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청소년인권운동의 입으로 입시경쟁교육 앞담화까기

공현 2008. 1. 8. 12:02

청소년인권운동의 입으로 입시경쟁교육 앞담화 까기


공현 = 윤종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 청소년인권모임 나르샤

emptyyoon@naver.com / taekyoon73@hanmail.net



◎ 복잡난감한 괴물퇴치 미션


  여기, 괴물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괴물과 싸운다고 뛰어들었다가 그 앞에서 계속 낑낑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우리 모두는 저 괴물에게 괴롭힘 당하고 있다, 저 괴물을 없애야 한다, 우리도 같이 싸우자, 그렇게 말하기는 참 쉬운 일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 큰 괴물을 과연 없앨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왠지 괴물한테 먼저 덤벼서 달라붙어 있는 사람의 눈치도 보인다. 그 사람이 먼저 찜해놓았으니까, 오랜 세월 괴물이랑 싸워왔으니까…. 저건 아닌 거 같아도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싸우는 방식도 맘대로 해보기 어렵고, 눈치도 보이고, 스트레스도 받고… 여하간 좀 난감하다. 괴물 하나 상대하기도 버거워 돌아가시겠는데, 괴물이랑 먼저 와서 싸우고 있는 저 사람도 상대하기 골치가 아프니, 에휴 걍 때려치면 안 될까 하지만, 때려칠 수는 더더욱 없고….


  음, 대충, 입시경쟁교육 문제에 마주해 있는 내 심정이 저렇다.

  입시경쟁교육의 문제가 청소년들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중요하고도 커다란 문제라는 것은, 뭐 웬만한 사람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당근 청소년인권운동의 입장에서도 입시경쟁교육 구조라는 ‘괴물’은, 교육이나 학교에 관련된 청소년인권 문제들 전반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입시경쟁교육은 분명 청소년들의 삶을 억압하고 있다. 또한 시험기간에는 활동 참여율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수험생 시기가 되면(고3, 재수생, n수생 등등)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등, 실제적으로 청소년들이 인권운동 같은 걸 하는 데 상당히 커다란 걸림돌이 되는 문제이다.


  중요한 문제라서 그런지, 공략 난이도도 높다. 입시경쟁교육의 문제는 부모, 교사, 학교장, 학원, 대학, 기업, 정부 등 모두의 이해관계가 긴밀하게 얽혀 있기에 건드리기가 어렵다. 또한 입시경쟁교육과 맞서는 것은, ‘하향평준화’에 대한 보수 언론들의 공포감 조성과, ‘국가경쟁력’을 운운하는 뿌리깊은 국가주의와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 행동양식들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입시경쟁교육의 문제가 아주 커다랗고 강고한 구조 - 시스템과 싸우는 일이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입시경쟁교육의 현실을 자신들이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지 못하고 쉽사리 무력감을 느끼기 쉽다.


  그런데 동시에, 나를 포함해서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입시경쟁교육의 문제를 청소년인권운동이 다루는 것에 대한 ‘긴장’을 갖고 있다. 그런 긴장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자세한 것은 본문에서 언급하겠다.


  그러나 그 어떤 긴장과 곤란한 점이 있더라도, 현실에서 입시경쟁 문제와 부딪치고 있는 나는 입시경쟁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괴물 앞에서 먼저 와서 싸우고 있던 사람이 불편하다고 해서 괴물과의 싸움을 포기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아니, 오히려 이런 긴장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입시경쟁교육에 대해 말해야 한다. 청소년인권운동이 긴장감과 불만과 상처를 덮어가면서 ‘교육운동’과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청소년인권운동의 입장에서 입시경쟁교육 문제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인권의 입장에서의 교육 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안의 방향을 만들어내야 한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볼 때 교육운동의 담론들이 견지하고 있는 관점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 정치(精緻 : 정확&치밀)하게 반박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운동이 반복해온 담론을 답습하는 형태가 아니라, 다른 형태의 다른 입장에서의 이야기가 우리에겐 분명히 있다. 단지 그것이 명료하게 표현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 ‘다원적 평등’ 식칼로 괴물 회 뜨기


본론에 들어가며, 문제의식에 대한 맛보기


  한국의 경쟁적인 교육 환경이 아동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으니 개선하라는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권고를 굳이 인용할 것도 없이, 입시경쟁교육의 문제는 다방면의 청소년인권 침해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 입시경쟁 때문에 강제자습, 강제보충수업, 심야학원 등이 횡행하게 되고 이 때문에 청소년들의 자유권, 여가권, 휴식권, 건강권 등이 침해되며,

 ▲ 청소년들에게 입시경쟁체제를 강요하기 위해서 학교, 학원, 가정에서 성적이 안 좋은 학생을 체벌하고 통제하고 강압하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며,

 ▲ 성적비관이나 입시경쟁이 주는 스트레스와 절망감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들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한 해 수십 명에 이른다.

 

  여기서 내가 이와 같은 입시경쟁교육의 ‘영향’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니다. 나는 입시경쟁체제 그 자체 - 경쟁교육체제 그 자체를 인권의 입장에서 어떻게 볼 수 있는지랄까나, 여하간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물론, 입시경쟁교육의 ‘영향’들은 입시경쟁교육과 분리할 수 없으며,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권고안도 이를 분리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글 쓰는 사람인 내가 편하기 위해서 이렇게 대략 화제를 한정한다. 이 글의 결론부터 미리니름하자면, 나는 입시경쟁 및 현재의 초중등교과과정 등이 그 자체로 사람들의 평등권, 교육권, 발달권을 근본적으로 침해하고 짓밟고 있다는 주장을 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평등권은 단지 계층간 지역간 불평등이나 이른바 양극화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교육에서의 평등”에 대한 인식 또한 청소년의 입장에서 재정리하고자 한다. 재정리된 “교육에서의 평등” 개념은, 계층 및 지역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을 중심 문제로 두지는 않을 것이다.


  흔히 하는 말이지만, 평등이란 단지 모든 것을 똑같이 대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평등의 이념을 나타내는 정확하고도 포괄적인 표현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이다. 그래서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 분야에서 능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나기에 경쟁에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에게 더 좋은 보상을 주는 것은 평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연한 듯 보이는 이 상황도 사실 더 깊이 생각하기 시작하면 당연하지가 않다.

