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

우리 사회가 아직 남자들에게 수컷 역할을 맡겨야 할 만큼 원시적이라는 사실에 고마워하도록 해라!

공현 2010. 2. 13. 14:06


  수호자들을 가리키는 '여신의 신랑'이라는 칭호는, 혼인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나가의 사회를 놓고 볼 때 매우 기이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나가의 여인은 한 명의 남자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동물과 다름없는 재생산 방식을 선택하고 있는 나가의 사회에서, 이 '신랑'이라는 혼인 제도를 연상케 하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 물론 그 의미는 우리의 혼인 제도와 같다. 여신의 신랑이라는 칭호는 그들 수호자들이 다른 여인이 아닌 단 한 명의 여인인 발자국 없는 여신에게만 충실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렇다면 나가 사회에서 이들 수호자 집단은 동물적인 동료들에 비해 고등한 자들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리의 혼인 제도가 나가들의 난혼보다 고등한 방식이라 믿는 것은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자기중심적인 태도다. 때론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곤 하는 논리적 탐구는 아쉽게도 우리의 혼인 제도가 나가의 난혼보다 별로 우월할 것이 없음을 증명해준다.
  사람들은 동물보다 훨씬 성장이 느리다. 따라서 사람의 여자들은 성장이 빠른 동물들의 암컷에 비해 육아에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 이것이 여자와 미숙한 자손 양자에게 위험한 투자임은 자명하다. 혼인 제도는 수컷에게 이 위험을 분담하게 하는 제도다. 즉 먹이를 구해 오고 적대적 환경에 맞서 투쟁하는 등의 역할을 남자가 담당함으로써 보다 안전한 재생산을 꾀하려는 제도가 우리의 혼인 제도다. 이것은 이를 테면 어미와 새끼라는 기본적인 가족 구조에 수컷이 편입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가들의 경우는 수컷이 담당할 역할을 사회적 체계가 대신하고 있다. 심장 적출법에 의해 나가 여자들은 자손을 충분히 보호할 만큼 강력해졌으며 그들의 땅 한계선 이남에서 나가에게 불리한 거의 모든 요소를 일소했다. 그 시점에서 나가 남자들은 자신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 이상 가족의 기본 구조인 암컷 어미와 새끼의 관계에 수컷이 끼어들 자리가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역할이 감소되면 권력도 감소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나가의 사회는 여성이 지배한다. 나는 '여신의 신랑'이라는 호칭에는 암컷 어미와 새끼의 관계에서 추방되자 더 크고 더 위대한 것에 편입되고자 몸부림치는 나가 남자들의 슬픈 소속 욕구가 반영되어 있지 않나 추측한다.
  그러니 이 때려죽이고 싶도록 사랑스러운 손자 녀석아. 네게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그 '남성미'를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면, 우리 사회가 아직 남자들에게 '남성미에 대한 찬사와 존경'이라는 웃기는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남자들에게 수컷 역할을 맡겨야 할 만큼 원시적이라는 사실에 고마워하도록 해라!

- 독설가로 유명했던 우슬라 사르마크 부인이 혈기방장한 손자에게 들려준 애정 어린 충고 中


(이영도. 2003. 『눈물을 마시는 새 2』.  pp.152-154. 황금가지 출판사)





그냥 어느 모 카페인지 하는 데서, 여성 우월주의자였나 여성상위주의자였나로 찍힌 기념으로 발췌해두는 인용문.


(이영도가 나가 사회를 구상하면서 이갈리아의 딸들 같은 텍스트들을 참조한 것은 분명해보인다.
그리고 우슬라 사르마크라는 이름 자체도, 팬카페 등에 보면 어슐러 르귄에서 따온 것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건 여성 상위일지도 몰라 ㅋㅋㅋ

좀 더 세부적으로 이야기하면, 나가 사회는 사회 구성원을 보호하는 기능을 심장 적출법과 키보렌 등 주변 환경 덕에 개개인이 그다지 부담하지 않는 반면에, 아동을 양육하는 기능은 '가문'에서 여성들이 맡고 있다. 즉 양육, 육아 기능까지도 사회가 상당 부분 부담하게 되면 나가 사회는 여성 상위가 아닌 구조로 변화해갈 수도 있다.

부모(친권자)의 아동에 대한 권력의 문제를 개선할 방안을 고민하기 위해서도, "역할이 감소되면 권력도 감소되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문장은 참조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