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두발자유를 주장하려는 청소년을 위한 논리들

공현 2009. 3. 30. 01:19
2007년 1월에 완성했던 글인데
2년이 지난 아직도 유효하다는 게 슬프군요-
자료 정리의 의미에서, 그리고 학기 초를 맞아 올려둡니다

호적돌의 그나마 최근(2008년 1월;;) 쓴 "두발복장규제는 성희롱이다" 글은 이 링크로? (근데 이 링크가 전체공개로 열려 있는지 모르겠네)



두발자유를 주장하려는 청소년을 위한 논리들

 

공현 / 윤종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 청소년인권모임 나르샤
emptyyoon@naver.com / taekyoon73@hanmail.net

 

 

 

들어가며

 

☆  중고등학생의 두발자유. 도대체 몇 년 동안 나온 이야기인가. 기록을 뒤적거려보면 1985년에도 두발자유를 외치며 학생들이 농성을 했다고 하고 1970년대 후반에도 안동의 한 고등학교에서 고등학생들이 두발자유를 외치며 학교를 뛰쳐나와 시내를 누비며 시위를 했다는 증언도 있으니, 이 얼마나 오랫동안 되풀이 되어온 주장인가. 두발자유가 ‘인권’이자 ‘기본권’이라는 논리로 등장한 것도 7년이 넘었으니 이런이런.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그 긴 시간이 지나도록 두발자유화 하나 못 이루어내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기나긴 세월동안 청소년들의 싸움과 노력이 있었기에 반삭 아니면 몽실언니였던 두발규제가 지금은 또 이만큼이나 된 것일 수도 있다.

 

☆  애당초 두발자유냐 두발규제냐의 다툼 속에서 합리적인 토론과 합의는 불가하다. 왜냐하면 두발자유냐 두발규제냐는 결국 그 근본을 따져보면 “교육에서 무엇을 우선시하는가?” “학교(사회)는 무엇을 위한 곳인가?”, “청소년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등등의 문제를 포함하는, 가치관과 가치관 사이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신라면이 맛있느냐 무파마가 맛있느냐, 개가 예쁘냐 고양이가 예쁘냐를 놓고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 합리적인 토론과 합의 따위가 가능할 리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극히 드문 예외를 빼면 두발자유를 주장하고자 하는 사람이 두발규제를 신봉하는 사람을 훌륭한 논리적 대화로 설득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는다.
  자, 여기 한 약간 다혈질인 교사와 한 두발자유를 주장하는 학생의 교무실에서의 밀실회담(?)을 상상해보자.
  “니들 머리 자유로 하면 온갖 요란한 짓 다 하고 다닐 거잖아. 그걸 어떻게 교육자로서 보고 있냐. 다 너희를 생각하는 마음인 거야.”
  “그러나 그 요란한 짓이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공공복리나 질서유지를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위협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이러해서 두발규제는 인권침해입니다. 이 인권침해가 정당화되지 못하므로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어디서 선생님 말에 꼬박꼬박 말대꾸야. 여하간 니들 머리 긴 꼴 못 봐. 염색한 꼴은 더더욱 못 보고. 학부모님들은 또 얼마나 난리를 치겠냐.”
  “그건 선생님이나 부모님들의 자의적인…”
  “한 마디만 더 말대꾸하면 3번 아이언 가져와서 엎드려뻗치라고 한다.”
  오 이런. 세상은 별로 합리적인 곳이 못 된다. 평등하고 이성적인 대화의 장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냉엄한 현실 속, 권력의 작용이란.
  만일 여러분의 조금 덜 다혈질인 교사, 혹은 조금 더 침착하고 덜 폭력적인 교사와 대화를 할 경우에도, 만일 그 교사가 두발규제 신봉자라면 빙빙 돌기만 하고 도저히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상황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두 논리가 전혀 다른 전제와 전혀 다른 가치관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분명 두발자유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왜 두발자유가 정당하고 두발규제가 그른지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목적이 두발규제 신봉자를 설득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여하간 아무리 우리가 귀차니스트라고 해도 뭔가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리가 있어야 하는 게 세상 돌아가는 방식이며, 또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을 두발자유 쪽으로 붙잡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말 안 해도 알 거다.
  이 글은 두발자유를 주장하려는 청소년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 인권/기본권으로서의 두발자유 주장 논리를 긁어모아서 정리한 것이다. 또, 이건 “어떻게 두발자유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는 “우리는 왜 두발자유를 주장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서 쓰고 있다. 만일 “어떻게 두발자유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고 싶은 분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으시다면, 그런 이야기는 별로 써있지 않으니 오해 없길 바란다, 훗.

 

 

 

 

두발자유 -> 인권!

 

  두발자유는 인권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선언한다.(사실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할 생각이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05년에 내놓은 결정문에서 두발자유가 기본권임을 인정했다. 그럼 두발자유가 대체 ‘인간답게 살 권리’ 중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권리인지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그러니까 2000년을 전후로 하여 일어난 청소년인권으로서의 두발자유운동에서 가장 흔하게 나온 이야기는 바로 두발자유가 헌법 제12조 ‘신체의 자유’라는 주장이었다. 고등학교 〈법과 사회〉 교과서를 봐도 두발도 신체이며 두발을 손상시키는 것도 상해죄(신체를 다치게 한 죄란 거지.)에 해당한다고 해석되고 있으니까, 두발자유는 당연하게도 ‘신체의 자유’로, 아~주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법학자들(대다수라는 게 우울한 현실이다.)과 기존의 법 해석은 ‘신체의 자유’를 국가 공권력이 개인을 자의적으로 체포하거나 구속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식으로만 해석해왔다는 것 또한 알아두어야 한다. 이는 소극적 자유권을 옹호하고 있으며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근대법적인 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거를 편의상 신체의 자유의 ①번 의미라고 해두자.
  헌법 제12조 ‘신체의 자유’에 대한 진보적인 해석은 기존의 협소한 해석에 몇 가지 의미를 추가하여 권리를 더 광범위하게 본다. 바로 신체적으로 훼손[규제]당하지 않을 권리 혹은 개인의 신체결정권이다. 이것을 ②번 의미라고 해두자.
  만약에, 법 좀 안다는 사람이 신체의 자유는 ①번 의미니까 두발자유에 적용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①번 의미와 ②번 의미를 모두 주장하는 법학 교수도 있다고 이야기해주기 바란다. 전북대 교수님 특강에서 저 해석을 들었는데 성함은 잊어버렸다. 죄송하다. 알게 되면 추가해보도록 하겠다.
  진보적인 인권관에 따른 해석을 가미하자면, 사회는 단순히 개인의 신체를 자의적으로 구속하지 않음으로써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①번 의미만 충족시킨다고 장땡이 아니란 거다. 진보적인 인권을 주장하는 우리는, 사회는 사람들의 ‘신체의 자유’(두 번째 의미에서)를 적극 보장할 의무를 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두발자유는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기존의 협소한 해석에서의 ‘신체의 자유’가 아니라 더 적극적인 해석에서의 ‘신체의 자유’에 해당한다. 애초에 인권이라는 게, 문구 하나하나나 기존의 문구 해석에 구속되는 권리가 아니라는 점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알아두길 바란다.
 ※ 본래 인권에 대한 해석은 계속 진보한다. 예를 들어 최초로 인간의 권리에 대한 선언이 등장했을 무렵에는 그 인간의 권리에 여성의 권리는 거의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여성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운동으로 여성의 권리도 그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새로운 조항들도 만들어졌다.
    뭐, 세상이 그런 거다. 불변하는 것도 없고, 절대적인 것도 없달까. 역사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거니까는.

