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

가해자 인권 논의의 오류 & 좀 더 겸손해지길

공현 2009. 10. 7. 11:39


쉽게 쓰라고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다른 분들이 이 논의에 있어서 구사하는 "짐승만도 못한"이니 "베풀 인권"이라느니 "영혼"이라느니 하는 언어 자체가 제가 이해하기엔 너무나 고난도의 것이기에, 저도 거리낌 없이 저에게 가장 쉬운 언어를 택하여서 짧게 씁니다.



@ 인권에는 '인간'이라는 것 외엔 아무 자격도 필요없다

최근에 새로 나온 책인 『인권의 문법』(류은숙) 서문을 보면 '자연권' '시민권' '인권'을 구별하여 설명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뭐 간추려 말해서 자연권이니 시민권이니 하는 것은 그 권리의 '자격'을 따지는 속성이 있지만 '인권'은 자격을 묻지 않는 권리라는 겁니다.
인권은 풀어 쓰면 그냥 '인간의 권리'니까요. 인간이기만 하면 어떤 자격도 묻지 않고 자명하게 인정되는 것이 인권입니다.(여기에서 '자명'하다는 것은 인권의 역사성이나 사회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권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하긴, "권리"라는 발상 자체가 다분히 인조적인 건데)이니까요-. 다만 인권 자체의 논리 안에서 인권은 자명하다는 말입니다.)

* 인권의 실제적 보장은 결국 국가-사회에 의한 법이나 질서에 의한 보장이므로 결국 인권은 국가에 의해 보장되는 개념이며 시민권이다... 라는 아렌트식 논의는 그냥 넘어가구요. 이건 정말 정치학자스러운 논의니까.


그래서 인권을 이야기할 때 가장 처음 문제가 되는 건, 어쩌면 '인간인지 아닌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여성, 장애인, 흑인 등은 '인간'이 아니던 사회가 있었지요. (뭐, 이 경우엔 사실 '시민권'에 가까운 개념이지만 은유적으로 넘어가고...)
그러나 그런 자격 조건을 모두 넘어서가면서 선언된 것이 '인권'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격조건에 따른 차별들을 넘어서는 투쟁들에 정당성을 제공해온 것이 인권입니다.
(- 태아가 인간이냐, 사이보그가 인간이냐 등의, 애초에 '인간'이라는 경계 그 자체가 철학적이거나 생물학적이거나 유물(唯物)적인 면에서 모호해지는 영역들이 존재할 수 있지만요.)

누군가가 인간인 이상 그 누구도 그 사람의 인권을 박탈한다고 선언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그 사람의 행위에 대한 가치판단을 가지고 그 사람의 존재에 대해 인간이 아니네 맞네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뭔가 생물학적이고 유물(唯物)적 차원에서 인간이 아닌 경우가 아니라면요


"넌 인간인데 인간이 아냐 ㅋ"는 말이 안 되잖아요? -_-

예를 들어, 명제로 표현하면-
: 살인범은 살인을 한 사람이다.
  사람이면 인권을 가지고, 인권을 가지면 사람이다.
  살인을 하면 인권을 박탈당해야 한다.
  인권을 가지지 못하는 살인범은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이건 진중권이 거창하게 비트겐슈타인까지 인용해가며 쓴 명문 중 하나인 "반대를 위한 문법적 착각"의 한 부분을 연상시키는 논법입니다. 
"나는 당신이 남자인 것을 반대한다." 
"나는 당신이 인간인 것을 반대한다."



 만일 살인범이 정말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사람의 법률로 살인범을 처벌하는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서 법률이 적용되고 책임을 묻고 처벌을 하는 거니까요.


애초에 누군가가 인간인 이상, 인권이 있네 없네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모순입니다.




@ 범죄자의 인권제한은, 의무를 어겼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인권이 있고 그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사회의 목적이다 라는 것은 프랑스 혁명 등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근대 사회가 성립되면서 이루어진 기본적인 약속입니다.
물론, 어느 사회든지 범죄자들의 인권을 제한(처벌)합니다.

하지만 그 제한의 논리는 "사회의 약속인 법을 어긴 당신들은 인권이라는 약속을 누릴 수도 없다!"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필요최소한으로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자들을 처벌한다 / 또는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 교화한다."입니다.

(즉 "범죄자는 인권이 없다", 가 아니라 - "범죄자도 인간이라서 기본적 인권을 누려야 하지만, 더 큰 인권침해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최소한으로 인권을 일부 제한하는 조치를 취한다.", 입니다. 일종의 '필요악'일까요.)