  과연 이 사회가 가치있게 평가하는 ‘능력’이란 무엇이며 그 평가는 공정하고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가? 능력에 따른 보상은 적절하고 합리적인 것인가? 너무 과도하거나 부족하지는 않나? 그리고 과연 교육체계가 어느 정도 독점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평가’와 ‘경쟁’이, 다양한 인간들의 다양한 존재 방식, 다양한 성질들을 모두 공정하고 평등하게 평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현재의 입시제도는 시험 문제 잘 푸는 사람, 암기 잘 하는 사람이 좋은 점수를 받으므로 진짜 인재를 길러낼 수 없어서 문제다.”, “사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 유리한 입시제도들이다.”와 같은 비판들이나 “수능 시험 한 번으로 인생이 크게 결정나는 불합리한 제도다.”, “학벌(출신 학교)이 불합리하게 너무 많은 걸 결정짓는다.”라는 식의 비판들이 있다.

  분명히, 현재 교육의 목표가 허울 좋은 교육기본법이나 국제조약 같은 데 써놓은 것과는 달리, 사실은 사람들을 사회에 더 잘 순응하게 만들고 더 잘 통제당하게 만들고 “국가경쟁력”을 위한 인적 자원을 생산해내는 데 있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라고 할 만하다. 그런 점에서 교육의 목적은 확실하게 바뀌어야 하며, 듣기 좋게 써놓은 목적과 실제 목적 사이의 괴리를 지적하거나 교육 시스템이 그 목적을 좀 더 잘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질문과 비판들도 중요하다. 합목적성과 동시에 경쟁 자체의 공정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교육’이라는 이름을 단 현재의 경쟁 시스템이 사실은 단지 현재 사회체제의 재생산을 위한 장치에 불과하지는 않은지, 또는 교육이 그 자체의 올바른 목적(말하자면, 민주시민 양성, 인권의식 탑재, 총체적이고 적절한 발달,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위해서 작동하지 않고 사회적 재분배 등을 위한 수단이지는 않은지,(‘능력’을 평가해서 사회적 자원을 분배한다는 ‘명목’하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합리와 불평등과 불의가 생기지는 않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질문들, 이런 비판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어느 정도 검토가 이루어져 왔기에 여기서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는 좀 종이나 모니터 화면 등이 아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솔직히 조금 상투적이고 재미없기도 하다. 내가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과연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고 경쟁시키고 이에 대해 보상을 제공하는 입시경쟁교육 시스템이라는 게 과연 얼마나 다양한 인간들에게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또한 그런 시스템이 얼마나 인간들을 고려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다원적 평등 : 우리는 평등하게 다르며, 다름으로써 평등하다.


  이제부터 나는 ‘다원적 평등’이라는 개념적 식칼로 입시경쟁교육 괴물을 회 뜨려고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원적 평등’이라는 식칼이 대체 뭔지,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부터 해야 한다. ‘다원적 평등’ 식칼을 만들기 위해, 먼저 간단한 우화에서부터 시작해보자.


  토끼와 거북이가 육상경주를 했는데, 당연하게도 압도적인 차이로 토끼가 이겼다. 이에 불만을 가진 거북이는 이번에는 육상이 아니라 바다에서 수영경주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당연하게도 압도적인 차이로 토끼가 졌다. 오기가 생긴 토끼는 1년 동안 죽어라 수영만 연습해서 세상에서 가장 헤엄을 빠르게 치는 토끼가 되었고, 거북이에게 다시 도전했다. 훈련의 성과가 있었는지 토끼와 거북이의 차이가 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거북이와의 차이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둘의 경주 소식을 들은 상어가 결승선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먼저 도착한 거북이를 잡아먹었고, 거북이보다 좀 뒤처져서 헤엄치던 토끼는 상어가 거북이를 먹는 것을 보고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내가 급조한 거긴 하지만(-_-), 이 우화는 경쟁의 기준에 대해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육상에서 빠른 것과 수영에서 빠른 것, 그 중에 뭐가 더 우월한가? 아니 애초에 빠른 것이 느린 것보다 더 우월한가? 평등을 정의하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말은 참 쉬워보이지만, 실제로 이를 구체화시키려고 할 때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무엇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는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그리고 다른 것을 어떻게 다르게 대우해야 하는가?


  교육 불평등을 다루는 기존의 조리도구들 중에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건, 바로 ‘경제적 수준에 따른 교육의 차이’라는 식칼이다. 이는 경제적 수준이 교육의 격차와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다. 한 가지는 교육은 ‘개인’의 능력과 적성을 개발하고 발달시키고 평가하여 적절한 보상을 주는 체계인데 ‘개인’의 능력과 경제적 수준은 별 연관이 없으므로 이것이 연관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다. 다른 한 가지는 경제적 수준에 따른 교육 격차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재생산하고 착취 관계를 공고히 한다는 인식이다. 두 번째의 재생산에 대한 이론 또한 매우 의미있는 주장이며 근대 교육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일단은 ‘개인’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려고 한다.

  좀 까칠하게 얘기하자면, ‘개인’의 능력에 대한 주류적인 소박한(?) 신앙은 다분히 근대 개인주의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즉, 개인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그 능력이나 적성의 차이는 선천적인 개인적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빈부격차 등으로 인한 교육 기회의 불평등과 보상의 불평등은 그런 개인적 차이를 온전히 드러내고 반영하는 데 방해가 되는 왜곡이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는 소리다.

  하지만 실제로 개인의 능력이나 적성, 소질 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동시에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그 개인의 능력이나 적성, 소질이 지니는 가치는 달라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 격차라는 사회적 조건의 차이 때문에 개인의 능력, 적성, 소질이 달라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므로 이를 불평등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단지 경제적이거나 지역적인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면 개인의 자유로운 능력이 마음껏 활개치게 되는 그런 단순한 게 아닌, 좀 더 복잡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잠시 국제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의 발달권과 교육권에 대해서 여러 조항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부분들이 있다.


제 27 조

1. 당사국은 모든 아동이 신체적·지적·정신적·도덕적 및 사회적 발달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를 가짐을 인정한다.

2. 부모 또는 기타 아동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자는 능력과 재산의 범위안에서 아동 발달에 필요한 생활여건을 확보할 일차적 책임을 진다.

3. 당사국은 국내 여건과 재정의 범위안에서 부모 또는 기타 아동에 대하여 책임있는 자가 이 권리를 실현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특히 영양, 의복 및 주거에 대하여 물질적 보조 및 지원계획을 제공하여야 한다.


제 29 조

당사국은 아동교육이 다음의 목표를 지향하여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가. 아동의 인격, 재능 및 정신적·신체적 능력의 최대한의 계발

나. 인권과 기본적 자유 및 국제연합헌장에 규정된 원칙에 대한 존중의 진전

다. 자신의 부모, 문화적 주체성, 언어 및 가치 그리고 현거주국과 출신국의 국가적 가치 및 이질문명에 대한 존중의 진전

라. 아동이 인종적·민족적·종교적 집단 및 원주민 등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해, 평화, 관용, 성(性)의 평등 및 우정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유사회에서 책임있는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준비

마. 자연환경에 대한 존중의 진전

(『유엔아동권리협약』에서. 굵게 한 강조는 내가 했다.)


