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먹는 것에도 민주주의가 있다

공현 2008. 7. 14. 17:13
아수나로북에 들어가는
급식, 청소년인권, 먹거리, 식품, 생태적 먹거리, 건강권 뭐 그런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먹는 것에도 민주주의가 있다



  급식 괴담을 아는가? 국에서 바퀴벌레 시체가 나왔다거나, 구더기가 나왔다거나, 몇몇 사립학교들 같은 경우는 급식비는 비싼데 급식의 질이 형편없는 걸 봐서는 뭔가 비리가 있다는, 뭐 그런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들 말이다. 학생들이 벌레 등이 들어간 급식을 먹고 괴물이 되어버리는, <급식해저드>라는 만화까지 있을 정도다.
  이런 사실적 괴담(?)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급식으로 인한 집단 식중독이라거나, 어느 사립학교에서 급식비리가 있었다거나 하는 생생한 사건들을 직접 경험하거나 전해 듣곤 한다. 특히 최근에는 vCJD(변종크로이츠펠트야곱병. 소위 ‘광우병’. 나는 소에게 “미쳤다”라는 딱지를 붙이는 광우병이라는 이름에 반대한다.) 위험 쇠고기까지 대두되면서 먹거리의 안전성이라는 문제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먹거리 문제는 중요한 청소년인권 문제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건강권/안전할 권리와 알 권리(식품과 소비자 이야기할 때 꼭 등장하는 두 권리),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말로 풀어보려고 한다. 먹는 것에도 민주주의가 있다. 아주 중요한.




급식운영을 민주화하라!


  먼저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부터 지적하자면, 급식운영을 민주화하는 것일 터이다. 특히 급식을 직접 먹는 당사자들인 청소년/학생들(그리고 교사들)의 급식운영 참가는 중요하다. 급식운영에서의 예산과 시설, 그리고 전반적인 운영의 의사결정 과정에 학생들이 참여해야 한다. 학생들의 의견을 실시간으로 수렴하고, 학생들의 권익을 보장할 수 있는 학생 급식 담당자들을 둘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급식의 문제 중 상당수는 급식을 직접 먹는 당사자들의 의견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고 학생들은 그저 주는 대로 먹어야 했다는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사육’당한다고 느끼는 데는 그런 급식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급식운영에 학생이 참여하는 것도, 소수의 사람들만 급식운영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급식운영에 대해 알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하고, 수시로 학생들이 운영에 참여하거나 급식시설을 체험/감시할 수 있도록 하여 급식 과정과 가까워지고 이를 통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위탁급식(급식업체에 돈을 주고 급식을 맡겨서 운영하는 것)보다는 직영급식(학교에서 직접 급식을 운영하는 것)이 더 민주적이다. 기업을 거치는 위탁급식보다는 아무래도 직영급식에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고 감시할 여지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직영급식은 기업의 이해관계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학교에서 직접 운영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또, 직영급식은 위탁업체보다 식중독 발생률이 낮다. 급식 위탁업체는 급식 시설비용도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이윤을 남기기 위해 값싼 식재료를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모든 학교의 급식을 직영화하기는 어렵겠으나 점차적으로 예산을 확보하고 시설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급식운영 참여를 보장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vCJD 위험 쇠고기의 경우에도, 이런 직영급식과 학생들의 민주적인 참여와 통제를 통해 vCJD 위험 쇠고기가 급식에 사용될까봐 불안해하는 것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다.(사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자체도 비민주적인 정부의 독단에서 비롯된 문제다.)




먹거리는 그냥 상품이 아니다!

