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19세 미만’은 왜 ‘미성년자’가 되었나

공현 2009. 8. 6. 04:32

다 쓰고 나서도 세상에 뭔 캠프 자료집으로 A4 7페이지짜리 글을 쓰나... 싶었던a
그냥 혼자 쓰다가 불 붙어서 마구 써버린...





‘19세 미만’은 왜 ‘미성년자’가 되었나

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청소년인권캠프 별세상(2회) “별을 낚다!”



  청소년들에게는, 법적으로 붙어 있는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미성년자”라는 이름이죠. 민법에서는 만 20세 미만, 청소년보호법에서는 만19세(사실상 연20세) 미만, 공직선거법에서는 만 19세 미만 등등으로 그 기준을 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미성년자”라는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지 않으세요? 미성년자라는 말은 ‘아직 성년이 아닌 사람’, ‘아직 완성된 나이가 아닌 사람’, ‘미성숙한 나이의 사람’이라는 뜻이잖아요. 이건 마치 장애인을 “비정상인”이라거나 “부족한 사람”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 같은, 괴악한 센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 한 마디로 차별적인 말이란 거죠.


‘미성년자’라는 굴레

  어떤 사람들을 “미성년자”로 이름 붙이고 “미성년자”로 대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미성년자”라고 불릴 때 그 사람들은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삶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다른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들의 강요를 당해야 합니다. 학교에 다니며 교육받아야 하고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정치 참여 같은 문제에서는 전사회적 왕따를 당합니다. 그들은 학교의 교육과 가족의 보호·통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불완전하고 미성숙하니까, 성숙한 사람들이 그들을 두들겨 패서라도 잘못을 고치려 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반항은 있을 수 없죠. 왜냐하면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들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들이 항상 더 옳을 텐데. 그러니까 학교를 운영하든 자기 삶의 진로를 결정하든 정책을 결정하든, 그들은 쏙 빼놓고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들끼리 알아서 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들은 혹시 무슨 사고를 저지르거나 무슨 사고를 당할지 모르니까 밤에는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보호자의 허락 없이 돌아다니거나 외박을 하거나 하면 안 되죠. 돈을 주거나 돈을 벌 수 있게 했다간 잘못 쓸 수도 있으니까 조금씩조금씩 용돈만 주거나 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미성숙한 그들을 위해 사회가 그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미성숙하고 불완전하니까 혹시 책이나 그림이나 영화 같은 걸 보거나 음악을 듣다가 잘못된 걸 따라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것도 다 미리미리 금지해둬야 합니다. 성행위? 섹스하다가 덜컥 임신이라도 하거나 하면 어떻게 책임을 지겠습니까? 당연히 다 금지해야죠! 그렇게 미성숙한 사람들에게 성욕이나 성적 자유?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청소년의 섹스할 자유? 그게 뭐임? 먹는 거임? 우걱우걱.
  특히 한국에서 더 두드러지는 건데, 이 그들에게는 한 가지 더 무거운 짐이 지워집니다. 입시경쟁, 취업경쟁이라는 짐이죠.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미성년자들이 사회에 잘 적응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을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인재’로 만들기 위해서, 경쟁은 옵션이 아닌 필수입니다. 한국처럼 먹고 살기 힘든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미성년자’는 자연스러운 걸까?