  맨날 질문만 하는 거 같아서 미안하지만, 여기에서 ‘발달’이란, ‘계발’이란 무엇일까? 모호한 개념이며 당사자들 외엔 누구도 함부로 규정할 수 없는 영역이긴 하지만, 사회가 그것을 보장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충이나마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발달의 다양한 가능성들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고 이를 지원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 ‘발달권’과 ‘교육권’에 대한 이야기는 ‘다원적 평등’을 이루는 중요한 부품이 되므로 꼭 기억해둘 것을 권장한다.

 

  다시 처음에 제시했던 우화로 돌아가보자. 내가 만든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고전적인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와 비교해서 읽어보자. 두 이야기를 비교해서 읽으면, 주류적인 가치 - 능력만이 유일한 ‘능력’인 것처럼 평가받고 나머지 능력은 비가시화(안 보이는 것처럼 은폐되는 것)되거나 평가절하 당하는 현상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동화책에서, 교과서에서 배워온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에서는 결코 거북이가 토끼보다 수영을 더 빨리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수영은 기본적으로 땅에서 생활하는 동물인 인간에게는 달리기보다 덜 주류적인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거북이가 토끼들과 함께 교육받으며 성장했다면, 수영 따위는 해볼 기회조차 없었다면 그 거북이의 발달권은 보장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거북이들 중에도 달리기가 토끼보다 훨씬 빠른 슈퍼 거북이가 있었다면? 이런 거북이에게는 달리기의 기회 또한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달리기를 잘한다고 해서 달리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건 잘하냐 못하냐의 문제라기보다는, 각 사람들의 행복, 선호, 발달, 자기계발, 자존감 등의 문제이며 기회의 문제이다.) 물론 수영과 달리기 외에 다른 고려해야 할 가치들, 능력들, 소질들이 많다. 때로는 상어에 잡아먹히지 않은 토끼처럼, 수영이 느린 것 또는 어중간하게 느린 것이 장점일 때도 있다.

  중요한 건 온갖 다른 능력들과 소질들, 적성들을 어떻게 평등하게 평가하고 대우하고 보장할 것이냐의 문제인데, 결국 이는 사회적으로 중시하는 가치의 문제와 연관된다. 어떤 사회가 A와 B라는 가치-능력만을 중시한다면, 그 외의 다른 모든 능력과 소질, 적성들은 평가절하되거나 비가시화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능력과 소질, 적성들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모든 인간들의 권리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꼭 능력이나 소질, 적성이 아닐 수도 있으며 거기에 경제적 조건, 지역적 조건, 장애/비장애, 성적 지향, 병력 등 다른 사회적 조건들이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요컨대, 발달권과 교육권을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다원성이다.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말은 엄밀하게는 “다른 것은 평등하게 다르게”라고 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가치들을 위계화․서열화하는 것은 그 자체로 평등을 저해한다. 따라서, 평등은 근본적으로 다원주의적이며 다원적 평등만이 평등일 수 있다. 한 가지, 또는 소수의 기준만을 고려한 평등은 총체적인 평등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러한 발달권과 다원적 평등의 개념은, 전통적으로 평등을 제창해온 사람들이 받아야 했던 공격 - 즉 전체주의라거나 획일화라는 공격을 부정한다. 그것은 다원주의를 근간에 깔고 있으며,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인간의 관계가 진정으로 인간적이며 “사랑은 사랑으로만, 신의는 신의로만… 교환되는” 사회, 개인적 자유의 실현이 사회 모두의 자유를 증진시킬 수 있는 사회,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이념이다.


  다원적 평등의 개념은, 간단한 ‘질’과 ‘양’의 개념으로 바꿔서 표현할 수 있다. EBS에서 했던 그림 그리기 프로의 밥 아저씨가 “참 쉽죠?”라고 하는 립서비스랑은 다른 의미로, 진짜 간단하다. 사과 6개와 포도 20개는, 결코 그 개수를 비교해서 포도가 더 ‘좋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단순히 크기가 다르다는 이야기라면 물론 저울에 달아보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의 문제라면 이는 측정 불가능하다. 또한 사과가 약으로 쓰일 수 있는 희귀한 병에 걸린 환자에게는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를 떠나서 사과의 가치가 훨씬 높을 것이며, 포도로 포도주를 담그거나 하려는 사람에게는 사과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 문제를 파스칼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서로 다른 집단들이 존재한다. 강한 자들, 선남선녀들, 똑똑한 사람들, 독실한 신자들. 이들 각자는 다른 곳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에서 군림한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서로 만나며, 또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어리석지 않은가? 왜? 그들 각자가 지닌 우월함은 서로 그 종류가 다른 것들이지 않은가! ...... 우리는 서로 다른 자질들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무를 지고 있다.

- 파스칼


  본래, 질적으로 다른 것들은 교환 불가능하다. 물론 특정하고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질적으로 다른 것들이 양적으로 교환된다. 나한테 보리가 필요한데 너는 계란이 필요하니까, 보리 1포대와 계란 20개를 교환하자, 라는 식으로. 이 교환은 화폐나 다른 뭔가가 매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각 사람이 부여하는 가치의 질과 정도가 모두 다를 수 있고 조건과 상황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게 되기 때문에, 양적으로 통일될 수 없으며 보편적으로 계량화할 수도 없다. (이걸 양적으로 계량하려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작동 원리 중 하나이다.)

  ‘질적으로 다른’ 여러 가치, 여러 능력들과 소질들을, 서열을 매기는 ‘양적인 방식’을 통해서 평가하고 대우하는 것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다른 것을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특질들, 소질들, 능력들에 대해서 그것을 모두 다르게 대우하고 평가하고 존중해야 하며, 가치를 위계화하거나 서열화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적 가치의 다원성을 중심으로 한 평등, 그것이 다원적 평등이다.


  물론 우리는 다원적 평등이라는 식칼을 휘두를 때, 몇 가지 조심할 사항이 있다는 걸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평등보다 우선하는 가치로서 존중되어야 할, 인간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존중이나 기본적 자유와 인권의 신장 등은 다원적 평등의 적용에서 예외적인 지위일 수 있다. 또한 실제로 구체적인 사회는 무한히 다원주의적일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무한히 다양성을 보장하고 무한히 다원주의적인 사회는 개념적으로 가정할 수는 있지만 실재할 수는 없다. 때로는 모순되기도 하는 무한한 가치와 성격들을 모두 똑같이 추구한다는 것은 아무런 속성이나 특징이 없는, 비역사적이고 비실재적인 사회 외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가치들이 다른 가치들보다 더 우월하고 유의미한 것으로 대우받는 현상 자체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현실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다만 다양성의 지평을 계속해서 넓힘으로써 개념적으로 완전한 평등에 근접해갈 수 있을 뿐이다.


