으로 가족 문제를 보고 교육 문제를 보고 청소년인권 문제를 유비추론해보자는 생각도 이 책 덕분에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조주은씨가 청소년운동이랑 굉장히 잘 맞을 거 같단 생각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들은 자녀에게 버릇이라는 것을 가르칠 때가 있다. 아이가 말문이 트여 제법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할 무렵 부모들이 먼저 가르치는 것은 존댓말이다. ˝~하셨어요?˝라는 높임말부터 ˝어른이 무슨 말을 하면 `네`하고 잘 듣는 거야˝처럼 순종적인 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더군다나 한쪽은 반말을 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존댓말을 한다면, 그 관계는 권위로 움직이는 권력관계가 된다. … 우리가 흔히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고 하는 예의 바른 어린이란 곧 어른들의 권위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아이를 의미한다. 가족은 연령에 의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상대적으로 나이가 적은 아동, 청소년(녀)들은 가족 안에서 보호와 숨막히는 통제를 동시에 경험하기도 한다. 혹시 우리는 저항과 비판 속에서 건강하고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하면서도 가정으로 돌아가면 자기 아이를 어른 말 잘 듣는 아이로 키우려는 욕구는 없는가? 또는 말 잘 듣는 자녀이고자 하지는 않는가?˝(89~90쪽)

˝전시 현장에 있는 어린이는 전쟁 반대의 다양한 이유 중 하나가 되지만, 그 논리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또 다른 착취를 빚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아동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아동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동기의 발명으로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분리되었지만, 아동이 어른의 세계에 통합된다면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지 않을까?˝(124쪽)

조주은씨는 아동기 문제를 모성착취, 모성신화와 연관지어서 많이 풀어냅니다. 그리고 가족에 관련해서는 `정상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또, 가족 안에서의 권위나 권력관계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죠. 경험이나 사례에 근거하면서도 이론적인 고민, 일반화된 관점을 놓치지 않기 때문에 잘 와닿습니다.
가족 안에서의 권력에 대해서 어른-아동 문제도 이야기하지만, 역시 페미니즘이니까 남성-여성 문제도 많이 이야길 해요. `사랑`이라는 환상, 성폭력, 불평등한 가사노동이나 양육... 그리고 가족 안에서도 그렇게 폭력이 존재하고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생각을 보여주는데, 저도 그걸 보고 가족 안에서 자식과 부모 사이에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단 아이디어를 얻었던 거 같아요.

˝모순되게도, 단일한 계급이라고 치부되는 한 가족 안에서도 취향은 위계화되어 있다. 남성들이 자신만의 취미생활을 동호회 활동 등을 통하여 우아하게 지속하는 반면, 여성들은 결혼 전에 알았던 음악이 마지막인 경우가 많다. … 계급분류적 문화 행위의 상징성이 궁극적으로 계급구조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는 부르디외의 지적은 의미심장하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계급이 어떻게 차별적으로 재생산되는지는 분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을 남긴다.˝(229쪽)


조주은씨 본인의 논문 주제가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 가정`에 관련된 거였는데, 그래서 그런가 조주은씨는 가족의 문제도 잘 분석해내지만, 노동운동 내부의 문제도 적절하게 지적을 하더라고요. 칼럼을 모은 것 같은 책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여러 이슈들과도 관련지어서 쓴 글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도 읽어볼 만합니다.


다른 활동가 분들이랑 꼭 같이 읽고 싶은 책입니다!


물론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다뤄온 주제인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해서도 좋은 글들이 많습니다.

딱 펼쳐보니까 ˝프리섹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여성 활동가들은 남성들에게 창녀로 이해되고 프리섹스주의자인 남성 활동가들은 섹스 파트너를 선택할 권리를 향유한다.˝(195쪽) 같은 통렬한 서술이 눈에 들어오네요.


다만 다양한 주제들을 간결하면서도 핵심적 문제를 짚으며 다루긴 하는데, 하나하나의 글들이 좀 짧은 편이라서 아쉽기도 합니다. 더 길게 이야기를 해보면 재밌겠다 싶은 게 몇 개 있었습니다.



아, 사소한 단점 하나. 책 편집상 쪽수 표기가 책의 제본 안쪽에 돼있는데요. 그거 때문에 쪽수 찾기가 힘드네요;;; 왜 이렇게 했지...

http://gonghyun.tistory.com2014-11-15T14:43:23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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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지나가는꿈2012.04.20 12:42

활동하는 단체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길래 하나하나 다 반박하고 사실과 다른 건 다르다고 지적질하는 댓글을 달았는데,

단 김에 블로그에 올려봄


수정 : 소스를 달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소스를 링크했습니다.
추신 : http://cafe.naver.com/asunaro/40673 이 글에 대해 하나하나 반박하는 식으로 댓글 단 걸 가져온 거고, 넘버링 등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1. 죠리퐁 : 죠리퐁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이 이야긴 1990년대인가에 YWCA 관련해서 처음 나왔던 소문인 걸로 아는데요. 여성부가 그런 입장을 내거나 정책을 쓴 적이 없습니다. 이런 소문을 만들어낸 작자들이야말로 과자를 보고 그런 상상을 해서 여성단체/여성부 공격하려고 써먹는다는 점에서 저질인 것 같습니다.



2. 군인은 "집 지키는 개" 발언 : 해당 발언은 김신명숙씨가 TV토론에서 했다고 알려진 말인데, 김신명숙씨는 여성운동가이긴 하지만 여성부에 몸담은 적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발언도 허위로 만들어진 것으로, 김신명숙씨는 당시 TV토론에서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김신명숙 망언어록’ 그 실체는? 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164041



3. 게임업계로부터 삥 뜯음 : 여성가족부가 게임업계로부터 게임과몰입예방 기금을 모으려고 한 건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여성부'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분야 업무 쪽의 문제입니다. 이 업무는 과거에는 보건복지가족부 등이 담당했던 일이고, 가족-청소년 부서가 대체로 마인드가 그렇게 생겼습니다. 우울한 현실이죠. 그리고 지금은 교육과학기술부도 추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국 정부의 꼰대들이 X 같은 거지 여성부라는 부서 특성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게임과몰입예방 기금을 정부가 만들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을 수 있어도, 그런 기금이나 활동이 필요할 순 있습니다.


`게임중독법' 법제화?…전방위 규제 우려 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473488&g_menu=020591

이런 자료를 보시면 보건복지가족부가 당시 게임규제, 청소년규제 관련 담당 주무 부처인 걸 알 수 있습니다.


보건복지가족부 - 여성부 에서  ---> 보건복지부 - 여성가족부로 가족 업무 이관에 관해

여성가족부 홈페이지 http://www.mogef.go.kr/korea/view/intro/intro01_03.jsp


"여성특별위원회는 조직과 기능, 인력과 예산 등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어 급격히 변화하는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 여성의 시대를 대비하기에는 미흡하여 정부 각 부처에 분산된 여성관련업무를 일괄해서 관리ㆍ집행할 여성가족부를 신설하였습니다.

(....)

유연하고 창의적으로 일하는 정부를 구축하기 위하여 정부기능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하는 내용으로 정부조직법을 개정(2008. 2. 29)하여 여성가족부가 수행했던 가족 및 보육정책 기능은 보건복지가족부로 이관되었고 여성가족부는 여성정책의 조정ㆍ종합, 여성의 권익증진 등 지위향상 기능을 수행 할 수 있도록 개편하였습니다. 한편, 가족 해체 및 다문화 가족 등 현안 사항에 적극 대응하기 위하여 보건복지가족부의 청소년 및 다문화 가족을 포함한 가족 기능을 여성가족부로 이관하는 내용으로 정부조직법이 개정(2010.1.18)되고, 이에 따라 "여성가족부"는 "여성가족부로 개편되고, 여성ㆍ종합 및 여성의 권익증진 등 지위향상 뿐만 아니라 가족정책, 건강가정사업을 위한 아동 업무 및 청소년의 육성·복지 및 보호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 여성가족부 현재 조직도를 보시면 "청소년가족정책실"은 여성정책과 별도로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청소년 보호 업무, 심의 등의 업무는, 이건 과거에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있다가, "국무총리실 산하 청소년위원회" -> "국가청소년위원회"로 바뀝니다. 그러다가 2008년에 이명박 정부 들어 조직 개편으로 "보건복지가족부 산하 아동청소년정책실"로 흡수됩니다. 그 아동청소년정책실이 여성가족부로 다시 이관되면서 "청소년정책관" 쪽이 됩니다.

사실 청소년 정책 업무는 여러 가지로 복잡합니다. 과거에는 문화관광부-여성가족부-국가청소년위원회 3각 구도로 정리가 한 번 되었다가, 정권 바뀌면서 여성부랑 국가청소년위원회를 통합한다고 했다가... 결국은 여성부-보건복지가족부로 정리하면서 보건복지가족부 밑으로 청소년을 통합시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여성가족부-보건복지부로 개편하면서 가족/청소년 업무는 결국 여성가족부 소관이 된 거죠.

참고) 여성부 청소년위 통합 추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384834



4. 목욕탕 수건 안 주는 게 차별 : 이 문제는 여성부가 아니라 2000년즘에 대통령 직속 여성특위에서 말이 나왔던 문제로 압니다. 차별로 결정하고 시정 권고를 했는데, 무조건 무료 지급하라는 식은 아니었고 유료 지급을 고지하라는 식으로 권고했습니다.

근데 목욕탕 수건 차별은 저도 처음 알았을 때 문제 있을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요? 남탕에만 수건을 쌓아놓고 여자들한테는 수건을 유료로 하는 게 참;; 여성들의 민원을 받아서 문제제기하는 차원에서는 그리 나쁜 활동이었던 것 같진 않네요.


[여성특위] "여탕서만 유료타월은 성차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030612



5. 회식에서 성매매 안 하면 회식비 지급 : 성매매는 실제로 남성들이 여성들의 성 서비스를 구매하는 형태가 비율로 80~90% 이상입니다. 또한 회식 이후에 술에 취한 중장년 남성들이 많이 가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런 타겟팅을 하고 정책을 내놓을 수도 있겠죠.
해당 정책의 실효성이나 현행 성매매 금지 정책에 대한 비판해볼 순 있겠지만, "남자를 전부 다 짐승으로 보는 뜻"이란 건 어떤 해석인지 잘 모르겠네요. 성구매를 하는 게 "짐승"이란 뜻이라면, 대한민국 남성들의 1/2 이상은 "짐승"이 맞을 겁니다 아마도.
저는 어차피 인간은 짐승이라는 쪽이고, "성구매"="짐승"이라고 생각지 않지만.


여성 존중하는 남성은 성구매 안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7&aid=0000000143

한국 남성 10명 중 4명은 지난해 성매매 했다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30900.html



이 위까진 원문에서 "남자를 다 짐승으로 보는 짓"이란 식의 코멘트가 달려 있어서 거기에 대해 쓴 거구요. 수정 보완하면서 좀 더 말을 보태봅니다.

저는 일단 대한민국 사회 아님 최소한 대한민국 주류 남성 커뮤니티 안에서 "성구매"가 심각한 범죄로 얼마나 받아들여지고 있기나 한지 의심스럽기 때문에 이 정책에 대해 반감을 표하는 남성들이 표리부동해 보이긴 합니다. 또 회식 이후 성매매를 안 하겠다고 하면 상금을 주는 정책이 "남성들을 모두 예비범죄자 취급하는 정책"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감시/정보수집/제약/불이익 등이 있다면 명백히 예비범죄자로 보는 정책이 되겠지만, 그런 요소는 없는 것 같으니까요.

이 정책이 그 자체로 남성을 예비범죄자로 본다는 주장은, 마치 과속 사고가 빈발한 지역에서 과속 예방 캠페인을 하거나 공공장소 금연 캠페인을 하는 게 운전자/흡연자를 예비범죄자(교통법규나 경범죄 위반 등)로 취급하는 짓이라는 논리와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해당 정책이 성매매 근절주의로 보더라도 실효성도 없고 별로 깊이 있는 계획을 가지고 나온 정책도 아니며, 철학적으로도 괴상한 정책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게 꽤 어리석은 삽질이라는 데는 동의합니다. 다만 "여성부 폐지해야 할 이유"라면서 길길이 뛸 정도의 문제인진 잘 모르겠습니다.



6. 테트리스 금지 : 죠리퐁과 마찬가지로 테트리스 이야기도 전혀 근거 없는 거짓말입니다. 여성부에서 그런 정책을 내거나 게임에 태클 건 적이 전혀 없습니다. 죠리퐁과 마찬가지로 테트리스를 보고 그런 상상을 한 건 여성부를 욕하는 쪽이겠죠.



7. 애니메이션 수입 금지 : 애니메이션 수입금지 역시 다소 과장되어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등에 대해 규제를 강화한 건 사실이지만 수입금지는 무슨;; 예로 드신 나루토질풍전은 방영 잘 하고 5월에 방영 예정도 돼있던데요...
그리고 뭣보다 이 역시 '여성부'의 문제가 아니라 청소년보호법과 청소년보호정책의 문제입니다. 원래 청소년정책은 보건복지가족부, 문화관광부가 담당했었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여성가족부로 개편되면서 가족분야 업무를 가져왔고, 그 안에 청소년보호, 연령 심의 업무도 딸려온 겁니다. 한국 정부의 청소년 정책 라인이 교육 쪽이든 문화 쪽이든 다 그렇습니다. 한국 정부와 관료 전반의 청소년보호주의와 꼰대성이 문제지, 여성부라는 부처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지하게 불만이 있으시면 아수나로에서 같이 청소년보호주의 반대 활동을 해요 ^_^



8. 셧다운제 :  7번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여성부의 업무가 아니라 '가족부' 업무 쪽입니다. 셧다운제는 과거에는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보건복지가족부 측이 추진했던 정책입니다. 뭐 여성부 자체도 원래 꼰대꼰대 한 면이 있었겠습니다만은, 다른 부처라고 그리 다르진 않습니다. 진지하게 바꾸고 싶으시면 아수나로에서 같이 청소년보호주의 반대 활동을 해요 ^_^

셧다운제 도입,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7년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1/21/2011112100848.html


9. 가요 심의 : 가요 심의도 위의 7, 8번과 동일합니다. "청소년보호법"과 "청소년보호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의 자의적 검열이 가능하게 해둔 법제와 기구들의 문제입니다. 여성부라는 부처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수나로에서 청소년보호법을 개정하거나 폐지하는 활동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9. 쿨링오프제 : (9번이 2개네요;;) 쿨링오프제는 처음 진지하게 도입하려고 말이 나온 건 교육과학기술부 쪽이고 그 맥락도 심지어 "학교폭력 예방"이었다죠. 참 한국 정부가 총체적으로 암울해 보이죠? 여성부만 욕하고 있을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한국 정부를 폐지시켜야 할 판.
한국 정부와 사회를 모두 바꾸려 하는 아수나로 활동을 해보아요 ^_^

이주호 "게임규제 '쿨링오프제' 도입 검토"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20126_0010300196&cID=10201&pID=10200



10. 소나타3 : 죠리퐁, 테트리스와 함께 역시 전혀 사실이 아닌, 거짓말입니다. 여성부에서 소나타3의 전조등이 남성 성기와 닮았다고 했단 이야기인데, 그랬던 적도 없고 소나타에 관련해서 무슨 조치를 취한 적도 없습니다. 죠리퐁, 테트리스와 마찬가지로 전조등을 보고 그게 남성 성기와 닮았다고 상상하고 그걸 여성부 까는 데 이용하는 저질스러운 사람들이 한 거짓말이죠.



11. 예산낭비 : 예산낭비는 한국의 여러 부처들이 다들 저지르는 짓입니다. 일례로 과거 국가청소년위원회 때나 청소년기구 때도 예산 남는다고 구성원들 데리고 뷔페 가고 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고 직접 참여했던 사람에게 들은 -_-;; 행정부와 입법부의 국가 예산 남용에 대해 감시와 비판, 견제는 꼭 필요하지만 여성부만 콕 집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산 낭비는 부처 폐지를 주장할 논거가 아니라 시민 참여, 예산에 대한 민주적 통제 등을 어떻게 강화할지 정책적 운동적으로 해결할 문제입니다.
예산 남용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면 참여연대나 주민자치 운동 쪽, 또는 소위 진보정당들에서도 그런 일을 하니까 참여해보심이 어떨까요? ^^



12. 고(故) 장자연씨 사건에 침묵 : 고(故) 장자연씨 사건 관련해서, 여성부는 경찰에 공정한 수사를 촉구했고, 관련 법을 개정해서 소위 '성상납' '성접대' 행위도 처벌 가능하게 하고 실태조사를 하게 하는 등 정책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잘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침묵했다는 건 사실과 다른,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사건은 경찰-검찰이 수사하고 대응하는 역할이죠;; 대형 사기사건이 난다고 기획재정부가 수사하지 않고, 대형 해킹 사건이 난다고 정보통신부가 대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견을 표명하고 정책을 만들 순 있지만 개별 사건에 대해서는 경찰-검찰이 대응하는 게 맞습니다.