 

 

  ‘신체의 자유’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나 ‘개성발현권’의 측면에서 두발자유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표현의 자유’는 보통 ‘언론․표현의 자유’라는 식으로 언론의 자유와 한 세트로 정치적 자유의 일부로 생각되지만, 포괄적으로 해석했을 때는 두발자유나 복장의 자유 또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개성발현권은 비록 헌법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대한민국 헌법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않는다.”라고 하여 헌법에 직접 안 써놨어도 기본권에 해당하는 것들이 있다는 ‘포괄주의’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본권에 들어갈 수 있다. 개성발현권을 행복추구권의 일부로 보는 시각도 있다. 행복추구권 입장은 일본 같은 경우가 대표적으로, 일본은 두발자유를 행복추구권으로 인정한 전례가 있다.
  이 주장은 두발자유 뿐 아니라 용의복장의 자유 전반을 포괄하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두발자유를 기본권이라고 인정한 입장 또한 ‘개성발현권’의 입장에서였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 논리를 가져올 때의 장점은 국가인권위원회(무려 국가기관이고, 인권에 관해서는 여하간 나름 권위 있는 곳이다.) 결정문이 떡하니 있다는 것. 들이대면 적어도 지식의 권위라는 면에서는 섣불리 부정하기 어렵다. 많은 어른들이 권위에 약하다. 후후.

 

 

  두발자유가 인권이고 기본권이라는 사실은 실로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인권을 사회가 제한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까다로운 기준을 만족시킨 후에야 가능하다고, 이 민주주의 사회, 법치주의 사회가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 시민혁명 이후 만들어진 현대 사회의 목적은 바로 사회 구성원들의 인권을 잘 보장하고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즉, 사회의 목적 자체가 인권보장이다. 그런데 그런 사회가 인권을 제한하려면, 즉 자신의 목적을 ‘배신’ 때리려면, 그게 별 수 없다는 거를 증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에게 봉사하라고 만들어진 로봇이 어쩔 수 없이 한 인간을 죽여야 한다면, 왜 그래야 하는지, 뭐 예를 들어 그 인간을 죽이지 않으면 1억 명이 죽는다든가 그 인간이 무시무시한 살인마로 사형선고를 받았다든가 뭐 그런 사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다.(내가 사형제에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인권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거냐, 하면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전문(前文)에 보면 사람들이 폭동(혹은 폭력적인 혁명)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인권을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고 써있다. 이걸 바꿔서 말하면 사회가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혹은 오히려 침해한다면, 사회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뒤엎어도 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이것이 바로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했을 때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저항권’이다. 오오, 참을 수 없는 ‘인권’의 무거움이여.
  입증 책임의 문제도 있다. 두발자유가 기본권이자 인권이라는 주장은, 두발규제가 당연한 상태가 아니라 두발자유가 당연한 상태이며 두발규제는 두발자유에 대한 제한이고 예외적인 경우임을 뜻한다. 이렇게 될 경우에는 두발자유라는 인권을 제한하고자 하는 쪽에서 두발규제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입증할 책임을 지게 된다. 두발자유를 주장하는 쪽에 두발자유를 왜 해야 하는지 입증할 책임이 있는 게 아니란 거다. 그러니까, 두발자유를 주장해도 학생들의 탈선이 없다거나 성적이 떨어지지 않음을 증명하라고 누가 말하면, 당당하게 두발자유는 기본권이니까 오히려 두발규제를 주장하는 쪽에 두발규제의 입증 책임이 있다고 말하자. 곧 두발규제를 하려는 쪽에서 두발규제가 왜 필요한지, 두발자유가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혹은 사회의 유지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지, 공공복리나 공익을 현저하게 저해하는지 뭐 그런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발자유는, 굳이 그것이 성적과 관계가 없다는 것, 아니면 두발자유를 해도 알아서 ‘교사들 만족시킬’ 머리를 하고 다닐 거라는 것 같은 걸 증명 따위 하지 않아도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이다. 그것은,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물고문, 전기고문해서 성적을 올리게 하는 것이 옳지 못한 일인 것과 마찬가지다. 두발규제를 해서라도 면학분위기를 유지하겠다는 것은 인권보다 입시교육에서 좋은 결과를 내는 게 더 훌륭한 가치라는 소리랑 똑같다. 성적이 낮은 학생들도 비인간적인 고문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두발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좀 더 세세하게 기본권을 제한할 때 필요한 요건이 뭔지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우선, 기본권을 제한하려는 목적이 정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이 불가피해야 한다. 제한할 때도 권리의 본질적인 부분은 제한할 수 없으며, 그 제한이 필요최소한의 것이어야 한다. 기본권을 제한해서 얻게 되는 법적인 이익(정의, 공공복리 등)이 기본권 제한 때문에 잃게 되는 정의와 균형이 맞을 정도여야 한다. 이러한 기본권의 제한은 국회에서 정한 법률로만 가능하다. 신체적·정신적․정치적 자유의 경우는 제한 조건이 더 엄격해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이며 현존하는 긴급한 위험이 있을 때만 제한할 수 있다.
  이 조건에 두발자유 문제를 대입해보자. 두발자유를 제한하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바로 학생들을 쉽게 통제하고 교사의 폭력에 순종하게 만들며 권위주의적인 학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이 목적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에 위배되며, 명시적으로는 교육기본법 제2조가 선언하고 있는 교육의 목적(민주시민, 홍익인간의 이념에 맞는 훌륭한 인품의 사람을 만드는 것)과 제12조에서 “①학생을 포함한 학습자의 기본적 인권은 학교교육 또는 사회교육의 과정에서 존중되고 보호된다. ②교육내용·교육방법·교재 및 교육시설은 학습자의 인격을 존중하고 개성을 중시하여 학습자의 능력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강구되어야 한다.”라고 한 것에도 위배된다.
  두발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불가피한 일도 아니며 학교 질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서 적절하지도 않다. 지금까지 두발자유와 청소년 범죄나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주는 정도 등의 인과관계는 증명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발자유는 신체의 자유이자 개성발현권․표현의 자유이기 때문에 신체적 자유인 동시에 정신적 자유에 해당한다. 따라서 두발자유로 인해 실질적이고 현존하는 긴급한 위험도 없고, 두발자유가 분명하게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도 아닌 이상 제한할 수 없다. 
  법률로써 제한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기도 모호하다. 초중등교육법에 보면 학교의 장은 법령의 범위 안에서 지도․감독 기관의 인가를 받아서 학교규칙(학칙)을 제정할 수 있다고 되어 있으며, 교육상 필요한 때에 학칙이 정하는 바에 의해 학생을 징계하거나 지도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제8조와 제18조) 그리고 그 자세한 기재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하게 되어 있는데,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보면 학칙에는 다음 사항이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1. 수업연한·학년·학기 및 휴업일
2. 학급편제 및 학생정원
3. 교과·수업일수 및 고사와 과정수료의 인정
4. 입학·재입학·편입학·전학·휴학·퇴학·수료 및 졸업
5. 조기진급 및 조기졸업
6. 수업료·입학금 기타의 비용징수
7. 학생포상 및 학생징계
8. 학생자치활동의 조직 및 운영
9. 학칙개정절차
10. 기타 법령에서 정하는 사항

  여기에 학생의 용의복장을 규제할 수 있다는 항목은 없는데, 결국 학생징계의 한 기준으로 ‘학생생활규정’, ‘용의복장규정’ 등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두발자유를 비롯한 용의복장의 자유가 기본권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제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규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설령 법률로써 두발자유를 비롯한 기본권을 제한하더라도 그 정당성이 거의 없으며 위헌, 인권침해 소지가 다분한 판에 이는 학칙 제정 과정에 당사자인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한다는 현실과 함께 절차적인 정당성도 심각하게 훼손한다.