  하지만, 급식운영 과정에서의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기초이다. (그 기초조차 안 되어 있어서 입 닥치고 먹어야 하는 게 현실이기도 하지만 -_-.) 이제 우리는 식재료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과정 자체의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로부터 먼 어딘가에서 어떻게 만들어진지도 모르는 식재료들과 식품들이 어떤 과정으로 유통되었는지도 모르게 근처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들을 돈 주고 샀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알 권리나 건강권, 민주주의 같은 것은 고려대상이 아니거나 ‘복불복’ 식으로 운에 맡겨지게 된다.
  그 대안으로 유통과정을 축소시키고 생산지의 소식을 전해들으며 생산 과정이나 방식 등을 최대한 공개하는 생활협동조합(생협) 시스템이나 산지 직거래 방식 등이 나오고 있다. 이런 방식 속에서, 생산자와 소비자는 좀 더 소통하게 되고 좀 더 민주적으로 생산과 유통과정에 개입할 수 있게 된다. 생산 과정에서 더 생태적이고 안전한 먹거리를 만들기 위한 노력과 함께. 먹거리는 우리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한 상품 논리만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 무상급식 : 먹거리가 단순한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무상급식은 중요한 가치이다. 일단 무상교육의 이념 속에서는 학교에서 먹는 급식도 무상이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무상급식은 먹거리가 단순한 상품이 아니고 기본적인 권리라는 관점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최소한으로 필요한 건강한 먹거리는 돈과 관계없이 먹을 수 있음을 당연한 것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교육적 목적에서라도 무상급식은 필요하다. 예산 해결을 위해 성금이나 기부금을 모을 수도 있을 것이나, 그 기본은 공짜 급식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내가 생태적 먹거리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넘어가겠다. 생태적인 먹거리의 요건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우선 살충제나 화학비료, 성장촉진제 같은 수단(생태계를 파괴하고 먹는 사람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을 사용하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것이 기본일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서는, 한 가지 종류의 작물을 집중적으로 재배(농약, 살충제에 의존하거나 유전자를 조작해가며)함으로써 생태계를 붕괴시키거나 동물들을 매우 파괴적인 환경에서 성장촉진제와 항생제를 쩔도록 투여해가며 대량사육하는 등의 공장식 대량생산시스템이 아닌, 좀 더 생태계를 존중하는 생산 시스템에서 나온 먹거리를 ‘생태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생태적인 먹거리는 지속가능한 식량생산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기만일지언정 조금 더 동식물 윤리적인 생산을 위해서도, 마지막으로 그 먹거리를 먹는 사람을 위해서도 꼭 실현되어야 한다. 특히 vCJD나 조류독감 등의 질병이 동물들을 공장식으로 대량생산하는 축산업 시스템에 의해 더 쉽게 전염되고 있으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질병’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생태적 먹거리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소의 vCJD와 관련하여 소를 죽인 나이가 20개월이나 30개월이니 말이 많은데, 실제로 소의 평균수명은 약 20년이다. 그런 소를 2~3년 동안 성장촉진제와 동물성 사료, 항생제를 먹여가며 강제로 빨리 키워서 죽이는 이 시스템이 과연 윤리적이거나 생태적인 걸까?)
  이런 생태적 먹거리들이 현재로서는 비싼 축에 든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싼 가격에 사먹었던 공장식 대량생산시스템에서 나온 먹거리들이 그 싼 가격 대신 얼마나 많은 생태적 가치 등을 희생해왔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생태적 먹거리를 먹을 수 있도록 사회가 보장해야 하며, 육식과 대량소비에 익숙해진 사회구조를 변화시킬 필요도 있다.
  이와 같은 시스템을 급식에 적용한다면, 학교 차원에서 직접 학생, 교사와 함께 농사나 양식 등을 통해 생태적인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을 구상해볼 수 있다. 실제로 학교에서 먹는 식량을 다 조달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책임지고 안전한 먹거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또, 단순히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위치를 넘어서 어떻게 먹거리가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중요하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하면 지역의 학교들과 생활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생산자와 직접 소통하고 안전하고 생태적인 먹거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서 나는 학생들이 급식을 만들고 배식하는 과정, 설거지 과정 등에도 함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수학 문제 몇 개 더 푸는 것보다 중요한 교육은 이런 가사노동 분야이다. 30대가 되도록 제대로 할 줄 아는 요리가 몇 개 없어서 요리책에 의존하거나 일부 여성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는 결국 성별분업 논리(사실 급식을 맡아서 만드는 직원들의 다수는 여성이다.)물론 수백 명, 수천 명의 학생들이 먹는 급식을 학생들이 하루종일 만들고 있을 수는 없지만 정기적으로 학생 당번을 정해서 돌아가며 급식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방안 등과 학교당 학생 수를 줄이는 일 등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먹이는’ 존재가 아니다