[보도자료] 정부 최초로 “성접대 실태조사” 길 열어  http://www.mogef.go.kr/korea/view/news/news03_01.jsp?func=view&funcSUB=&currentPageSUB=0&pageSizeSUB=10&key_typeSUB=&keySUB=&search_start_dateSUB=&search_end_dateSUB=&arg_id=0&bid=24&rbid=0&ridx=0&bidSUB=0&cid1=0&cid2=0&cid3=0&cid4=0&cid5=0&cid6=0&cid7=0&arg_cid1=0&arg_cid2=0&arg_class_id=0&currentPage=0&pageSize=10&key_type=&key=&search_start_date=&search_end_date=&class_id=0&bidx=615377&idx=615377



13. 여성부가 우리를 괴롭혀왔다... : 여성부는 우리를 그리 많이 괴롭히지는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청소년들을 오랜 세월 동안 괴롭혀왔지만요...

그리고 한국의 성평등 지수가 바닥을 치는 상황에서 여성부는 필요 없다느니 남성부도 있어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어떻게 그리 함부로들 하시는지 잘 이해가 안 갑니다.
노동부가 노동부 안 같고 자본가 편에서 삽질을 하고 노동자들을 탄압하더라도, 노동부 폐지하잔 말은 안 나오죠?;; 마찬가지로 여성부가 잘못을 한다고 해서 쉽게 여성부를 없애자고 하는 건 좀 이상한 생각 같습니다. 여성주의나 여성운동 자체를 우습게 보거나 혐오하는 시선이 느껴져요.




여기 쓴 이야기들도... 사실 위키백과만 가봐도 태반은 허위 악성 루머라고 다 나와있습니다 -_-;;


막 낚이지 마시고, 검색 한 번이라도 해보는 성실성과 주체성을 가지시면 어떨까요? 자료선별이 귀찮은 분들을 위해 요샌 위키백과처럼 비교적 양질의 자료를 편집해둔 곳도 적지 않습니다...


어이없는 소릴 보시면 "헐 이렇대!" 하고 퍼나르지 마시고, 진짜 그런가? 하고 뉴스나 위키백과 등 검색 한 번이라도 돌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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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11.17 15:57



아수나로에서 어제 발표한 거구요
담당한 분이 쓰러지셔서 도중에 제가 땜빵으로 밤새가며 자료 정리를 했던 ㅠㅠ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48998.html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1171213131&code=94040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79115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9269

http://www.suwon.com/news/articleView.html?idxno=60054


관련기사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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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19금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의 사랑에, 성에 인색하다. 청소년들의 성 문제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높으면서도 청소년들의 올바른 성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논의는 부족하기만 하다. 이번 조사 결과에서도 단편적으로 알 수 있듯이, 학교들은 학생들의 사랑과 성을 금지하고 처벌하기에만 급급하다. 때로는 입시공부를, 때로는 학생다움을 내세우며.


그러나 사랑할 권리는 하나의 인권이다. 사랑하는 감정, 성적인 행위와 마음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보장되고 존중되어야 하는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헌법 제10조에서 보장하고 있는 행복추구권이자, 성적 자기결정권이며, 사생활의 자유이다. 「2008청소년인권선언」에서는 제8조에서 “청소년에게는 나이와 성적 지향(동성애, 이성애 기타 등등), 성정체성에 상관없이 짝사랑하고 연애하고 성적인 생각과 행동들을 하거나 하지 않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유엔아동권리협약도 제16조에서 아동은 사생활에 대해 자의적이거나 불법적인 간섭을 받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최근 여러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학생인권조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민단체들이 추진한 바 있는 광주 학생인권조례안에는 사생활과 개인 정보의 보호 부분에 “학생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둘러싼 감정을 존중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하여 청소년들의 사랑할 권리 보장을 꾀하고 있다. 서울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안 역시 사생활의 자유에 관한 조항에서 “학생의 교우관계에 간섭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사랑할 권리,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폭력과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인 동시에 실현을 위해 경제적 사회적 능력이 필요한 사회권이기도 하다. 학교의 연애 탄압에 문제제기하는 것은 청소년 성적 자기결정권 실현을 위한 첫 걸음일 뿐이다. 사랑이 ‘19금’이 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청소년들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누릴 수 있는 정신적․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청소년들이 법적․경제적 이유로 숙박시설을 이용할 수 없는 안습 상황, 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책임감을 기르지 못하는 상황을 바꾸어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청소년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 교육청들, 학교들은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학칙들을 폐지하라.

◆ 학교와 가정에서 실효성 있고 인권적인 성교육을 실시하라. 청소년들이 성에 관한 정보와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개방하라.

◆ 정부는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관한 사회적 캠페인 및 교육을 실시하라.

◆ 정부는 임신․출산을 한 청소년이 출산․양육을 할 수 있도록 사회적 지원을 마련하라.

◆ 정부는 청소년들이 실질적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누릴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마련하고 사회적 제도를 개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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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10.13 23:10

[페미니즘인(in)걸] ‘여성+청소년=여성청소년’이란 공식을 넘어서자

복합차별에 대해 아시는지?

발새


사실 페인걸은 매번 복합차별을 다루었었다.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울 것은 없지만 한번 제대로 다뤄보자는 취지로, 이번 페인걸 주제, 복합차별이다.

지하철 난투극

60이 넘은 여성과 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둘이서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이 찍힌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배경이 지하철이라 “지하철 난투극”이란 이름이 붙었다. 처음 동영상이 올라왔을 때는 ‘어린 것이 싸가지 없다’던 네티즌들은 나중에 그 여성청소년이 자신이 실수한 것에 대해 거듭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 많은 여성이 폭언을 한 상황을 듣고 여중생 vs 할머니의 싸움에서 여중생 편을 들었다. 싸움의 발발은 그 여성청소년이 신발의 흙을 실수로 옆의 그 사람의 옷에 묻힌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한 가지 조건을 비틀어 보자. 실수로 옷에 흙을 묻힌 사람이 여성 청소년이 아니라 성인 여성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남성 청소년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조건에서도 그 사람은 폭언을 했고 몸싸움이 일어났을까? 영상 속의 사람은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두 가지 약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틀을 각각 들이대면 보이지 않던 이 상황은 여성-청소년이라는 틀 안에서 제대로 보여 진다. 이렇게 두 가지의 복합된 차별은 합집합이라기 보단 교집합의 문제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




청소년 인권 운동과 여성 운동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여성 청소년이 겪는 문제는 여성운동과 청소년 운동이라는 단일한 틀로 잘 담아 지지 않는다. 청소년 인권 운동의 내부에서도 여성 청소년들은 종종 소외된다. 청소년 인권 운동의 중요 의제인 두발이나 체벌 등은 여성청소년보다는 남성 청소년에게 더 압박스러운 것들이다. 반면 여성 청소년에게 예민한 사안인 외박이나 섹스, 임신 등은 어느새 뒤로 밀려난다.

여성운동 속의 여성 청소년들의 존재는 더욱 미미하다. 결혼, 출산, 취업 등 여성 운동에서 주목해온 의제는 주로 성인 여성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번 더 여성청소년들이 복합차별의 대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청소년운동+여성운동=여성청소년운동’이란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여성 청소년들이 겪는 차별은 여성 청소년 고유의 경험이다.

청소년과 여성의 사이에서

너희는 안 꾸며도 예쁜 나이다. 화장할 시간에 공부나 더 하렴.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교사들한테 가장 많이 듣던 말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청소년기가 안 꾸며도 예쁜 나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얼굴에 여드름 나고 한창 살찌는 신체 나인데 말이다. 이런 어조는 여성청소년에게 ‘여성’보다 ‘청소년’이 되라는 말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연애나 성에는 관심을 갖지 말고 외모를 치장하는데도 신경 쓰지 않는 순종적인 청소년 말이다.

하지만 이런 교사들에게서 조금 시선을 돌려보면 어떤가. 소녀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노골적으로 판매하는 대중매체, 외모로 서열을 매기곤 하는 또래 여자 친구들. 여성 청소년들이 마주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청소년으로서의 이미지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 청소년들은 청소년은 물론 ‘외모에 치장하는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존재하기를 요구받는다.



여성 청소년에게 요구되는 이 두 가지 이미지는 몹시 상반되는 것이라 양쪽의 장단을 맞추기가 힘겹다. 아침 등교 시간에는 학생부의 눈을 피해 긴 치마를 입었다가, 학교에 오면 다시 바느질을 해서 짧은 미니스커트를 만들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공부만 하던 모범생들이라도 수학여행을 갈 때면 탱크 탑에 미니스커트를 입는 센스도 있어야 한다. 이 둘 중 한 가지라도 놓치는 순간 공부밖에 모르는 찌질이와 생각 없이 노는 날라리 중 하나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위 사진:여러번 바느질한 교복치마


언어를 잃어버리다

나도 청소년기를 복합차별의 대상인 여성 청소년으로서 보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글에 담고 싶은 나의 차별 경험담이 없었다. 나의 외모는 지금이나 그때나 성별 구분이 잘 안 된다. 그래서인지 학교를 다닐 때 난 철저하게 청‘소년’이었던 것 같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난 차별받을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차별에 대한 이렇다 할 기억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청소년기에 차별당한 일이 없다고 생각 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사건들을 언어로 바꿔 기억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이다. 경험하는 모든 일은 적절한 언어가 있어야 제대로 기억된다. 감정의 결을 표현하는 데도 사랑, 우정, 동경 등 많은 단어가 동원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단어가 없다면 감정을 언어로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나는 청소년기에 내가 당한 차별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만나지 못했고 나의 경험들은 반편이가 되어 여성이나 청소년으로서 겪은 일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큼직하게 기억에 남는 일이라도 있었으면 그 일을 다시 복합차별을 관점에서 재구성해 볼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복합차별이란 새로운 단어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경험을 기억으로 바꾸는 길목에서 옳은 방향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지금도 교실 곳곳에서 일어나는 복합차별은 복합차별이라는 단어를 만나지 못한 체 당사자들의 언어 뒤로 숨어버리고 있다.

약자들은 자신을 설명할 단어를 잃어버린다고 하는데, 이 글을 쓰면서 그 말이 참 실감난다.
덧붙이는 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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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22 호 [기사입력] 2010년 10월 12일 22:4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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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09.08 23:15

[페미니즘인(in)걸]"부모님 모셔와"가 무섭지 않은 세상을 만들려면?

청소년과 여성, 가족 제도에 스크래치 내기

공현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뭔가 규정을 어기거나 학교 눈 밖에 나는 짓을 했을 때 가장 두려운 조치는 뭘까? 그야 당연히 체벌이나 욕설, 또는 퇴학 같은 징계들 모두 다 무섭긴 무섭다. 그런데 내 경험상 가장 손써볼 도리가 없으면서도 껄끄러웠던 것은 “집에 전화하는 것”, “부모님(혹은 집안 어른, 보호자) 불러오는 것”이었다. 뭐 이런저런 집안 사정에 따라 다들 조금씩 느끼는 정도 차이야 있겠지만… 부모/보호자 소환은 공식적인 징계도 아니고 직접 두들겨 패는 폭력도 아니라서 학교 입장에서는 부담될 것 없으면서, 학생 입장에서는 참 대응하기도 어렵고 압박스러운 스킬 중 하나다. 실제로 많은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청소년들이 학교의 탄압은 버텨냈으면서도 이 집안의 압박 ― 가정탄압 앞에 굴복해야 했다.

교사들의 이 “부모님 모셔와” 스킬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청소년들의 일상적인 생활 전반을 모두 규율할 권력이 부모/보호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학교에서 교사의 권한을 정당화하는 주된 논리 중에서 “부모/보호자로부터 교육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부모/보호자에게는 청소년들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또 부모/보호자는 자신들의 가치관에 따라 교육하고 지도할 권리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벌을 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청소년들은 먹고 살 만큼 돈을 벌기가 힘들고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부모/보호자들은 청소년들에 대한 경제적인 지배력도 가지고 있다. 부모-자식 관계에서는 대놓고 대들고 반항하기가 껄끄러운 문화적 심리적 장벽들도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학교에서 집에 전화를 하고 부모/보호자를 부르는 일은 청소년들에게 가장 큰 힘을 행사할 수 있고 청소년들 입장에선 저항하기도 힘든 권력자를 불러들이는 조치인 셈이다. 학교보다 더 강력한 권력은 가족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학교에서라면 문제제기를 할 거리가 되는 일들도, 부모/보호자에 의해 집안에서 이루어지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곤 한다. 예컨대 학교 안에서 교육제도를 비판하는 전단지를 나눠줬다고 해서 징계를 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자식이 그런 전단지를 나눠줬다고 어머니가 자식을 혼내거나 용돈을 깎거나 외출금지를 내리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학교가 학교에 반항적인 학생의 생활을 감시하기 위해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하거나 하면 사회적 논란이 일수도 있겠지만, 부모가 자식을 걱정해서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부모/보호자와 자식/청소년의 관계가 권력관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또 ‘부모’라는 엄마와 아빠가 있는 정상가족 중심적인 용어를 벗어나기 위해서 언제부턴가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 몇몇은 “친권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페미니즘 : 가족 비판의 동지

우리 사회에서 가족은 끊임없이 좋은 곳, 회복되어야 할 곳으로 일컬어진다. 학교에서도 음악시간이면 “즐거운 곳에서 나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내 집뿐”이라는 노래를 배우고, 동요도 엄마, 아빠와의 추억이나 화목한 가정을 소재로 한 게 많다. (“우리 아빠 꿈속에 오늘 밤에 나타나 내 얘기 좀 전해줄 수 있겠니. 먹고 싶은 것이나 놀고 싶은 것이나 모두모두 할 수 있게 해줄래.”라고 노래하는 「피노키오」라거나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른들은 몰라요”라고 하는 「어른들은 몰라요」가 가장 투쟁적일 정도?) 영화에서 공익 광고에서 신문에서 법에서 가족은 계속 건강하게 회복되어야 할 곳, 삭막한 사회에서 마지막 안식처 정도로 묘사되곤 한다. 그런 한편 ‘정상 가족’이 아닌 가족에 속한 청소년들은 ‘정상 가족’을 당연한 걸로 전제하고 있고 가족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있는 사회에서 ‘정상 가족’을 가지기를 소망하고는 한다.

하지만 실제로 청소년들의 삶을 살다보면 과연 가족이 그런 것인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청소년들은 가족에서는 정(情) 같은 것 말고도 생활을 하나하나 규율하고 명령하는 권력도 경험할 수 있다. 가족이 안식처라는 것은 노동에 지친 남성 가부장을 위한 판타지는 아닐까? 청소년에게 가족은 등을 누이고 쉬는 곳이 되기도 하지만 공부하라는 압박을 받는 곳, 또 다른 일터, 친권자에게 잘 보이고 생활비를 받는 곳이기도 하다. 가족에서는 친권자들에 의해 사랑과 교육의 이름을 달고 체벌이나 감금 같은 폭력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때로는 소유욕과 의무감이나 권력의 행사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진로나 생활을 놓고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청소년과 친권자 사이의 갈등은, 가족이 순전한 ‘공동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도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가족 시스템이 흔들리고 있어서 생기는 문제들도 있겠지만, ‘정상적인 가족’ 안에서도 충분히 많은 폭력과 권력관계, 사회적인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가족 비판의 영역에서 청소년운동의 ‘선배’인 셈이다. 페미니즘은 결혼이 불평등한 계약이고 가족이 여성을 억압하고 있으며 여성의 희생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족 안에서 여성들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가족 제도에 의해 여성들의 성은 통제받는다. 페미니즘은 그동안 일터와 사회는 남성들의 공간이고 가족은 여성들의 공간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여성들에게 가사노동, 양육노동, 감정노동 등을 부담시킴으로써 가족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밝혀왔다. 여성들에게 가족은 안식처이자 보금자리가 아니라 일종의 일터이다. 그것도 그 일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처럼 가족이 자연스러운 운명공동체가 아니라 그 안에도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과 권력관계들이 얽혀 있는 사회적인 제도라는 관점이 만들어진 것에는 페미니즘의 기여가 컸다. (사회주의-공산주의나 아나키즘 역시 이러한 관점을 만드는 데 일부 기여했다.)