 

 


  두발자유가 기본권이자 인권이라는 말은 이처럼, 결코 두발자유가 손쉽게 건드리고 규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애매모호한 ‘질서’나 ‘분위기’, ‘보기 안 좋다.’. ‘학생답지 않다.’ 등의 말로 인권을 침해하려드는 교사들이나 이에 동조하는 학생, 학부모들의 모습은, 정말이지 사람들에게 인권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다고나 할까.

 

 

두발규제 -> 폭력!

 

  자, 두발자유가 인권이고 기본권이라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실컷 떠들었으니까 이제는 두발규제를 비판하고 두발규제 주장을 반박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학생다움”, “위화감”, “성인과 구별”, “질서와 규칙”, “학교 평판” 등등 두발규제를 옹호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어왔을 것이다. 이런 흔히 나오는 논리들에 반박하는 대항논리를 여기에 쓸 것이다.

 


학생다움과 위화감?

 

  어떤 사람들은 두발자유를 실시해서 다양한 머리 모양을 하게 되면 염색이라거나 아니면 장발이라거나 여하간 그런 외모가 학생답지 않다고들 이야기한다. “학생답다.”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그 명확한 기준이 세워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막연한 ‘학생다움’의 모습이라는 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다움”을 권장하는 것은 사회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단지 “~다워야 한다.”라는 이유만으로 제도적으로 기본권을 제한하거나 권력으로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학생다워야 하기 때문에 두발규제를 하고 교복을 입히겠다니. 그건 말하자면 사람들이 ‘여성다운 여성’이나, ‘남성다운 남성’의 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외모를 가진 사람들은 강제로 성형수술을 시키거나 강제로 옷 스타일을 규제하는 것과 비슷한 짓이다. 단순한 권장사항(게다가 사회의 “~다움”이란 편견에 찌든 옳지 않은 것일 때도 있다!)과 인간으로서의 권리, 헌법과 국제조약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저울질하면 권리 쪽이 더 가치 있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담으로, 나만 해도 남성임에도 간혹 치마를 입고 다니는데, 그런 옷차림을 하고 다녀서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기는 하지만 치마를 입고 다닌다고 해서 처벌을 받거나 위협을 당한 적은 없다.)
  학교 평판에 대한 걱정도 마찬가지다. 학교의 평판이 인간의 존엄성, 인권-기본권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아니, 사실 이 문제는 모든 학교가 두발자유화를 하면 전혀 걱정할 게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만약 내가 학교의 교장이라면 차라리 주변 학교들까지 두발자유화할 것을 적극 설득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무지개색으로 염색을 하거나, 비싼 파마를 한 학생들이 어떤 ‘위화감’을 조성할 거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 위화감이라는 것은 두발규제가 당연한 잘못된 세상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두발자유가 당연한 세상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일 뿐이다. 표현의 자유와 개성발현권이 보장되어 있는 이 사회에서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길거리에서 빨간 머리를 한 젊은이와 전통 한복을 입은 젊은이가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아마 빨간 머리 젊은이는 속으로 “저 구린 한복을 입고 어떻게 길에 다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전통 한복을 입은 젊은이는 “저게 무슨 난리야? 서양사람 닮으려고 애를 쓰는군.”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제대로 된 민주 시민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 면전에서 굳이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표현이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뭐, 그럴 수도 있지.”라거나, “내 마음에는 안 들지만 간섭할 수는 없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충돌해야만 하는 ‘권리’의 부분이나 인류 보편의 가치에 관한 것이 아닌 이상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는 인권적으로 필수다.
  아마, 두발자유화 이후 맨 처음 염색을 한 학생이 나타나면 “쟤, 뭐야?”라고 생각하며 위화감을 느끼는 학생도 몇몇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대한다면 그런 다양한 머리 모습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런 경험은 사회에서 만나는 다양한 취향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고 관용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아주 드물지만 경제적 위화감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부잣집 학생이 머리를 거창하게 꾸미고 학교를 왔다고 하자. 그런데 그게 문제인가? 공교육은 본질적으로 성적이나 옷차림이 사람의 가치를 재단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단 걸 적극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그런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방법을 고민하기는커녕 다 똑같이 입힐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이거 참. 빈부격차 때문에 생기는 외모의 차이로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게 해야 한다는 담론은 옷차림이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임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효과까지 갖고 있다.
  또한 현실적으로 학교가 아무리 잘 가르쳐도 그런 것 때문에 경제적 위화감이나 갈등이 빚어진다면, 어째서 학교는 그런 것을 은폐하려 드는지 의문이다. 현실에서는 엄연히 ‘다양한 머리’와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하는데, 유독 학교에서는 그것을 보여주면 안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논리다. 학교는 학생들의 눈가리개가 아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빈부격차를 두발규제를 한다고 해서 얼마나 가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긴 하지만, 그 이전에 과연 가리는 것이 옳은 일인가 고민해봐야 한다. 교육은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불평등을 은폐하는 도구인가? 그런 불평등으로 인해 빚어지는 갈등이나 위화감을 어떻게 조정하고 해결하는지 배우는 것도 중요한 교육이다. 또 그런 불평등에 대한 경험을 원동력으로 삼아 스스로를 계발하거나 사회 변혁의 꿈을 꿀 수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가 머리카락의 삐까번쩍함에 의해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배워야 한다.
  두발자유는 인권보장일 뿐 아니라 다양성에 대한 ‘관용’과 현실에 대한 직시 또한 가르쳐준다. ‘위화감’이라는 구실로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성인과 구별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청소년과 성인의 구분을 위해 학생들의 두발을 규제해야 한다고 한다.(비학생 청소년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는 주장이라는 점은 상당히 거슬린다.)
  청소년들을 굳이 두발규제 등을 통해 성인과 구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청소년들이 청소년에게는 적당하지 않은 - 유해한 사회의 환경을 접할까봐 차단하려는 목적이다. 청소년들이 소위 ‘청소년 유해업소’나 술, 담배 등을 접할까 걱정스럽다는 소리다. 다른 하나는 성인인 척하는 청소년들이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으므로 청소년들이 단정한 머리모양에 교복을 입고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억제하겠다는 것이다. 이 둘은 미묘하게 다른 듯하면서도 거의 비슷한 소리다. 범죄건 유해환경이건 ‘탈선’이란 말로 뭉뚱그려지니까.

