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벌의 교육적 효과’라는 말의 모순과 본질
체벌 사건이 불거진 어느 한 중학교에, 면담을 하러 찾아갔을 때 일이다. 어느 한 학부모가 “잘못을 하면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라는 말을 했다. 한창 논쟁 중이었던 나는 그 말 한 마디에 화가 나서 그동안 마음에 꾹꾹 담아 두었던 말을 꺼내고 말았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이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선생님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 선생님을 때리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이 말은 단순히 역지사지의 자세를 가지라고 요구하는 발언이거나 싸가지 없는 발언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실 이 말은 체벌 옹호론이 안고 있는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고자 했던 말이었다.
체벌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주장 중에는 이런 게 있다. <체벌은 중요한 교육적 효과가 있으므로 정당하다.> “잘못을 하면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라는 말을 좀 더 세련되게 바꾸면 대충 이런 말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 이 말을 한 번 찬찬히 가지고 놀아보자. 이 문장에서 “교육”을 ‘올바른 것’을 알고 있는 교사가 ‘잘못된 것’을 생각/실천하는 혹은 ‘올바른 것’을 알지 못하는 학생에게 ‘올바른 것’을 알고 받아들이고 동의하도록 하는 과정이라고 구체화해볼 수 있다.(물론 교육은 이런 단순한 과정이 아니지만, 적어도 올바른 것을 아는 교사가 잘못을 하는 학생을 교육적으로 체벌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머릿속에 있는 ‘교육’의 그림은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다.)
그러므로 문장을 이렇게 바꿔볼 수 있다. <체벌은 교사가 알고 있는 ‘올바른 것’에 학생이 동의하도록 하는 데 유용하므로 정당하다.> 이 말은 결국 이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폭력으로 어떤 생각에 다른 사람이 동의하도록 하는 것은 정당하다.>, 아니면, 적어도, <정당할 수 있다.>
이 명제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를 떠나서 이 명제는 심각한 모순을 일으킬 가능성을 안고 있다. 문제는 어떤 생각이 그 생각 자체의 설득력이나 효과가 아니라 그와 무관한 외부의 요인에 의해 다른 사람이 동의하도록 만드는 것이 정당하다는 부분에서 생긴다. 물론 현실에서야 생각이나 주장에 동의하는 데에 많은 외부적 심리적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그것이 정당하다고 선언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인 것이다.
이를 정당하다고 선언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모순은, 그 명제 자신과 반대되는 명제를 연결시켜 일종의 메타 명제를 만들어보았을 때 일어난다. 어떤 명제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 명제 자체의 내용과 무관하게 외적 수단에 의존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명제와 그 외적 수단 사이의 불일치와 모순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예를 들어보면 이런 것이다. : <“폭력으로 다른 사람이 내 의견에 동의하게 만드는 건 잘못이다.”라는 의견을 폭력을 이용해서 동의하게 만드는 것은 정당하다.>(이는 실제로 학교 현장이나 가정에서 곧잘 일어나는 모습이다!) 물론 이런 기괴한 모순은 ‘폭력’이 아닌 다른 것을 넣어 봐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돈으로 다른 사람이 내 의견에 동의하게 만드는 건 잘못이다.”라는 의견을 돈을 이용해서 동의하게 만드는 것은 정당하다.>
탈출구와 본질
체벌을 옹호하는 입장을 유지하면서 이 모순을 벗어나려고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인 듯하다. 하나는 솔직하게 이 모순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교육적 효과를 주장하지 않으면서 단지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체벌은 교육적 수단이 아니라 열악한 교육환경이나 가정환경 속에서의 통제 수단, 일종의 필요악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책임을 지고 그래서 체벌이 없어져도 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체벌금지 문제가 사회적 공론화가 된 지도 어언 15년이 다 되어가는 상황에서 준비가 부족하다는 투의 이런 주장은 무책임해보이기까지 한다. “너무 오래도록 지연된 정의는 부정된 정의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또한 체벌이 단순히 필요최소한의 통제 수단으로서만 긍정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사람들은 실제로는 체벌이 대단히 광범위하게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현실에도 반대하는 위치에 서야 할 텐데,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어쨌건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될 때, 그나마 생산적 정책적 논의를 할 수 있게 될 것 같기는 하다.
두 번째 방법은 “아이들의 경우에만, 미성숙하므로 맞아도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을 좀 더 풀어써보면 이렇다. “아이들은 미성숙하고 어른들은 성숙하다. 그러므로 어른들의 생각은 아이들의 생각보다 항상 옳다.” 적어도, “옳을 개연성이 크다.” 또는 “아이들은 미성숙하므로 어떤 의견의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외적 수단을 통해 동의시킬 수밖에 없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명제와 외적 수단의 모순’이 해소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이에 비해 어른이 언제나 ― 적어도 대체로 옳다는 것을 이미 전제해버리고서는, 거기에서 어떤 모순이 생기든 ‘어쨌건 옳기 때문에’ 그걸 깔아뭉개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맞아도 되는 존재’로서의 아이들과 ‘사람’을 분리시키는 태도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경험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인권적으로든, “아이들은 미성숙하고 어른들은 성숙하므로 어른들이 항상 옳다.”라거나 “아이들은 맞아도 된다.”라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걸 논의하는 것은 이 다음의 일로 미뤄두자. 그저, 나는 체벌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비로소 체벌 문제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즉, 체벌은 아동-청소년과 어른-비청소년 사이의 권력관계이고 계급문제이다. ‘맞아도 되는 존재’(아이, 청소년)와 ‘사람’(어른, 비청소년)을 분리시키는 인식과 구조 때문에 일어나는 폭력이다. 정혜신 박사는 2011년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서 때리는 게 아닙니다. 아이가 여러분보다 약하기 때문에 때리는 거죠.”
아동-청소년과 어른-비청소년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관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인간이 아닌 존재, 인간이 덜 된 존재로 취급당하는 아동-청소년이 어떻게 스스로를 인간으로 인정받게 할 것인가? 오늘도 그런 질문을 던지면서, 학생인권, 청소년인권을 이야기하고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