페미니즘에 따르면 아이를 양육하고 교육할 책임을 어머니-여성에게 떠맡기는 걸 정당화하는 ‘모성’ 역시 자연스러운 게 아닌 사회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이러한 비판은 청소년들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이야기이다. 친권자들이 가진 양육의 책임은 동시에 청소년들의 삶을 지배하고 규율할 권력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성’ 이데올로기 등을 비판하는 것은 청소년들이 가족 안에서 겪는 억압과 갈등을 어느 개인의 문제 또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이야기와 여성들의 이야기는 가족이라는 사회 제도에서 가장 많은 부분 맞물려 있다. 체벌이나 가정폭력,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폭력과 억압 등은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여성과 청소년 모두가 집에 있어야 할 존재로 취급받는다는 점,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에 제약이 따르는 존재라는 점도 동일하다. 양육의 책임과 그 권력의 문제에서는 여성-어머니와 청소년의 경우 서로 입장이 다르지만 같이 극복해야 할 얼키고설킨 굴레가 된다. 여성 청소년들이 남성 청소년들에 비해 가족 안에서 더 많은 억압을 받는 현실에서도 페미니즘과 ‘청소녀니즘’(청소년+이즘ism)이 만나는 교차점을 볼 수 있다.

물론 남성 가부장 역시 가족 제도 안에서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고개 숙인 아버지’ 등의 담론을 보면 지금의 가족 제도가 남성 가부장에게 어떠한 부담을 주고 있고 또 가족의 판타지가 이를 어떻게 은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지금의 가족 제도를 바꾸기 위해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하고 거기에 저항할 동기가 있는 주체는 여성-어머니와 청소년이다. 가족을 비판하고 스크래치를 내고 바꾸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페미니즘 운동과 청소년운동은 동지 관계에 있다.


연대가 가능하든 말든

그러나 현실을 보면 여성-어머니와 청소년이 연대해서 가족을 바꿀 수 있을지, 나는 좀 의문스럽다. 이른바 ‘정상 가족’ 속에서 청소년들은 여성-어머니와 많은 충돌과 갈등을 겪는 일이 많다. 아버지는 좀 더 무게 있는 라스트 보스 급, 권력자로 존재하면서 중요한 순간에만 나서서 권력을 휘두르고, ‘정상 가족’ 안에서는 어머니가 청소년들의 일상생활 속에 권력자로 등장한다.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저항할 때는 청소년과 여성-어머니가 같은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여성-어머니가 연합하여 청소년의 삶을 자기들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려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남성 청소년과 아버지가 여성-어머니를 착취하기도 한다.

여성-어머니와 청소년은 지금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직접 체험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도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쉽사리 연대할 수 없다. 하긴 애초에 가족을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보는 이데올로기가 강고한 이 사회에서는, 가족의 문제를 느끼더라도 그걸 가족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결 짓는 사람들 자체가 드문 판이니 이 또한 하나의 탁상공론일 수 있다.

확실한 것은 페미니즘 운동과 청소년운동에게 가족은 같이 넘어야 할 산이라는 것이다. 역사가 짧은 청소년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페미니즘 운동 역시 그동안 우리 사회의 가족을 충분히 비판하고 바꾸는 데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우선은 가족을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포장하는 사회에서 가족을 하나의 상대적이고 사회적인 제도로 보고 그 제도의 문제들을 드러내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족끼리 서로 존중합시다.”, “서로 대화하는 가족을 만듭시다.” 같은 류의 캠페인을 넘어 가족이 사회적인 운동과 정치의 대상으로 생각되기 시작할 때 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청소년들과 여성들의 가족 안에서의 이야기를 공론화하고 우리의 다른 이해관계를 내세워 가족 제도에 스크래치를 내고 태클을 검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공현 님은 청소년활동가네트워크 활동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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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18 호 [기사입력] 2010년 09월 08일 17: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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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08.04 21:16

[페미니즘인(in)걸] 납량특집 -공포영화

그 영화가 무서웠던 더 무서운 이유

발새


이번 페인 걸은 무더위를 식히기 위한 납량특집, 공포영화 속의 여성청소년들이다. 생각해보면 다른 장르에 비해 공포물은 유독 ‘학교’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10년 째 장수중인 <여고괴담>시리즈, 최근에 속편이 개봉한 <고사>시리즈 등이 모두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입시위주로 모든 학생들을 경쟁자·적으로 만드는 ‘학교’라는 공간은 이제 한국에서 공포영화의 단골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포 영화가 이런 학교의 현실을 고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상업 영화의 메커니즘 안에 있는 장르 영화의 하나인 공포영화는 대부분의 경우 사회 비판이라는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때문에 어떤 상황 혹은 공간이 가지는 폭력성은 어떤 인물의 부도덕함이나 싸이코틱함으로 대치되어버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공포 영화 속에 여성 청소년이 등장할 때도 마찬가지다. 여성 청소년들을 사회적인 약자로서 묘사한다고 한들, 이것이 어떤 현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단지 영화적인 재미를 돋우기 위해서 사용되는 장치인 경우가 다반사다.


지못미 소녀들
위 사진: 영화 <아랑> 포스터

그렇다면 여성청소년들은 공포영화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살펴보자. 여성 청소년들은 보호해야 할 존재로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아랑>이란 영화에선 남자 주인공이 짝사랑했던 소녀를 지키지 못해 그녀를 강간하고 죽인 범인들을 연쇄 살인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성 청소년들은 성폭행이나 죽임을 당하여 남은 사람들에게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겨주는 역할을 한다. <러블리 본즈>, <살인의 추억>, <마더> 등등 말이다. 이런 경우 여성 청소년들은 사회적 약자의 대표격인 셈이다. 물론 이런 설정 자체가 여성 청소년을 무기력한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더 아니꼬운 것은 영화가 의도하는 것이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과 영화 밖의 관객들의 ‘순결한 소녀’의 보호에 대한 합의란 것이다. 이 사회에서 순결한 소녀는 당연히 보호받아야할 대상들일 뿐이다. 때문에 이들이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되었을 때, 관객들은 이들의 사건을 수사하거나 이들의 복수를 하는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주로 남성들)에게 더 쉽게 몰입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설정을 가진 영화로 <추격자>를 들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보호의 대상으로 순결한 소녀가 아닌 순결하지 않은 성매매 여성이 등장하는데, 영화는 이 여성을 보호해야한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그녀가 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임을 강조한다.


공포와 에로 사이

이런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여성 청소년은 다른 한편으론 에로틱한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한다. 공포영화는 애초에 비명을 지르고 칼에 찔리는 여성들의 이미지로,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했었다. 여기에 소녀·여고생의 이미지가 덧씌워지면 그 시너지 효과가 엄청나다. 여성 청소년이 등장하는 공포영화는 소녀나 여고생의 순결한 몸을 파괴하는 쾌감을 주는 것이다.
위 사진:<여고괴담4> 중, 끔찍하게 살해당한 여고생의 몸


<여고괴담>시리즈를 보라. 3편부터 5편까지는 본격적으로 난도질당하는 여고생의 몸이 등장한다. <고사>는 좀 더 자극적으로 수조 안에서 죽어가는 여고생이 나온다. 그런데 이런 공포 영화들이 재수 없는 것은 이렇게 보여줄 건 다 보여주면서도 남성들에게 가해자의 편에 서지 않은 것 같은 안정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여고괴담>시리즈에서 여고생들의 몸이 난도질당하고 관절이 꺾이는 것은 외모나 성적에 강박적으로 집착한 여성들 본인의 탓이고, <고사>의 경우 관객은 문제를 풀어서 수조안에서 여고생을 구출하는 입장이다. 앞서 말했듯이 공포 영화는 어떤 사회적인 문제를 재미로 차용하는 것일 뿐 결코 약자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에로 코드의 또 다른 형태로, 성적인 금기를 범하는 여성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것은 주로 임신, 동성애나 사제 간의 사랑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성적인 금기를 어기는 소녀는 성인여성보다 더 도발적인 법이다. 예로 <여고괴담>시리즈의 모든 작품에 등장한 동성애 코드, <여고괴담4>에서 다룬 사제 간의 사랑, <여고괴담5>에서 다룬 임신 등이 있다. 이 영화들은 금기를 어긴 여성 청소년들이 좋지 않은 결말을 맞게 된다고 말한다.


소녀들은 불완전한 존재?

또 하나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청소년의 이미지는 불완전성이다. 여성 청소년은 사회적으로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존재인 여성과 청소년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캐릭터의 극대화를 노리는 공포영화에서 이런 이미지가 얼마나 반갑겠는가.

공포 학원물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 청소년들이 외모나 성적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캐릭터는 주로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초자연적인 무엇과 결탁하거나, 죽어서도 계속 특정한 공간에 머물거나 하는 등의 형태로 공포를 만들어낸다. 드물게 공포영화에서 이성적이고 침착한 역할을 하는 여성 청소년이 등장하더라도 다른 단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로 <4교시 추리 영역>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은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대신 폐쇄적인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다. 남자 주인공이 출중한 외모, 명석한 두뇌 그리고 리더쉽까지 갖춘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또 이런 불완전함의 이미지는 여성 청소년들을 우정과 사랑을 혼동하는 모습으로 묘사하여, 여성 청소년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대부분의 공포영화에 동성애 코드를 남발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주체적인 귀신들

반대로 공포 영화에서 여성 청소년들은 앞서 말한 것과는 다르게 주체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여고괴담>시리즈의 1,2편, <분신사바>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 여성 청소년들이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귀신과 거래를 하거나, 직접 죽어서 귀신이 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여성청소년들이 제 모습을 온전히 가지고선 누구를 죽이거나 괴롭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공포영화는 굳이 사회적으로 형성된 여성 청소년의 이미지를 깨뜨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위 사진:여고괴담> 중 한 맺힌 여고생 귀신



그 영화가 무서웠던 이유

공포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들을 불편하지 않으면서 무섭게 만드는 일이다. <여고괴담>에서 친구들한테 괴롭힘 당하다 죽은 여고생이 귀신이 되어 학교를 떠돈다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여고괴담>의 줄거리가 주인공 여고생이 살아서 자신을 괴롭히고 배신한 친구들을 한 명씩 살해하는 것이라면 과연 이 영화를 편히 볼 관객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또 반대로 만약 <추격자>의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성적인 무능함을 무시한 여성들에게 귀신이 되어 복수하는 내용이라면 누가 이 영화를 재밌게 보겠는가. 이렇듯 공포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관객이 어떻게 여성과 남성을 인식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공포물은 상황이나 공간의 폭력성을 주제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른 장르보다 사회의 병리 현상을 다룰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은 장르라고 생각한다. 여태 그런 공포영화가 잘 없었을 뿐이다, 좋은 예로 <샤이닝>이란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어느 평범한 아버지-남편이 한순간에 폭력적인 살인마가 되는 내용인데 우리가 순간순간 느끼지만 덮어두었던 아버지-남편의 폭력적인 모습을 잘 포착하여 뛰어난 공포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처럼 공포영화는 반드시 이미 구성된 세계관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나는 더 이상 공포영화에서 비명을 지르는 소녀들을 보고 싶지 않다. 그녀들의 캐릭터도 역할도 너무 뻔하다. 그렇다고 신개념 싸이코패스 살인마로 여성 청소년이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여성 청소년들은 청소년으로서 학교 안에서 한 인간으로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하는 상황이고, 여성으로서 가부장사회의 약자란 위치에 있다. 이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포착하여 훌륭한 공포영화로 탄생시킬 수는 없는가? 영화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인가? 바로 영화 속 등장인물이라는 타인의 감정을, 내 것으로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훌륭한 매체가 아닌가. 한 명의 영화팬으로서 공포영화에 여성 청소년이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어서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지못미: 인터넷 용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의 줄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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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새 님은 청소년 인권 활동가 네트워크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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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14 호 [기사입력] 2010년 08월 04일 15:5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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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10.07.30 08:41



[책의 유혹] 생식기 차이가 가져온 엄청난 결과

『아주 작은 차이』, 알리스 슈바이처 저, 김재희 역, 이프, 2001

초코파이

사실 이 책은 그리 딱 손에 잡혔던 책은 아니다. 책을 사고도 한동안 책꽂이에 조용히 전시해 두고 있었던 책이다. 그러다 처음 책을 잡고 보면서는 조금 불편했던 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녀’들의 이야기 속에서 생물학적 남성인 내 모습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년이 넘게 평화 운동, 포르노 반대 운동 등을 펼치며 여성 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애쓰던 저자가 사랑, 성, 일이라는 주제로 13명의 여성들을 만나 취재하고 인터뷰한 내용이다.



1975년 독일에서 처음 출판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 나와 있는 질 오르가즘에 대한 이야기나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가 당시에는 색다른 것이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어느 정도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동성애가 너무 쉽게(?) 드라마에서 다루어지는 것을 본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얼굴을 붉혔듯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내용들은 이미 죽어버린 그 무엇이 아니라 아직도 이 사회 곳곳에서 펄떡거리고 있는 작은 차이들에 대한 것들이다.

이 책에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식기’의 아주 작은 차이가 현실에서는 엄청난 차이와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생식기’의 차이가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의 차이를 낳고 이것이 결국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저자는 ‘8~9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차이’가 ‘엄청나게 큰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 온당하냐고 묻는다.

여성다울 것을 강요하는 사회, 가사와 육아가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는 것은 지금에도 마찬가지이다. 신부수업을 받고 가사와 육아를 자연스럽게 여성의 몫으로 되어가며 그 속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주부 우울증이라 이야기되며 약물이나 정신과 치료 정도로 해결하려 한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여성의 무력감은 남편의 관심과 약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복잡한 무엇이다. 회사에 있으면 육아 문제로 고민하는 여성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렇지만 그만큼 거기에 대해 고민하는 남성들을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주말에 아이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빼앗길까봐 차라리 휴일 근무를 하면서 돈도 벌려고 회사에 나오는 남성들을 찾는 게 더 쉬울 때가 많다. 내 친구는 남편이 ‘애보는 걸 안 도와준다.’고 이야기한다. 그 친구는 대학을 나왔고, 사회의식이 투철한 친구지만 ‘육아’는 자기가 하는 거고 남편은 ‘도와주는’ 거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내뱉는다. 많은 여성이나 남성이 학력이 부족하거나 의식이 없어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일상화된 ‘아주 작은 차이’의 큰 결과이기에 덤덤히 지나가는 듯하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은 맞벌이 부부 가운데 여성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3시간 27분으로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인 42분에 비해 5배가량 높은 것이라고 밝혔다. 부부가 맞벌이를 하더라도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보다 5배 가까이 많은 것이다. 여성 생식기를 타고 났기에 여성이 가사와 육아를 전담해야 한다는 의식은 변함이 없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가사와 육아 못지않게 성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저자는 성해방이라는 것이 결국은 여성의 해방이 되지 못하고 남성 중심의 억압적인 성관계를 강화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성의 성기 삽입을 통한 질 오르가즘이야말로 진정한 오르가즘이라는 전통적인 성의식과 동성애에 대한 혐오는 지금도 계속 된다. 그리고 그러한 페니스(자지) 중심의 사고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의 은근한 변형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남편이 원하면 섹스가 싫어도 해줘야 한다고 알았다.’고 말하는 책 속의 한 인터뷰 여성의 말에서도 그런 모습은 드러난다. 결혼을 한 여성이든 하지 않은 여성이든 인터뷰 내용 중에서 정말 무의식중에 학습된 가부장(남성) 중심의 사회 체제는 정말 견고하다.

책의 서문에서 그녀는 “25년 전에 쓴 책이 아직도 꾸준히 읽히고 있고 여전히 그들이 물어오는 편지에 답변을 보내고 있다. 왜일까? 시간이 많이 지나오면서 상당히 달라졌다고 할 수도 있고,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직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게 느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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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파이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돋움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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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12 호 [기사입력] 2010년 07월 21일 15: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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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0.07.07 20:14

[페미니즘 인(in) 걸?] 잔혹한 소년만화의 테제

‘소녀’ ‘정규직’ 오타쿠가 본 소년만화 씹어주기

둠코



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굉장히 좋아한다. 특히 일본에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들을 보면 거의 사족을 못 쓴다. 흔히들 말하는 ‘오타쿠’ 이다. 어떤 한 분야에 꽤나 심하게 열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음악 오타쿠, 와인 오타쿠, 이런 식으로도 쓰이지만 그냥 ‘오타쿠’라고 하면 만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일정 장르의 게임(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던가, 애니, 만화를 원작으로 한 게임 같은 것들)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어쨌든 애니메이션에 엄청 빠져서, 하루에 거의 여덟 시간씩 착실히(?) 보는 ‘정규직 오타쿠’ 였다. 지금도 하루에 8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틈만 나면 애니메이션을 본다.