 

  우선,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기본적 인권을 제한한다는 것은 마치 범죄자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 모두를 감옥 안에 가둬놓고 보호한다는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 사회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 사회 환경을 없애려고 해야지 사람들의 기본권을 제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 ‘청소년 유해환경’이라는 게 일부 어른들이 자의적으로 정해놓은 거라는 느낌이 강하긴 하지만…. 만약에 이 사회가 정말로 사람들에게 ‘유해’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환경이라면, 그것은 그런 환경을 조성할 정도로 무분별한 이윤추구를 허용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잘못이다.
  뭐 어쨌건 간에 좀 더 지엽적으로 책임 소재를 논하더라도, 청소년들의 유해업소 출입과 음주, 흡연은 상인들이 ‘신분증’ 검사만 제대로 해도 해결될 것이다. 많은 어른들은 “머리를 기르면 성인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른들이 얼마나 법을 하찮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상인들이 법을 제대로 지키고자 한다면 ‘외모’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신분증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상인들에게 이러한 의무를 철저히 지킬 것을 요구하기는커녕 학생들의 두발을 규제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어른들은, 한 마디로 일부 상인들의 편의를 위해 자신의 자녀들을 규제하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 상인들의 편의와 학생들의 인권. 무엇이 더 중요할까?

 

  그리고 학생들이 범죄를 저지를 위험성이 높다는 주장은 청소년들을 예비 범죄자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이는 상당부분 청소년들이 미성숙하고 충동적이라는 신화에 근거하고 있다. 청소년기의 성격에 대한 심리학 연구는 많지만, 청소년들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명백하게 더 높다고 증명된 바는 없다. 오히려 범죄율을 살펴보면, 2005년 한 해 총 범죄수는 1,893,896건인데 청소년들의 범죄(소년범죄 : 20세 미만의 사람이 저지른 범죄)수는 67,478건이다. 계산해보면, 소년범죄는 전체 범죄의 약 1/28 정도다. 그런데 인구로 보면 10세~19세까지 인구만 600만 명 정도로 전체인구(4800만 명 정도)의 1/8 정도 된다. 즉, 인구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범죄율은 오히려 다른 나이대에 비해 낮은 편이다.(통계청에서 찾아본 자료들이다.) 만약 범죄율을 근거로 기본권을 제한한다면 40대의 범죄율이 2003년 통계 28%로 가장 높기 때문에 40대를 대상으로 두발규제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연령대를 기준으로, 막연한 편견과 가능성만을 이유로 인권을 제한하겠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 알겠는가?
  예를 들어 3급 이상의 정신지체 장애인들에게 “당신들은 정신지체를 앓고 있어서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오른쪽 볼에 별 마크를 그리고 다녀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사회가 정신지체 장애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인권침해를 자행하는 신체적 제약을 거는 행위로 볼 수 있으며, 이를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학생에게 “너희는 어른과 구분되어야 하니까”나 혹은 “너희가 머리가 길면 탈선할 수 있으니까”라며 인권을 침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두발이 단정하지 않으면 그것이 심리 상태도 해이해져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유치한 반영론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 주장은 검증된 적이 없다. 만일 어떤 청소년이 절도나 성폭력과 같은 범죄행위를 하고자 한다면 눈에 띄는 염색머리를 하느니 평범한 머리를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실제로 스포츠머리나 단발머리를 한 학생도 얼마든지 도둑질이나 성폭행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두발규제가 있기 때문에 일탈을 원하는 청소년들이 ‘두발규제’라는 금기를 깨는 경향이 나타나는 측면도 있다. 즉, 두발자유가 금지된 것이기 때문에 소망하게 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소리다. 전혀 증명된 적도 없는 주장을 갖고 기본권-인권을 제한할 수 있다고 말하니, 통탄할 노릇이다. 또, 만약 이게 증명이 되었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관련된 이야기지 딱히 청소년들에게만 적용할 문제도 아니다.
  게다가, 성인들이 이야기하는 ‘해이해진 심리 상태’란 무엇인가? 이는 청소년들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청소년들을 자신들의 생각대로만 통제하겠다는 것인가? 타인의 인권을 침해한다거나 공공복리를 실질적으로 저해한다거나, 뭐 그런 파괴적인 행위를 제재하는 것이 아닌 한, 청소년들을 과도하게 통제하려는 시도가 무조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의미하고 사회에 필요한 도덕을 감수성 면에서나 이성 면에서 ‘교육’하고 반성적으로 받아들이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외모를 통일시켜서 예의를 강제로 박아 넣으려는 폭력을 당연하다는 듯이 지껄이는 태도에는 질릴 정도다. 청소년들의 삶은 본질적으로 그들 자신의 것이다.
  혹자는 두발자유화와 복장자유화를 실시한 적이 있던 전두환 정권 시절, 그러니까 1980년대에 청소년들의 범죄율이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러한 주장을 펴는 통계자료나 논문이 있다면 공개해주기 바란다. 내가 아는 바로는 그런 것이 학문적으로 입증된 적은 없다. 그때 두발자유화 때문에 학생을 교사로 착각하여 인사하는 학부모가 있었다거나 하는 해프닝들은 많이 전해지지만, 두발자유와 범죄 사이의 연관을 분명하게 입증한 연구는 없다. 만에 하나라도 둘 사이의 연관이 입증되더라도 그것이 학생 다수에 대한 인권제한 자체를 옹호할 증거가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 상황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당시 군사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 사탕발림과 정권 이미지 향상을 목적으로 두발자유화, 복장자유화를 학생들에게 던져주었으며 또 비슷한 목적으로 3S(Sport, Sex, Screen) 정책도 실시했다. 사회전반적인 분위기가 이 3S 정책으로 인해 ‘유흥’적인 분위기가 비교적 강해졌는데, 이런 점을 고려하면 두발자유가 범죄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은 성인의 범죄율이 함께 증가하지 않았는가를 함께 비교 조사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신분 구별을 위해서 특정 신분에게 기본권을 포기하라고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 감시의 효율’을 ‘인간의 존엄성’, ‘인권’보다 높은 가치로 여기는 반인권적 발상이다.

 

 


성적을 위해, 그리고 너희를 위해?

 

  학생들의 성적을 들먹이며 두발규제를 정당화하는 경우가 있다. 머리에 신경 쓰면 학교 성적이 떨어진다나 뭐라나. 그리고 “너희를 위해” 두발규제를 한다고들 이야기한다. 나는 그런 주장을 접할 때마다 두발자유와 관련된 다큐에서 새벽 1시까지 강제자율학습을 시키는 학교의 교장이 “학생들을 공부시켜 명문대에 보내는 것이 인권을 보장해주는 것”이라고 떠들던 게 생각난다. 쩝.
  여하간 성적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할 말이 없다. 두발규제와 성적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입증된 것도 별로 없기도 한데, 여하간 나는 두발자유를 하면 학교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더 산만해지리라는 데 심정적으로는 동의하는 편이다. 증명된 바 없지만, 자신의 신체에 대한 부당한 통제와 억압에서 벗어났는데, 당연히 더 산만해지는 게 자연스러울 듯한 기분이랄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학교가 지나치게 억압적이라는 게 맞을 거다. 그런데 할 말이 없다는 것은, 그럼 성적이나 학교 분위기를 위해서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권-기본권을 포기하겠다는 소리냐는 거다. 무시무시한 가치의 전도 현상이다. 이 가치관을 받아들이면, 학교 분위기를 산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떠든 학생을 고문한다거나, 성적이 낮은 학생을 고문해서라도 성적을 올린다거나 하는 방법도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대체 인권을 뭘로 아는건지 한숨밖에 안 나온다.
  그리고 “너희를 위해서”라는 주장을 위해 딱 맞는 고사가 있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한 왕이 자기 궁궐에 진귀한 새가 날아 들어오자 기뻐하며 새를 위해 음악을 울리고 진수성찬을 차렸다고 한다. 그러나 새는 오히려 그런 환경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렸다고 한다. 왕은 새를 위해 한답시고 이것저것 했는데 새는 오히려 그 대접 때문에 죽어버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면서 그것을 “다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해봐야 설득력이 없다. 그건 상대방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자기 소유물로 여기거나 의지나 인격이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규칙이니 지켜라?