  그런데 정말로 당연한 일일까요? 이렇게 어떤 사람들에게 ‘미성년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꽤나 깐깐한 제한을 가하고 학교에 반드시 다녀야 하게 만드는 등의 일이 꼭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일단 지금 당장 다른 나라들을 봐도 서로서로 다른 점이 많습니다. 정치 활동을 하는 데 나이에 따른 제한이 별로 없다던가, 선거권이 만 16세라던가, 15~16살만 되어도 원한다면 독립해서 살 수 있다던가, 12살에 애를 낳아도 너무 큰 부담 없이 양육할 수 있다든가…. 학교나 교육제도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겠죠.
  최근에 좀 뜬 『88만원세대』라는 책이 있는데 혹시 아실까 모르겠습니다. 주로 한국 20대들의 현실을 다룬 책인데요, 심심찮게 10대들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첫 챕터 제목이 「첫 섹스의 경제학 - 동거를 상상하지 못하는 한국의 10대」입니다. “동거를 상상하지 못하는 한국의 10대”. 이 말 속에는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동거를 상상할 수 있는 10대”들이 있다는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실제로 다른 몇몇 나라들에서는 16~18세만 되어도 섹스·동거·독립을 비교적 자유롭게 큰 부담 없이 할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미성년자’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제도들은 사회가 만든 것입니다. 역사를 꼼꼼히 살펴보면 지금과 같은 ‘아동’, ‘어린이’, ‘청소년’, ‘미성년자’ 같은 개념과 제도들이 생겨난 건 500년도 안 된 일입니다. ‘학교’처럼 거의 모든 아동·청소년들이 꼭 다녀야 하는 교육기관이 생긴 건 그보다도 더 가까운 과거의 일입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100년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이전에도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나 아이들을 다르게 대하는 게 전혀 없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고, 대체로 지금보다 더 이른 시기에 ‘성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청소년들의 뇌가 어쩌구저쩌구 호르몬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소리들을 많이 듣습니다. “주변인”이니 “질풍노도의 시기”이니 “자아정체성 확립”이니 하는 말들을 사용해가며 청소년들을 규정하려는 심리학자들의 이야기를 교과서에서나 책 속에서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청소년들은 충동적이고 미성숙한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사실 이런 얘기들은 100% 과학적인 것은 아닙니다. 문화가 다른 여러 사회들을 살펴보면, 아이와 어른의 구별이 별로 없는 사회,  ‘질풍노도의 시기’ 같은 것 없이 아주 평화롭게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사회 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10대’들이 판단력이나 책임감이 부족한 듯이 보이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회가 그들을 어른들과 격리시켜 행동을 통제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엄격한 규율을 강요하고 권리를 박탈하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더 문제행동을 일삼는 것처럼 보인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사회에 참여할 권리, 경험을 쌓을 기회를 빼앗겼기 때문에 더 의존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데, 능력이 부족하고 의존적이기 때문에 권리와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식의 뷁스런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오히려, 정말로 ‘과학적’으로 말한다면, 성욕이나 성적인 활동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라고 하는 15~16세부터 섹스, 결혼 등이 가능한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이 글이 하고 싶은 말은 분명합니다. 청소년들이 인권침해를 당하며 통제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은 청소년들의 뇌가 아직 덜 익었다거나 그들의 몸 속에서 충동적이고 미성숙한 감정과 행동을 조장하는 호르몬들이 마구 분비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 18세까지는 판단력도 없고 멍청하고 비합리적이다가, 만 19세가 넘으면 판단력이 갑자기 짠하고 생기고 삶과 사회에 진지해지고 합리적으로 변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딴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고, 이 사회가 그따위로 생겨먹은 탓입니다.


왜?

  그럼 왜 이 사회는 이따위로 생겨먹은 것일까요? 설마 특별히 어른들이 못돼먹어서, 성격이 안 좋아서, 변태라서 그런 것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아동·청소년들의 노동이 금지되기 시작한 때, 청소년들에게 학교에 다닐 것을 요구하고 학교를 ‘의무교육’으로 만들어갔던 때를 살펴보면 대충 답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학교 제도는 아동·청소년들의 삶을 억누르고 ‘배워야 하는 존재’인 ‘미성년자’들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요. 실제로도 초등학교가 생겨나면서 아이, 어린이에 대한 개념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았고 중등학교가 생겨나면서 청소년기가 보이게 되었거든요.