그런데 청소년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러다가 페미니즘을 알게 된 후 마냥 재미있던 애니메이션이 조금씩 불편해졌다. 내가 접하는 많은 만화에서, 혹은 주류라 불리는 많은 만화들에서 여성의 캐릭터는 언제나 비중이 적거나 존재감이 옅다. 정확히 말하면 남성들에게 가려져 있다. 그래서 한동안은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기도 했지만 결국 오타쿠짓은 습관이어서 그런지 금단 증상에 져 버리고 말았다.

보통 만화는 크게 소년만화와 소녀만화로 나뉜다. 소년만화는 초, 중, 고등학생 남성층을 주로 겨냥해 만든 것으로 스포츠만화나 전투만화가 주를 이룬다. 슬램덩크, 테니스의 왕자, 우에키의 법칙, 나루토, 원피스, 블리치, 은혼 등이 있다. 반면 소녀만화는 한국에서는 흔히 순정만화라고 불리고 있는데, 초, 중, 고등학생 여성층을 대상으로 애틋한 로맨스를 통해 심금을 울리는 작품을 떠올리면 된다. 대표작으로 캔디 캔디, 나나, 토라도라 등이 있다. 이렇듯 독자층을 구분한 이 단어들도 여성과 남성의 고정화된 성 역할에 따라 나눠 놓은 것이다.


모에(*)!! 만화 속의 여성 찾기

소년만화에서는 크게 두 가지 캐릭터로 여성이 나온다. 첫 번째는 ‘서비스 캐릭터’이다. 이 때 서비스란 여성캐릭터를 이용한 성적 흥분을 남성에게 서비스 한다는 노골적 의미이다. 실제로 애니메이션, 만화계에서 서비스 캐릭터라는 말이 쓰인다. 이건 거의 모든 주류 소년만화에 빠지지 않는 요소로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보면, 제일 기분 나쁜 캐릭터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부각시키고 많은 경우에 그런 여성 캐릭터가 적게는 두세 명에서 많게는 열 명 가까이 나와서 주 독자층인 남성들의 취향에 따라 ‘고를’수 있게 했다. 독자가 남자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만화에 나오는 여성들이 자신을 따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런 만화로는 『에반게리온』, 『왕도둑 징』(이건 매 화마다 주인공에게 반하는 서로 다른 여자들이 한 번씩 등장하는, 뭔가 본드걸 같은 느낌이긴 한데) 같은 만화들, 많은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들에서 서비스 캐릭터들을 보여주고 있고(이 미.연.시** 같은 경우는 그냥 그 서비스 캐릭터를 즐기는 것 자체가 목표다.) 전투만화 같은 경우에도 여성들이 노출이 많은 복장을 하고 나오게 하거나 가슴, 엉덩이 등을 강조한다. 『절망선생』이라는 만화에는 매번 어떤 일이든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절망하는 선생이 나오는데 그 선생을 좋아하는 열댓 명의 여학생들이 등장한다. 그 여학생들은 제각기 두드러지게 다른 성격을 가지는데 스토커, 귀국자녀, 은둔형 외톨이, 동인녀(***), 초 포지티브 소녀(****), 뭐든 계획적으로 딱 부러지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여자애 등이 나온다. 정작 선생은 그 중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피해 다닌다는 느낌이다. 결국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주인공이 아무도 ‘선택’ 하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이 맘에 드는 여성캐릭터를 고르는 상상의 여지를 남겨둔다는 노림수가 있다.



두 번째는 ‘서포터 캐릭터’이다. 서포터 캐릭터는 스포츠 만화라던가, 전투만화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여성이 주로 남성 주인공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스토리가 진행 될수록 주인공과 여성 캐릭터 사이에 러브라인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전투만화에서는 여성이 적에게 납치되어 남성인 주인공이 여성을 지켜주는 구도이다. 여성들도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보통 남성인 주인공보다 강하지 않다. 여성이 열심히 싸우기는 하지만 최종 승리는 언제나 남성 주연 캐릭터가 독식한다.

이런 구도에서는 ‘남자다움’ 혹은 ‘사나이들의 세계’ 같은 것이 굉장히 부각된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나이들의 세계를 좋아한다. 일본의 유명한 만화 잡지 ‘점프’의 3요소는 승리, 우정 사랑으로 모두 ‘남자의’ 승리, 우정, 사랑이다.



『블리치』, 『나루토』, 『원피스』 같은 전투만화와 『테니스의 왕자』, 『슬램덩크』같은 스포츠만화에서 여성들이 주로 서포터로 나온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애처로운, 보고 있으면 화가 치미는 서포터로 등장하는 만화는 『데스노트』라고 생각한다. 『데스노트』에 나오는 아마네 미사는 데스노트를 손에 넣어 사람을 죽이는 라이토가 세계적 탐정인 ‘L’에게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 ‘L’에게 구속되어서도 입을 열지 않고, 자신에게 두 번째 데스노트를 준 사신(*****)과 거래를 해서 수명을 두 번이나 깎아먹는다. 기본적으로 자신은 바보이니 라이토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고 공언할 정도로 의존적인 캐릭터이다.


『미래일기』 분홍머리 여자애 가사이 유노

서비스나 서포터 등 여성을 부차적인 존재로 다루는 캐릭터 외에 예외적인 경우들도 많이 있다. 세 번째는 전투미소녀 캐릭터이다. 이 경우 남성 주인공보다 여성이 강하다. 남성은 주로 여성에게 보호받는다. 하지만 만화의 골자가 전투라고 해도 전투 능력이 높은 여성이 주체적인 캐릭터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전투는 주로 남자 주인공을 지키기 위한 것이거나 절체절명의 위기에 남성주인공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다는 패턴이다. 결국 정신적으로 남성에게 기대고 있다는 식의 전개로 이어진다. ‘예쁜데다 강하기까지하다’ 는 식의 외모지상주의는 기본으로 깔려있다.

『웨딩피치』, 『세일러 문』, 『카드캡터 체리』, 『울트라매니악』, 『신풍괴도 쟌느』 같은 변신물은 대부분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적들과 싸우지만 위기일 때 달려오는 건 남성들이다. 『미래일기』 같은 경우 각자 고유의 능력을 지닌 일기의 소유자들이 서로를 죽여서 승자를 가리는 게임을 하게 되는 내용이다. 일기를 이용한 일종의 능력자 배틀물의 형식이다. 남자 주인공은 소심하고 매사에 주눅 들어 있다. 가사이 유노라는 우등생에 역시나 일기의 소유자인 여성이 주인공을 열렬히 좋아해서 위기에 처한 남자주인공을 위해 싸운다. 일기를 파괴해서 상대방을 처치하는 마지막은 남자주인공이 하는 걸 봐서 가사이 유노가 서포터 캐릭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주인공이 너무나 하는 게 없다. 이 마지막 경우가 가장 질이 나쁘다. 여성이 고정된 역할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전면에 내세우다가 결국은 ‘그래봤자 여자’ 라는 메시지가 읽히니까.




언니들이 필요하다

남성 중심의 애니메이션에서 부차적인 존재가 아닌 주체적인 여성캐릭터가 있는데, 이른바 ‘언니 캐릭터’ 이다. 『원피스』(물론 원피스 자체는 굉장히 뜨악할 정도로 마초스럽다.)라는 만화에는 언니 캐릭터가 증장한다. 『원피스』 주연급 캐릭터는 9명인데(지금까지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457화 기준으로) 모두 ‘밀집모자 해적단’의 일원이다. 그 중에 여자 캐릭터는 딱 두 명이다. 참 난감한 성비이다. 한 명이 니코 로빈이고, 또 한 명이 나미이다.

위 사진:『원피스』 그림 순서대로 로빈, Dr.리누, 벨메일


니코 로빈, 벨메일, Dr. 리누. 내가 좋아하는 세 언니의 이름이다. 니코 로빈은 전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고고학 연구가 진행되었던 ‘오하라’라는 섬에서 태어났다. 로빈은 어린 나이에 고고학 자격을 취득했지만 ‘오하라’의 연구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역사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하자 ‘세계정부’가 섬을 통째로 공격해서 멸망시킨다. 유일한 생존자인 그녀는 여러 암흑의 조직에 몸담고 사는데 그 모든 조직들이 그녀 하나를 생존자로 남기고 괴멸한다. 그녀의 특기는 배신, 거짓말, 암살. 그녀는 모든 것을 내다보고, 꿰뚫고 있다. 조직이나 권력을 이용하고 배신할 줄 아는 ‘악녀’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주인공들 ‘밀짚모자 해적단’을 뒤에서 받치고 있다. 벨 메일은 주인공중 하나인 여자애 나미의 의붓 엄마이다. 그녀는 어릴 적에 해병이 되겠다고 마을을 뛰쳐나가 입대하는데,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어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할 때 나미와 누군지도 모를 나미를 어르고 있던 노지코를 발견한다. 두 아이를 살리겠다는 마음에 죽을 각오로 고향에 돌아와서 친딸도 아닌 두 여자애를 강하게 길러낸다. 해적인 아론이 마을에 쳐들어왔을 때도 당당히 맞서 싸우다가 “태어난 시대를 원망해서는 안 돼. 살아있으면 반드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그녀의 자식을 위한 희생은 전통적 ‘모성’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딸들에게 기존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Dr. 리누는 ‘밀짚모자 해적단’의 선의인 쵸파의 스승이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데리고 있던 인간사슴 쵸파를 맡아서, 자신의 의술을 모두 전수한다. 섬 가장 높은 산의 성에 살며 가끔 내려와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러 ‘쳐들어와서는’ 치료를 해 준 후 그 집 재산의 절반을 뜯어간다. “Happy 하냐? 나는 아직도 팔팔한 130대라구!” 라는 말을 달고 사는, “아름다움의 비결이 알고 싶나?” 라고 당당히 외치는 여자. 성격이 괄괄하고 똑부러지지만 쵸파가 정든 고향을 망설이지 않고 떠나게 해 주는 사려 깊음도 있다. 자신의 나이나 외모에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다리가 아픈 아이의 팔을 꾹 눌러서 “봐라, 다리 아픈 거 다 잊었지.”라는 농담을 던질 정도의 넉살과 “내 환자가 침대에서 나갈 때는, 완치 되거나, 죽거나. 두 경우다. 낫지도 않았는데 맘대로 돌아다니면 죽여 버리겠어.”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 괴상하고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다. 다들 어느 정도 롤모델로 삼고 싶은 언니들이다.

위 사진:『은혼』 『가구라』


그것 말고도 『은혼』이라는, 일본의 개화기를 판타지로 바꿔서 그린 만화에도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일본이 서양의 국가가 아닌 우주인들에게 개항했다는 설정. 그래서 우주인들이 (만화 안에서 천인天人이라고 부른다.)사회의 지배층이 된 세계를 그린다. 주인공인 긴토키는 은발의 사무라이이다. 사무라이는 폼도 뭣도 없는, 집세가 5달 정도 밀려있고 당뇨병 위험에 시달리는 뭐든지 해 주는 해결사(결국 돈은 못 버는)이다. 해결사 사무실에 얹혀사는 가구라라는 여자는 우주에서 유명한 전투민족인 야토족 소녀인데 스쿠터 정도는 한 손으로 세울 수 있고 총 맞은 구멍은 좀 있으면 막히는, 엄청난 신체 능력을 지닌 여자애이다. 무기로 총알이 나가는 우산;;을 쓴다. 전기밥솥 째로 밥을 마실 정도로 먹성이 좋고, 엉뚱한 성격이다. 사다하루라는 커다랗고 사람 머리를 덥석 물어버리는 견신犬神을 키운다. 해결사 일행이 범죄사건에 휘말려 경찰에게 심문을 받았는데 조사를 끝내고 풀려나오면서 ‘경찰이 엄청 열 받으니 경찰서 문간에 토해주겠다.’ 는, 만화의 여주인공 이미지가 절대로 아닌 여자애이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조직에 들어가면 짱을 먹자는 게 좌우명이라나. 만화에 나오는 여성 주연급캐릭터는 어느 정도 예쁘고, 도를 넘는 더러운 짓이나 막 되먹은 짓은 하지 않는다는 틀을 확 깨버리는 통쾌함이 있다.


우리는 애니메이션 속에 살고 있다

멋진 언니들이 많지만 애니메이션 전체에서 여성의 위치는 한계가 있다. 기본적으로 소년만화들은 남성들‘만을’ 독자로 지정하고 있다. 이런 장르를 좋아하는 여성 팬 층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좋아하게 되어도 마초 세계관을 수긍하고 내면화하기 전에는 편하게 즐길 수가 없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도가 남성이다 보니 아무리 멋진 여성 캐릭터가 나와 봤자 ‘멋진 조연’일 뿐이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멋진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것으로 만화 안의 성 역할 구분 짓기가 해결될 수 없다. 특정 캐릭터 하나가 남녀의 성역할의 구도를 깼다고 한들, 팔아먹기 위해 만들어 낸 수많은 여성캐릭터들에 대한 면죄부 혹은 변명정도 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좋은 캐릭터가 많이 나오는 것도 좋지만 애니메이션, 만화가 여성의 인기를 위한 수단 혹은 보조물로 대하지 않는 시각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여성이 ‘남성들의 뒤에서 받쳐주는, 남성들이 보기에 좋은’ 캐릭터로 나오는 걸 좋아하는 독자들이 없어져야 하고, 현실에서 성별에 따른 위치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하니 참 어려운 일이로세..;ㅅ;

주류의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는 많이 읽히고 팔리기 위해 사람들에게 가장 전형적인 모습들, 혹은 현실보다 훨씬 현실적인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 중에 가장 부각되는 것이 성역할의 구분인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세계가 그렇다는 것을 과장되게 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이 현실의 복사판이라는 걸 알면 ‘이건 애니메이션이고, 현실이 아니니까 괜찮아’ 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질 것이다. 불편해진 사람들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간다면 언젠가 불편하지 않은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모에: 패티쉬와 비슷한 개념으로 어떤 캐릭터 자체가 아니라 어떤 캐릭터의 특징에 팬덤을 가지는 것. 대개는 아이템이나 성격, 그 사람의 신분, 직업 등이다. 안경모에, 소꿉친구모에와 같이 쓰인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남성 주인공이 등장, 그것이 플레이어가 된다. 주변에 ‘선택’ 할 수 있는 많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특정 캐릭터와 친밀도를 높이기 위한 선택지를 골라 행동하면서 마지막에는 원하는 여성 캐릭터와 맺어지게 되는 것이 목적이다.

*** 동인녀: 만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2차 제작물인 동인지를 만들어 내거나 읽는 여성을 지칭. 만화의 주인공들을 엮어서 BL(남성간의 사랑을 그림)로 만드는 종류의 2차 제작이 주를 이룬다. 다른 말로 야오녀 라고도 한다.

**** 초 포지티브 소녀: 절망선생이 모든 것을 부정적을 생각하는 반면, 이 소녀는 도저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것 조차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 사신과의 거래: 데스노트에 죽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적으면 죽일 수 있다. 단 본인의 얼굴을 알고 있어야 하고 본명을 풀네임으로 적어야 한다. 사신과 거래를 하게 되면 사신의 눈의 능력을 받을 수 있다. 이 능력이 있으면 사람 얼굴 위에 그 사람의 본명이 보이게 된다. 댓가는 남은 수명의 절반.


덧붙이는 글
둠코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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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10 호 [기사입력] 2010년 07월 07일 17: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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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06.28 10:58



격월간 사람에서 기본소득과 청소년 토론회에 쓴 원고를 수정하여 다시 싣고 싶다고 해서 수정한 거예용.





패륜적 기본소득

공현

  “기본소득”이란, 재산이나 소득, 노동 등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회구성원들 개개인에게 균등하게 정기적으로 소득을 지급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의 생계에 필요한 돈을 사회가 균등하게, 무조건적으로 보장하는 보편적 복지 제도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개개인의 계좌에 매달 정부가 30~50만원 정도의 생계비를 입금해준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기본소득은 특히 노동 중심의 사회에서 밀려나고 있거나 차별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욱 의미 있는 제도이다. 한국의 기본소득네트워크에서는 기본소득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밝히며 토론하기 위해 “기본소득과 장애인”, “기본소득과 여성”, “기본소득과 청소년” 등의 주제로 연속적으로 토론회를 열고 있다. 이 글은 6월 19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와 기본소득네트워크가 공동으로 준비해서 연 “기본소득과 청소년” 토론회에서 발제한 원고를 고쳐쓴 것이다.