 

  교육기본법 제12조 ③ “학생은 학교의 규칙을 준수하여야 하며, 교원의 교육ㆍ연구활동을 방해하거나 학내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여서는 아니된다.” 초중등교육법 제18조 ① “학교의 장은 교육상 필요한 때에는 법령 및 학칙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학생을 징계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지도할 수 있다.”
  이런 법률에 의거해서, 아니 뭐 이런 법률 같은 건 모르더라도 여하간 “학교의 규칙이니까 무조건 지켜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다. “학교의 규제가 싫으면 학교를 떠나라.”라는 말은 덤으로 붙는다.

 

  우선 “학교의 규제가 싫으면 학교를 떠나라.”라는 말에 대한 반론부터 펴겠다.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는 두발규제에 정당성이 없더라도 계속 지켜나가겠으니 동의하지 않는 청소년은 전부 학교를 나가라는 소리다. 그러한 주장은 “두발규제를 하기위해 ‘교육’을 포기하겠다.”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반교육적인 두발규제가 교육의 본질적인 목표, 혹은 교육(좁게 봐도 학교 공교육) 그 자체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가치가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되었다. 학교는 학생들의 인권을 탄압하기 위해 있는 곳이 아니다.
  간혹 보면 선지원 학교라는 이유나 기타 등등 잡다한 이유로 학생들이 자기 선택에 의해 온 것이니 닥치고 따르라는 논리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말도 안 되는 이유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드러난다. 예를 들어 내가 (가)라는 나라로 이민을 갔는데 그 나라에서 수사기관이 내게 고문을 가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나는 내 선택에 의해 그 나라로 이민을 갔기 때문에 그에 대해 아무런 비판도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인가? 내 인권을 침해한 것이니 잘못을 시정하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인가? 어떤 집단을 선택하는 것과 그 집단의 잘못에 대한 비판은, 완전 별개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항상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만일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눈 감고 그것을 피하는 것만을 선택해왔다면, 사회의 개혁이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를 떠나야 할 것은 두발규제에 반대하는 학생이 아니라 두발규제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인권침해다.

 

  또한 “규칙이니 지켜라.”라는 말은 낡은 “형식적 법치주의”의 입장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형식적 법치주의”란 법이라는 형식을 갖추기만 하면 그 내용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그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어떻건 간에 어떤 법도 허용될 수 있다고 하는 입장이다. 이 형식적 법치주의는 교과서에서조차 부정되는 입장이다. 법은 사회의 궁극적인 목적과 이념, 정의에 합치해야 하며, 악법은 법이 아니다. 우리는 악법에 불복종하고 그것을 바꾸기 위한 운동을 벌임으로써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꾸려 할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두발자유를 주장하는 쪽과 두발규제를 주장하는 쪽이 맞서고 있는 현실은, 두발규제가 악법이냐 악법이 아니냐를 가지고 싸우는 상황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당연히 두발규제가 악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그 상황에서 “악법도 일단 지켜라.”를 요구하는 것은 전혀 적당하지 않다. “악법도 법이다.” 식으로 “규칙이니 잘못됐다고 생각해도 지켜라.”라고 말하는 것은 두발규제가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데, 잘못됐으면 없앨 궁리를 해야지 그걸 지키라고 요구하는 건 스스로의 무식함과 불의함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규칙이니 지켜라.” 따위 문제가 아니라 그 규칙을 없앨지 그대로 둘지를 놓고, 규칙의 정당성을 놓고 싸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 대고서 규칙이니까 무조건 지키라고 한다거나 그 규칙에 근거한 권력을 휘둘러대는 것은 실로 폭력적이고 권위적이라고 하겠다.

 

  근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대체 교육의 목적이 무엇이란 말인가? 교육이 “규제를 통한 억압”,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복종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전체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폭력일 뿐이며 인권의 이념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세계인권선언 제26조에는 “교육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목표로 하여야 한다. 교육은 모든 국가들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 간에 있어서 이해, 관용 및 친선을 증진시키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연합의 활동을 촉진시켜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두발규제를 비롯한 용의복장규제나 체벌 등은 학생들에게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을 강화시켜주기는커녕 인권 및 기본적 자유가 얼마나 가볍게 침해당할 수 있는지 학습하게 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두발규제는 교육권까지 침해하고 있다. 굳이 내가 교육기본법까지는 들먹이지 않아도 되리라 여긴다.
  좀 더 절차적인 이야기를 하면, 현재의 학칙은 그것을 수용하고 지켜야할 학생들의 동의 없이 학교장 및 교사가 일방적으로 정하고 있다. 물론 이미 정해진 교칙 이니 지키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교칙이 헌법이나 교육기본법 등 상위법의 조항들과 대치된다면 이는 정당한 규칙이라고 할 수 없기에 그것을 따르지 않을 권리가 우리에게는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두발규제는 분명 정당한 근거 없이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기에 위헌적 성격이 강하다. 학교라는 제도 교육집단이 “두발규제” 없이는 유지 되지 않는다는 것, 혹은 그만큼 두발규제를 할 커다란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기본권 제한의 요건에 맞추어 엄밀하게 입증하지 않는 한 그 위헌적 규칙을 정당화시킬 방법은 없다.
  아참, 많은 분들이 사립학교의 학칙은 공립학교의 학칙보다 더 자율성이 있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봐야 할지에 대해 걱정하는데, 사실 사립학교 또한 교육기본법이나 초중등교육법, 사립학교법 등에 의해 존재하고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해둔다. 이렇게 말하면 또 일부 유럽 지방이나 미국의 소위 ‘명문’ 사립학교의 엄격한 용의복장규제를 이야기할 텐데, 나는 그것 또한 그 안의 청소년들이 충분히 문제제기할 수 있는 인권침해라고 본다. 그 ‘명문’이라는 곳에서 그런 식으로 교육을 하니까 아마 세계 곳곳의 소위 ‘지도자들’ 중에 괴악한 자들이 많은가보다.

 


학부모가 원해서 어쩔 수 없다?
  학부모가 원하기 때문에 학교가 어쩔 수 없이 두발규제를 해야 한다는 말은, 비겁한 말임과 동시에 학교의 의견을 은폐하는 말이다. 물론 두발규제를 원하는 학부모들은 모두 인권침해의 가해자이며 반인권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학부모가 원하기 때문에 한다는 말 속에는, 두발규제는 “해도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이미 깔려 있다. 만일 학부모들이 학교에 아주 심각하게 인권침해적이거나 부당하고 공익 - 다른 사람이나 공공적인 권리를 짓밟는 행위(단적으로 공금을 횡령하라거나, 학생들을 물고문하라거나)를 요구한다면, 그걸 그대로 할 것인가? 만약 어떤 교사가 학부모가 원한다는 이유로 그런 짓을 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교사 자격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두발규제가 정말로 인권침해이며 없어져야 할 악이라고 생각한다면, 학교의 교사들은 학부모가 원한다고 해도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학부모들 또한 학교가 인권을 침해해 가면서 청소년들을 통제하고 억압하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청소년들은 당신들의 소유물이 아니다.

