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병역거부자 팀블로그] 병역거부자인 나는 양심수인가

공현 2012. 11. 8. 14:48


[12.10.17-공현] 병역거부자인 나는 양심수인가

원글 : http://withoutwar.tistory.com/57



1.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 소식지를 읽다가, 일본대사관에 트럭을 돌진시켜 재물손괴죄 혐의로 구속재판 중이신 분이 양심수 목록에 추가된 것을 발견했다. 그분은 어느 일본사람의 '위안부 소녀상 말뚝테러'에 항의하는 마음으로 그랬다고 한다. (그 다음번 소식지에선 양심수 목록에 없던걸보니, 아마 재판에서 실형선고를 안받으셨나보다.) 나는 그 소식을 보며 의문이 생겼다. "이분은 '양심수'가 맞는걸까?" 동시에, 병역거부로 재판을 받고 수감이 될 때부터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거리도 같이 떠올랐다. "나는 과연 양심수인가? 양심수란 정확히 무엇인가?"

'양심수'란 단어를 곧이곧대로 풀이해본다면, 대강 마음 속의 '양심'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양심' 때문에"라는 말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우선, 마음 속의 양심, 신념, 사상, 의견, 신앙 등을 이유로, 즉 어떤 생각이나 믿음을 품고 있다는걸 이유로 수감된 경우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자기 마음 속의 생각이나 믿음을 쓰거나 말하거나 표현했다는 이유로 수감된 것도 '양심 때문에'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뭔가 겉으로 표현한게 없이 마음 속의 것을 알아내긴 어려우므로, 대체로 양심수들은 이런 표현의 자유 문제가 연관되어 있곤 하다. 여기에서 좀더 넓혀본다면, 그런 생각이나 믿음에 따라 어떤 행위,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수감된 사람들도 어쩌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한국 상황에서 '양심수' 개념에 가장 잘 들어맞는 것은 예컨대 국가보안법 피해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이적표현물 소지'나 '찬양, 고무' 같은 죄명으로 처벌받는 사람들일듯 싶다. '비전향 장기수' 같은 경우도, 처음에 갇힌 이유가 무엇이든, 마음 속의 신념을 바꾸지 않는다는 이유로 풀려나지 못하고 계속 갇혀있다면 '양심수'에 해당될테고.

그런데 마음 속의 생각이나 믿음에 따라 한 활동 때문에 수감된 경우를 '양심수'에 포함시키는 것에는 모호한 부분이 있다. 한 예로, 얼마전 노르웨이에서 자신의 극우적 신념에 따라 사람들을 죽인 사람을 떠올려보라. 그 사람 역시 자기 마음 속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것이고 그 때문에 수감된 것이니까, '양심수'라고 불러야할까? 같은 질문이 마음 속 깊이 뿌리내린 신념에 따라 테러를 저지른 사람, 학살이나 전쟁을 저지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가능할 것이다. 이에 대해 적합한 대답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 사람은 그 사람 마음 속의 생각이나 믿음 때문에 처벌받은게 아니라, 살인, 학살, 전쟁 등의 행위 때문에 처벌받은 것이다. 즉, 우리는 어떤 사람의 '양심'과 '행위'를 구분하여 다룰 수 있다.

트럭을 일본대사관에 돌진시킨 그분에게도 마찬가지 기준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분의 의견, 신념과 관계없이 오직 그 행위만을 이유로 처벌을 받는다면 말이다. 사실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에서 싣는 '양심수'들의 목록을 보면 이게 '양심수'가 맞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사례들이 간혹 있다. '양심수'라는 개념이 그저 "나(우리)는 그 사람의 수감에 부당한 부분이 있다고 주장한다"라는 이야기를 포장하는 꾸밈말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가 '양심수'가 아니란 말이 그 사람의 수감이 꼭 정당하다느 뜻도 아닐 것이고. 그러니 '양심수'의 개념은 좀 더 정확하게 쓰여야하고, 또 다른 개념들의 발명도 필요해보인다. 자본친화적 법 적용 때문에 수감된 노동자, 철거민 등을 '계급수'라고 한다거나? (물론, 관련해서 '구속노동자'나 '공안수' 등 여러 용어가 있긴 하다)

그리고 나는, 나와 같은 병역거부자 역시 과연 양심수가 맞는건지 잘 모르겠다. 병역거부자들은 자신의 양심, 신념 때문에 갇혀있는 것인가? 국가는 병역거부자들의 양심, 신념, 신앙을 처벌하는 것인가? 내 생각엔(적어도 최근엔) 국가가 병역거부자들을 입대 영장을 받고도 입대하지 않았다는 '행위'만 보고 처벌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병역거부자들의 형량이 1년6월로 줄어든 최근 몇년은 말이다. 탈영이든 항명이든 입영기피이든 다른 '병역법 위반'들도 큰 차이가 나지않는 형벌을 받곤하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나는 나를 재판한 사법부든 형을 집행한 국가든 내 생각이나 주장에는 아주 무관심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이 나(우리?)의 신념이나 주장의 내용에 무관심하다는 것이야말로 내가 '양심수'가 아니라는 증거 아니겠는가?