가정에서의 청소년의 지위

  근대 사회에서 청소년, 아동과 깊은 관련이 있는 제도로 학교와 가정을 꼽을 수 있다.(하루 일과 중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한국은 ‘학원’도 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학교에서의 청소년인권 문제에 비해 가정에서의 청소년인권 문제는 잘 공론화되지 않는다. 이는 학교가 제도화된 공적 공간이며 집단적, 조직적 제도인 반면 가정은 사적 공간,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의 체벌과 가정에서의 체벌, 학교에서의 종교 강요와 가정에서의 종교 강요 등을 비교해보면 이런 차이는 쉽게 알 수 있다. 최근에 전교조 교사들이 정치활동을 이유로 대량 해직을 당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교사의 정치적 자유는 학생들의 미성숙을 이유로 문제가 되지만 아무도 부모나 다른 가족의 정치활동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법 제도부터 보자. 민법에는 친권의 효력으로 친권자가 청소년을 보호, 교양할 권리의무(913조), 청소년의 거주지를 지정할 권리(914조), 징계할 권리(915조), 재산 관리권(916조) 등을 명시하고 있다. 청소년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면 부모, 후견인 등의 친권자가 정하는 곳에서만 살아야 하고, 친권자의 가치관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 하며, 친권자에게 자의적으로 체벌이나 용돈 끊기, 외출금지 등의 징계를 당할 수 있으며, 재산권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에 개정이 되긴 했는데, 민법의 친법 관련 조항에는 “자식은 친권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라는 조항이 있었다.
  이는 단지 법 규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의 문제이다. 극단적인 예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성적이 잘 안 나온다는 이유로 친권자에게 체벌을 당하다가 죽음에 이른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다. ‘모태신앙’을 비롯해서 가정에서 종교나 정치적 견해를 강요하거나 강압하는 경우는 아주 많다. 개인적인 다이어리나 휴대전화 기록 등을 친권자가 함부로 보고 이를 근거로 청소년들을 통제하는 일, 위치추적 등은 ‘부모의 사랑과 걱정’으로 정당화된다. 어느 학교에 진학을 할 것인가, 어떤 진로를 택할 것인가, 학원을 갈 것인가 등의 문제도 거의 다 친권자의 뜻이 많이 반영된 결정을 하게 된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청소년활동가들은 대부분이 가정에서의 반대와 탄압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청소년 자신의 자발성이 없이 100% 전적으로 친권자의 뜻만을 관철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친권자 개개인의 성격이나 가치관에 따라 처우가 많이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청소년의 삶에 대해 친권자가 가지는 지배력은 상당히 강력하고, 그 지배력을 행사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선택은 대부분이 친권자들의 성향에 맡겨져 있다. 제도적․문화적 조건만으로 봤을 때는 청소년들은 ‘친권자의 소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회적 지위에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있어왔다. 아나키즘에서는 근대 사회가 “아동을 부모의 부속물로 바라볼 뿐, 아동 역시 자율적 존재로서 자신의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고 꼬집어 이야기한다. 꽤 유명한 아나키스트인 바쿠닌 또한 “아동은 그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아동은 부모의 소유물도 아니며, 심지어 사회에 소속된 사회적 소유물도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아나키즘과 청소년 해방」. 마크 시버스타인 Marc Siverstein 지음.) 페미니즘 쪽에서도 남성 가부장과 여성 사이의 권력관계에 더해서 아동에 대한 권력관계를 다루는 논의들이 있으며, 우에노 치즈코 또한 세대간의 지배 종료를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 과제 중 하나로 제안했던 적이 있다.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이러한 청소년들의 가정 안에서의 지위는 많은 부분 경제적인 종속성에서 비롯된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것이다. “말 안 들어? 그럼 용돈 없어!”, “내 말 듣기 싫으면 나가. 여기가 니 집이냐? 니가 입는 옷 먹는 거 다 누구 돈으로 산 건데?” 용돈 뿐 아니라 의식주 전체를 친권자에게 의지해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친권자가 사용할 수 있는 압박의 수단이란 무궁무진하다. “내가 너 키우느라 들인 돈이 얼만데” 등 한국 특유의 높은 보육․교육비 때문에 (좀 넓게 잡은) 중산층 이상의 친권자들이 가지는 투자의식과 주도권 등도 크게 작용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의 도입은 가정 안에서 청소년들의 지위를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우선 기본소득은 가족 단위가 아니라 개개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청소년 또한 가정의 경제력의 일부를 담당함으로써 어느 정도 협상력과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기본소득의 액수와 사회적 조건에 따라 구체적인 양상에서는 차이가 있겠으나, 일단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친권자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보다 독립적이고 덜 의존적인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청소년을 투자의 대상으로 보고 미래에 자신들에게 더 많은 부와 명예를 돌려주기를 바라는 친권자들에게는 투자의 부담이 줄어드는 동시에 자신들의 노인 생활이 어느 정도 보장됨에 따라 청소년을 채찍질해서 사회 상층에 쑤셔 넣을 동기가 어느 정도 줄어들게 된다.
  친권자들도 똑같이 기본소득을 받게 되니까 가정 안에서 경제력의 부담 정도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라, 돈이란 같은 액수더라도 어느 정도 있는 자들보다는 없는 자들에게 더 효용이 큰 법이다. 가정 안에서 가지는 경제력의 비율이 0에서 10이 되는 것은 발언권이나 협상력의 측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또한 기본소득 모델에서는 소득이 많은 친권자들은 세금으로 그만큼 더 많은 돈을 내게 되기 때문에 기본소득은 좀 잘 사는 가정 안에서는 경제력의 분배 효과를 가지게 된다.

  여차하면 가출할 수 있다는 것도 청소년들의 가정 안에서의 지위에 틀림없이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양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출은 자신이 원하는 주거를 요구하는 일종의 투쟁이나 보이콧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가출을 해도 주거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제대로 살 수 없다는 점에서 가출의 리스크가 컸다. 이 리스크는 가출 후에 어디서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하는 막막함과 정해진 레일에서 삐끗하기라도 하면 낙오자가 된다는 두려움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본소득의 도입은 가출의 리스크를 어느 정도 해결해준다. 우선 일차적으로는 최저생계 수준의 소득이 보장되니 가출 후에도 청소년들이 독립적 생활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나아가서 기본소득의 도입은 노동시장에 변화를 일으키고 지금처럼 취업을 위해 죽어라 스펙을 쌓아야 하고 낙오되지 않기 위해 바둥거려야 하는 상황을 개선하게 될 것이며, 가정과 학교의 틀에서 벗어나며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가 훨씬 작아지게 만들어준다. 여차하면 파업이든 태업이든 할 수 있는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듯이, 기본소득은 가출 등 가족의 틀을 벗어난 청소년들에 대한 일종의 사회안전망이 되면서 청소년들의 지위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
  더 적극적으로는 청소년들의 독립 시기가 빨라지는 것도 기대해볼 수 있다. 지금 주로 청소년들, 그러니까 0~19, 20세 정도까지의 ‘미성년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친권자의 경제적 지배력이라는 점은 한국 사회에서는 20대 초중반의 사람들 다수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생계에 필요한 소득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면, 계속 돈을 모아서 주거를 마련하고 친구들과 공동으로 생활하는 방식으로 독립을 시도할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대학 진학의 보편화에 청년실업이니 어쩌니 하면서 점점 늦어지고 있는 독립이 앞당겨진다는 것은 10대, 20대 전반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뜻한다.
  요컨대 기본소득은 더 이상 기존의 부모-자식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내고,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가족 해체’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청소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친권자 말 잘 듣고 나중에는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여 효도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담이 크게 덜어지게 된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게 의존적으로 살던 관계가 좀 더 독립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데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는 가정 안팎에서의 투쟁을 통해서 지금까지 잘 드러나지 않았던 가정에서의 권력관계들을 공론화하면서 변화시키는 청소년들의 실천이 필요할 것이다. 기존의 사회적 윤리를 파괴한다는 점에서는 실로 ‘패륜적’이다.


문화적 어려움들

  물론 이렇게 단순하게 낙관할 수만은 없다. 청소년들의 가정에서의 지위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 외에도 문화적인 문제나 여러 제도적인 문제들에 얽혀 있다. 민법이나 노동법 같은 데부터 넓게 본다면 교육제도나 선거연령, 사회적 인식 등까지도 모두 청소년들의 독립적인 삶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경제적 토대가 달라지면 상층 구조는 다소 오차가 있더라도 변화하게 되어 있다는 식으로 낙관하는 것은 좀 무책임하다. 기본소득 도입 자체에서부터 사회적 인식과 문화적 요인들이 걸림돌이 될 가능성도 높다. 청소년들이 세뱃돈 압수당하듯이 기본소득을 받자마자 친권자들에게 압수당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더 극단적으로 생각해보면, 몇몇 장애인 시설들이 보조금 더 타내려고 장애인들을 데려와서 보조금을 갈취하듯이, 아이 1명을 더 낳으면 그만큼 기본소득을 더 번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낳거나 입양하는 친권자들도 나타날 수 있다. 아니면 학생간 폭력에서 ‘삥’을 뜯는 규모가 커지고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유괴 등의 범죄가 증가하는 일도 상상해볼 수 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본소득 도입 초기에는 청소년들의 경제적 판단능력 등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분명히 청소년들은 (사실은 20, 30대들도 좀 해당) 경제적 주체가 되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상상력을 안 좋은 쪽으로 발휘한다면 기업의 마케팅 전략이나 명품 소비 문화 등에 소득을 다 쓸 수도 있다. 지금도 빈곤층 가정의 청소년에서부터 이런 명품 소비, 신제품 소비 등의 모습들이 보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기본소득이 청소년들의 독립에 기여하기보다는 명품이나 10대 마케팅에 주력하는 기업들의 배를 불리는 데 쓰인다면, 친권자에게 손을 벌려서 그런 소비를 하는 것보다는 낫겠으나, 최선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는 청소년들에게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문화적 변화에 더해 어떻게 경제적 주체로서 소비하는 것에 대해 사회구성원들을 교육할지, 이러한 소비 문화의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계획해야 할 문제이다.


가능성으로서의 기본소득

  기본소득은 액수상으로는 모두에게 같은 돈을 지급하는 것이지만, 모두에게 같은 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다. 더 빈곤하고 더 종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효용이 있는 돈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가정/가족 단위로만 묶여서 생각되어왔고 독립된 경제적 능력을 인정받거나 보장받은 적이 없는 청소년들은 기본소득 도입의 이해당사자 중에 중요한 한 축이 될 수 있다.
  기본소득은 전가의 보도가 아니며, 그 자체로 청소년들을 해방시킨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기본소득의 도입이 청소년들이 친권자로부터 좀 더 자유롭고 독립적인, 지금의 사회적 시선으로 본다면 ‘패륜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 중 하나일 수는 있다. 또한 기본소득의 도입은 사회 전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고 청소년들의 삶이나 교육에도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물론 기본소득이 도입되는 과정 자체, 그리고 기본소득에서 청소년들(0세~19세 정도)이 배제되지 않게 하는 것 자체가 난이도 높은 운동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기본소득 도입 이후에도 청소년들의 경제적 사회적 독립과 인권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역시 청소년들의 주체적인 투쟁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 운동과 제도는 최소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 전까지는 이야기하기도 힘들었던 그런 새로운 사회로 가는 가능성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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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04.12 16:26

[널 붙잡을 논평 1]

 

 

아동청소년 대상 성폭력‘만’ 비친고죄?

국회의원들과 여성가족부의 꼼수를 비판한다!

 

 

지난 3월 31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일부 개정법률안>과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여성가족부는 시급히 발표한 보도 자료에서 "아동청소년 대상 성폭력 범죄 사전예방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대폭 강화되고, 보다 내실 있는 성폭력 피해자 지원이 가능하게 되었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글쎄. 내놓은 대책을 봐도, 그 아래 깔려있는 철학을 살펴도 실질적인 성폭력 예방 및 피해자 지원은 요원해 보인다.

개정된 법률안은 아동청소년 대상 성폭력 범죄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고소 없이도 공소를 제기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실상 친고죄 적용을 폐지하고, 피해 아동청소년이 성년에 이르기까지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음주 또는 약물로 인한 심신장애 상태에서의 감경규정도 배제된다.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 폐지는 여성단체들이 누누이 외쳐왔던 이야기다. 피해 여성들에게 필요한 건 '말하지 않을 자유'가 아니라 '말할 수 없게끔 만드는 조건'의 변화다. 성폭력이 남성의 참을 수 없는 성욕의 결과라는 얼토당토않은 편견, 결국 성범죄의 원인 제공은 피해 여성이 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은 성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 경험을 숨기고, 신고조차 포기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왜곡된 인식을 고스란히 반영한 형법의 친고죄 조항은 뜯어고쳐야 마땅하다.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에만 예외적이고 특별한 '혜택'을 줄 필요는 없다는 거다. 이러한 정책 방향은 성인 피해여성의 입지를 좁히고 고립시키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무력한' 아동청소년은 특별히 보호받아야하지만, '부도덕한' 성인 여성은 스스로 비난을 감수해야한다는 것인가? 아직도 갈 길이 멀고도 멀었다.


아동청소년의 성에 대한 이러한 특별한 '보호'는 아동청소년은 사리판단 능력이 부족하고 신체적으로도 더 취약하다는 전제 속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보호주의의 결과 아동청소년이 일방적인 보호의 대상만으로 인식된다면, 성에 대해 무지한채로 남게 된다면, 그것이 과연 아동청소년에 대한 범죄나 폭력, 차별을 줄이는데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번에 법률이 개정되기 전에도 만 13세 미만 아동 피해자의 경우 이미 비친고죄 적용을 받아왔다. 그러나 경찰수사 과정에서 피해자를 의심하고, 합의를 강조하고, 신고한 사람을 힐난하는 문화는 마찬가지였다. 친족 성폭력 사건의 경우 가족 안에서 쉬쉬하며 조용히 묻어두는 경우도 허다하다. 비친고죄로 전환한다고 해서, 어른들이 대리할 수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사라질 문제는 아니라는 거다. 아동청소년 스스로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명명하고 인식할 언어와 지식을 갖출 수 있도록, 주체적으로 사건 해결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이 절실히 필요하다. 피해자가 학생인 경우 주소지 외의 지역에서 취학할 수 있도록 돕는 지원책(성폭력 특별법 7조)을 만들기 이전에, 왜 피해 여성이 살던 지역을 떠나 이사하게 되거나 학교를 옮기게 되는지 그 맥락을 읽어내고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라는 말이다.

백 번 양보해 친고죄 폐지만큼은 칭찬해 주려고 해도 예외 조항이 눈에 밟힌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공공밀집장소에서의 추행', '통신매체 이용 음란'은 예외에 해당한다. 강간과 추행은 그 경계가 사실상 모호하고, 성폭력 근절을 위해서는 일상의 문화를 바꾸는 것이 중요함을 그렇게 말해왔건만 여전히도 성폭력을 '성기를 삽입 했냐/안했냐'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니 한심하다. 더불어 이번 개정안과 함께 성폭력 가해자 전자발찌 소급 적용 등 반인권적 법안도 동시에 처리되었다고 한다. 형량을 강화하고, 전자발찌를 채우고, 가해자의 신상정보 등록기간을 연장하는 것이 성범죄를 줄이고 피해 여성들을 위로하는 전략인양 내세우고 있다. 성폭력 사건의 80% 이상이 가까운, 아는 사람에 의해 시도된다는 점, 처벌을 '무겁게' 하는 것보다 '확실하게' 하는 것이 범죄율을 낮추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는 더하다가는 입이 닳을 것 같다.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무엇이 문제인지부터 제대로 파악하길 촉구한다. 아동청소년은 특별히 순수한 존재도, 특별히 아름다워야 할 존재도 아니다. 단지 이 문제적인 사회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폭력으로부터 더욱 취약한 이유는 무엇인지, 성폭력 범죄 자체를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바란다. 아동청소년이 스스로를 지킬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머리를 쓰기 바란다. 아동청소년이 성폭력 피해를 입더라도 스스로 그것을 이야기하며 극복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떤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해야 할지 연구하기 바란다. 이 모든 것 이전에 좀 더 배우려는 자세를 갖고 피해 여성, 그리고 피해 여성을 지원해 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길 바란다.