 

의무도 하기 전에 권리부터?

 

  “의무도 하기 전에 권리부터 주장한다.”라는 비난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의문을 느낀다. 대체 무슨 의무를 말하는 건가? 그렇게 물으면 대개 뭐 두발규제를 지켜야 한다느니 몸가짐을 바로 해야 한다느니 성적이 높아야 한다느니 심지어 휴지를 길에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경제적 능력을 이유로 드는 사람도 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의무를 한 후에야 권리가 있다는 것부터 우선 맞지 않는데, 인권사상은 본래 권리가 먼저 있고 사람들의 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의무가 발생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에 권리를 제한한다는 것은 엄격한 요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법에서 “비례의 원칙” 같은 게 대표적인데, 비례의 원칙은 범죄를 저지른 정도에 맞게 권리를 제한(=처벌)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면, 경미한 절도죄를 저지른 사람의 손을 자른다거나 사형을 할 수는 없다는 거다. 마찬가지로 의무를 다하지 않아서 권리를 제한받게 되는 것은 그 내용과 절차 모든 면에서 법적인 요건을 만족시킬 때, 특정한 의무에 대해 특정한 권리에 대한 제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포괄적으로 ‘의무’를 안 했으니 포괄적으로 ‘권리’를 제한받는다는 건, 솔직히 반박할 가치도 못 느끼는 헛소리다. 두발규제는 전혀 합당한 ‘처벌’이 될 수 없으며, 이 논리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모두를 대상으로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경제적 능력을 이유로 드는 사람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 해서 인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능력이 없거나 부족한 실업자라고 해서 인권을 침해당해도 되는가? 인격을 모독해도 되는가? 고문하거나 때려도 되는가? 경제적 능력의 부족은 자연스럽게 합당한 경제적인 권리의 부족을 낳을 뿐이다. 청소년들은 민법상 경제활동에서 상당한 제한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인간의 인권-기본권을 무효화시킬 수 없다. “아동권리협약” 같은 것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라.
  게다가 이미 다수의 청소년들은 반쯤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부모의 ‘친권’에 의해 권리를 제한받고 있다. 솔직히 한국은 ‘친권’을 포괄적으로 해석하는 편이라서 그 자체로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을 정도다.(일기장 훔쳐보기나 감금, 체벌 등…. 솔직히 나는 친권제한특별법이라도 필요하지 않을까 느낄 정도다.) 경제적인 능력을 이유로 해서 인권침해를 받아들일 이유는 전혀 없다.


 

 


인권은 무슨 인권, 멋 부리려는 거지?

 

  두발자유나 용의복장자유에 대한 주장을 하다보면 꼭 부딪치게 되는 반응이다. 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멋 부릴 자유는 자유가 아니냐?”라는 거다.
  우선, “인권이 대체 뭔지 자세한 공부 없이 남들이 인권이라고 하니까 따라나서는 사람들은 인권을 말할 자격이 없다.”라는 주장부터 반박하자. 인권의식은 지식이 아니다. 인권의식은 차라리 감수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인간이 인간인 한 공통적으로 가지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으며, 이는 스스로가 자명하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라고 노직이란 학자는 말했다. “직관적으로”에 밑줄 바란다. 어떤 제도나 처우가 인권에 비추어봐서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헌법 조문이나 국제협약 조문을 뒤적거려서 아는 게 아니요, 느낌으로 알 수도 있다는 거다. 그 느낌이란 두발규제의 경우에는 “내가 내 머리카락 가지고서 내가 멋 내고 싶은 만큼 내겠다는데 어째서 그런 데까지 간섭하는가?”와 같은 불쾌함이다. 그러므로 인권이 뭔지도 모르면서 멋 내고 싶어서 떠든다는 폄하는 정당하지 않다. 인권에 대해 자세히, 지식으로서 알지 못해도 자기 인권을 주장할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멋 낸다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부정적인 어감으로 들린다. 그래서 사람들이 “멋 내고 싶어서 두발자유 주장한다.”라고 말하면 욕처럼 듣는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의 보도자료를 보라. “학생의 두발자유는 개성의 자유로운 발현권이나 자기결정권, 사생활의 자유 등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 권리로서 인정되어야 하며 학생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두발제한 규정을 근거로 학생들의 두발을 일률적이고 획일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헌법 및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에 부합하지 않으며 특히 강제적으로 학생의 머리를 자르는 것은 인격권 등에 대한 침해라고 판단했습니다.” 여기에서 개성의 자유로운 발현권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멋 낼 권리”로 치환해도 별 문제가 없다고 본다. “멋 내기”라고 말하면 안 좋은 것 같고 “개성의 자유로운 발현”이라고 말하면 좋게 들리는 세상이다. 쳇.
  인권을 말하는 게 가식적으로 들린다면, 최저생활비 보장을 요구할 때 “생활권”이나 “사회권”이라고 말하는 건 가식적인 것이고 “배불리 먹고 살자.”라고 말하는 게 진솔하다는 이야기다. 내가 듣기에는 양쪽 표현 모두 별 차이 없는 것 같다. “멋 낼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이 사회가 통탄스럽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볼 때 멋 낼 권리보다 중요한 권리는 물론 많다. 예를 들면 “자율학습을 강요받지 않고 여가를 즐길 권리”라든가 “맞지 않을 권리”, “획일적인 입시교육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일류대학 안 나와도 부당한 차별 안 받을 권리” 같은 것들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멋 낼 권리”와 배치되는 건 아니다.
  당당하게 주장한다. “개성발현권” = “멋 낼 권리”는 인권이고 기본권이다.

 


선생님에 대한 도전?

 

  혹시, 선생님들이 학생 지도나 수업에 힘이 들지 않겠는가 물어올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만약 선생님들이 힘이 드신다면, 그것은 두발 자유화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열악한 교육 환경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들이 교육에 힘들어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한 반에 30~50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며, 선생님들에게 떠넘겨진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생의 권리뿐만 아니라 선생님들의 권리 또한 보장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선생님들의 권리가 학생의 인권을 침해할 권리는 아니라고 생각할 뿐이다.
  학급과밀화 문제나 입시경쟁체제는 그런 점에서 학생과 교사 모두의 권리를 침해하는 구조적 요인이다. 분량 사정상 학급과밀화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한 학급당 학생수를 지금의 반이나 3분의 1로 줄이는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 선생님의 수가 늘어야 됨은 당연하다. 선생님들에게 부과되는 여러 가지 잡무(돈 걷기, 공문 작성 등등)가 줄어야 한다. 그리고 전체적인 수업 과목과 수업시수가 줄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선생님 입장에서는 자신의 수업 준비와 학생들에게 쓸 시간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범죄나 폭력 등과 같은 것에 대한 생활지도에는 ‘전문 상담 교사’의 확충을 통한 지원이 필수다. 현재와 같이 길거리에서 좀 ‘불량’해 보이는 학생들을 다그쳐 학교를 알아내고 처벌하는 방식은 비교육적일 뿐만 아니라 반발심만 높일 뿐이다. 선생님과의 ‘윤리적 토론’이나 전문적인 상담으로 인격적 지도가 이뤄져야 한다.
  흔히 언론은 학생의 권리와 교사의 권리를 대립되는 것으로 그려놓고 싸움 붙이기를 즐긴다. 그러나 우리는 학생의 권리와 교사의 권리를 반드시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선생님과 학생을 힘들게 하는 것은 구조적으로는 열악한 교육 여건과 왜곡된 체제다. 그런 점에서 교사의 노동권이나 교권(인권을 침해할 권리로서의 교권이 아닌 정당한 교권!)의 보장과 교육 여건의 개선은 학생들의 인권 찾기에 반대되기는커녕,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선생님들도 두발과 복장의 자유화를 이야기할 수 있다. 교사는 성인이고, 존중받는 듯하지만 사실 학교도 엄격한 위계서열과 비민주적인 관행들이 많이 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의 복장과 머리를 보자. 크게 튀지 않는 머리에 비슷한 정장 차림. 왜 선생님은 반바지를 입거나, 튀는 머리를 하거나, 청바지를 입거나 하면 안 되는 것인가? 2006년에는 생활한복을 입었다는 게 욕을 먹을 빌미가 되었던 이용석 선생님 같은 사람도 있다. 만약 선생님들도 복장과 두발의 자유를 주장한다면 우리는 선생님들과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청소년인권을 주장하는 우리는 선생님들과 함께 ‘민주적인 학교’, ‘학교민주화’를 이야기할 자세가 되어있다. 선생님들이 더 이상 ‘가르치는 기계’가 아니라 힘들고, 짜증도 낼 줄 아는 인간임을 고백하고 함께 이야기하길 원한다. 선생님과 학생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원한다. 선생님과 선생님 사이의 평등한 관계 또한 원한다. 지위에 너무 얽매이지 않는 인간적인 관계를 원한다. 각자의 정당한 권리를 존중하고 보장해주며, 잘못된 것은 싸워서라도 고칠 줄 알고, 그러면서도 서로를 배려하는 법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교육의 의미일 것이다.