※ 다원적 평등의 ‘다양성’에 대해, 생태계 다양성과 비슷한 의미에서 해석하고 정당화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여러 다른 사회 상황 등을 고려 가능하고, 다른 사회 상황에서는 지금과는 다른 가치, 다른 능력과 소질이 더 유리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의 전반적인 다양성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것이랄까? 하지만 나는 일단은 다원적 평등을 인간의 권리(평등권, 발달권)에 근거해서 주장하는 데 만족하겠다. 다양성을 사회의 생존과 발달에 유리하다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은 다양성의 근거 자체를 뒤흔드는 반격의 소지를 남기는 것일 수도 있다. 즉, 획일화가 사회의 생존과 발달에 유리한 특정 상황에서는 전체주의도 정당하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차라리 홍정훈이 『비상하는 매』에서 주장한 대로 삶의 목적은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일 수도 있겠지만….



  다원적 평등에 대한 기초적인 이야기는 대충 한 것 같으니, 이제 직접 현재 교육의 배를 칼로 가르고 뼈를 발라내면서 이 식칼을 써먹어보자.


  현재의 입시경쟁체제는, 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 등 몇 개의 과목들에 관해 출제된 오지선다/단답형 문제들을 정해진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이 정확하게 정답을 맞추느냐를 기준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서열화한다. 물론 요 몇 년 사이에는 과거에 비해서 출석점수, 봉사시간, 논술, 예체능 실기, 자격증 등 다양한 것들이 입시에 반영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가치’의 다원화가 아닌 입시 ‘전형’(방식)의 다양화에 불과하다.

  가치의 다원화와 방식의 다양화는 전혀 그 의미가 다르다. 방식의 다양화는, 물론 한 가지 방식만으로 평가할 때보다는 약간 더 가치의 다원화 현상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효과는 극히 제한적이며, 입시 방식을 다양하게 하는 것이 가치를 다원화시켜주지는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입시 방식이 여러 개가 생겼다고 해서 그것들이 현재 학교에 다니면서 입시에 직면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삶, 진로, 꿈들이 다양하고 풍부하게 되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란 거다.

  아무리 입시 방식들을 내신이 어쩌구 논술이 어쩌구 수능이 어쩌구 본고사가 어쩌구, 특기자가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만들더라도, 그런 방식들을 통해 평가하고 서열화시키는 가치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정말 극소수의 예술적 학문적 경우를 제외하면, 현재의 공교육이 평가하려는 가치는 대동소이하다. 얼마나 주어진 환경에 잘 순응하고 성실하게 생활하는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주어진 문제를 얼마나 빠르게 ‘해결’하는가? 얼마나 문제 낸 사람의 의도를 잘 추측하여 ‘정답’을 잘 찾는가? 얼마나 주류적인 기술을 잘 구사하는가? 얼마나 계량화되고 정식화된 주류적인 교과서의 지식들을 잘 외우고 잘 사용하는가? 얼마나 말을 듣기 좋고 유창하게 하고 글을 논리정연하고 무난하게 쓰는가? 그런 기준들에 더해서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글쓰기 등의 국민공통교과목들과 입시 교과목들도 ‘가치’의 관점에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최근 논술이나 몇몇 방식의 시험들은, 대학의 서열에 따라 평가하는 가치들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서울대나 연세대의 논술 문제는, 전남대나 경북대의 논술 문제에 비해 더 날카로운 사고와 더 많은 교과서 외의 지식들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또한 결국 인간의 풍부하고 다양한 가치, 능력, 소질, 적성들을 온전히 평가하기 위한 것들이 아니라, 지식기반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능력들을 좀 더 차별화해가며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의 입시경쟁교육은, 말하자면 가치의 독과점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육상경주 중에서 800m 달리기를 잘하는지 허들 경주를 잘하는지 100m 달리기를 잘하는지 마라톤을 잘하는지… 그런 식으로 다양한 육상경주의 방식들을 통해 경쟁하더라도 결국 거기에서 평가하는 가치들은 육상경주에 필요한 순발력, 지구력, 다리 근력, 달리기 자세, 등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모두 질적으로 다르고 다양한 능력, 적성, 가치들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소수의 기준들 ― 말하자면 수학문제를 잘 푸는가, 언어영역 문제를 잘 푸는가, 수능영어를 잘 해석하는가, 수행평가 숙제를 열심히 해오는가, 기술 자격증을 많이 따는가 등등 그런 것들 ― 만으로 경쟁시키고, 그것으로 그들의 존재의 가치들을 평가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불평등하고 폭력적이다. 현재의 입시경쟁교육은, 사람들의 발달권과 교육권을 심각하게 제한하거나 저해시키며, 일원적인 가치체계에 기반한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써, 인간의 존재에 대한 다양한 차별을 낳는다. 현재의 주류적인 사회가 요구하는 몇몇 요소들 ― 능력들, 재산 정도, 상품성, 정체성 등 ― 만이 우대를 받고 그밖의 것들이 주변화되고 무시되는 현상은, 인간 전체에 대한 왜곡과 차별을 낳는다.


  따라서 다원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교육 방식, 교육 내용, 교육 과정 자체를 완전히 갈아엎고 재구성해야 한다. 학교에서 체득하게 되는 순응적 생활방식과 교과서의 지식들이 진리(?)의 위치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은 인정할 수 없다. “실업계는 직업교육 인문계는 대학진학” 식의 분리는(물론 실업계 학생의 다수가 전문대를 진학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얼마나 의미가 있는 분리일지 의문이지만) 대학진학을 통해 고학력과 학벌을 획득하는 것을 더 우월한 가치로 평가하는 현실에서 가치의 서열화와 불평등을 가속화시키는 것일 뿐이다. 대학서열화와 학력 및 학벌로 대표되는 차별 현상은 물론이요 학과간, 분야간 불평등 또한 다원적 평등을 추구하는 교육에서는 있어서는 안 된다.

  경쟁을 중심으로 한 교육은 필연적으로 가치의 독과점 체계와 함께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쟁은 교육의 중심 가치가 되어선 안 된다. 보수 언론 같은 데가 종종 경쟁, 서열화를 다양성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다. 경쟁과 서열화는 독과점된 가치체계에 기반하여 인간을 평가하고 구분할 뿐이지, 인간의 여러 가지 입체적인 차이들을 반영하지는 못한다. 이런 경쟁을 중시하는 이야기는 보통 “국가경쟁력”과 같은 국가주의적 주장, 그리고 “효율성” “경제성장”과 같은 자본주의적 주장들과 함께 몰려다니는데, 인간의 권리와 다양성, 평등의 추구를 근간에 두는 교육과 국가주의나 자본주의처럼 인간을 수단화하고 ‘인적 자원’으로 취급하려는 주장들은 사이가 매우 안 좋을 수밖에 없고 만나기만 하면 싸우게 되는 건 당연하다.