 

2010. 4. 12.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팀원들의 한줄 평! 평! 평!

 

공현: 아동 성폭력'만' 비친고죄? 얼마나 생각 없는 건지. 무상급식이 아니라 이런 게 진짜 잘못된 포퓰리즘이지~ ㅉㅉ

난다: 얘기 좀 제대로 들으시긔! 처벌만 하면 다임? 아동청소년만 '특별히 보호'만 해주면 다임?-_- 제대로 된 성폭력 예방 위한 '대책' 좀 내놓으시라는 말씀.

공기: 성폭력은 그 어떠한 이유에서도 가해자 탓이다 감히 어디서 애매모호한 기준을 들이대는것이야

한낱: 뭐 찔리는 것들 많은가보오? 성폭력 가해자 엄중처벌! 외치는 모습들 보면,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 같소이다. 국K-1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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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03.06 11:05

 3.8 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여성의 임신․출산 및 몸에 대한 결정권 선언”
 
여 성들은 오랫동안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왜곡된 성문화와 가부장제에 문제제기하고, 몸에 대한 자율성이 바로 여성들의 권리임을 알려왔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사회에 만연한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와 억압은 오늘 이 자리에 우리를 다시 모이게 했다.

최 근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낙태시술을 하는 병원 세 곳을 고발조치했다. 정부는 직접 나서서 낙태신고센터를 운영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낙태를 결정하는 여성들의 절박함과 위급함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여성을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 및 재생산권의 주체로 존중하지 않고 여성의 몸과 자율권을 통제하려는 반인권적인 발상이다.
 
여성의 몸을 국가발전과 유지를 위한 출산의 도구로 여기는 국가의 인구정책에 따라 여성의 출산에 대한 선택권은 존중받지 못했다. 불평등한 이성애 관계 속에서 피임에 대한 결정권을 갖지 못한 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원치않는 임신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아이를 낳아 기르기 어려운 열악한 사회경제적 여건 때문에, 결혼제도 밖의 임신을 비난받아야 할 행동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스스로 언제 누구의 아이를 몇이나 출산할 것인지를 전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임신과 낙태, 그리고 출산에 대한 결정권은 여성에게 있다. 이는 여성의 몸과 삶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고발조치 이후, 여성의 임신․출산을 비롯한 몸에 대한 결정권과 건강권에 대한 침해는 심각해지고 있다. 낙태시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기 어려워졌고, 시술 비용은 이미 훌쩍 뛰었다. 외국에서의 낙태시술을 고려하는 여성들도 생기고 있다. 심지어는 법적으로 보장된 강간피해로 인한 낙태도 시술을 거부당하고 있다. 단속이 강화되면 낙태시술이 음성화되고 비용이 높아져 결국 여성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심각한 침해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모든 억압을 단호히 거부하며, 임신과 출산을 비롯한 몸에 대한 결정권이 그 누구도 아닌 여성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한다.

- 낙태시술 단속 강화는 여성을 궁지로 몰아넣을 뿐이다. 프로라이프 의사회와 정부는 여성 인권 침해하는 낙태고발과 단속을 즉각 중단하라!

- 여성의 몸은 국가발전을 위한 출산의 도구가 아니다. 정부는 여성의 임신․출산 및 몸에 대한 결정권을 보장하라!

-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산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사회경제적 사유의 낙태를 허용하라!
 
- 모든 여성에게 혼인상태, 연령, 계급, 성정체성과 상관없이 피임, 임신, 출산, 낙태를 비롯한 몸에 대한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이 자리에 모인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여성의 몸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몸과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자율적으로 결정하기위한 움직임을 시작한다!


2010 3.5
여성의 임신․출산 및 몸에 대한 결정권 선언 참가자 일동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다함께 여성위원회, 문화미래 이프,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성소수자위원회, 반성매매인권행동이룸, 붉은몫소리, (사)여성문화이론연구소,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준비모임, 사회진보연대, 성노동자권리모임지지(GG), 언니네트워크,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 인권운동사랑방, 장애여성공감,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NGA), 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여성위원회,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여성인권위원회,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향린교회 여성인권소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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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02.28 00:04



쉽게 포지션을 정리하면, 저는 낙태금지에 반대하는 쪽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낙태를 찬성하는 것은 또 아닙니다만.

"낙태금지를 반대한다"라고 말하는 게 왜 이렇게 쉽게 "그럼 넌 낙태 찬성. 넌 생명 경시 ㅇㅇ"가 되는지는 참 알 수가 없는 미스테리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학교폭력은 가해자들을 징역 살게 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순 없다"라고 말하는 게 "학교폭력을 지지한다, 찬성한다"인가요??

"게임중독을 막겠다며 청소년들에게만 밤10시 이후 게임을 금지하겠다는 것을 반대한다. 다른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게

"난 게임중독을 찬성한다"가 되나요?;


사실 낙태금지에 반대하는 여성단체, 여성주의자들, 여성들 등등도 낙태를 하는 건 좋은 거야 라거나 낙태를 막 해도 되지,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낙태 금지에 반대하는 이유 중 중요한 것 하나가 여성의 몸의 문제인데, 여성 몸에 좋을 것 별로 없는 낙태를 좋아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낙태금지에 반대한다"가 곧 "낙태를 찬성한다"는 아니죠.


그런 의미에서, 간혹 몇몇 좌파 운동단위에서 보이는 낙태에 대한 강한 옹호와 낙태는 당연한 여성의 권리이고 해방이라는 식의 언설은, 뭐 낙태를 윤리적으로 비난하고 금지해야 한다는 공세에 대응하려는 그 맥락을 이해하고 대충 동의하기는 하지만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는 않는 면도 있습니다.



낙태-임신중절이 금지되는 게 왜 문제인지는 충분히 많이 다른 글들에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 낙태 금지는 낙태를 음성화시키고 고액화시키고 안전하지 않은 낙태를 늘릴 뿐이라거나, 사회적 문제인 출산과 낙태를 여성 개인의 윤리적 문제로 만들어버린다거나 등등...

참고 : (경향신문 기사) (일다 기사) (여성단체 성명) (이채공간 블로그 글)



낙태-임신중절은 누구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것이 선택지 중 하나로 떠오르게 되는 사회적 조건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것을 임신한 여성에게 책임을 묻고 부담을 지우는 식으로만 해결하려는 참으로 '손쉬운' 방식이 낙태금지입니다.

이 문제를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결정권 이런 식의 권리의 충돌로 놓는 건 부당하고 너무 단편적인 생각입니다. 이 두 권리가 충돌하게 되는 원인은 일정한 사회적 조건 때문으로, 이 사회적 조건이 개선되면 두 권리를 모두 보장하는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낙태를 금지하고 싶다면 최소한 사회적 양육 시스템을 엄청 잘 갖춰놓고, 여성이 임신-출산으로 인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별로 없게 만들어 놓고 나서 낙태금지 어쩌구 이야기를 꺼내는 게 양심적인 자세 아닐까요?


성교를 할 때 아무리 피임에 신경을 쓰더라도, 불임수술을 받지 않는 이상은 - 임신이 되었을까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게 보통입니다. 100% 안전하면서 건강에도 문제가 없는 피임법 같은 게 없기 때문입니다. 성관계를 가져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런 경험이 있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라이피인지 뭐시깽이인지를 도저히 고운 눈으로 볼 수가 없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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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02.13 15:04

[페미니즘인(in)걸?] 왜 소수자들은, 여성/청소년들은, 오지랖이 넓은가

‘그래도...’의 반복

난다


학교를 그만두기 전, 학교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 늘 어느 순간 벽 같은 것에 부딪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신나게 학교 욕, 선생 욕을 하다가도 누군가는 꼭 “너무 우리들 생각만 하지 말고, 선생님 생각도 좀 하자.”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이를테면 체벌에 대해 수다를 떨 때,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때리냐? 진짜 그 선생 너무 심하게 때리는 것 같아.”라고 얘기하면, “에이, 그 선생님이 좀 심하게 때리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체벌은 허용되고 그래야, 우리도 스스로를 통제하고 학교도 잘 굴러갈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리고 친구들의 끄덕거림이 따라온다. 늘 답답했었다. 왜 이 친구들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들에 대해 그냥 그대로 수긍하는 거지?

비슷한 경험은 학교를 그만 두고서 인권활동이라는 걸 하면서도 자주 접했던 것 같다. 인권교육을 가서 학생들의 권리나 인권에 대해 얘기하면 청소년들은 ‘아무리 그래도’ 하면서 ‘선생님들’ 걱정을 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회사 뒷담화를 까다가 내가 발끈하자, ‘그래도’하면서 ‘사장님’을 옹호한다. ‘사장님’도 나름의 고충과 어려움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내가 보기엔 아빠가 훨씬 힘들어 보이는데.


구조적 무감각과 ‘착하게’ 길들여지기

사람들은 쉽게 이 사회의 기준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주류적인 기준을 흔드는 것들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 곧잘 ‘인권’을 이야기하고, ‘차별’을 이야기하고,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어떤 ‘선’을 넘어가지 않으려 한다. 그 ‘선’을 넘어가는 것은 기존 사회의 질서를 흔들고 침범하는 것이라 여긴다.

처음부터 그랬을 것 같진 않다. 청소년들이 “아직 어린 것들이”라는 말에 맞춰 “그래, 우린 아직 어리니까 좀 더 통제 받아야 해.”라고 생각하거나, 여성들이 이 사회 ‘미’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더욱 꾸며내고 혹독한 다이어트를 감행한다거나, 혹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남성들을 먼저 이해하고 배려하는 방식으로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같은 사회적 약자로 닮은꼴인 청소년과 여성, 그리고 약자들은 웃기게도 강자를 먼저 걱정한다. 그러한 여성성과 약자성(먼저 배려하고 먼저 이해하고)은 약자가 강자에게 훨씬 더 많이 잘 발휘되고 있다. 이는 성인/교사/남성-강자 중심 사회에서 그들 중심의 질서가 학생/여성 속에도 깊이 뿌리를 내려, 자신들을 둘러싼 억압마저 그들의 시선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예전부터 ‘남성/비청소년의 이야기’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살며 쌓아온 경험들이 우리들 마음 곳곳에 눌러 붙어 ‘내면화’되었기 때문이다.


생존하기 위해 강자 입장 내면화하기

소수자/약자들이, 권력 있는 자/강자들을 위하도록. 그래서 이 사회가 뒤틀리지 않고, 뒤집어지지 않게 고정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사회는 우리들을 오랫동안 ‘착하게’ 길들여왔다.

그렇게 길들여진 ‘착한’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고 산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착하고 착실했다. ‘야간자율학습’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고, 성적도 그럭저럭 유지했다. 학교의 온갖 규제가 고통스러워도, 선생님들이 우리를 때려도, 나는 그 순간순간을 흘려보냈다. 그런 것들을 그만두라고 말하고도 싶었지만, 그 순간에는 착실하게 참아냈다. 그 순간만 넘기면 되니까. 또는 그 순간에 내 목소리를 내기라도 하면, 눈앞에 징계나 탄압이 떨어질 테니까.

하지만 그런 시간을 보낼수록 선생님들이 우리를 때릴 때마다 그걸 계속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게 괴로웠다. 나는 왜 아무 말도 못하는 거지? 나는 왜 이렇게 힘이 없지? 이런 고민을 하다가, 그냥 거기에 그럴 만한 의미를 부여해버렸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어, 라고. 선생님도 그만한 이유-학생들을 대학에 많이 보내야 할-가 있어서일 테고, 그건 선생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라고.

먹고 사는 것, 여성들의 경우에는 사회적 인식도 그렇고, 학생들은 학교에서의 눈앞에 보이는 탄압이나 징계에 대한 문제 때문에 쉽게 바꿔내야겠다는 생각을 더 못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나의 생존을 위해서 이 체제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편입되는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강자의 입장을 이해해야 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정당화 시켜야 했다. 나한테 고통을 준 사람도 어느 정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고, 이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면 나는 덜 불편할 수 있으니. 그리고 그럴 때에야 나는 이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으니. 그래서 나도 그러한 나 자신과 학교와 체벌하는 교사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창시절을 추억할 때처럼. 대학에 가고 나서, 자유시간이 많아지니, “아 그래도 고딩 땐 할 게 있었는데~”하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수능 보기 전에는 수능공부=쓸모 있는 짓/나머지 전부=휴식이라는 ‘공식’이 있었는데, 수능이 끝나고 이게 허물어지고 나니, 참 허무하더라는 것처럼.

너무 힘든 시절이었지만, 그렇게 힘든 시간만 있었다고 생각하기엔 내가 너무 비참하니까. 그래서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일들을 더 크게 기억하고 추억하면서 그 때는 그래도 좋았지, 그래서 좋았지,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반복되고 반복되어 이 체제를 구성한다.


그래서, 그러니까

이 단단한 구조를 직시하는 것은 여성으로, 청소년으로,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 나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우리를 더욱 ‘착한 아이’로 길들이는 국가의 통제가 점점 더 검은 그림자를 펼쳐오는 이 때, ‘착한 아이’가 아니면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쫓아내버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 때, ‘국가’를 위해서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멈춰야 한다고, ‘모두가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 때. 우리 이제 더 이상 착해지지 않아도 되었으면 좋겠다. 이 커다랗고 단단한 기준을 뒤집을 만한 발칙함과 깐깐함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난다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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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190 호 [기사입력] 2010년 02월 09일 23: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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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0.02.13 14:06


  수호자들을 가리키는 '여신의 신랑'이라는 칭호는, 혼인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나가의 사회를 놓고 볼 때 매우 기이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나가의 여인은 한 명의 남자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동물과 다름없는 재생산 방식을 선택하고 있는 나가의 사회에서, 이 '신랑'이라는 혼인 제도를 연상케 하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 물론 그 의미는 우리의 혼인 제도와 같다. 여신의 신랑이라는 칭호는 그들 수호자들이 다른 여인이 아닌 단 한 명의 여인인 발자국 없는 여신에게만 충실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렇다면 나가 사회에서 이들 수호자 집단은 동물적인 동료들에 비해 고등한 자들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리의 혼인 제도가 나가들의 난혼보다 고등한 방식이라 믿는 것은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자기중심적인 태도다. 때론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곤 하는 논리적 탐구는 아쉽게도 우리의 혼인 제도가 나가의 난혼보다 별로 우월할 것이 없음을 증명해준다.
  사람들은 동물보다 훨씬 성장이 느리다. 따라서 사람의 여자들은 성장이 빠른 동물들의 암컷에 비해 육아에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 이것이 여자와 미숙한 자손 양자에게 위험한 투자임은 자명하다. 혼인 제도는 수컷에게 이 위험을 분담하게 하는 제도다. 즉 먹이를 구해 오고 적대적 환경에 맞서 투쟁하는 등의 역할을 남자가 담당함으로써 보다 안전한 재생산을 꾀하려는 제도가 우리의 혼인 제도다. 이것은 이를 테면 어미와 새끼라는 기본적인 가족 구조에 수컷이 편입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가들의 경우는 수컷이 담당할 역할을 사회적 체계가 대신하고 있다. 심장 적출법에 의해 나가 여자들은 자손을 충분히 보호할 만큼 강력해졌으며 그들의 땅 한계선 이남에서 나가에게 불리한 거의 모든 요소를 일소했다. 그 시점에서 나가 남자들은 자신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 이상 가족의 기본 구조인 암컷 어미와 새끼의 관계에 수컷이 끼어들 자리가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역할이 감소되면 권력도 감소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나가의 사회는 여성이 지배한다. 나는 '여신의 신랑'이라는 호칭에는 암컷 어미와 새끼의 관계에서 추방되자 더 크고 더 위대한 것에 편입되고자 몸부림치는 나가 남자들의 슬픈 소속 욕구가 반영되어 있지 않나 추측한다.
  그러니 이 때려죽이고 싶도록 사랑스러운 손자 녀석아. 네게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그 '남성미'를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면, 우리 사회가 아직 남자들에게 '남성미에 대한 찬사와 존경'이라는 웃기는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남자들에게 수컷 역할을 맡겨야 할 만큼 원시적이라는 사실에 고마워하도록 해라!

- 독설가로 유명했던 우슬라 사르마크 부인이 혈기방장한 손자에게 들려준 애정 어린 충고 中


(이영도. 2003. 『눈물을 마시는 새 2』.  pp.152-154. 황금가지 출판사)





그냥 어느 모 카페인지 하는 데서, 여성 우월주의자였나 여성상위주의자였나로 찍힌 기념으로 발췌해두는 인용문.


