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선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이다.
설리먼, 황야의 마녀, 소피 어머니 등이 이루고 있는 어른의 세계와
하울과 소피, 마르쿨, 캘시퍼, 황야의 마녀(늙고 나서) 등이 이루고 있는 아이의 세계.
단적으로 도식화 한다면, 어른의 세계는 힘을 휘두르는 곳이고 전쟁을 일으키는 곳이고 거짓말을 하는 곳이며, 아이의 세계는 '반전'의 세계이며 평화의 세계, 사랑의 세계이다.
설
리먼은 하울의 스승으로서, 하울의 힘을 봉쇄하거나 자신의 마음대로 통제하고자 한다. 황야의 마녀도 하울과 소피를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한다. 소피의 어머니는 후반에서는 설리먼의 하수인이 되어 소피를 기만한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미안하다,소피" 한
마디를 대수롭지 않게 던지는 모습은 권력에 굴복하고 금전적 이익 등을 좇는 무책임한 어른의 모습이다. 어른들의 세계는 그런 힘으로 움직이는 세계이다.
그에 반해 하울의 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아이들의 세계는 자유, 평화, 사랑 등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들이 인식하는 세계는 말이
통하는 세계이며, 아름다운 세계이다. 소피가 하울에게 말하는, "그럼 성에 가서 말해."라는 대사는, 말로 세계를 설득할 수 있다는, 세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은 아이다운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아이들의 세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마법이고, 하나는 어른들의 세계의 관용이다.
현실에서는 어른들에 비해 무력한 아이들은, 마법이라는 힘을 통해 자신들만의 세계(성)를 어른들로부터 숨기며 지켜나갈 수있고,
군함을 추락시킬 수도 있다. 분명 하울의 힘은 세계 전체에 대해서는 미약한 편이나, 작게 반항할 정도는 된다.
실질적인 힘 외에도, 아이들의 '가족'이 성립하는 방식 또한 마법에 의존한다. 그들의 가족 구성을 보자. 하울-아버지, 소피-어머니,마르쿨-아이,
황야의 마녀-할머니 -- 하울의 성의 구성원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삼대 가족의 대유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가족을 구성하는 것들은 모두 아이
세계의 구성원들, 곧 아이다. (황야의 마녀도 마법의 힘을 잃고 늙고나서는 그 행동거지나 사고방식이 유아 수준이다.) 하울과 소피가 어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마법의 덕분이다. 그런 점에서 소피를 할머니로
바꾼 마법은 단지 안 좋은 저주로만 볼 수는 없다. 본래대로라면 구성될 수 없는 "아이들만의 가족"이 마법의 힘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전통적인/근대적인 가족 관념과 성역할에 대한 고민도 제기해볼 수 있다. 반전이나 평화의 이유이자 상징으로 가족을 등장시키는 일이 흔한 미국 헐리우드 영화가 연상되기도 한다.)
한편, 그들의 세계가 유지되는 것은 어른들이 그들을 관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설리먼을 들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설리먼의
캐릭터를 무너뜨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설리먼은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아이들을 억압하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그래어리석은
전쟁은 그만두도록 하지"라면서 그들을 관용해버린다. 자신의 개 힌에게 "줏대 없는" 녀석이라지만 그 말은 그 자신에게도 해당한다.
(두세 번 밖에 등장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일관성 없는 캐릭터를 지니고 있는 것은, 작품의 스토리를 망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_-)
결국, <하울..>의 세계는 아이들을 위한 세계이고, 미야자키 감독이 말하려는 것도 '아이들의 논리'로 표현된다. 그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폭격 장면, 불바다가 된 지상의 장면, 그런 '어른들의 병폐'에 대한 치유 방안이자 반(反)으로서 어린이들,그 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하울..>이 동화적인 상상력들로 이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이 작품의 단점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이야기의 개연성에 빈틈이 생기게 된다. 동화라고 하기엔 다소 복잡하고 복합적인
캐릭터와 이야기를 들고서 작품을 풀어나가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동화적인 결말처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식 해피 엔딩을
제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결말을 싱겁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힘은 악의 소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에서, '힘'을 가졌기 때문에 타락하는 캐릭터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황야의 마녀도 마찬가지로, 힘을 가지고 있을 때는 어른들의 세계에 속한 뚱보
아줌마지만(소피에게 마음대로 저주를 걸고 하울을 소유하려고 하는 등) 마법의 힘을 잃고 난 후에는 하울의 성에 들어와서 하나의 늙은이로서
살아간다. 늙어버린 황야의 마녀의 모습은 아이와 비슷하다. 황야의 마녀가 이전에 하울에게 집착하던 것이 어른의
방식이었다면, 힘을 잃은 후의 집착은 아이 같은 방식으로 표현된다. 늙으면 다시 아이가 된다는 것일까?
마찬가지로, 하울은 캘시퍼와 계약하여 힘을 손에 넣지만, 그 대가로 심장을 잃어버렸다. 이 "심장"을 마지막에 소피는 "마음"이라고
표현하는데, 하울이 자신의 심장을 돌려받은 것은 어렸을 때의 순수한 마음을 다시 얻었음을 의미한다. "어렸을 때의 심장 그대로"와
같은 표현에서도 그런 상징성이 확인된다.
사실, 캘시퍼와 하울의 시간은 하울이 유성을 받은 그 때에 멈춰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한것이 소피였다. 하울의 심장이 하울의 가슴 속에 있음으로 하여, 하울은 어렸을 때 그대로인 그 심장-마음을 다시 키워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성장 이야기
<
하울...>은 결국 성장 이야기이다. 소피는 하울을 만나면서 사랑을 알고, 저주에 걸려 할머니가 되기도 하며, "난 예쁘지
않아"라든가 뭘 할지 모르는 - 무기력한, 하울을 만나기 전의 상태를 극복하여 하울을 위해 적극적으로 여러일을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겁쟁이에 금발로 치장하고 다녔던 하울은 소피 때문에(고의가 아니라 해도) 본래의 검은 머리를 하게 되고,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되었다가 저주를 풀어가며 다시 젊어지는 것, 그리고 본래의 검은 머리로
돌아가고 심장을 돌려받는 것, 그 모든것들은 어린이 시절로의 회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성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역설적이게도 <하울...>은 어린이의 마음을 다시 갖게 되는 것이 성장이라고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장은 통속적인 어른으로의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피터팬 신드롬을느끼게 만드는데,) 작가는 '아이인 채로 강해지는 것'을 말하고 싶은 듯하다. 어른의 세계에 편입되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대안을 구축하는 방식으로서의 성장. 순수한
마음으로 강해지는 것. 진실한 것. 사랑과 평화. 이 작품에 따르면 그것들은 모두 아이로서 (기존의 어른이 되지 않고) 성장한 사람들의 성질이다. 소피가
저주를 풀고도 갖고 있는 흰머리는 그런 성장을 상징할지도...
문제는...
이
작품은,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랑 이야기, 반전 메세지, 성장 이야기, 가족이야기. 사실 이
모든 것들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는 하다. 몇몇 장면들에서 사랑과 가족은 반전의 메세지로 읽히기도 하며,아이들은 가족을
이루면서, 사랑을 하면 성장해간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이 모든 것들을 표현하기에 <하울..>은 다소 부족했다.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고 한 것, 그리고 그 많은 것들을 모두 좋은 결말로 끌고 가려고 한 것, 그것이 이 작품의 이야기 구조에
아쉬움이 남게 하는, 주된 원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