  급식을 비롯해서 먹거리에 관한 논의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것은 청소년들을 매우 수동적인 존재, 또는 보호해야 할 대상 정도로만 취급하는 태도이다. 급식문제에 대해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걸 먹이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심정” 운운하는 것은, 성별분업적 표현(왜 항상 어머니가 먹거리를 걱정하는 제1순위 주체인가?) 때문에도 옳지 못하지만, 아동-청소년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본다는 점에서도 옳지 못하다. 학교에서만 탄산음료 판매를 금지시키겠다는 정책도 그렇다. (특히 2007년 무렵부터 있었던 “아이건강국민연대”는, 비록 그 운동 내용이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고는 해도 이런 관점을 고집하고 있는 면이 많다. 여기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
  물론 먹거리나 건강에 관한 문제를 개인의 선택이나 자유로만 이야기하는 건 사기다. 거짓말이다. 먹거리를 만들고 유통시키고 소비하는 구조가, 사회적 시스템이, 생활양식과 패턴, 환경은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 것과 무관하게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건강권을 맡기겠다는 건 무책임이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까지의 급식이나 먹거리 관련 운동이나 정책들은 아동-청소년들을 주체적인 존재로 파악하지도 않았고, 그 운동의 운동주체로 보지도 않았다. 그 결과 앞서 내가 말한 것과 같은 민주적인 급식이나 학생들의 참여 같은 중요한 부분들은 간과되었다. 교사나 부모들은 때때로 편식을 못하도록 ‘급식지도’를 한다면서 체벌과 같은 강제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청소년들에게 탄산음료나 과자 같은 것이 뭐가 문제이고 왜 소비함녀 안 되는지를 알리고 스스로 소비를 줄이도록 하거나 그런 문제 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생산자를 규제하기보다는, 학교에서만 탄산음료를 없애는 이상한 정책을 쓰기도 했다.
  급식이나 먹는 것을 지도하는 과정에서도 강제적·강압적인 방식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심각한 영양의 불균형이 질병을 일으킬 정도라면 의학적인 처방과 지도가 필요하겠지만, 그런 수준이 아니라면 급식지도는 설명과 설득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설명과 설득에 근거하여 교육하지 않으면, 강압과 강제를 통한 급식지도는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인 효과를 볼 뿐이다. 급식지도는 뭐도 가리지 말고 잘 먹어야 하고 몇 분 안에 먹어야 하고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먹거리 생산의 생태적 문제점들이나 알 권리, 먹거리 민주주의에 대한 포괄적인 교육이 되어야 한다. 최대한 다양한 식성(그것이 취향이건 종교적/사상적 이유건)을 고려하여 식단을 짜야 할 것이고, 다양한 음식들을 자율배식하는 형태가 가장 좋을 텐데 일부 식단에서는 조정 과정을 둘 수도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탄산음료 금지 같은 정책도 좀 우스운데, 학교에서만 금지하는 것, 그리고 청소년에게는 탄산음료가 해롭다고 금지시키려고 하면서 비청소년(어른)들에게는 아무 말도 없는 사고방식은 이상하기 짝이 없다. 학교 밖에서는 맘껏 먹어도 된단 말인가? 탄산음료는 특히 청소년들에게만 유해하고 비청소년들은 아무 문제 없단 말인가? 탄산음료나 과자 등이 그렇게 건강에 해롭다면 그냥 소비하도록 냅두는 것은 분명 좋은 정책이 아니며, 그 유해성을 충분히 알리고 강조할 필요는 있다. 아니면 차라리 생산자(기업)를 규제해야 할 텐데, 기업을 상대로 탄산음료나 과자 생산을 규제하는 일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좀 더 만만한 소비자-청소년들을,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라는 논리에 기대어 규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단순히 먹거리를 ‘먹이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먹거리를 ‘먹는’ 존재이며, 그 먹거리에 대해 의견을 내고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자꾸 ‘아이들의 건강권’을 들먹이며 청소년들에게 무엇을 먹이네 마네 어른들끼리 떠들지 말고, 청소년들과 함께 뭘 먹을지 말지, 그리고 어떤 먹거리를 어떻게 만들고 유통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실천하자. 당신들이 대신 이야기해주려고 하는 ‘아이들의 건강권’이라는 말은 지긋지긋하다. 이제, ‘건강권’을 우리의 제대로 된 인권으로 돌려받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