(이영도가 나가 사회를 구상하면서 이갈리아의 딸들 같은 텍스트들을 참조한 것은 분명해보인다.
그리고 우슬라 사르마크라는 이름 자체도, 팬카페 등에 보면 어슐러 르귄에서 따온 것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건 여성 상위일지도 몰라 ㅋㅋㅋ

좀 더 세부적으로 이야기하면, 나가 사회는 사회 구성원을 보호하는 기능을 심장 적출법과 키보렌 등 주변 환경 덕에 개개인이 그다지 부담하지 않는 반면에, 아동을 양육하는 기능은 '가문'에서 여성들이 맡고 있다. 즉 양육, 육아 기능까지도 사회가 상당 부분 부담하게 되면 나가 사회는 여성 상위가 아닌 구조로 변화해갈 수도 있다.

부모(친권자)의 아동에 대한 권력의 문제를 개선할 방안을 고민하기 위해서도, "역할이 감소되면 권력도 감소되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문장은 참조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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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02.01 01:44




* 강기갑 씨의 남보원 역패러디에 바치는 조공...이려나;







남성인권보장위원회(이하 남보원)는 약간은 복합적인 선들 위에서 평이 이루어져야 할 프로그램이 아닐까 싶습니다. 프로그램이 다루는 내용상의 변화도 그렇고, 그밖에 부분들도 그렇고 말이죠.


처음 남보원이 방영되었고 그 첫 화가 떠돌 무렵. 제 주변에서는 루저인 남성들의 찌질한 애환들을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남성들을 희화화시키는 느낌이다. 반여성적이라는 지적은 약간은 오버다, 라는 이야기가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저도 첫 화를 본 소감으로는 대체로 동의했었구요.
남보원의 초기 컨셉은 "지금은 여성상위"라며 볼멘소리를 하는 남성들이 말하는 그 불평불만들이 얼마나 별 거 아니고 또 어떻게 보면 우스워보이는지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팝콘에 버터 추가하지 말라고 하며 징징대고, 팝콘을 사라면서 북을 치며 구호를 외치고 '투쟁'하고, 그렇게 징징대다가도 요술봉 하나에 웃음을 되찾는 남성들. 그건 차라리 여성들을 비난하고 역차별(이 뭔 뜻인지 제대로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지만)을 소리높여 외치는 남성들에 대한 자아비판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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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후반부로 오면서, 이러한 태도는 점점 변화합니다.
남성들에게 불만을 느끼게 하는 여성들의 행동을 비판하는 것 같은 위치와,
여성들에게 불만 가지는 남성들의 찌질함을 폭로하는 것 같은 위치
이 둘 사이의 균형에서 남보원은 점점 전자로 기울어갑니다. (이러한 기울어감 자체가 남성 우월 사회의 결과물 아닐까요?)

남보원은 점점 남성중심적이고 여성에 대해 적대적인 소재들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남보원은 매우 적나라하게 성별 권력관계를 드러내는 한편 정당화시킵니다. 예컨대 그동안 사준 밥이 얼마냐, 외박 한 번 해라. 라고 외치는 남보원은 결국 여-남의 연애관계가 여성의 성과 남성의 경제력을 맞교환하는 관계임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긍정하고 또 그것을 남성들의 정당한 요구, 심지어 '인권'이란 이름을 붙여서 외칩니다. 세상에. 도대체 왜 그게 인권인지 모르겠군요.

남성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경제력을 희생당하는 것 같은 측면이 있다면 평등한 경제적 부담을 질 것을 요구하는 게 맞겠지요. 그것은 어쩌면 '평등'이라는, 인권과 가까운 가치로 이야기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여성들이 소득이 일반적으로 더 낮은 현실에 대한 논의를 포함해야지요. (사실 여성들이 경제적 부담을 덜 하는 것이 불만인 남성 분들은 여성운동에 뛰어들어서 여성들의 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함께 투쟁하셔야 합니다.)

개그 프로라서 그런 사회구조적 이야기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남보원은 "영화표는 내가 샀다. 팝콘은 니가 사라" 선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산 밥이 얼마냐 외박 한 번 해라"를 외칠 때, 그리고 이와 유사한 사례들에서, 이미 남보원은 남성우월적 사회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맡고 서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여성에 적대적'이라거나 성불평등에 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만한 위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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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남보원 자체가 타겟으로 삼고 있는 '여성들'의 상은 매우 계층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된장녀'로 표현되는, 고소득 전문직이면서 남성들을 부당하게 갈취(?)하는 여성들을 여성 일반을 대표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남보원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여성들과 관계맺음을 하는 남성들은 또 누구일까 하는 고려까지 해야 남보원에 공감한다고 하는 남성들이 누구인지 윤곽이 잡힐 것입니다. (하재근 씨 글 )
제가 이 부분에 대해 엄밀한 분석이 가능한 위치는 아니지만, 대체로 어느 정도의 중산층 이상, 고학력자(대학생이 고학력자라면.), 전문직 정도의 말들이 연상되는군요.
단적으로 말해서, 저도 남성이지만 저는 남보원을 몇 번 보면서 공감한 적이 올림픽 레슬링복 이야기밖에 없어요. 제가 굳이 여성주의적이려고 노력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경험 자체를 한 적이 없는 게 대부분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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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남보원을 보면서 드는 또 다른 불편함은, '투쟁'을 지나치게 격하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투쟁이나 인권이 반드시 엄숙한 것이어야 하고 존경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희화화될 수도 있고 웃음이나 농담이라는 방식으로 비판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목숨을 걸고 해고는 살인이라고 외치며 투쟁에 나서고, 비인격적 모독과 대우에 맞서 투쟁에 나서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보고 웃으면서도 가슴 한켠이 싸늘하게 가라앉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투쟁을 우스운 놀이로 보이도록 만들어온, 진정성 없는 투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온, 형식적인 운동만을 일삼아온, 일부 활동가들, 명망가들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남보원은 또한 '인권'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기반하고 있으면서 그런 인식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문제도 있습니다.
인권은 극히 사회적인 문제이며 소중한 가치입니다. 사회적 권력관계의 문제를 담고 있으면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기본적인 욕망들이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할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인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권이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방식으로 이해되면서, 그리고 강자들의 권익이 형식적 평등의 논리 속에 '인권'이라고 이야기되면서, 인권이 뭔지 제대로 공부해본 적도 없고 느껴볼 기회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다수인 이 사회에서 인권이 이상한 형태로 전용되면서... 사람들은 인권을 비웃고 짓밟습니다.
지금의 남성"인권"보장위원회가 그런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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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여성인권보장위원회를 만든다면,
아마도 남보원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암울하고 차별적이고 억울한 이야기들을 많이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여성단체들은 많이 만들어지고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인터넷에서 키배 뜨는 이상의 활동을 하는 '남성단체;란 건 안 만들어지는 이유일지도 모르겠군요.



추신 : 저는 남성들이 나서서 남성들의 인권을 보장하라고 하며 군대/징병제를 폐지하자고 하면 적극 찬성하겠습니다. 한 마디 덧붙여서요. "군대/징병제를 폐지하는 건 남성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인 동시에, 군대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평등권까지 옹호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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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9.12.22 18:52



크리스마스는 과연 얼마나 행복한 날일까요?

모두들 크리스마스를 즐거운 축제, 따뜻한 날, 사랑의 날로 기억하고 싶어하지만,

크리스마스에도 현실은 참 @$!%%%합니다.  ㅠ_ㅠ




『가난뱅이의 역습』을 봐도, 크리스마스의 상업주의를 비판하면서 크리스마스 분쇄집회를 하는 에피소드가 소개되죠 ㅋㅋ

아직 그렇게 거창한 '크리스마스 분쇄 집회' 수준은 아니지만

여기에도 크리스마스에 문제제기하는 행사가 하나 있습니다.

행사라기도 좀 그런가요? 그냥 작은 캠페인 규모의 행동입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안티크리스마스' 행사네요/

(원래 용산 참사 현장, 명동성당이나 남일당 등에서 하려고 했다고 하는데, 그쪽 자체 행사가 잡혀 있어서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1주년이 다가오는 용산 참사도 어서 잘 해결되어야 할 텐데, 참 마음이 싱숭생숭한 연말입니다...)



 



안티크리스마스 액숀 시즌2!

<깜깜한 크리스마스>가 떴다!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의 야심찬 프로젝트! ‘안티크리스마스 액션’은 크리스마스에 쉽게 볼 수 있었던 익숙한 풍경들에 태클을 걸고, 물음표를 던지는 행동입니다. 작년 12월 24일, 안티크리스마스 게릴라 액션에 이어 2009년 12월 24일, 다시 한 번 더 액션단이 출몰합니다.
이거이거, 이 세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우리의 번뜩번뜩한 ‘깜’을 외면하지 않고, 혼자 까지 않고 같이 까서 ‘깜깜’한, 안티크리스마스 액션 시즌2, <깜깜한 크리스마스>에 함께 해주세요~


 

 

* 언제 : 2009년 12월 24일(목) 오후 3시
* 어디서 : 홍대 앞 걷고 싶은 거리 (홍대입구역 4번 출구 근처)
 

* 발칙한 액숀의 4가지 키워드

 
“루돌프는 시급을 얼마나 받을까?”

- 크리스마스는 빨간 날? 쉬는 날? 즐겁게 노는 날? 크리스마스에 오히려 과다 노동하게 되는 사람들. 1년 째 임금체불 당하면서 루돌프는 아직도 썰매를 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들에게도 크리스마스는 마냥 행복한 날일까? 과연-

 
“커플 천국? 어떤 커플?”

- 크리스마스를 수놓는 커플 상품~ 거리도 커플 천국~ 그렇다. 고로 크리스마스는 커플의 시즌이었던 것이다. 근데 잠깐, 그 커플들은 죄다 비장애, 이성애 커플들 뿐이잖아? 크리스마스의 ‘커플 천국’은 동성애자, 장애인 등 소수자를 배제하고 있는 건 아닌지?

 

“청소년에게 이브의 밤은 허락되지 않았다.”

-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 받으려면 울면 안 되고, 놀면 안되고, 일찍일찍 집에 들어가서 공부해서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단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여야 하는 청소년에게 이브의 밤은, 크리스마스는 허락되지 않았다규.

 

“그 곳엔 여전히 사람이 있다.”

- 오뎅꼬치 하나 사먹으면서 서민 경제 신경 쓰는 척, 크리스마스 같은 날에 찾아와 따뜻한 손길 내미는 척. 쇼는 이제 그만! 특정한 날에만 ‘반짝’하는 생색내기에 태클 걸기! 이웃이 연탄 한 장 선물할 때, 우리집은 철거 당했다. 헐.

 

 

자자, 고개를 끄덕끄덕하셨다구요?

그렇다면 컴온 롸잇나우! 함께 하면 더 깜깜해져요!

 

 


 

문의 :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 10대 여성주의 커뮤니티 <깜>

(난다 : 010-9916-1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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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지나가는꿈2009.12.19 02:19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솔로부대들의 활동이 왕성해질 즈음이지요.


그런데 왜 '솔로부대'라고 하면 보통 '남자들'이 연상될까요?

"솔로부대는 남녀노소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의 포스터만 오직 여성인 것은 오히려 '솔로부대'가 일반적으로는 남성성과 연관되는 말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만들어주는군요.


물론 '솔로부대'라는 말이 만들어진 경로 - DC 짤들의 출처 자체(2차세계대전 때 독일군 포스터 등) 등에서 연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대"라는 말의 군사주의적 냄새도 그렇구요.



그러나 애초에 왜 '솔로'들의 설움이니 뭐니 이야기할 때는 흔히 남성이 그 '솔로'의 주체가 되는 것 같은지...하는 생각도 문득 듭니다.

비약처럼 들릴지 몰라도, 연애의 주체는 남성이고 여성은 그 남성에게 연애의 대상이고 심하게 말하면 소유물이라는 느낌일까요?

연애하지 못하는 남성은 무능력자-프롤레타리아트(무산계급)이고, 연애를 하는 남성이 유능하고 승리자인... 뭐 이런 식의 뉘앙스들????

그에 반해 연애인이 아닌 여성들은, 특히 30대 이상이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독신녀' 또는 '노처녀'라는 식으로 전혀 다른 표찰을 받는 느낌.



크리스마스를 맞아 짤방 폴더에 저장해둔 솔로부대 이미지들을 보다가 문득 든 생각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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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9.11.11 12:50

인권오름 기사 원문


원래 난다가 쓰기로 한 건데, 땜빵으로 이틀만에 써내려간... 글
뭔가 잘 쓴 거 같으면서도,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지 딱 정리하는 부분이 누락된 기분이 드는 글이다.








[페미니즘인(in)걸] 괴물들과 공주님들?

아동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공현


‘몬스터’(우라사와 나오키 지음)라는 만화가 있다. 제목부터가 ‘괴물’인 이 만화에는 진정으로 천재적이면서 잔혹한 살인자, 요한이 등장한다. 그러나 절대악인 요한을 추적하면서 드러나는 진실은, 그 요한조차도 ‘인간병기’를 만들어내려고 한 어른들의 실험에서 비롯된 괴물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 만화에서 요한이 사실상의 자살로 사라진 후, 남겨진 질문은 이것이다. “괴물은 누구인가?”


괴물이 되어버린 가해자

사형, 종신형, 거세, 신상정보 공개, 전자발찌……. 최근에 아동 성폭력 범죄의 가해자에게 가해져야 하는 처벌이라면서 거론되는 것들이다. ‘조 아무개 씨’의 여성 아동에 대한 성폭력 사건이 TV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지면서 가해자를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해자에게는 인권이 없다”라면서 “그런 새끼들은 쳐죽여야 한다”라고 외치고 있다. “가해자에게 인권은 없다.”, “짐승만도 못한 놈” 같은 말들 속에 숨은 뜻은 무엇일까? 그건 아동 성폭력의 가해자(줄여서 가해자)는 자신들과 다른 사람, 아니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해자는 자신들과는 무관한 존재, 이해할 수 없으며 제거되고 박멸되어야 할 ‘괴물’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끔찍한 성폭력 가해자라 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체포되어 감옥에 격리되기 전까지 이 사회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범죄는 사회적인 사건이며, 끔찍한 사건의 가해자도 이 사회의 일부이다. 아동 성폭력과 성폭력에 대한 연구를 보자. 아동 성폭력 범죄 가해자들은 학력이 낮고, 자아존중감이 낮고, 성적 좌절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들의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신체적/사회적 힘이 약한 아동을 대상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다. 뿌리 깊은 남성 중심적 문화와 음주에 관대한 문화도 원인이 된다. 애초에 남성으로서의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한다는 심리 자체가 남성 중심적 사회 문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여성/아동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 못하고 여성/아동이 약한 존재, 무력한 존재로 묘사되고 만들어지는 것 또한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관련하여 더 자세한 내용은 한겨레21 제781호(2009.10.16.) 안수찬 기자의 「아동 성폭행범 처벌 ‘무겁게’보다 ‘확실하게’」를 참고하시라.)

사진설명여성단체가 조두순 사건에서 음주를 이유로 감형된 것을 비판하는 캠페인을 하고 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건의 사회적 맥락이나 원인들을 외면한 채, 그리고 평소에는 폭력들에 관대한 모습마저 보이면서, ‘비정상적인 것’들로 돌출된 부분들을 잘라내려고만 한다. 마치 이백 대, 삼백 대를 때린 교사들에게는 ‘부적격 교사’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한 대, 다섯 대를 때리는 교사들에게는 관대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체벌은 학교의 폭력적인 시스템과 규제, 체벌에 관대한 문화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한 대를 때리든 이백 대를 때리든 체벌은 근절되어야 한다. 성폭력은 사회의 문화와 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30대를 강간하든 아동을 강간하든, 강간을 하든 성추행을 하든, 성폭력 과정에서 피해자가 입은 상해가 크든 작든, 성폭력은 근절되어야만 한다. 아동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고 차별과 폭력, 성적 대상화에 노출되어 있는 이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이러한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그저 조 아무개 씨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외치며 ‘가해자에게는 인권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심하게 말하면 위선적이다. 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서 자기 당 국회의원이 저지른 성폭력을 무마하려고 술잔을 깨는 퍼포먼스를 하며 성폭력에 관대한 모습을 보였던 한나라당 의원들이 성폭력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을 보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조 아무개 씨를 죽여 버려야 한다고 댓글을 달고서 바로 다음날에 성매매 업소에 가는 남성들, 여직원에게 성희롱을 하는 남자 상사들, 강간 포르노를 보면서 하악거리는 남성들, 소녀시대나 원더걸스의 ‘섹시함’에 속으로 야릇한 긴장감을 느끼면서 뮤직비디오를 보는 남성들이, 없을 것 같은가? 다시 한 번 묻자면, “괴물은 누구인가?”