  이처럼 다원적 평등의 교육은, 현재의 입시경쟁교육과 학교 교육 체계, 그리고 국가주의 및 자본주의와 같은 사회 체계 전반과 충돌한다.


  교육을 통해서 계급과 계층이 재생산되는 현상은, 공교육 시스템이 평가하고자 하는 기준들이 대체로 부유층의 사람들에게 유리한 데서 기인한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학습시키는 내용들이 사회의 주류적이고 지배적인 가치를 반영하고 있으며, 학교에 취학하기 전에 경험하게 되는 언어 환경, 지식 환경, 문화자본 등은 학교에서의 ‘성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교육이나 유학 등을 통해서 학교에서 평가하는 주류적인 가치와 능력들을 향상시킬 기회 또한 부유층의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갖고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내가 경제적으로 상위에 있는 가정에 속하는 청소년이 불평등 구조에서 상위를 차지한다고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원적 평등의 입장에서는 가치의 획일화와 서열화 자체를 비판하기 때문에, 주류적인 독과점 가치체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누구는 더 갖고 누구는 덜 갖기 때문에 문제다,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 이야기를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경제적인 문제가 획일적 불평등을 만드는 하나의 요인임은 분명하고, 빈곤층의 청소년들은 다양한 삶을 모색해볼 기회조차도 더 적은 불평등 속에 놓여 있다. 경제적인 요건이 차별과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가치의 독과점체계에서 주요하게 작용하는 요소 중 하나이며, 빈곤층이 부유층에 비해 전반적으로 열악한 성장환경, 교육환경을 경험한다는 것은 반드시 인식해야 하는 교육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이 빈곤층도 입시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교육적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해서는 안 된다. 내 말은 주류적인 가치체계를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의 서열화와 획일화 체계 자체를 비판하고 인간 모두의 발달권과 삶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입시경쟁교육 체계가 부유층에게 더 ‘유리’하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현재의 입시경쟁교육 체계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것이 부유층들의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식으로 추측하여 이를 정치경제적 문제의식으로 연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유층 가정에 속해있으면서 학원과외 뺑뺑이를 돌고 자신의 적성이나 능력이나 꿈과는 무관하게 정해진 코스를 따라 판검사, 변호사, 공무원, CEO, 의사, 약사 등이 되어 살아가는, 그런 청소년이 온전하게 행복하고 좋은 삶을 살며 자신의 ‘발달권’을 온전하게 실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부유층 청소년들이 사회적 가치들을 내면화하면서 사회화하기 때문에 자신의 그런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많지 않더라도. 그래서 프레이리는 『페다고지 - 피억압자의 교육학』에 현재의 억압자와 피억압자로 이루어진 사회를 혁명하는 것은, 피억압자와 억압자 모두의 해방을 이루는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을 생각할 때, 개인의 ‘자유’나 인간의 본성이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청소년들은 스스로 입시경쟁과 사회의 현실을 파악하고 소극적이건 적극적이건 체제에 순응하면서 사교육이나 영어공부, 입시준비와 취업준비 속에 뛰어들어 살아가고 있다는 게 더 타당할지도 모르며, “너희는 온전히 행복하지 않아!”라거나 “너희는 너희의 권리를 침해받고 있어!”라고 외치는 것은 오만이거나 독선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사회,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또한 나 자신과 내 몇몇 친구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입시경쟁교육과 학교 교육, 사회 속에서 불만, 불안, 불행 같은 느낌들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독립적 개인의 ‘자유’ 같은 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은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가? 그건 분명히 개인의 ‘자유’라는 신앙에 근거하여 사회를 비판하는 ‘순진한’ 주장들을 해체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우리의 윤리 또한 해체한다. 사회 문제를 다룰 때 사람들이 자발적인지 외부로부터 강제당하는지를 논하는 것에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사람들 또한 사회문제를 구성하는 구조의 일부이며, 중요한 건 그들이 자발적인지 비자발적인지가 아니라 (자발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상황이 바람직한지 바람직하지 않은지에 대한 가치 판단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내가 주장하는 대로 욕망하고 살아야 한다고 할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육과 사회에 대해 주장할 수밖에 없으며 또 그 실현을 위해 내 욕망에 따라 노력할 것이다. (뭐, 막간에 잠시 끼어든 변명이었다. -_-)



  나는 “가치의 독과점체계”, “일원화”, “경쟁”, “획일화”, “서열화” 등의 말이 단지 교육이나 입시경쟁에만 적용되는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전반적인 특징이며, 교육은 단지 그런 특징이 나타나는 한 영역일 뿐이다. 따라서 ‘다원적 평등’과 ‘발달권’, ‘평등권’ 등의 개념에 근거를 둔 입시경쟁교육에 대한 비판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 전체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도 시대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더 중시되고 더 인정받는 특질이나 가치들은 당연히 있었을 것이며, 자본주의는 그런 경향을 좀 더 강화하고 체계화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뭐 여하간에 그런 데까지 가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까, 일단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근대 사회에만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질적으로 다른 것들은 양적으로 비교될 수 없는데 그것이 시장에서 정해진 “가격”을 가지고 거의 완전하게 교환가능하고 비교 가능하다고 선언한 것이 근대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방식이다. 사람들의 고유의 다원화된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소비” “소유” “효율적 생산” “상품성”과 같은 몇몇 방식으로 가치를 제한시키고 사람들을 평가함으로써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며 여기에 이름을 붙인다면 대략 일원화와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일원화는 가치들을 비교 가능한 하나의, 또는 소수의 가치로 환원하여 양적으로 비교하려는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근대 사회는 그런 일원화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경쟁시킴으로써 통제하고 사회화시켜서 이윤을 극대화한다. 여기서 소수의 가치란, 우선 자본의 증식 = 이윤에 도움이 되는 것을 말하며 시장에서 잘 팔리는 상품이 되는지 여부를 말한다.

  입시경쟁교육은, 어쩌면 이러한 근대 자본주의적인 방식을 사람들에게 학습시키고 그것을 당연시하게 여기는 것을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나는 다원적 평등의 실현이 사회적 가치의 다원성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입시경쟁교육의 문제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 전체와 함께 다루어져야 할 문제인 것이다.



