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꿈

상산고 교육의 실패

공현 2010. 2. 20. 03:16


내가 평소에 밝히기 꺼려하는 내 경력은,
내가 속해있는 대학교와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다.
대학 이야기는 나중에 할 기회가 있을 테고.


나는 '상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냥 이니셜처리할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 허울 좋은 학교의 명예 따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밝히기 싫어서 - 그냥 쓰기로 했다.)

'수학의 정석'을 써서 번 돈으로 만든 사립학교라는데,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수학의 정석으로 번 돈을 가지고부동산이라거나 여하간 어떤 불로소득으로 만든 거 아니냐는 소문이 학생들 사이에 있었다. 정석 판 돈만 가지고서는 학교 못만든다는 나름의 계산과 함께. 물론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는 학생들 사이의 괴담일 뿐이다. 지배자-권력자에 대한 피지배자들의 일반적인 태도.


나는 말하자면 자립형사립고 1세대로, 노무현 정부가 자립형사립고를 공인하고나서 시범운영으로 지정된 6곳인가 7곳의 자사고 중 한 곳인 상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솔까말, 자사고가 뭔지 잘 아는 사람도 별로 없던 때고, 막 인문학 가르치고 양서 읽기 한대서 대안학교 같은 건 줄 알았어욤 ㅠㅠ  --> 같은 자기 변명은 줄이고...)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최소한 상산고 교육을 경험한 입장에서는 '자사고 교육'은 실패했다고 느낀다.

아니, 뭐 제대로 말한다면 한국 교육의 실패를 논해야겠지만 -┌

여기서 실패라는 건 입시 성적, 입시 결과를 놓고 하느ㅏㄴ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상산고가 명목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교육의 목표'가 달성되지 못했음을 지칭한다.
어차피 한국 고등학교들의 목적이 그 고등학교의 교훈이나 교육기본법에 나온 민주시민 양성 등의 교육목표가 아님은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일단 자기들이 그렇게 내세우고 있으니 과감하게 '실패'라고 말해줄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서울대에서 뭐를 지냈다고 하던 교장은 뭐 명문 사립고(말하자면 미국이나 영국에 있는 그런 삐까번쩍한)를 만들고 싶다고 했지만 (애초에 그것은 얼마나 계급적인 꿈이던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_-;;;;;) 학교 운영은 결국 한국 학교적 한계를 그다지 벗어나지는 않았다.
(--- 사실 교장의 언행부터가 모순인 게, 교장은 외국 명문고 학생들은 따로 두발복장규제 같은 거 안해도 알아서 단정하게 잘 하고 다녀서 규제를 않는 거고 니네는 그렇게 못하니까 별 수 없이 규제하는 거란 식으로 말한 적이 있는데, 일단 그 외국 이야기가 사실인지도 의심스럽지만, 그러한 규범을 벗어나는 사람에 대한 관용이 전제된 상태에서 문화적으로 규범이 형성되는 것과 학교에서 불관용을 전제로 규범을 강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이다.)

(두발복장규제를 온존시키고 있고 체벌도 은근 빡세게 존재하고 있었고) 전근대적인 형태의 교육 방식과, 근대적인 입시 경쟁의 모순이 있는 상황에서, 인간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지성을 갖춘 사람을 길러내겠다는 식의 교육 목표나,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은 '상산인의 헌장' 따위는 연설문이나 학교 홍보물을 꾸미는 장식품 이상이 되지 못했다.

※ 상산고에서 학생들에게 도덕적 마음을 길러준다며 꽃동네 전교 사회봉사를 보내던 것을 생각하면 이런 '인간성'이나 '도덕'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장애인들을 사회에서 격리해서 수용하는 이런 시설들은 장애인권의 관점에서, 장애인 당사자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그 '인간성'이란 대단히 비인간적인 동정, 우월한 입장에서의 자선 따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니었을까. 사회 지도층의 아량, 동정이란 참 비인간적이다.

개인연구, 양서읽기, 가창시간 등 그나마 보통의 인문계 고등학교보다 덜 입시 종속적인 성격의 특수 교과목들은 논술 대비용으로 취급받거나 아니면 학생들에게 입시 공부를 위한 자체 자습 시간 정도로 취급 받을 뿐이었다.