아이들은 공주님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동 성폭력에 특히 더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신체적, 사회적으로 더 약자인 아동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더욱 더 비난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사람들이 아동에 대한 다른 폭력보다 성폭력에 특히 더 거부감을 가지며 분노하는 이유, 그리고 아동이 아닌 경우에도 신체적으로 저항할 만한 힘이 없는 여성이나 장애인이 당한 성폭력보다 아동의 경우에 특히 더 분노하는 이유 등등…….

일단, 실제 그 사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권력 관계가 어떤지를 떠나서, 피해자가 아동이라는 것만으로 우리는 더 많이 분노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그것을 종족을 보전하고자 하는 유전자 프로그램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근대 이후로 형성된 아동관도 한 몫 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아동은 교육받고 보호되어야 할 존재이며, 무력한 존재라는 아동관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끔찍한’ 아동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될 때마다 가해자에 대한 비난과 동시에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늘어간다. 보호자들의 불안감을 이용하여 위치추적 서비스나 CCTV 등을 다루는 업체들은 광고를 한다. 아이들의 휴대전화에 위치추적 서비스를 달고, 조금이라도 연락이 안 되거나 보호자(부모, 후견인, 교사 등)의 시야를 벗어나면 안절부절 못하는 어른들이 늘어난다. 안전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야 잘 알겠지만, 그 결과는 아이들의 행동반경을 제한하고, 아이들에 대한 감시를 늘리는 것으로 나타나기 십상이다.

사진설명정부에서 발벗고 나서 제공해주는 위치확인 서비스. 아동이든 장애인이든 본인의 동의 의사를 확인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고, 보호자가 서류만 갖추면 신청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아동 성폭력 사건에 분노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동과 성을 연관짓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은 사건의 끔찍함에도 분노하지만, 아동을 대상으로 성욕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가해자를 ‘괴물’ 취급하고, 아동을 성과 연관지어 생각하기를 꺼려한다. 아동은 성과 무관한 순수한 존재로 남아야 하며, ‘성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적 성을 얘기하기를 꺼려한 나머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성폭력은 영혼을 파괴하는 범죄다.” 성폭력은 지극히 신체적인 범죄인데 말이다.)

이런 태도가 아동을 성적으로 무력하고 무지한 존재로 만들고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건의 매듭을 푸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다. 아동이 성적인 존재이자 주체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체계적이고 내실 있는 성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성폭력 피해를 입은 아이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명명하고 인식할 언어와 지식을 갖지 못하기 십상이다. 조 아무개 씨가 가해자인 이번 사건에서는 상해와 폭력의 정도가 심하여 피해 아동이 자신의 피해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작년에 대구의 초등학교에서 집단적으로 일어났던 성폭력 사건의 경우, 어떤 경우에는 성폭력의 피해/가해를 특정하기도 어려웠고 때로는 그것이 성폭력인지 여부를 가리기 어려운 측면조차 있었다. 사건의 당사자인 초등학생들이 자신의 경험을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최소한 신체적인 측면에서 근력으로나 지구력으로나 아이들이 약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호주의의 결과 아이들이 더욱 더 사회적인 약자로 인식되고 일방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인식된다면, 또 아이들이 성에 대해 더 무지한 채로 남게 된다면, 그것이 과연 아이들에 대한 범죄나 폭력, 차별을 줄이는 데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이들의 삶을 완벽한 감시 하에 두고 아이들의 자유를 박탈할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어째서 아동에 대한 폭력 사건이 공론화될 때마다, ‘피해자’라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제한당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인지 이 불합리함은 참 설명하기 힘들다.

아이들 자신을 포함하여 이 사회의 모두가 해야 할 일은 성폭력 범죄 자체를 줄일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아닐까? 아동이 스스로를 지킬 힘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성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더 잘 대처하고 성폭력 피해를 입더라도 스스로 그것을 이야기하며 극복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성에 살고 있는 공주님이 아니며, 아름다운 동화 속에 사는 존재도 아니다. 아이들은 이 사회에서 당신들과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동 성폭력 사건은 어느 설명 불가능한 괴물이 우리가 지켜줘야 할 순수한 공주님을 납치한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이 사회의 현실이며, 괴물을 쓰러뜨리고 공주님을 성 안에서 보호함으로써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덧붙이는글
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178 호 [입력] 2009년 11월 10일 22:4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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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9.10.16 18:59

[페미니즘인(in)걸] 여학생은 성적이 “너무” 우수하다. 도대체 어쩌라고~

한낱


한낱 활동가의 자기 고백

중 고등학교를 다녔던 시절, 나는 ‘모범적인’ 여학생이었다. 민망하지만, 그랬다. 공부도 곧 잘했고, 반장도 몇 번 해봤다.선생님들의 예쁨도 꽤 받았다. 학교 안에서 가끔 짜증나는 상황이 발생하긴 했지만, 그건 그냥 그 날 재수가 없어서 그랬던거였다. 청소년 인권? 그런 거 전혀 몰랐다. 지금의 정신 상태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공부에 매진했다. 그만큼 성과도있었고, 보상도 받았다. 당시에 내가 성차별을 받았던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학업성적과 임원직 수행으로 '여성'이라는 핸디캡을뛰어넘은 나는 여느 찌질한 남학생들보다 훨씬 인정받았다.

차라리 객관적인 점수로 평가받았던 그 시절이 여성인 나에게 더 행복한 시간이었던 걸까? 요즘 국방부가 군가산점 부활을 운운하는걸 보면 처참한 느낌마저 든다. 아무리 졸업성적이 좋아도 '용모준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군필자 우선' 앞에서 고개를숙여하는 학교 밖보다는 균형 잡힌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건가? 그렇기 때문에 여학생들의 우세가 학교 안에서는 가능한 거고,여남평등은 학교 안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평할 수 있을까?

조금만 더 내 이야기를 해보자. 어렸을 적 엄마는 내게 “찰흙으로 고추를 만들어 붙여줘야지.” 등등의 농담을 많이 했었다. 내가그다지 ‘여성스러운’ 외모를 갖추고 태어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엄마는 언니에게는 보이지 않는 다른 종류의 기대감을 내게품었고, 나는 내가 집에서 ‘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는 무게를 어릴 적부터 지고 살았다. 지금도 내가 중학교에 올라갈 때 엄마가했던 말이 기억난다. “엄마가 미안하다. 예쁘게 낳아주지 못해서. 그만큼 너는 공부를 잘해야 돋보일 수 있어. 열심히 해.엄마가 밀어 줄게.” 엄마의 진솔한 충고는 나의 처절한 인정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변호사든, 기자든 뭔가 똑똑하고멋져 보이는 직업을 가지려면 공부를 뛰어나게 잘해야 했고, 좋은 대학에 가야만 했다.

물론 이런 경험이 내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탈학교 청소년 활동가는 자퇴를 고민하던 시절 담임교사가 했던 말을 생생히기억하고 있다. “너 자퇴 해가지고, 어디 시집이나 갈 수 있겠니?” 나의 엄마도, 이 담임교사도 여성인 우리가 맞이하게 될쓰디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본인들이 여성으로서 살아오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를 나눠 준 것일 수있다. 비록 그 지혜가 우리가 가진 조건 자체를 성찰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여학생들, 너무 똑똑해서 ‘문제’다?

소 팔아서 장남만 대학 보내던 시절은 이제 지났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여성도 남성과 나란히 취학의 문에 들어설 수 있게되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의무교육이 되었고, 기회 자체만 본다면 성차가 두드러지지 않는 시점에 온 것 같다. 학업 성취도평가 분석이나, 특목고 진학률을 보면 여학생들의 학업 수행 능력이 남학생들을 앞질러 가고 있다고 한다. 남학생 학부모들은 내신에대한 불이익 때문에 남녀공학을 기피하고 있으며, 남고/여고로의 전환 신청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최근까지 일부 학교에서는‘남녀 내신 분리 산출’이 관행이기도 했다. 남녀의 뇌구조 차이를 근거로 남녀공학 폐지론을 주장하는 보수논객들도 활개를 친다.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함을 생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뇌의 크기까지 들먹였던 것이 우생학 아니었던가. 이제는 여성의 생물학적우수함을 거꾸로 반증하고 있는 셈이니 도리어 반가운 일일 수도 있겠다.

사실 이런 분석들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것 자체가 이들의 논리에 말려드는 꼴이 된다. “그 분석에는 문제가 있어. 여학생들이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야.” “우리 여학생들이 너무 공부를 잘하고 있나? 좀 못하도록 노력해 볼게.” 얼마나 우스꽝스런답변인가. 왜 여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높은 것은 ‘문제’가 되는 걸까? 여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되 남학생들 보다는 살짝 못하는오묘한 성적 관리 기술을 익혀야 하는 걸까? 이러한 현상이 정말 ‘문제’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남학생들이 공부를 못하는데 어떤사회적 장벽이나 차별이 있고, 그것이 성적에 영향을 미침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성적으로만 학생의 능력을 판단하는평가제도 자체에 이의제기를 해야 한다. 애꿎은 여학생들의 성적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차별이 낳은 역설적 상황

여 학생들의 학업 성적이 좋은 것은, 그만큼 그녀들이 성적 관리에 필사적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차별의 상황에 놓여있기때문에 성적도 뛰어나다는 거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훨씬 뛰어나야 비로소 출발점에 설 수 있다. 따놓을 수 있는 데서 점수를충분히 따놓지 않으면, 도저히 게임이 안 된다. 비슷한 조건을 가진 상태에서,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잠재적인’ 능력자로인정받는 현실이기 때문에 여성들은 항시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어야 한다. 대학 진학 후, 20대 여성들이남성들보다 어학 공부에 더 많이 열중한다는 통계는 그런 점에서 의미 있다. 여성 할당제 등 여남 간의 실질적 평등을 보완하려는정책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을 해소시켜 줄만큼 든든한 버팀목이 되지는 못한다. 특히나 실업률이높고, 고용이 불안한 시기에는 그마저도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다. 여성들이 공직에 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공무원 시험 합격률이높은 이유는 다른 선택지가 없거나, 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임용고시 합격률이 높은 이유는 암암리에사립학교에서 남교사를 선호하고, 우선 채용하기 때문이다. 씁쓸한 일이지만, 군가산점제가 부활하면 이런 ‘여초 현상’ 조차사라지겠지만 말이다.



정말 여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는가?


다 시 돌아와서, “정말 여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져보고 싶다. 평균이라는 통계의 가장 큰 함정은변량들의 차이를 무화시키고 중간 값으로 환원시켜버린다는 점이다. 모든 여학생들이 공부를 잘하지는 않는다. 다만, 공부를 잘하는일부 여학생들이 있고, 그녀들이 한국 사회의 여학생을 대표한다. 많은 여학생들이 힐러리나 박근혜, 나경원을 동경할 순 있지만모두가 그녀들처럼 소위 ‘성공’하는 여성이 될 수는 없다. 여학생들이 내신관리 능력이 뛰어난 건 학교에서 요구하는 인간형에부합함으로써 생존하려는 전략이다. 그냥 여성이 아닌, ‘똑똑한 여성’들은 사회에서 남성과 비등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우리는그녀들을 ‘명예 남성’이라고 부른다.

어떤 교사들은 ‘참한 여학생이 반장이 되어야 교실이 안정적이다.’라고 말한다. ‘참한 여학생’이 교실을 주도해야 교실 안 폭력도줄어든다는 거다. 참한 여학생은 누구인가? 성격은 기본이고 성적도 좋아야 한다. 학생과 교사의 갈등을 조절하고, 교실 안을침착하게 돌보는 ‘조용한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순간,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훅 느껴진다. 이제는 기술과 가정을 분리하지 않고여남이 함께 배운다고 한다. 출석부에 남학생 이름이 먼저 기재되어 있던 문화도 사라졌다고 한다. 학교가 옛날보다는 많이변화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여학생의 ‘능력’을 바라보는 기준은 획일적이다.


평균을 갉아먹는 존재들의 반란


이 러한 학교 안의 능력주의가 깨지지 않으면, 통계에 보이지 않는 다수의 여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소외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없다. 끊임없는 열등감에 괴로워하는 여학생들, 학교의 기준을 비웃으며 학교가 아닌 거리를 택하는 여학생들에게 “그러니깐, 공부를좀 더 하라니깐!”을 계속해서 외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한 명, 한 명 천천히 빛나는 사람들. 그이들이 자기만의존재감을 인정받을 수 없는 학교에서 성평등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연재 글들이 청소년 인권에 여성주의적 상상력을 불어넣는 시도였다면, 이번 글은 청소년인권을 통해 자칫 페미니즘이 놓치고넘어갈 수 있는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학교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능력주의(성적 제일주의)’다. 학교에서는못생겨도 공부를 잘하면 일단 인정받는다.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고 좋은 성적을 내면 역시나 인정받는다. 소수성에기반한 다양한 차별들이 능력주의라는 거대한 프리즘을 통과해 그 빛깔을 낸다. 여성주의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학교 평균을 갉아먹는존재들’의 반란을 기획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한낱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입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174 호 [기사입력] 2009년 10월 14일 12: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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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지나가는꿈2009.09.30 02:16



사건을 다룬 취재 동영상을 봤는데
피해자의 부모는 가명 처리가 되는데
정작 피해자 본인은 버젓이 실명으로 해서
온갖 언론에서 나XX 사건이라고 불러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동-피해자에게는 자기 이름이 안 드러날 권리도 없나요?


그리고 사건을 왜 자꾸 나XX 사건이라고 피해자의 이름으로 붙이는 건지,,,
이건 뭐 괴상한 피해자중심주의.

정작 피해자가 아니라 뭇 사람들(주로 네티즌)의 자기만족, 공분이 중심에 있는. -_-
피해자인 분과 그 피해자의 가족 되시는 분들도 별로 원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에서 가끔은 나는 저런 파렴치한 놈이 아니야 라는 안도 같은 게 읽히는 거 같을 때가 있는데 그건 역시 나만의 착각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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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드는 성-인권교육용 책 만들기 등에 참여하면서 하는 생각이, 성폭력은 참 '보편적인'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간 폭력이라거나 연쇄살인 같은 경우에는 차라리 계급적 요소나 심리적 요소를 찾아서 개연성 같은 걸 부여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발생 양태의 차이, 빈도의 차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은,
이토록 무차별적이고 광범위하게 남성-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발생가능한 폭력이라니...

이번에 나XX 사건을 보면서는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채소마누라'(지은이 펫 머피)라는 SF소설이 떠올랐습니다.
(내용이 궁금하면 읽어보세요-;)

만일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에서 제가 느끼는 더 특별한 분노가 있다면,
그것이 물리적으로 전혀 저항할 수 없는 신체적인 약자라는 이유로 더 잔인하고 손쉽게 벌어진다는 것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저에게 얼마나 분노할 자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분노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남겨두겠습니다.
이것저것 마음에 걸리는 일들투성이인 저는, 적어도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얼마 전에 강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피해의 심각성이 부각될 때에만, 피해의 심각성이 기존 사회의 '상식'을 넘어설 때에만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은 전혀 인권적이지 않습니다.
'미친개새끼' 한 명에게 징역을 몇 년 때리냐를 가지고 난리치는 거, 물론 중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처벌을 강화한다고 범죄가 근절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처벌이 지나치게 경미한 것보단 나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성폭력들에 대해 생각하고 개선책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범인에게 어떤 고통을 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대책을 세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 틈새의 미투데이에서




추신 : 어쨌거나, 이 사건이든, 최근에 논란이 된 인종차별금지법 건이든, '인권단체 드립'은 아주 그냥 지긋지긋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참고할 글 - stcat님의 '피해자 인권' VS '가해자 인권'?


추신2 : 술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성폭력에 대한 처벌이 감형되는 것은 어쩌면 논리적으론 맞는 걸 수도 있습니다. 술이 취해서 책임 능력이 부족했다고 주장한다면요. 음주운전이랑은 좀 범주가 다른 것 같긴 합니다.
뭐, 좋습니다. 감형하든지요. 대신 이렇게 합시다. "책임도 못 질 거면서 술을 과하게 퍼마신 것"을 처벌하는 추가조항을 둬서, 만취상태에서 살인 강도 성폭력 등 범죄에 대해서는 그 범죄에 대해 죄를 적용하고, 거기에 더해서 술 퍼마신 죄를 추가하여 가중처벌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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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