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청소년)보호주의를 넘어서야 다른 길이 보인다

공현 2009. 5. 21. 09:53
천주교인권위에서 청탁받아서 쓴 원고
사실 좀 급하게 써서 날림티가 난다;;;




보호주의를 넘어서야 다른 길이 보인다

 

혹시 선생님… 당신은 환자를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까…? 약하고 불쌍한 환자들을 정의의 아군인 자신이 지켜주고 있다…. 그 감각이야말로… 바로 차별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차별이란 누군가를 업신여기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환자를 지키려하고 있어요…. 이것도 어떤 의미론 차별입니다…. 즉 당신은 환자를 자신보다 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위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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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에서 “~주의”라는 말이 붙은 단어들은 보통은 그렇게까지 긍정적인 의미로 유통되지는 않는 것 같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이념 알레르기’ 때문일까? 여하간 여기 제목에 단 “보호주의”라는 말 또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무슨 무역 보호주의 이런 이야기는 아니고, 청소년보호주의다. 본의 아니게 “~주의”의 부정적인 용례를 하나 더 만든 셈이 되었다.

   그렇다고 뭐 내가 “보호는 필요하지만 보호주의는 싫다!” 뭐 이렇게 “보호”에 “~주의”를 붙이면 주의해야 할 나쁜 게 됩니다, 하는 식의 나이브(naive:소박한)한 말장난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굳이 ‘청소년보호’라고 하지 않고 ‘청소년보호주의’라고 한 것은 청소년(=아동, 미성년자 등등)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그 발상이 어느 특정인의 의견이나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제도들로 짜인, 제법 잘 작동하고 있는 시스템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아, 물론 보호주의와 별 연관이 없지만 결과적으로 ‘보호’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는 행위나 생각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보호는 필요할 수도 있지만 보호주의는 싫다!”라는 말이 100% 틀린 것만은 아니긴 하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청소년보호주의가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체 뭐가 그리도 듣기 싫어서 “~주의”씩이나 붙여가면서 이렇게 태클을 거는 걸까? 분명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누가 나 특별히 보호해주겠다는데 싫다고 하는 게 이상한 노릇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보호가 그렇게 좋기만 할 것일까? 골목골목마다 포돌이와 같이 붙어 있는 안내문에 써있는 말들처럼, 정말로 청소년선도, 청소년보호는 우리 사회와 인류가 지켜나가고 실현시켜야 할 가치일까?

   보호라는 건 보통 누가 받는 것인가? 바로 약자가 받는 것이다. 아무래도 약자에게는 강자로부터의 보호, 그리고 유해환경으로부터의 보호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신체적/정신적으로 ‘미성숙’하고 신체적/사회경제적으로 약자라는 이유로 특별한 보호를 제공받게 되며, 그것은 청소년보호법을 비롯하여 다양한 제도나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다. 그 ‘보호’의 영역은 실로 광범위해서 정치,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문화적으로도 수많은 ‘보호’를 당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청소년보호주의의 면면을 살펴보면 아무래도 의심이 든다. 이건 보호를 핑계로 한 통제일 뿐인 것 아닐까? 특히 청소년보호주의가 청소년들을 차별하고 청소년들의 참여를 제한하는 데 동원되는 순간 이런 의문은 확신으로 굳어진다. 학교에서 학칙을 정하는 일에 청소년들이 참여할 권리를 달라고 이야기하는 때조차도 보호주의가 작동하고, 집회에 나가거나 할 때도 보호주의가 적용되면서 “밤10시 이후 안전 귀가”하라거나 “집회장을 청소년유해매체, 청소년통행금지구역으로 하자.”(by 조갑제)라는 말까지 나온다. 부당하게 적은 임금을 받는 때에도 보호주의가 내놓는 대안은 하나, 바로 ‘보호자동의서’가 있어야 일할 수 있다는 식의 대안뿐이다. 청소년들을 보호한다면서 성에 관한 정보들은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어놓고, ‘동성애’를 청소년유해물로 지정하면서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차별 속으로 내몰던 것도 청소년보호주의였다.

   왜 보호해준다는 좋은 소리가 이런 형태로 나타나는 걸까? 그건 청소년보호주의가 근본적으로 청소년들의 주체성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보호주의의 가장 커다란 전제는 청소년들은 ‘미성숙’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보호주의는 ‘미성숙’한 청소년들의 의견과 입장을 고려하기보다는, 비청소년들의 관점에서 청소년들을 어떻게 보호, 선도, 관리할지를 생각한다. 청소년보호주의는, 청소년에 대한 무시, 배제, 차별과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소년보호주의는 다른 청소년인권 침해를 정당화해주는 알리바이, 변명거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청소년들이 현재 사회에서 약자인 것은 분명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청소년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경험이 부족하다는 의미에서 청소년들이 ‘미성숙’한 측면도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청소년들이 약자인 것은 불가피하고도 본질적인 것인가? 그리고 청소년보호주의는 과연 적절한 대안인가?

