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것같은꿈

있던 일

공현 2021. 12. 21. 21:42

강민진(쥬리) 씨와 있던('있었던'이라고 쓰고 싶지가 않다. 아직도 진행 중인 일 같아서.) 일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 하지만 개인적이진 않은 문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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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교차로 횡단보도 앞에 서서 기억에 잠겼다. ‘여기에서 당신과 긴 통화를 했지그때 난 당신이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음을, 우리의 앞길이 파국일 것임을 예감했었고.’ 계절은 요즘 같은 한겨울이었고 전화기를 붙든 손이 시렸고 한발짝 더 슬퍼진 날이었다.

당신은 집에서 국회로 무슨 행사에 참여하러 택시를 타고 가고 있었고, 가는 동안 통화를 해달라 했다. 사적인 볼일을 보러 걸어가던 중이었던 나는 당신과 통화를 이어가느라 길거리를 맴돌았다. 그때 당신은, 자기가 청소년운동을 떠나는 선택을 하면 나라는 사람을 잃게 될 것 같다고, 그러면 연을 끊을 거냐고 조금 돌려 물었다. 내 대답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우선 이 문젠 나와의 사적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운동의 원칙의 문제다. 그러니 동료 활동가로서 당연히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거기 더해서 나 개인으로선, 나는 네가 나를 속였다고 느끼기에 상처받을 거고 더 화날 거다. 왜냐면 너는 청소년운동을 계속할 거라고, 그러려면 주변의 신뢰와 지지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나에게 네 편을 들어달라고 요구했고 그래서 옹호하고 지지하지 않았느냐. 그래 놓고서 그 말을 지키지 않으면 나를 속여서 이용한 것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긴 통화였지만, 긴 침묵 뒤에 내 말에 돌아온 당신의 대답만은 거의 어절 하나까지도 기억한다. “내가 너를 속이거나 이용하려고 한 게 아니라는 건 믿어 주면 좋겠어.” 나는 그건 과거 그 시점에 실제 당신의 의도가 어땠는지와는 무관하게 당신이 약속을 지키느냐의 문제라고 답했다. 그런 일이 애초에 일어나지 않게 하면 될 일이라고 대꾸했다. 청소년운동을 떠나지 않으면 된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면 된다고. 당신은 그럴 거라고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 전화가 끝난 뒤 나는 길에서 울었다. 울었노라 말하지는 않았다.

얼마 전에는 당신이 청소년운동을 떠난 것이 주변 활동가들이 매몰차게 굴어서 그런 거 아니겠냐는, ‘우리를 잘 알지도 못하고 거의 아무 관계도 없는 어떤 사람이 내뱉은 말을 보았다. 순서가 정반대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처음에는 당신을 믿고 지지해주려 했다고. 하지만 당신이 불신을 주는 언행을 여러 번 했고, 약속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고, 우리가 공유하고 있다고 믿었던 원칙과 가치를 해쳤다고. 다른 활동가들이 뭔가를 해서 당신이 떠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약속을 어기고 떠나려는 모습을 보였기에 다른 활동가들이 비판했고, 그러다 결국 떠났기에 다른 활동가들이 이렇게 분노하는 것이라고. 사실 통화에서 당신이 말한 그러려던 의도는 아니었다라는 것은, 자기 자신도 스스로 한 말을, 약속한 것을, 공유한 가치를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지 않은가.

당신과의 그 통화의 기억이 불길함과 불안함으로 채색되어 있다면, 경악과 경멸로 채색된 장면들도 있다. 가령 다른 활동가더러 자기가 청소년운동 출신 첫 국회의원이 된다면 좋지 않겠냐고 당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느껴서, 효능감을 느껴서 좋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 정의당 대변인을 맡고 첫 브리핑에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면 복장규제를 강제해도 된다는 식의 내용이 담겨 비판하자 정의당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안 넣었다라고 했던 대답. 정의당이 청소년 당원을 못 받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한 인터뷰.

나는 단지 당신이 떠나서 절망적이고 괴로운 것이 아니다. 떠남 자체가 아니라, 함께 추구했다고 믿었던 가치와 약속이 당신의 손에 의해 단 몇 개월 만에 그렇게 간단히 더럽혀지고 부서질 수 있었다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 운동의 성과를 개인이 사유화해선 안 된다고 한 원칙이든, 제도권 정치나 공직으로의 진출은 단체의 결의 속에 운동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합의이든, 당신이 직접 제시했던 이 단체가 자리 잡을 때까지 떠나지 말고 함께하자는 약속이든, 그것이 당신에겐 아무 무게도 없이 사라질 것들이었단 것이그리고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왜 이게 문제인지를 이해하지도 못하리라는 것이 끔찍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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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처음부터 당신이 저를 속이려는 무슨 계획을 가졌던 건 아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은,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것은, 결국엔 속이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당신이 막바지에 입장을 오락가락 번복하던 도중 딱 한 번,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사과할 일이 맞아요. 이렇게 열악한 청소년운동에 여러분을 남겨두고 나는 떠나는 게 미안해요.”라고 말했던 것, 그게 진심이었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바로 직후에 곧장 부정되어버린 말이더라도요. 이제 당신은 진심 같은 건 중요치 않은, 흔하디흔한 거짓말쟁이가 되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