2.
'양심수', '양심의 자유' 등이 부각되면, 거기에는 볼테르의 저 유명한 논법이 따라붙곤 한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탄압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이다." 여기서 "동의하지 않는다"란 말의 의미는 상관하지도 판단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리라. 한국 사회에서 병역거부자들에 관해 형성되어있는 비교적 우호적인 편인 이야기들 중에도 그런 종류의 것이 많다. 병역거부자들은 어차피 종교적, 정치적 신념을 굽하지 않고 군인이 되기를 거부할 것이므로, 그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 처벌하기보다는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대안을 마련하자는 것 역시 그 중 하나의 변형 논리이다. 병역거부자들의 신앙, 신념에 동의하진 않지만 감옥에 보내는 것보다 나은 길을 찾자는 식의 이야기도 그렇고. (이런 논법의 배경엔 한국의 공고한 군사주의와 병역거부자의 수적 다수가 '종교인'이라는 현실 등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처럼 사람의 신앙, 신념 등을 국가가 강제로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한국 사회의 인권의식은 크게 발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런 논법이 껄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정치적 병역거부자', '정치적 양심수'에 속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상당수의 정치적 양심수들은 자신이 자유를 침해당해 갇혀있다는 것만큼이나 자신이 탄압당하면서도 생각하고 말하려했던 그 내용 역시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사람들이 '부당한 수감'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 이상으로 자신이 수감된 연유, 자신의 주장이나 활동 등에 관심을 가져주길 원할 수도 있다. 수감 사실이 앞에 오고 그들의 '양심'의 내용은 뒤로, 괄호 쳐진 채 판단 밖으로 밀려난다면 그게 꼭 바람직한걸까?

'양심'이라는 개념은 원래 이런 문제를 초래하게 예정되어 있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고유한 '양심'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고, 공유되기도 어렵단 점에서 사회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니 '정치적 양심수'란 말은 이미 모순을 품고있다.

한나 아렌트는 논문 <시민불복종>에서 이런 '양심'의 문제에 대해 이렇게 썼다. "양심은 비정치적"이며, "개인의 자아와 그것의 고결함을 염려"하지, "잘못이 범해지는 세계나 그것이 그 세계의 향후 진로에 대해 갖는 결과에 주목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자기희생적 요소'가 '강렬한 관심'과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진지함 그리고 법에 대한 충실함'을 나타내는 최상의 증거라는 점은 대단히 불행한 것이다. 왜냐하면 외골수적인 광신은 보통 미치광이의 표지이며, 어떤 경우라도 그것은 문제의 논점에 대한 합리적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공화국의 위기>, 한나 아렌트, 김선욱 옮김, 한길사)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정치적 병역거부자들의 목소리, 이야기를 그저 '존중해야할 고유 불변의 양심'이 아니라 대화해볼만한 정치적 관점, 발언으로 받아들여줬으면 한다. 그런 생각을 할때면 나는 '양심수'로 분류되기보다는 '평화수감자', 차라리 '정치범'으로 불리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도 해본다.

3.
이런 논의는 실은 별로 새로운게 없는 것이라서, 병역거부-평화운동에서는 진작부터 '개인의 인권'과 '반군사주의, 평화'운동아리는 서로 긴장관계가 있는 두 축으로 병역거부운동을 분석해왔다. 한편으로 나는, 병역거부운동과 인권의 언어가 '양심의 자유' 말고 다른 만남을 이룰 수도 있을 것 같다.

병역거부가 국제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양심의 자유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은 결국 역사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체로 알려진 바이다. 유럽지역, 미국 지역 등에서 '종교적 양심'을 앞세운 병역거부가 먼저 등장했고, 그러한 종교적 전통이 이어지고 확산되면서 비종교적(정치적) 병역거부가 그 기반 위에서 나탄ㅆ던 것이다. 출발부터 종교적 신앙적 성격이 있었으니 '양심의 자유' 문제로 다루어질 수 있었고, 때문에 지금도 병역거부는 '양심의 자유'의 대표적 의제 중 하나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역사적 맥락 말고도 다른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병역거부가 중요한 인권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이나, 병역거부가 양심의 자유의 본질적인 내용에 속한다는 해석 등은 모두 병역거부에 대한, 정확히는 군대, 전쟁에 대한 가치판단을 깔고있는 것은 아닐까? 요컨대 사람을 살상하는 군대, 전쟁의 성격상 그것들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에 일반적으로 악영향을 미칠 만하다는 공감대가, 병역거부를 인권의 언어로 옹호하게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양심의 자유'가 '양심'의 내용은 따지지 않는다는 전통적 설명과는 안맞겠지만, 그런 공감대가 없었다면 과연 병역거부가 인권의 대표적 의제이자 본질적 내용으로 입주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졌듯이, 인권은 중립적인 체계가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라는 친근한, 편향적 체계이고 언어이다. 역사 속의 인권 구상들 중에는 상비군 또는 국군의 폐지, 축소를 담고있는 것들도 있지 않았는가? 병역거부자가 '양심수'가 아니라고 해도 병역거부운동이 인권과 만나는 다른 조합들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다. 여하간 병역거부운동 역시 '양심수' 너머에서 계속 나아갈 것이고, 병역거부자들 각자의 말들도 운동을 통해 계속 만들어지고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2012. 10. 17. 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