Imagine, 인간적이고 평등한 교육


  부족하고도 미흡한 실력이지만 대충 회 뜨는 작업을 했으니, 이제 이걸로 어떤 요리를 할 수 있을지 상상해보자. 다원적 평등이 실현되고, 사람들의 발달권이 가능한 한 많이 보장되는 교육과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이 이야기는 그다지 구체적인 얘기는 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원칙과 틀을 제시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선 다원적 평등은 사회적 가치의 다원주의를 기본으로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다원적 평등은 직업간의 소득 불평등이나 직업에 대한 사회적인 불평등을 해소하거나 최대한으로 완화할 것을 요구한다. 사회에서의 직업에 따른 불평등과 그에 따른 대학 학과 및 종류의 불평등이 대부분 사회의 주류적인 가치체계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다. 과연 의사나 판검사, 변호사, CEO의 업무가 만화가, 청소부, 버스기사 등의 업무보다 세 배, 다섯 배 이상 중요하고 그만큼의 사회적인 가치있는 것들을 더 만들어내는 활동인 걸까, 하는 문제제기는 고전적이기까지 하다. 학력이나 학벌과 마찬가지로 직업영역, 학과 등도 모두 가치 기준이며, 이를 서열화하고 위계화하지 않는 사회는 다원적 평등의 기본 조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가치의 평등이, 교육에서의 가치의 평등 또한 보장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직업이건 어떤 일을 하건 얼마나 일을 하건 무관하게 똑같이 취급하자는 이야기냐면서, 오히려 이는 획일화라고 반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주장은 그런 것은 아니다. 그건 “다른 것을 같게” 취급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다원적 평등은,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하며 다원적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도 임금의 차이나 노동 조건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을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사회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사회의 다원화는 필연적으로 분야별 직업별 수입이나 조건의 차이를 대폭 감소시킨다. 노동이나 노력에 대한 평가는, 인간의 매우 다양한 사회적 욕망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가 될 것이다. 사람들의 노력의 정도에 따른 격차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적어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은 인권으로서 보장될 것이다.


  다원적 평등을 추구하는 교육은, 현재와 같은 국가독점 교육, 학교 교육을 부정하고 다양한 방식과 내용의 교육을 지향한다.

  교육의 근본은 경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조차도, 공교육의 ‘정상적 기능’은 사회적 평등을 이루어 내고 사회 내의 차별, 갈등, 교육 격차를 줄이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공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육을 사회적 격차를 줄이는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교육의 내용과 사회적 교육적 가치의 불평등, 일원화, 서열화에 대한 고민들은 필요 없게 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발달권과 교육권의 최대한의 실현은, 공교육에서는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사회통합과 사회적 격차를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공교육’은, 인간을 사회에 편입시키고 사회에서 강조되고 통용되는 가치와 방식들을 개인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하지만 교육이란 게 원래 인간을 ‘사회화’시키는 것을 중요한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포괄적으로는 인간을 사회화시키는 모든 활동에 “교육”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겠지만, 사실 제대로 된 의미의 ‘사회화’는 결코 인간을 현존하는 사회체제에 일방적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성을 발달시키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능력, 적성, 소질을 발달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고 다양한 행복을 모두와 함께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학교 건물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학생’으로서 관리하고 거기에 순응하는 정도에 따라 ‘학생’들을 평가하는 방식의 교육은 근본적으로 가치의 일원화와 서열화를 내포하고 있다. 설령 학교 자체가 국가독점을 벗어나더라도, ‘학교’의 개념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큰 차이는 없다.


  다원적 평등의 교육은, 학교라는 방식을 벗어나서 공동체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내용, 여러 가지 방식의 교육 과정과 교육 제도들을 추구한다. 사회적 공동 육아, 도서관과 박물관, 예술센터 등을 비롯한 지역사회의 여러 시설들과 노동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교육과 토론, 교류, 여러 종류의 교육시설들 등이 다원적 평등의 교육의 모습이 될 것이다. “탈학교” 같은 말은, 고정된 ‘학교’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의미가 없어진다. 가장 기초적인 초등교육내용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이수되겠지만, 그 이후에는 대학 졸업여부나 고등학교 졸업여부 같은 말이 아예 성립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다원적 평등은 사회적인 인간의 권리와 발달과 행복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인간적인 교육을 추구한다. 따라서 한 쪽이 지식을 독점하고 그것을 다른 한 쪽에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민주적인 토론과 대화의 방식을 취하며, 또한 사람들의 그때 그때의 컨디션, 욕망, 상태 등을 고려하여 유연하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를 위해서 소규모 체제를 유지해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사람들을 평가하는 방식은 결코 서열화하고 점수를 매기고 계량하는 방식이 아니다. 모든 다양한 교육 과정 중에서는 따로 평가가 필요하지 않은 것도 있으며, 평가가 필요한 경우에도 여러 사람들이 주관적인 대화와 피드백을 통해서 상호적인 평가를 하게 된다. 사회 자체가 총체적으로 인간을 대우하는 방식은, 기본적인 인간성을 평등하게 존중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다르기에 그 다름을 평등하게 다르게 대하는 방식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정말, Imagine - 그러니까 상상 속의 이야기로만 들릴 수도 있다. 또는 뜬구름 잡는 추상적인 말들의 나열로 보일 수도 있다.

  일단 이게 추상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건, 나도 아직 경험해보지도 못한 일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이야기하는 게 무책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앞으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현실을 나 혼자 이러쿵저러쿵 자세하게 규정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교육, 이런 사회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 글쎄. 나는 이게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를 말할 수 없다. 논리적으로, 무한히 다원화된 사회의 존재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할 수는 있다. 다원화는 다원화에 대한 부정 또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고서, 저런 교육방식이나 사회 구조 자체에 대해서는, 그 실현가능성에 대해 아직은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실제로 실현하는 것 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증명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뭐 설령 이게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여기에 가깝게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이상이라는 것으로도 충분한 건 아닐까, 지금으로서는?





◎ 괴물 앞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이대기


  이 글을 시작할 때 나는 괴물과의 싸움이 어렵지만, 괴물 앞에서 먼저 와서 싸우고 있던 사람 ― 교육운동과의 관계맺기도 어렵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불쾌하게 받아들이거나, 또는 운동 안에서의 분열을 조장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주장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뭐, 그런 생각에 대해서 딱히 반박을 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이건 분명히 섭섭하거나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고, 또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소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하간 내 생각은, 그 안에서의 긴장과 불평등한 권력관계 등을 안고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단합’이나 ‘단결’이란 건 허구이고 올바르지 못하며 차라리 분열하는 게 낫다는 거니까.