'인권'이라는 약속은 사회 구성의 가장 첫번째 원리이자 약속이고 다른 법이 만들어지는 기초입니다.
더군다나 그 '첫번째 약속'은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약속입니다. 일부 범죄자에 대해서만 '인권'을 인정하지 말자고 하는 식의 논리는 사실 사회의 기본 원리로서의 인권의 성격을 무너뜨리는 겁니다.
처음 한 약속에 근거를 두고 두 번째, 세 번째 약속을 했는데 - 여섯 번째 약속을 어겼다고 해서 처음 한 약속까지 싸그리무효가 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섯번째 약속 속에는 첫번째 약속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서 여섯번째 약속을 어기는 것은첫번째 약속의 일부를 무시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그것이 이 사회를 만들고 운영하는 '첫번째약속'인 인권의 기본 성질과 근간을 모두 무효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사실... 애초에 법률이든 사회적 합의이든 - 그 약속 안에는 그 약속을 어겼을 때의 처벌까지 약속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기도 한데)

"약속을 어긴 너는 인권을 보장받을 자격이 없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결국 그 논리의 기본 골격은, 선언으로서의 인권이 아니라 의무가 선행한다는 식의 유치한 권리론으로 후퇴하게 됩니다. "니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너의 권리는 없다."라는 식의 암울한 권리론 말입니다.


예, 뭐 저도 12년형이 사안의 정도에 비추어볼 때 그리 쎈 형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한국의 사법부가 성폭행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판결을 내려온 것에도 불만이 많습니다.(인권단체, 여성단체 모두가 꾸준히 지적해온 문제입니다. 술을 마셨다는 것 등을 이유로 심신미약으로 감형되는 것에 대해서도요. [일다] 취중 성폭력은 감형? 가중처벌해야)
그러나 그런 판단이 "성폭행범 새끼에게는 인권이 없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건 아닙니다. 성폭력이라는 인권침해의 종류와 상해의 정도에 비해 형벌이 더 무거운 게 좀 더 적절할 것 같다는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아마도 "조XX 같은 놈들의 인권은 더 많이 제한받아야 한다, 거의 없을 만큼"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죠? 하지만 거칠게 "성폭행범에게 인권은 없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순간, 그 말은 너무나 위험한 말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스팀받은 사람들에게 던질 떡밥으로 성폭행범에 대한 형벌을 강화하는 입법안이나 내고 있는 국회의원들이 한심스럽고, 예방을 위한 다른 조치들을 더 강구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겁니다.

뭐, 애초에 감옥에 처박아놓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한국의 형벌 시스템 그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이 있고 그 위에서 몇 년형을 때렸느냐를 논해야 하는 상황에 불만이 있지만요.




@ 범죄는 사회적 문제 + 겸손함

인권, 이라고 하면 다분히 개인주의적인 주장일 것 같은 생각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의외일지 모르지만,
소위 '진보적(좌파적?) 인권운동'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인권운동 단체/활동가들은 사회주의적으로, 구조주의적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권 자체가 굉장히 사회적, 구조적, 공동체적 논의이기야 하지만요.
 
범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범죄는 개인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사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성품이 원래 나빠서, 유전자가 안 좋아서, 별자리가 개떡 같아서, 무슨 공의 경계 기원각성/살인고찰 편처럼 그 사람의 '기원'에 문제가 있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일까요?

대부분의 범죄는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인권운동가들이 사형을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사형은 어떤 범죄를 그 범죄자 개인의 책임으로만만드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 하나를 제거함으로써 범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그 사람의 존재에 떠넘긴다는 거지요.
(사형이 생명권 자체를 박탈하는 국가의 살인이라거나 사형이 가지는 여러 폐해들에 대한 우려가 가장 기본적인 이유긴 합니다)


제가 놀라는 것 중 하나는 말이죠...
사람들은 "내가/당신이 피해자의 가족이라면"하는 식으로 스스로를 피해자 측과 동일시하거나 피해자의 입장에 한 번 서보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엄청나게 많지만, "내가/당신이 가해자라면"하는 식으로 가해자와 동일시해보는 경우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가해자는 자신과는 전혀 별개의 존재이고 자신은 가해자가 될 수도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이 얼마나 오만한 근자감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느 부분에선가는 소수성이 있다" 운운하는 이야기들을 저는 제법 많이 들어왔는데, 그 말을 뒤집으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느 부분에선가는 다수성(majority, 주류성)이 있다"라고 해도 큰 문제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성폭력 범죄자들에게 열폭하면서 그런 놈들은 인권이 없다, 처참하게 죽여야 한다, 전자팔찌를 채워야 한다, 등등의 말을 내뱉는 분들을 보면 좀 당황스럽습니다. 자신은 그런 범죄자가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 자신감. 그런 게 팍팍 느껴져서요.

(어떤 범죄는 전자팔찌를 채우고 어떤 범죄는 안 채우고 이런 기준 자체가 사실 좀 모호한 일이라는 위험성을 고려하고)

첫 번째로, 병역거부를 준비하고 있어서 이미 '범죄자'가 될 채비를 하고 있고,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이나 공무집행방해죄나 무단침입죄나 국가보안법 등으로 잡혀갈 가능성이 높은 삶을 살고 있는 저로서는 그런 자신감은 무리이기도 하고-

두 번째로 꼭 그런 정치범으로서가 아니라도, 저는 저 자신도 살인자, 강도, 사기꾼, 성폭력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가해자들을 타자화시키는 일은 잘 못하겠습니다.


