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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어린왕자, 가방, 짐

어린왕자, 가방, 짐 (2005년 3월에 쓴 "가방, 짐"이라는 수필을 제목만 고쳐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가 자기 별로 돌아가기 위해 버려야 했던 몸뚱이. 긴 여행에 갖고 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인 그 몸. 「어린 왕자」를 처음 읽었을 당시, 그것이 내게는 대단히 인상적인 표현이었던 것 같다. 의식이 있는 것들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짐을 짊어지고 걸어간다. 크리스트교의 「천로역정」에서는 그런 것이 "죄 짐"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꼭 그것을 죄라고 표현할 이유는 없을 터이다. 죄 짐을 벗기 위한 여행은, 불교나 힌두교의 업을 벗고 해탈하기 위한 수행과 비슷해 보인다. 일종의 신비주의적인 사상과 연관지어 볼 때에, 짐을 벗어놓는 비유는 아집을 버리고 근원의 신에게 귀의하는 것을 표현..

어설픈꿈 2008.01.11

옷에게 하는 인사

흔히 인사는 인간 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 중 하나로 생각된다. 인사는 관계의 표현일 뿐 아니라, 관계를 시작하려는 의도를 표현하기도 한다. 서로 무심코 지나치던 이웃 사이에 인사를 통해 정을 쌓자는 말 속에도 그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인간의 사회적인 것들 ─ 언어와 사회적 행동이 대개 그러하듯이 인사는 기호이다. 백과사전의 인사 항목을 보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말이나 태도로 존경·친애·우정을 표시하는 행동양식" 곧, 인사라는 행동양식, 그 기호의 기호형식(signifiant, 기표)이 담고 있는 기호내용(signifiè, 기의)은 존경, 친애, 우정 등이다. 인사는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윤활유이다. 인사를 통해 이미 있는 친밀감도 더해지며, 없던 친밀감도 생기곤..

딱딱한꿈 2008.01.11

시 - 황사주의보

황사주의보 난방비를 아낀다고 창문을 바꿔 달았지 그런데 새 창도 신통치가 않은걸 일기예보에선 별 얘기 없었는데도 황사가 종종 날아 들어오지 복도를 타고 울려오는 계집애도아닌데왜이리조잘대 몰려다니는 남자애들이 흘린 나이스바디미스코리아폭탄엉클장 상표만 없는 알록달록한 별명들 오분만더공부하면남편직업이달라진다 수업 시간의 노신사 분은 모래를 털기도 하지 목구멍에 걸리는 따끔따끔한 황사 먼지들 베란다에선 남자애들이 가래침을 카악대며 먼지를 일으키지 환상이 깨졌다며 눈살을 찌푸리지 햇볕 아래서 조잘대던 우리들 다리에 프라이팬 기름처럼 튀지 그렇게 황사는 계속 심하고 저 선생님은 페미니즘적이라 인기가 없지 그러고 보면 이모는 마흔이 넘게 시집을 안 갔지 어거지로 선을 보는 족족 차버리더니 발톱이라도 깨졌는지 황사에 ..

어설픈꿈 2008.01.11

시 - 편의점

편의점 24시 편의점은 노랗다 거기에서 노란컵라면이나 검은삼각김밥을 사먹을 수도 있다 졸지 못하는 카운터 위에 맴도는 잠이 없는 노릿한 컵라면 냄새가 숨막히게 배고프다 배가 고프지 않던 사람도 노랗게 물든 그 앞을 지나다보면 허기에 물든다 다섯 대의 소방차가 앵앵 언덕을 넘어간다 붉은 사이렌에 아랑곳 않고 편의점은 노랗다 뒤따르는 하얀 앰뷸런스에도 아랑곳 않고 편의점은 노랗다 오늘밤도 가로등 침침한 거리 편의점 노오란 불면증인데 충혈된 간판이 거리를 먹어치우고 있는데 2005년 봄인가, 여하간 초에 썼던 것-

어설픈꿈 2008.01.11

아브라함과 이삭의 수난, 그리고 부모의 독재적 권리

어슴푸레한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높은 천장에 하나 가득 그려져 있는 낯선 프레스코화였다. 주제는 '아브라함의 수난'. 창세기에 수록된 에피소드다. 아담의 자손인 아브라함은 어느 날 주님의 계시를 받고 아들인 이사악을 제물로 바쳐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두터운 신앙심을 지닌 그는 아들을 속여서 모리야 산 정상으로 데려간다. 아브라함이 제단에서 아들을 칼로 찌르려는 순간 주님은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칭찬하고 이것은 모두 너의 신앙심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성서에서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 알렉산드로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이 이야기가 '이사악의 수난'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수난'인 것일까. 가정교사에게 물어봤지만 그는 비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아마 그런 의문을 ..