  먼저 교육운동에 대해 내가 느끼는 몇 가지 고민들을 털어놓는 걸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먼저, 감히 이런 말을 하기 좀 눈치 보이긴 하지만, 교육운동을 하는 몇몇 단체들은 현재 어느 정도 ‘관성화’되어 있어서,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고 창조하기보다는 정책적 대안만을 만들어내고 이미 조직되어 있는 사람들을 동원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단체들이 만들어내는 교육 문제에서 정책적 대안은 물론 중요하지만, 거기에만 치중하는 단체들의 경우는 현장에서의 실천을 어떻게 끌어낼지에 대한 고민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무엇보다도 교육운동 진영은 지금까지 주로 교사나 교수,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움직여왔기 때문에 청소년들을 타자화-객체화하고, 수혜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예 : “입시경쟁에 내몰리는 우리 아이들을 살리자!”와 같은 구호나, “우리 아이들을 해방시켜줘야 한다.” 같은 표현들) 동등한 연대 상대로 생각지 않는 경향이 있다.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 극히 일부만이 운동의 현장, 교육현장에서 만나는 청소년들을 동등한 연대의 대상, 운동의 주체로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다른 문제의식도 없이 청소년들을 하대하고, “~군”, “~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 입시지옥에서 구해줘야 할 불쌍한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어른들이 잘못해서 우리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으며 이제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해방시켜줘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뱉어낸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쉽기에, 이런 점은 청소년들과의 연대의 과정에서 계속 크고 작은 내부적 마찰을 빚는 원인이 되어왔다.


  입시제도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교육운동 진영이 청소년인권 문제를 인식하는 방식의 문제도 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입시의 문제가 근본적인 문제고 대부분의 청소년인권 문제는 결국 모두 거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입시문제 해결 이전에 다른 인권 문제에 대해 전개되는 운동은 지엽적이고 표면적인 데 머무르는 것이다.”라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하는 것이다.

  입시제도와 같은 커다란 구조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지적에는 분명 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교사들이나 학부모들은 자신들이 일상적인 행동들(사교육을 시키고, 수업시간에 입시교육을 하고, 체벌이나 두발복장단속 등으로 통제하는 등)을 정당화하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이런 커다란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하려드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봐야 한다.

  그리고 종종 이런 식의 주장들은 실제로 구체적인 청소년들의 저항이 일어나는 순간들을 무마하고 흐릿하게 만들기도 하며, 또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여러 가지 복합적 문제들을 한 가지(“입시경쟁”, “입시제도”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들)로만 끼워 맞추려드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왜 인권을 무시당하는가? 청소년들을 괴롭게 하고 때론 죽게 만들기까지 하는 지금과 같은 교육은 왜 생겼고 계속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복합적이고 입체적이다. 이를 “이게 다 입시경쟁 때문이다.”와 같은 방식으로 단순화시키려 하는 것은, 어쩌면 입시경쟁과 맞장 뜨는 교육운동으로 청소년들을 포섭하기 위한 것은 아닌가, “우린 너희와 같은 편이야.”라는 제스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설령 의식적으로 그런 의도를 갖고 있진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내 탓이 아니다.”라고 말하고픈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론적인 면에서, 나는 교육을 통한 부의 대물림 등을 이야기하는 경제재생산에 대한 이론이 한계를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 문제를 계급적 입장에서 말하려는 방식은, ‘가정’(가족)을 하나의 경제적 사회적 기본단위로 하여 그 안에서의 이해관계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다. 물론 다수의 사회과학적 연구에서 가정을 하나의 기본적인 단위로 간주하는 방식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그다지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여성주의(페미니즘)는 가정 안에서 가부장과 여성 사이에 사회경제적 위치의 차이, 그리고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가정 안에서 보호자와 자녀(아동) 사이에도 사회경제적 위치의 차이가 있으며 이해관계와 목적과 동기와 욕망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는 없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정교한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경제재생산 이론이 입시경쟁교육 속에 놓여 있는 청소년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데 충분하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청소년들 중에서 입시 문제나 성적 문제 등으로 인한 자살이 더 많은 쪽은 성적이 매우 낮고 가정도 아주 빈곤한 경우보다는 오히려 성적이 중위권, 또는 상위권이면서 가정에서의 지위 상승 욕구와 압박감이 강한 경우이다.

  하지만 기존의 교육운동 진영은 입시경쟁으로 인한 청소년들의 자살 ― 사회적 타살을 강조하고 이를 부각시키지만, 그러면서도 “현재의 입시경쟁은 출발선이 다른 불공정한 경쟁”이라거나 “돈 많은 집에 유리한 입시”라는 식의 이야기를 입시경쟁교육 비판의 중심에 둔다. 이러한 이론적인 불협화음은, 청소년들의 상황은 ‘가정’을 이해관계의 기본단위를 가정하고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에 교육 문제를 단지 경제재생산이나 지역간 격차, 계층간 격차의 문제로 접근한다면 교육내용 자체에 대한 질문은 사라지게 된다. 문화재생산 이론이 이야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교육운동 안에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으며, 청소년의 입장에서 교육내용과 방식이 어떤지에 대한 고민도 많지 않은 듯하다. 교육운동의 여러 현장에서 간간이 접할 수 있는, “학원을 못 가서 학원 다니는 애들을 부러워하는 가난한 집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럼 과연 그 사람들이 학원에 다니면서 입시공부를 하는 것이 행복한 일인지에 대한 질문을 피해가게 하곤 한다.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런 문제를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승전국의 병사들과 패전국의 병사들은 이 더러운 싸움에서 무엇을 얻었나 / 죽어야만 얻을 수 있는 영예를 얻었고 / 다쳐야만 얻을 수 있는 명예도 얻었지 / 폐품이 될 때까지 일할 수 있는 그 고마운 자유도 얻었지”라는 구절이 있다. 입시경쟁교육의 문제는, 어쩌면 청소년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거기에서, 진짜 승리자는 과연 얼마나 있는 걸까.


  교육운동의 이런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청소년인권운동은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고 비판해야 한다. 청소년인권운동으로서의 새로운 교육운동을 만들어가면서 다른 교육운동들을 변화시켜야 한다. 뭐 이런 식으로 좋게 좋게 말하기는 쉽지만,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교육운동에 비해 청소년인권운동은 돈도 적고 사람도 적고 규모도 적고 역사도 짧은, 힘 없는 작은 운동에 지나지 않는 게 현실이고 또 문제제기가 잘 먹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뭐 별 수 있나. 사실 이 글도 그런 짜증과 귀차니즘을 이겨내고 겨우겨우 써내려가고 있는, 교육운동에 문제제기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을.






◎ 맺으며 : 현실의 몇몇 운동들에 대한 언급


  나는 이 글에서 다원적 평등을 교육의 근본 원리로 세우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교육의 모습을, 추상적인 차원에서라도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지금부터는 현실의 운동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보려고 한다.