  처음 유럽에 도시가 생기고 공장이 생기던 때는, 참 비참하고도 끔찍한 노동 착취가 흔하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많은 공장들이 적은 돈을 주고 아이들을 고용했습니다. 아이들이 임금이 적었던 건, 아이들은 신체적으로 약한 입장이었고, 따로 기술을 가지고 있지도 숙련되지도 않은 노동자로 주로 단순한 업무에만 고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노동자들 대부분이 하루에 최저 10시간 최대 19~20시간씩(!) 일을 하는 끔찍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아동·청소년들이 과도하고 위험한 노동에 목숨을 잃었고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이 10대 후반일 때도 있었습니다.(즉, 노동자들이 20살이 되기 전에 죽었단 이야기!) 빈민이나 노동자 계급에 속했던 많은 아동·청소년들이 과도한 노동 속에 몸을 망치고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응하여, 일정 나이 이하의 아동 노동을 금지하고, 의무교육을 받도록 하는 법률들이 18세기 이후에야 만들어졌습니다. 학교에 다닌다는 취학 증명서를 가져오는 아동·청소년만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 같은 게 만들어지기도 했죠. 그런데 이런 아동 노동 금지, 의무교육 도입 등이 이루어진 데는 두 가지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런 끔찍한 현실을 바꾸고 (아동을 포함해서) 노동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인간답게 살게 해야 한다는 노동자들 자신과 양심적인 지지자들의 목소리 그리고 교육을 받는 것은 모든 사람의 권리이며 평등한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권리 사상의 발전이었습니다. 참 바람직한 일이죠? 물론 직접 노동 착취를 없애고 사람들이 굶어죽을 걱정 없이 살게 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한 궁여지책일 수도 있지만요.
  반면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더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한 노동력이 필요해졌다는 것, 학교 교육을 통해 더 순종적이고 규율을 잘 따르며 생산성 좋은 노동자를 만들 수 있으며 사회 불안을 줄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국가들 사이의 전쟁 등으로 인해 국가의 말을 잘 따르고 군사화된 국민들이 필요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학교의 모습은 많은 부분이 1800년대 프러시아(지금의 독일지역)에서 시작된 국가주의·군사주의 교육에서 온 것입니다. 당시 프러시아는 중앙집권화된 학교 교육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 고분고분한 광산노동자 ▲ 정부 지침에 순종하는 공무원 ▲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일하는 사무원 ▲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시민들. 프러시아의 교육은 순종적인 군인·노동자·공무원을 만드는 교육이었고 복종과 규율을 가르치는 교육이었습니다. 독일 민족주의 교육의 대표자인 얀이라는 사람은 민족부흥을 위해 의무교육이 필요하며, 민족주의적 의미가 없는 교과목의 폐지 등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프러시아의 이런 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지적도 있지요. 그밖에도 그 시대에는 많은 저명한 사람들이 학교 교육이 아동·청소년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국가·정부에 복종하는 인간을 길러내고 생산성 좋은 노동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한국에서 학교교육이 도입되고 ‘아동’이나 ‘청소년’이나 ‘소년’ 같은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한 건 근대 문물이 막 들어오던 1800년대 후반~1900년대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국가주의·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던 것은 한국에서도 별로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특히 조선-대한제국-한국에서는 청소년, 학생들을 민족의 전사이자 조국의 근대화를 이루고 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세대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한국전쟁까지 거치고 난 이후 한국에서도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1954년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장관이 쓴 글을 보면 “여러분이 학교에서 학업을 닦는 목적이 여러분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태어난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일을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미성년자’ ― 청소년, 아동들을 따로 구분하고 학교 교육을 받게 한 것은 국가를 위한 것이었단 겁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던 때에도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이는 것이 국민으로서 청소년들의 의무라고 밝히고 있는 ‘국민교육헌장’을 청소년들에게 달달 외우게 했던 때입니다. 청소년들, 학생들은 조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한 인적 자원으로 생각되었습니다. 한편, 그 당시 청소년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주입해야 할 대상이었고 그 때문에 정치적인 사건들에 대해 알고 판단을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반공주의와 애국주의를 벗어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지만 말이지요. 그건 청소년들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했다기보다는 청소년들에게 획일적 의식을 강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프러시아 교육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교육에서도 군사주의·군국주의적인 모습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과 십 년 전까지도 있었던 ‘교련 과목’도 그렇고, 우리가 체육 시간이나 운동장 조회 때 하게 되는 줄 맞춰 서는 훈련 등도 그렇습니다. 두발복장규제는 특히 군사주의적 냄새가 많이 나는데, 때로는 남자들이 군대에 가는 것을 미리 준비시키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듭니다. 교육에서 경쟁이 심한 것 또한 청소년들을 이 사회에 순응하게 하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효과가 있지요.
  그리고 한때는 한국에서는 청소년 노동에 대한 착취가 심각했습니다. 섬유, 옷, 봉제 등이 주력 산업이던 1960~70년대에는 평균 15~18세 나이의 청소년들이 어두운 공장에서 하루 15시간씩 재봉틀을 돌리고 마름질을 하고 바느질을 했습니다. 이런 노동 현실에 분노하여 항의하다가 분신하여 돌아가신 노동자 분이 바로 전태일 씨(본인도 17살부터 일을 했던)였습니다. 이러한 아동 노동이 실질적으로 금지되고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산업 구조가 바뀌고 민주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1980년대에 들어서였습니다. 이런 패턴은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한국·동아시아만의 특색도 없진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유교 문화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인데요. 독특한 ‘가족주의’라거나 교사에 대한 독특한 존경, 나이에 따라 존댓말 반말이 갈리는 등 나이 구별/차별이 쩌는 나이주의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것들도 한국 ‘미성년자’들의 삶을 괴롭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지요.
  시간이 흐르고 1990년대가 되면서 청소년들의 노동이 줄어들고, 청소년들이 사회에 참여할 이유(반공, 애국, 근대화 등)도 줄어들면서 청소년들은 자연스레 사회에서 왕따가 되어갔습니다. 1920년대에는 그렇게 흔하던 중고생들의 동맹휴학이나 학교 점거, 시위 등이 지금은 별로 없는 것에는 이런 역사적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사회의 주체라기보다는 의미있는 소비계층, ‘알 수 없는’ 젊은 세대 정도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최근에 촛불이다 뭐다 하고난 뒤에야 사회적 주체로서 청소년들에 대한 좀 진지한 얘기들이 오가고 있는 편이지요.