딱딱한꿈 2008.01.10

서구중심주의와 오리엔탈리즘

(2004년 12월에 썼던 글) 세계화란 것을 나는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다. 게으른 사람인지라 '배워야 하는 언어가 많아져서' 와 같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이라는 현재의 추세가 썩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지금 이 상태로는 적어도 얼마쯤은 실패한 담론이라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국가 간 차별, 인간성 상실, 고용 없는 경제 성장, 같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20:80의 사회"가 괜히 있는 말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자유주의나 세계화가 모두 거부할 체제라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실패"가 무시할 만한 요소는 아니니까. 다만 상투적인 소리로, "비판적인 수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문화적 ..

딱딱한꿈 2008.01.10

수필 - 전쟁 꿈

전쟁 꿈 어제 밤이던가 그제 밤 정도였다. 꿈에 전쟁을 만났다. 꿈에서 전쟁을 만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명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강 기억나는 것에 약간의 살을 붙여보자면 이렇다. 대체 어디와의 전쟁이었는지, 그런 건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았다. 나는 참전 같은 것은 하지 않았고, 내가 있는 곳은 그저 후방이었을 뿐이었고, 나는 그저 민간인이었을 뿐이었다. 학교는 휴교 중이었고 하늘은 흐렸다. 후방. 전선은 저 멀리 있었고 이곳은 전쟁의 참혹함이나 끔찍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도시. 하지만 전쟁이란 전선에서 총을 쏘고 미사일이 나는 그런 단순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이 도시에는 폭격기가 날지 않았지만, 다른 주요 도시들은 종종 폭격을 받는다고 ..

어설픈꿈 2008.01.10

시 - 닿을 수 없는

닿을 수 없는 아이들이 베란다서 수다를 떨고, 잔디밭에 둘러쳐진 하얀 로프와, 들어가지 마시오! 푯말 화창한 점심시간 벤치에서 소소한 얘기소릴 엿들으며 손톱을 하나하나 깎았어요 잔디 깎기 훑고 간 잔디밭엔 싸한 피 냄새 나른한 한숨 같은 비행기 소리 서서히 주위를 덮었고 손을 뻗어 보았지만 닿지 않았고 공기만 한 움큼 또각또각 물어뜯긴 손톱이 화난 듯 내게 튀어 오르는 날.

어설픈꿈 2008.01.10

시 - 새벽녘, 방에서

새벽녘, 방에서 째깍 얼핏 들었던 잠이 초침 소리에 깼다 꿈속에 떠돌던 귀가 시계에 머문 때문이다 자리에 일어나 앉아 두리번대다 습관적으로 뻗은 손 깜빡대는 형광등 파르르 숨을 떠는 방 창 밖을 본다 북향방도 내일에 설렜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잠겨진 창문으로 내다본 어슴푸레 풍경은 희미한 얼굴에 가려질 뿐 거울이 된 유리창, 방이 흘린 웃음이 나가지도 못하고 잔향만 속삭이며 간질거린다 물러나서 몸을 기대면 등에 닿은 벽이 하얗게 시리다 벽에는 꽃들이 피어 있지만 꽃들도 떨고 있다 내가 잠들던 방은 이 방이 아닌가 내가 한숨을 내쉰 방은 이 방이 아닌가 내가 코를 풀고 뺨을 닦던, 자꾸만 나를 삼키던 그 방은 이 방이 아닌가 내 방은 이제 개미 같은 귀울림과 아련한 기시감에서만 겨우 엿볼 수 있는가 그래서 ..

어설픈꿈 2008.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