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촛불소녀, ‘도전’과 ‘희석’의 줄다리기

공현 2008. 9. 8. 12:29



옛날에 썼던 글들 짜깁기 혹은 재정리에 가까운 글들이네요;

흠...

시민운동가 대회에 낼 원고로 쓴 거예용.

총총.







촛불소녀, ‘도전’과 ‘희석’의 줄다리기




잠시 옛날이야기

  청소년들의 정치 참여라거나 사회 참여에 대해 이야기할 때, 혹은 청소년들의 주체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단체들이 종종 1920년대 학생들의 항일독립운동이라거나 1960년의 4.19, 1980년 광주, 1980년대 후반의 민주화운동 등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나로서는, 이러한 운동들이 과연 얼마나 유의미했는지 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방식으로 과연 청소년들의 권리가 인정되거나 쟁취되었는가? 혹은 이런 방식으로 청소년들(만)의 이해관계가 얼마나 공론화되었는가? 항일독립이나 민주화의 문제가 청소년들의 삶과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더해서 청소년들이 이야기하고 요구안으로 내걸었던 교육과 학교와 청소년들의 삶의 문제는 어디로 갔느냐는 질문이다.
  ‘성인’들의 역사는, 1920년대 항일독립운동이나 8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에 청소년들이 참여하면서 내걸었던 교육에 대한 요구,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요구 등은 잊어버렸다. 그들의 운동은 단지 독립운동이고 민주화운동일 뿐이었으니, 사학재단의 비리와 교사의 체벌폭력까지도 독재정권과 연관 지으며 투쟁했던 80년대 고등학생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묻혔다고 밖엔 할 말이 없다. 묻힐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조건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하간 묻혔다는 건 확실하다.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선명한 주장 없이 청소년들이 거대담론(민족독립이든 광복이든) 속에 뛰어들면서 했던 정치적인 활동들이,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나 지위를 증진시키는 데 명확하게 기여한 것 같지도 않다.




다시 지금 이야기 : “촛불소녀”

  그리고 나는 2008년 촛불집회의 현장에서도 그런 복잡한 문제를 생각한다. 광우병 이슈에 묻혀서 청소년들의 다양한 요구들이 묻혔다는 것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지만, 그래도 일단은 촛불집회 자체에서 사람들이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을 해석하는 방식에만 집중하도록 하자.
  많은 사람들이 5월에 촛불집회를 처음에 시작한 주역은 청소년들이었다고 말하며, 청소년들이 역사적 주체이고,(독립운동, 4.19, 광주, 민주화운동 등등의 양념과 함께) 대단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많은 사람들(여기서 ‘어른들’이나 ‘비청소년들’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이라고 한 것은 실수가 아니다.)이 이야기한다. 오죽하면 청소년들까지 나오겠느냐고 말하고, 청소년들이 기특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며, 아이들이 무슨 죄냐고, 어른들이 해주겠다고 말한다.
  이처럼 집회현장에는 아이들/청소년들에 대한 이중적 시각이 혼재해있다. 한편으로는 청소년들의 ‘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청소년들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그들을 대상화하려고 한다. 내 눈에는, 청소년들의 정치적 힘과 역할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것을 축소시키고 청소년들의 정치적 활동을 예외적인 것으로 한정하고 이를 기존 사회의 틀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 두려는 마음들이 엿보인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촛불집회 현장에서의 청소년들에 대한 태도는 기존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보수적이다.
  ‘미성년자’(차별적인 표현이다.)는 부모 동의서를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촛불집회 웹홍보물, 밤 10시 이후에 ‘미성년자’는 자진 귀가시키겠다는 방침,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는 나눔문화의 종이피켓과 집회현장에서의 구호들, 중고등학생들의 등교거부는 백안시하면서 대학생들의 동맹휴업은 지지하는 ‘여론’, 등교거부를 포함하여 청소년들의 행동을 알리는 홍보물을 삭제하는 안티명박카페와 정책반대시민연대 카페 운영진, 예비군이라고 칭하는 남성들의 여성과 청소년 등은 뒤로 물러나라는 폭력적인 행동 방식들, 집회가 경찰과의 충돌로 좀 위험한 상황이 될 거 같으면 가끔씩 다가와서 말을 걸며 위험하니까 그만 집에 가라고 ‘반말로’ 말하시는 어르신들, 연행자들 중에서 ‘미성년자’는 석방하라는 구호들, 연행되는 여성 청소년의 사진에, 사실과 다르게 “‘집에 보내주세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라는 캡션을 다는 신문 기사들(이건 청소년과 여성이 중첩된 보호주의의 발로일 것이다.), 초등학생 연행에 분개하며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 대상화는 완고했다. 거기에 대한 청소년들의 직접적인 ‘도전’조차도 흡수할 정도로. 마치 청소년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 도전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는 듯이. 밤샘시위를 할 때 만들어진 토론의 장에서 한 청소년이 청소년들에게 함부로 반말을 쓰는 사례라거나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 구호 등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지만, 그 발언에 대해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박수와 환호였다. 박수와 환호가 무슨 문제냐고? 그 박수와 환호가, 그 ‘도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청소년이 나서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기특하게 생각하고 응원하는 듯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나눔문화의 구호를 패러디해서 “어른들이 무슨 죄냐, 청소년이 지켜주자”라는 문구를 락카로 새기곧 다녔지만, 그 문구를 본 한 촛불집회 사회자는 “자신들이 지켜줄 테니 어른들은 마음 놓고 촛불을 들라고 하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어른들이 더 열심히 해서 우리 아이들을 지켜주자.”라고 발언했다. 몇몇 사람이라도 그런 청소년들의 문제제기에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는지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 전반적인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촛불소녀는 촛불집회 속에서 청소년들의 지위를 나타내는 아이콘이었다. 간단하게 해석하면, 촛불소녀는 청소년들(특히 여성 청소년들)이 적극적으로 촛불집회의 공간을 열고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나타내는 아이콘이다. 또한 촛불소녀가 계속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발언되고 다양한 표정의 이미지들이 만들어진 것을 볼 때, 촛불소녀는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하는 이미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촛불소녀는, 청소년들의 정치적인 도전을 희석시키는 많은 지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촛불소녀는 학교의 두발규제와 복장규제에 딱 맞는 머리 모양과 단정한 교복을 갖춰 입고 있으며, 순수하면서 또 당찬 ‘소녀’의 이미지를 어필하고 있었다. 촛불소녀는 현재 집회현장이나 운동 속에서의 청소년들의 지위에 관한 문제의식이 결여된 문제작이었으며, “촛불”이라는 상징(비정치적인, 순수한, 소망 기타 등등의 표현들과 연결되는)과 “소녀”라는 이미지를 내세움으로써 지켜줘야 할 약자, 혹은 순수한 존재로서의 (여성) 청소년들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기획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여서 ‘촛불소녀’를 만들어서 유포한 나눔문화가 촛불소녀를 만들기 전부터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를 구호로 띄웠다는 점, 또한 촛불소녀 기획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반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 <촛불소녀의 코리아> 카페의 공지에 올라가 있는 글 중에는, 우리 10대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었다며, 청소년들의 행동을 깜찍하다고 표현하는, 시선들을 그대로 담고 있는 글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촛불소녀”라는 상징의 내용과 뉘앙스를 받아들이는 그 속에 청소년들에 대한 보호주의적/차별적인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촛불소녀 자체의 죄이건, 아니면 사회적 현실의 죄이건. 촛불소녀는, 청소년들의 도전과 이 사회(청소년들 자신도 포함한)의 희석이 만난 결과물이며 줄다리기 과정에서 나온 흔들리고 변화하는 아이콘이다.