범죄자 한 명에게만 열폭하는 사람들 중 몇몇 분들의 모습은 범죄가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타자화되고 괴물처럼 그려진 범죄자 한 명을 사회에서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을 만족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그 속에는 '피해자화'의 논리도 들어 있지요. 피해자를 어떻게 '회복'시키고 피해자를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에 대한 장기적이고 세심한 고려는 포기했으니까요. 피해자는 피해자로 남아야 하지요. '영혼의 파괴' 어쩌구저쩌구 하면서(저는 적어도 그런 식의 영혼이란 것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귀신이라면 어떨지 몰라도.).
그 '영혼의 파괴'라는 비유가 심리적 상처, 트라우마에 대한 비유라면 그건 굳이 성폭력이 아니라 하더라도 남습니다. 폭력, 집단적인 따돌림이나 괴롭힘, 방임, 사고, 그런 것들 대부분이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성폭력은 구체적이고 신체적인 폭력입니다. 성폭력 피해는 신체적 (그리고 신체 일부로서) 심리적 피해입니다. 굳이 성폭력만을 특정해가며 '영혼의 파괴'니 운운하는 것은, '성'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곤혹스러워 하는 것과 동시에, 성폭력 피해-생존 여성들을 피해자화하려는 맥락이 읽힙니다. 그러나 많은 성폭력 피해-생존 여성들이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건 피해를 축소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어쨌건, 요는 좀 더 겸손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누군가가 인간인지 아닌지를 내가 내 도덕과 가치판단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든
나는 절대로 그런 가해자/범죄자가 되지 않을 것이고, 범죄는 오직 그 이상한 몇몇 놈들의 문제라는, 나는 책임이 없다는 의식이든





0.
가해자가 인권이 있냐 없냐 같은 류의 얼토당토 않은 '문법적 착각'스런 논의에 빠져 있기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아동성폭력을 포함하여 모든 성폭력의 예방, 그리고 그 성폭력에 대한 적절한 사후조치(처벌을 포함한)에 대한 논의가 가능해지길 바라면서.
그리고 영혼에 상처가 어쩌구 하며 이야기하는 분들 중에 체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지 사소하고 짓궂은 궁금증을 남기고서.
아동인권-여성인권 보장, 아동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성적 실천 / 섹슈얼리티를 포함하여)의 신장이라는 좀 더 장기적인 방안에 대한 고민을 담아서.





p.s. 당신이 피해자의 가족이나 친구라도 가해자에게 인권이 있다, 범죄자도 인간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냐고 물으면 저는 아마 그럴 거라고 답할 텐데, 어떻게 답하든지 '위선자' 아니면 '현실을 모르는 놈' 아니면 '냉혈한' 아니면 '탁상공론'이 될 그런 류의 질문이긴 하지만, 어쨌건 그렇게 답할 겁니다.

p.s.2. 더 추가적인 보충 내용들은 아래 링크한 글들을 읽어보시면 좀 더 명확해지는 부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 참고 문헌 -------------------------------------------

'피해자 인권' VS '가해자 인권'? - 김슷캇 (사회당 덕후위원회) 님 블로그

" 이들은 인권은 보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기준을 무시한 채 마치 '피해자 인권'과 '가해자 인권'이 따로 존재하는 것 처럼대립화 시키고, '가해자 인권'을 박탈할 수록 피해자 인권이 보장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또한 가해자에 대한 인권 박탈을주장하는 이유로 피해자의 참혹함을 '어떠한 연결고리의 설명 없이' 근거로 들면서, 실질적으로는 스스로 피해자 인권도 침해한다."



"신속하고 통렬한 복수? 부질없다" - 레디앙 신민영님 글

"하지만. ‘12년형 사건’의 후폭풍은 어떠한가? 신속한 전개, 통렬한 복수만을 생각할 뿐. 챙겨야할 디테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다. 사건이 터지자 마자 나온 한나라당의 ‘유기징역 상한 폐지’ 주장. 그리고 ‘응징하고 싶지만, 화학적 거세는 너무하다’라는 인터뷰를 한 진중권씨의 글에 ‘찢어죽인다는 둥’ ‘악마 조가놈을 사형 시키자는 둥’ ‘진중권 딸도 똑같이 당해봐야 한다’는 둥 리플들.

사건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이것을 막기 위해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에 대한 세심한 고려는 온데간데 없고, 강력한 처벌을 해야한다는 주장만 일방적으로 나오고 있고, 한 술 더떠 유화적인 의견을 내놓은 진중권 씨에게 때려죽일 듯 달려들고 있다.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라면, 다양한 논점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나와야 할 텐데 이러한 논의가 원천봉쇄되고 있는 형국이다."




취중 성폭력은 감형? 가중처벌해야 - 일다 조이여울님 기사

"성폭력 양형 실태 통계에 따르면 피해자가 학생인 경우보다 유흥업소 주인이나 종사자인 경우 집행유예율이 높았고, 범행 이전에 가해자와 성관계가 있었던 경우 선고형량이 낮아졌다. 피해자가 음주상태였던 경우와 사건 전에 가해자와 함께 음주, 유흥 등을 한 경우에도 모두 집행유예 비율이 높고 선고형량이 낮아졌다.
 이경환 군법무관은 이 같은 법원의 판단이 ‘피해자 유발설’과 같은 성폭력에 대한 통념과 편견을 암묵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