  먼저, 입시경쟁이 계속 유지되는 한편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현실에서 입시경쟁을 없애는 것은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운동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입시경쟁을 없애기 위해서 현재의 학벌체제, 대학서열체제를 부수고 대학평준화를 이루는 것은 제도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2007년부터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대학평준화는 정책적 수단이며 하나의 중간단계일 뿐, 그 자체로 교육의 완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학서열화가 있는 상태에서 고교평준화는, 다원적 평등을 실현하는 교육이 아닌 획일화된 교육을 낳았다. 이는 사실 고교평준화의 문제라기보다는 대학서열화와 현재의 교육과정 자체의 문제에 가깝긴 하지만, 여하간에 일원화와 경쟁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겉으로 보기에만 ‘평준화’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결코 다원적 평등을 실현하지 못한다. 그렇게 볼 때 개념적으로 더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입시폐지’ 또는 ‘입시경쟁폐지’일 수도 있다.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 홈페이지에 걸려 있는 또 하나의 기치가 “학벌철폐”인 걸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현재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운동은 학벌 문제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학벌 이상으로 학력에 대한 차별은 교육의 다원적 평등을 저해하고 공교육과 대학교육의 독점적인 위상을 강화시켜준다. 학력의 문제도 그렇고, 실업계/인문계 분리의 문제도 그렇고, 사실 여러 가지 고민들이 필요하다. 입시폐지 대학평준화를, ‘공교육 정상화’나 ‘공교육 강화’의 관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다른 교육, 인간적이고 평등한 교육을 향해 가기 위한 중간 과제로 이해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그리고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운동 또한 앞 부분에서 언급한 경제재생산 이론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나 청소년들을 대상화, 객체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청소년인권운동이 이런 부분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새로운 입장을 내놓음으로써 변화를 만들어내야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뭐 그냥 적극적인 연대를 포기할 수도 있다. 여하간에 나는 이게 새롭게 만들어지는 운동이니만큼, 기존 교육운동의 방식들을 답습하지 않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조금이나마 있지만, 어떻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대안교육운동 또는 대안교육에 대한 시도들은, 현실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뭐 그건 사실 다른 교육운동의 구상들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가치의 독과점 체계, 일원화와 경쟁 등의 문제들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전반적으로 갖고 있는 성질들이고, 교육영역만을 거기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방식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은, 교육영역의 변화가 사회 전체의 변화들과 함께 가거나 사회 전체의 변화를 만들어낼 계기가 되지 않는 한은, 애초에 오래 갈 수 없는 기획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학교나 대안교육시설, 방식 등을 시도하는 것은 지금의 교육 현실과는 다른 방식의 교육에 대한 경험이나 사례, 가능성을 개척하는 것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그것이 궁극적, 장기적으로는 실패하더라도 그런 실험의 경험들은 변화에 여러 가지 형태로 기여할 수 있으며, 심하게 이야기하면 그런 실험들이 없이는 새로운 변화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물론 어떤 대안교육인지도 따져봐야 할 것이고,(몇몇 종교계 대안학교들에서 가끔씩 보이는 억압적인 모습들은, 과연 대안적 실험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지 의문을 느끼게 한다.) 대안교육운동이 갖고 있는 비청소년 중심적인, 교사나 학부모 중심적인 모습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대안교육이 하나의 완성된 정답을 향해 가는 게 아니며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고 계속 반성하고 바꿔나가야 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대안교육은, 현실 위에서 시도되는 ‘대안’이지, 결코 완성된 ‘이상’이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2007년에 만들어진 교육복지실현 국민운동본부에서 하는 교육복지 운동은, 내가 직접 참여하거나 많이 접해보질 못해서 잘 모르는 면이 많겠지만, 대체적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교육운동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 중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농어촌 교육에 대한 지원, 빈곤층에 대한 교육 지원, 아동의 건강권, 급식 문제 등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그 외에도 학생인권, 대학평준화와 공동학위제, 기타 등등을 모두 요구안으로 발표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운동이 무엇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다소 피상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걸 사과드린다.

  일단 교육복지 운동은 기존의 교육운동들이 가져왔던 청소년에 대한 시혜적이거나 통제적인 관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은 반성해야 할 부분이며 이후 청소년인권운동이 개입할 기회가 있다면 개입을 통해서 고치도록 요구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교육복지 운동이 ‘복지’의 차원에서 농어촌과 빈곤층의 교육격차, ‘교육 양극화’를 해소하려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교육 문제가 경제 격차 지역 격차 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 말하자면 경제재생산 이론이 안고 있는 한계까지 고려하지는 않고 있다고 생각된다. 교육복지 운동은 그 운동의 성격이나 양태로 볼 때 청소년인권운동이 개입하기가 특히 어려워 보이지만, 그래도 교육의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로서의 측면, 교육의 격차나 양극화의 문제 또한 놓고 갈 수 없고 놓고 가서도 안 되는 영역이다.


  또 하나 사족인데, 여러 교육운동들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외국 이야기는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분명히 한국의 현실보다 더 나은 사회도 외국들 중에는 있을 것이고, 여하간 현재와는 다른 어떤 체제가 가능하다고 제시하는 것도 못할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과 외국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은 다르다는 진부한 문제제기도 가능할 것이고, 과연 한국보다 좀 더 낫다고 해서 외국의 어떤 제도나 사회 상황을 이상적인, 지향해야 할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사람들의 모든 인권의 보장이라거나 다원적 평등의 실현 같은 이상이 실현된 사회는 없다. 단기적 과제로서 외국의 사례를 참고하거나 제시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인 것처럼 미화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뭐 이런저런 운동들을 언급했지만, 사실 내가 하고 싶은 ‘교육운동’은 하나다. 거듭 말했던, 바로 ‘청소년인권운동’으로서의 ‘교육운동’이다. 청소년인권운동이 연대할 대상으로서의 교육운동이 아니라, 청소년인권운동의 한 분야이자 일부로서의 교육운동이다. 청소년인권의 입장에서, 청소년들을 운동의 주체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들의 다양한 발달을 보장하는 교육이다.

  그게 되겠냐, 라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입시경쟁교육이라거나 현재의 학교 교육이라는 괴물도 인간이 만든 괴물이니까, 인간의 힘으로 없앨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게 너무 안이한 생각일지는 몰라도 여하간에 없앨 수 없다는 증명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또한 다원젹 평등을 추구하는 교육을 만들어갈 수 없다는 증명도 아무도 하지 못했다.

  입시경쟁교육이라는 괴물을 함께 쓰러뜨리는 그날까지, 카운트 다운을 시작해보자. 20, 19, 1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