 

 


군대 가서도 두발자유 주장할래?

 

  이 이야기는 은근히 많이 듣게 되는 이야기인데, 솔직히 말해서 가장 황당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군대와 학교는 가장 차별화되는 조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군대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게 하거나 혹은 그러한 훈련을 시키는 단체이며, 집단의 전투작전 수행능력이라는 목적만을 최우선시하는 조직이다. 그런 점에서 본질적으로 개개인의 인권이나 인격을 고려하는 집단이 아니다. 그러나 학교는 분명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존중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며, 당위적으로는 그 어느 곳보다도 인권적인 공간이어야 한다. 따라서 군대와 학교는 사회 전체를 놓고 볼 때 가장 다른 조직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군국주의 식민지 경험이나 권위주의 군부 독재의 경험이 학교를 군대와 유사한 곳으로 만들어버렸지만, 그러한 과오를 고쳐 나가야 하는 시점에서 군대와 학교를 비슷한 걸로 나열하는 것은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정도의 무식함이다.
  게다가 군대는 본래 인권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폐지되어야 한다. 군대 폐지나 시민군 창설까지는 안 가더라도 최소한 군비의 축소가 인권 실현에 바람직하다는 것은 파리 코뮌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서 제창된 진보적인 인권체계 이후로 종종 나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것은 일정 수준 이상의 군사력이 사회 구성원들의 평화․인권 의식을 저해하고 불안 심리를 부추긴다는 점, 그리고 앞서 설명했다시피 군대라는 조직이 내부적으로도 반(反)인권적이라는 점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개개인이 사상의 자유에 따라 자유롭게 택할 수 있는 대체복무제도 없는 한국의 징병제 군대는 매우 반인권적이라 하겠다. 이에 대해서 유엔의 자유권위원회도 2006년 말 무렵에 양심적․종교적․사상적 병역거부 인정과 적절한 대체복무제 도입을 권고한 바 있으니 참고하기 비란다.

 

 


두발자율화 & 두발완화 -> 인권침해!

 

  두발자유운동을 하다보면 심심찮게 “두발자율화” 혹은 “두발규제 완화”의 주장을 접할 수 있다. 이 두 주장은 두발규제 자체의 완전한 폐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인권으로서의 두발자유를 주장하는 입장과 맞지 않는다.

 

 

  먼저 두발자율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 과거에는 “두발자율화”와 “두발자유화”가 별 차이 없이 사용되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두발자율화와 두발자유화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 용어가 되었다는 점을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우선 지적해둔다. 두발자율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자면, 그것은 학교별로 자율적으로 학생, 교사, 학부모의 교육3주체가 합의하거나 아니면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학생회 등을 통해 두발규정을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반적으로는 강제이발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 덤으로 붙어 다닌다. (그에 비해 두발자유화는 두발자유는 인권-기본권이기 때문에 완전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보통 쓰는 의미에서 ‘자율’과 ‘자유’는 모두 개인을 단위로 하기 때문에, 집단을 단위로 하는 “두발자율화”와 개인을 단위로 하는 “두발자유화”라는 의미의 차이는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그렇게 사용되고 있는데….
  우선 두발자율화가 왜 문제인지 가장 근본적인 부분을 짚고 넘어가겠다. 우선 두발자율화는 그자체가 인권침해다. 인권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기본적 권리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권리이다. 두발자율화는 두발규제 자체가 인권침해적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 이 두발규제를 통한 기본권의 제한이 과연 옳은지를 논의하지 않고 각 개인의 ‘인권’을 집단의 ‘합의’에 양도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 두발자율화는 학교 구성원들 간에 토론과 합의, 다수 여론에 의한 결정 등 매우 민주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두발자율화가 그대로 적용되어, 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두발자유에 대한 설문조사하여 80%의 학생들은 현상 유지, 나머지 20%는 두발자유를 선택한다면, 그 학교에는 두발규제가 그대로 존속하게 된다. 그럼 나머지 20% 학생들은 인권침해를 당하지 않는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다수가 소수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다수의 의견이나 혹은 ‘합의’된 의견이라고 해도 그것이 단 1명의 인권이라도 침해한다면 그것은 인정될 수 없다. 인권-기본권의 제한은 앞서 말했듯이 내용적으로 그 제한의 목적이 정당하고 그 제한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것 등등 많은 조건들이 충족․입증되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집단적 합의를 통해 개개인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두발자율화 논리대로라면, 국민투표를 통해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거나 고문하는 것도 정당하다는 소리가 된다. 만일 이런 전체주의적 폐해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두발자유 설문조사나 혹은 합의 과정에서 때 두발규제를 원했던 학생들에게만 두발규제를 실시하고 두발자유를 바란 학생들은 두발자유를 완전 보장해야 할 것이다.
  또한 두발자율화를 통한 단계적 두발자유화 논리도 경험적으로 그 어려움이 입증되었기에, 두발자유화 주장을 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굳이 두발자율화 단계론 쪽을 선택해야 할 당위가 없다. 2000년도의 두발제한 반대 - 두발자유 운동 때 교육부는 공문으로 교육3주체 합의라는 두발자율화의 입장을 밝혔으나, 그 이후 6년이 지나도록 두발규제가 눈에 띄게 두발자유화의 방향으로 변화할 낌새가 보이지는 않았다. 2000년도 당시에는 상당수 학교가 두발규제를 완화했으나 그 이후 몇 년 동안 다시 강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교육3주체 합의나 토론을 통한 두발자율화 주장의 난점은, 현실적으로 교사와 학부모가 사회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토론이나 합의는 청소년들의 입장을 반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권력 관계의 문제를 간과하고 ‘여론’이나 ‘합의’, ‘설득’, ‘평등한 대화와 소통’을 강조하는 것은 그런 문제를 낳기 마련이다. 청소년들 다수가 저항하고 행동함으로써 사회적 권력의 약세를 만회한다는 적극적인 발상, 권리의식이 결여된 것이다. 2000년의 운동은 두발자율화 지침의 다른 폐해도 잘 보여주고 있다. 2000년의 두발제한 반대 - 두발자유 운동이 이어지지 못한 것은, 두발자율화 지침에 현혹된 사람들이 두발자유운동을 계속 해나가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두발자율화를 교육3주체의 합의가 아니라 학생회 등을 통해 학생들끼리의 합의 형태로 하면 두발자유는 자연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굳이 두발자율화를 거치는지 의문이다. 두발자유가 인권에 부합하고 두발자율은 인권침해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두발자유가 당연히 옳은 것이고, 만약 학생들끼리 두발규제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힘을 갖게 된다면 두발규제의 완전 폐지, 두발완전자유화를 주장하는 것이 옳다.