  어쨌건 결론을 정리해봅시다. “왜 이 사회에서는 ‘미성년자’를 따로 나누고 통제하고 학교를 보내고 사회에서 왕따시키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그 이유를 대략 요약하자면, ①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동·청소년들이 착취를 당하기 쉬웠는데 이를 막기 위한 궁여지책 ②국가와 기업(자본)이 아동·청소년들을 사회에 순응적이고 명령에 잘 따르고 생산성 좋은 국민·군인·일꾼으로 만들기 위해서 였습니다. ①번 이유는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지금 학교나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큰 영향력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통제는 어른들이 못돼먹어서도 아니고 변태라서도 아니었습니다. 그건 지금처럼 국가가 사람들보다 더 우선시되고, 기업이 돈을 잘 벌고, 지금 같은 가족제도가 유지되도록 하는 등, 이 사회를 계속 꾸려나가기 위해 생겨난 제도인 것입니다. 학교는 우리들이 똑똑해지고 훌륭한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한 게 아니라 국가와 기업(자본)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들어내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지금은 다른가요? 너무 음모론처럼 들린다구요? 하지만 역사를 봐도, 그리고 지금 있는 여러 정책들의 결과를 봐도, 충분히 그럴 듯해 보이지 않나요?


‘미성년자’도 인간이라는 외침

  그래서 우리가 “미성년자도 인간이다.”라거나 “청소년도 인간이다.”, “청소년에게도 인권이 있다.”라고 외치는 것은 단지 나쁜 어른들의 편견을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의 이 사회에 도전하는 일이고, 사회의 문화와 제도와 구조를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을 바꾸고 말을 바꾸고 학교를 바꾸고 가족·가정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일입니다. 그건 어쩌면 자본주의, 국가주의 사회에 대한 혁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뭐 쉽게 말해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란 거죠.
  어려운 일이더라도 ‘만 19세 미만’의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하게, ‘미성년자’가 아닌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상상하기가 좀 어려울 겁니다. 지금 같은 학교, 지금 같은 가족·가정이 없는 사회는 어떤 세상일지. 그럼 14살짜리 청소년이 임신이라도 하면 어떻게 애를 낳아서 기르라는 건지. 8살짜리 아이에게도 투표권을 주자는 건지. 청소년들이 사회경제적 약자가 아니게 만드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 어쩌면 청소년들 스스로도 사회경제적 약자의 지위에서 자유와 권리를 제한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안주하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교복이 없어지면 아침에 뭐 입고 나갈지 고민해야 해서 싫다는 청소년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통제와 타율과 귀차니즘이 자유나 개성이나 인권에 대해 거둔 씁쓸한 승리.)

  구체적으로 그런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서는 더 곰곰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누가 정답을 제시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요. ‘미성년자’도 인간이라고 말하는 외침은, 청소년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토록 많은 것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을 포함해서 말이죠. ^^






* 참고문헌
『바보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존 테일러 개토
『이팔청춘 꽃띠는 어떻게 청소년이 되었나 - 청소년 만들기와 길들이기』 고미숙, 권인숙, 김현철, 나임윤경, 박노자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 아동」 배경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