  청소년보호주의가 적절한 대안이 되기 어렵다는 점은, 청소년보호주의로 인해 청소년들은 사회적 경험을 쌓을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것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청소년보호주의는 청소년들은 ‘미성숙’하다면서 정치에 참여할 기회, 경제활동을 할 기회, 성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문화 컨텐츠들에 접근할 기회를 박탈하거나 제한한다. 그리고 그 결과 청소년들은 더욱 더 가정과 학교에만 갇히게 되고, 더욱 더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지고, 성에 대한 왜곡된 지식만을 얻게 된다. 청소년들이 약자라며 보호해주겠다고 하는 청소년보호주의는 결국 청소년들을 약자인 채로 유지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최윤진 교수는 청소년 권리 제한의 부당성을 고찰하면서 청소년들이 미성숙하므로 권리를 제한한다는 것은 청소년들이 경험을 쌓고 실수할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미성숙’ 상태를 계속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현재의 이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약자인 것, ‘미성숙’한 것은 비단 청소년들의 생물학적인 특성 때문만은 아니다. 청소년들이 이 사회에서 약자이거나 ‘미성숙’한 것은, 오히려 사회경제적으로 그들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험의 총량이 적다거나 신체적으로 좀 약하다거나 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이 사회에서 약자가 되는 것은 어른(실은 주로 30~50대)중심의 방식 및 가치관, 경험을 쌓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 사회, 청소년들을 미성숙한 통제와 훈육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세상의 인식 속에서이다. (#심리학자 로버트 엡슈타인 박사는 10대들의 충동적 행동이나 범죄 등에 대해서 10대들의 뇌가 어쩌구저쩌구하는 경향에 반대하면서, 그들이 판단력이나 책임감이 부족한 듯이 보이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회가 그들을 어른들과 격리시켜 행동을 통제하려 들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청소년들의 성(性)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청소년들의 성(性)을 통제하는 이유는, 물론 뭐 16살 전에 임신을 하면 자궁에 질병이 생길 위험이 몇 배 더 높다거나 하는 이유도 있지만,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주된 이유가 되고 있다.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애 낳아서 잘 기를 수 있냐는 거다. 그런데 임신했을 때 애를 낳아서 기를 수 없는 건 사실 청소년들이 근본적으로 ‘미성숙’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청소년들에게는 경제력이 거의 없고 청소년들의 독립이나 자립을 잘 인정하지도 지원하지도 않는 사회 구조 때문이며, 비혼모나 10대 부모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이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의 성(性)적 권리도 보장하면서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은 청소년들이 더 이상 경제적 약자도 아니게 되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청소년들이 학교와 보호자(부모 등)의 품 안에서만 살지 않아도 되도록 지원하고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보호주의는 그렇게 하기보다는 청소년들의 성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쪽을 택한다. 성교육도 실제적인 것보다는 통제된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고 만다.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요컨대 청소년보호주의의 문제점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고’인데 그 약도 증상을 완화하는 진통제인 정도이니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청소년들을 사회적 약자로 만들어놓고서 “너희들은 약자니까 보호해줄게.”라고 말하지만, 청소년들이 약자인 상태를 극복하게 도와주기는커녕 청소년들이 계속 약자인 상태로 남아있게 하고, 그 와중에 생겨나는 문제들을 조금 완화시켜주는 데 그치고 있다는 소리다. 청소년보호주의는 또 하나의 차별이다.

   그러므로 보호주의를 넘어서는 일은 당장 모든 보호를 철회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들의 사회적 약자로서의 상태를 그대로 둔 채로 모든 보호를 철회해버리면, 이 살벌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에서 이건 뭐 그냥 죽어나라는 이야기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보호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보호주의보다 더 근본적이면서 진정한 대안을 요구하는 것이다. (온갖 부작용들이 산재한) 진통제나 증상 완화가 아니라, 그 원인을 치료하고 바꾸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사회적 약자가 아닐 수 있도록 지원하면서 청소년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길. 청소년들이 ‘미성년자’라면서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는 길. 그 길들은 청소년보호주의를 극복한 다음에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보호주의라는 색안경을 끼고 청소년들의 문제, 청소년인권을 바라보는 한, 그것은 한 꼰대 ‘비청소년’들의 시혜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