비록 내가 다닌 학년은 자사고 1기로서 뭔가 미묘한 집단이라서, 특목고에는 가기 좀 미묘하면서도 성적이 좋거나 아니면 특출난 장기 분야가 있는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재밌는 친구들도 꽤 많이 만났지만, 이런 경향은 해가 갈수록 점점 사라지고, 성적이 좋은 모범생, 상류층의 학생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게 내가 재학 중에도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보면 나는 어쩌면 상산고 최대의 수혜자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입시 성적으로가 아니라,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여하간 나는 상산고 전대미문의 잉여+민주 만화동아리에 있었던 데다가, 방학 특강 시간에 공산당선언이나 미셸 푸코를 배우고, 다양한 형태의 아나키스트/좌파/무신론자/자유주의자/열린우리당지지자/민주노동당지지자/자연과학자/경제학자/수학자/작가/아마추어 일러스트레이터&만화가/프로그래머 등등을 만났으니까 말이다. 나는 상산고에서 글쓰기 능력과 독서, 많은 대화와 토론을 겪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학교가 공식적으로 제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조건들은 2-3년이 흐르면서 빠르게 사라져갔다. 공식적 학교 시스템으로부터 내가 받은 것으로 가치 있는 것은 논문 두 편 쓴 경험 외에는 없었다고 말하면 건방져 보일까? 좋은 교사들은 몇 명 있었지만 그뿐.
부모님은 내가 안 쫓겨나고, 학교 안 그만두고 무사히 졸업한 것만으로도 상산고여서 가능했다고 하지만, 그런 걸로 감사하고 좋아하기는 너무 좀 그렇지 않은가.





자사고가 입시기관화하는 것은, 대입에 종속된 중등교육에서 학교 서열화에 따른 것인 동시에 학부모, 학생들의 욕망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입시기관화된 자사고들은, 지금도 SKY에 몇 명씩은 꼭 보내는 꽤나 성공적인 입시기관인 동시에(이미 성적 높은 애들 뽑아서 SKY 몇 명 더 보냈다고 하는 게 자사고의 우수함 때문인지는 차치하고--) 교육의 실패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지는 않나 싶다.


마치 내가 상산고에서 만난 학생들은 대개 좋은 학생들이었던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뭐 어느 학교, 어느 집단이든 수백명 이상 단위가 되면, 꼭 맘에 드는 사람만 있는 일은 별로 없겠지만-; 뭐랄까. 어설픈 엘리트들이 탄생하는 과정을 보는 기분이랄까. -_-;;
자기가 자사고 학생이고 사회 지도층 ━ 간혹 지식인이라는 어설픈 허영을 가진 사람들. 세계 속에 자기의 위치를 직시하려 하지 않으며, 자신을 객관성과 양비론의 우위 속에 감추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간단한 예로, 대입제도에 내신이 강화되는 것에 대해서 솔직하게 내가 불리해서,  내 이해관계 때문에 싫다고 하지 않고 온갖 말을 붙여가며 경쟁력이 어쩌구 공정성이 어쩌구 하는 것) 발로 뛰면서 현장 - 세계를 겪어보지도 않았으면 한 발 물러나서 여러가지 것들을 평가하고 시험 문제 풀듯이 사회문제를 풀려고 하는 학생들. 그러면서 봉사나 무슨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위한다며 하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나 하나의 소양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 누군가가 합리적인 목소리를 내거나 자신의 삶을 위해 행동에 나설 때 그것을 말로는 지지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지만 같이 행동할 줄은 모르며, 이러쿵저러쿵 비평할 줄만 아는 사람들. 너무 쉽게 얼마든지 비겁해질 수 있는 사람들. 자기가 비겁하다는 건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런 학생들도 상당수 있었고, 이런 경향은 내 다음다음 학년이 더 심한 거 같아 보였고, 만약 입시기관적 성격이 더 강화되어 간다면 자사고에서 그런 학생들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수천명인지 수백명인지를 먹여 살릴 거라고 하는 이 '엘리트', '사회지도층'들 중에 저런 사람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게 된다면 말이다.


참 내 입장에서는 입시교육기관화된 부분에서 이미 상산고 - 자사고는 격한 실망의 대상이었다.
내가 어설프게 일구어놓은 청소년인권운동의 조직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도 자사고의 특성상 이미 예상한 일이긴 한데,(물론 내 잘못도 있고.)
아예 대놓고 기숙사에서의 단체기합, 체벌 문제 등으로 여러 번 학교와 마찰을 빚은 인권동아리 활동에 압력을 가하고 허가를 내주지 않던 모습에서 이미 자사고는 근대적 자유주의와 다양성조차 포기한 보통 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공간으로 봐야 하겠지. 약간의 정도차이가 있을 뿐.

자사고가 입시기관화되면서 발생하는 다양한 '실패'들은 어차피 자사고들에만 책임을 묻긴 힘들겠지만서도 (모든 학교와 교육시스템, 사회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지.)



그냥 상산고 교육과 그 교육의 결과물들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불평을 늘어놓고 싶은 계기가 있어서.


-- 그런데 내가 졸업하고 난 이후에 입학한 분들 중에서도 내 이름과 일화들을 아는 학생들이 상당수 있다던데, 지금도 아는 분들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느덧 졸업한 지도 4-5년 됐으니










어쨌건 결론 :: 그러니까 자사고 늘리지 말라고 이명박이든 뭐든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