 

 

  두발완화는 보통은 “길이제한은 없기를 바라지만 염색이나 파마는 좀 그렇지 않냐.”라는 주장이나 “어느 정도 풀어주면 좋겠지만 완전 자유는 바라지 않는다.”의 주장을 의미한다. 이 주장을 하는 동기는 대개 스스로가 두발규제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는 경우와 교사나 학부모가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지레 겁먹고 주장의 수위를 낮추는 경우가 있다.
  우선 스스로가 두발규제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는 경우에 대해서는 두발규제가 왜 인권침해이고 왜 사라져야 하는지 앞에 지겹도록 써두었으니까 굳이 길게 쓰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두발완화 논리가 얼마나 웃긴 건지, 그리고 이기적인 건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어느 날, 매일같이 주인한테 매를 맞던 노예들이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노예들은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주인에게 항의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 주인에게 이야기 하자! 하루에 5대 이상 맞을 수 없다고!” 기껏 주인에게 항거하기로 결심해놓고 5대 이상 맞을 수 없다고 얘기하는 저 일화를 보면서, 기껏 인권을 내세워 두발자유화를 외쳐놓고 어느 정도 길이에서 타협을 볼까하고 고민하는 두발완화(재조정) 역시 노예들의 태도만큼이나 어리석다.
  그리고 “나는 이정도로만 완화되면 족하다.”라는 것은, 이정도 완화로는 족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를 무시하는 것이다. 만약 귀밑 3cm 단발머리이던 두발규제가 완화되어서 귀밑 10cm가 되었다고 하자. 완화되기 이전에는 “나는 귀밑 3cm 단발머리도 좋으니까 두발완화에 반대한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나는 귀밑 10cm는 되면 좋겠으니 완화에 찬성한다.”라고 말하는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염색과 파마에 반대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왜 염색과 파마는 안 된단 말인가?
  예를 들어 특수한 파마를 해서 머리카락이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서 수업시간에 뒷사람이 칠판을 보는 것을 매우 어렵게 할 정도라면 그 사람은 제일 뒷자리로 간다거나 이런저런 제한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권리(예시에서는 교육권)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분명한 기준이 아니라면 그저 자신의 취향과 기준에 맞춰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는 두발규제를 정하고자 할 뿐이다.
  아주 가끔 염색과 파마에 대해서 생태계 오염이나 건강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그건 염색약, 파마약의 생산 자체에 대한 제한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염색약과 파마약의 생산이나 그것의 소비를 장려해대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 없이 청소년들에게만 그것을 제한한다는 것은 그 저변에 청소년 규제의 의식이 깔려 있다는 게 아닐까?
  지레 겁먹고 주장의 수위를 낮추는 것도 협상의 기술면에서 볼 때 전혀 적당하지 못하다. 두발자유화를 인권으로서 강하게 주장할 때 상대방은 논리적으로 그것에 대응해야 하는 곤란에 처하게 되지만, 두발완화를 주장할 때 그것을 단지 머리 길러달라고 떼쓰는 걸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좀 더 높다.(어차피 학교는 보통 그렇게 받아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두발완화를 주장할 때 동원될 수 있는 논리는 기껏해야 “옆 학교는 이렇다.”라거나 “너무 심하다.” 정도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소년들이 두발완전자유를 주장하면 보통 학교는 겨우 그것에 대해 타협안으로서 두발규제 완화를 제안한다. 마치 물건 값을 에누리할 때 목표로 하는 값보다 더 낮은 값을 먼저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완화라는 타협안을 먼저 제안해야 할 것은 결코 두발자유운동을 하는 쪽이 아니다. 우리의 최초 요구는 언제나 두발완전자유화여야 하며, 우리들의 인권이어야 한다.

 

 

  실제로 개별학교에서 두발자유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학교의 타협안에 대해 검토하고 그것의 수용여부를 생각하는 것은 선택 가능한 것이다. 또, 힘이 부족할 때 그런 타협을 수용하는 것이 크게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다.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힘의 부족 자체이지 타협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면서 우리의 원칙을 주장할 때는 두발자율화나 두발완화를 주장하지 않고 두발완전자유화를 주장해야 한다는 것은 인권적인 관점에서 명백한 점이다.

 

 

 


맺으며

 

  지금까지 내가 정리한 논리는 두발자유가 인권이라는 것에 기초하여 두발자유를 옹호하고 두발규제를 반박하기 위한 것들이다. 나름대로 총정리하는 기분으로 썼지만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이 글이 쓰인 시점, 즉 2007년 초까지의 사건들이나 과정들 중 일부만을 반영하고 있고, 두발자유와 관련된 담론(이야기)들은 더 많이 나올 수도 있다. 실제로 내가 쓴 두발규제 반박 논리들에 나온 두발규제 옹호 논리들 외에도 다양한 두발규제 옹호 논리들이 보이고 있다. 이 논리들은 대개 각 학교 홈페이지에 용감한 학생들이 두발자유 주장 글을 올렸다가 교사로부터 반박을 받으면서 수집된 것들인데, 거기서 나오는 논리들을 보면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각양각색인 것에 놀라게 된다.
  하지만 나는 이제 두발자유의 논리를 만드는 시기는 거의 끝났다고 생각한다. 2000년 이후로 두발자유와 청소년인권에 대해서 수많은 토론회가 있었고, 온라인이나 온라인이 아닌 상황에서나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기 때문이다. 이제 두발자유운동은 행동하고 또 행동하는 것이 요구될 뿐이다. 이 글은 새롭게 행동에 나서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까지 축적된 두발자유 주장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어떻게 두발자유를 이룰 것인가?”라는 부분에 대해서 나는 따로 글을 쓰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나는 “어떻게 청소년인권운동을 해나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싶다. 두발자유 뿐 아니라 용의복장자유, 체벌추방, 강제자율보충학습 추방, 입시경쟁 철폐, 민주적 학생회의 건설과 학생회 권리 획득,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무상교육 실현, 청소년노동인권, 장애청소년인권, 청소년동성애자의 인권 등등 청소년인권운동은 너무나 많은 과제들을 안고 있기 때문이며, 이중에는 그 달성 방법 면에서 서로 큰 차이를 보이는 것들도 있지만 유사한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용의복장자유와 체벌추방과 같은 문제는 두발자유 문제와 방법론적으로 유사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 마지막으로 내 몇 주 동안의 노력의 결실인 이 글이, 읽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다시 한 번 청소년들의 주체적 운동을 통한 두발자유화 쟁취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