뒤늦게 설명하는 “왜”

  여기까지의 내용을 잘 따라오지 못하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 글에서 나열한 여러 사례들이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것은 청소년 보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거나 그런 인식들을 어느 정도 공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잘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은 게 좋은 건데 뭘 그리 까칠하게 구는지 불쾌해 할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문제만으로 한정해서 말하자면,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위를 특별하고 예외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방식, 그리고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에 일정한 제한을 두면서 통제하려고 하는 방식(밤늦게 들어가라고 하는 거라거나, 등교거부-휴교시위에 대한 반감이라거나)들은 너무나 한계가 많다. 딱 잘라 말해서,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증진시키고 청소년들에게도 해당하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물론 지금의 한국 사회는 비청소년들에게도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아니다.)를 실현하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계속 억압받아 왔기에 2000년대 이후로 종종 드러나고 늘어나고 있는 청소년들의 행동이 지금 시점에서 특별히 소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예외적이거나 특별한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한다면, 또는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을 비록 지금까지는 부당하게 유보되어 왔지만 당연한 것, 잊혀진 권리가 자신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여기서 “잊혀진”이란 표현은 물론 비유이다. 권리는 되찾아지기보다는 창조된다. “잊혀진”이 이중피동이며 “잊힌”이 옳다는 딴지는 보류한다. “잊힌”보다는 “잊혀진”이 더 멋있지 않은가?)
  일반적으로, 청소년들은 분명 정치적(사회적, 경제적) 약자이다. 그러나 약자이기 때문에 보호해주고 약자이기 때문에 행동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약자인 청소년들을 어떻게 약자가 아닌 지위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 있길 바란다. 그것이 보호주의가 내재하고 있는 한계이다. 지금, 청소년들의 권리를 위해서는 더 많은 도전이 필요하다. 이 사회의 희석과 한계선 긋기와 충돌하는 도전이 필요하다. 따라서 나는 감히 “청소년은 촛불소녀가 아니다”라는, 자칫하면 촛불집회에 반대하는 뉴라이트가 쓴 것처럼 보이는 문구를 택할 것이다. 청소년은 촛불소녀가 아니다. 청소년은 촛불소녀의 프레임과 이미지를 넘어 더 나아가야 할 존재이며, 훨씬 더 정치적인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