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31

수필 - 고향

고향 (2005년 5월) 고향이란 단순하게는 태어나서 자란 곳을 의미하지만, 고향이라는 한 마디가 지니는 함축적 의미는 그보다 더 크다. 근원, 원류, 바탕을 둔 땅, 가장 친숙한 곳…. 인간의 고향은 기본적으로는 10개월 가량을 자란 어머니의 자궁일 터이고, 또 자란 집, 자란 고장일 테지만, 사람들이 '고향'을 더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는 점은 곧잘 확인된다. 고향은 주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향을 결정짓는 데는, 거기에서 몇 년 살았노라는 객관적인 문제보다는 내가 그 곳을 어떻게 느끼는지 등, 주관적인 문제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평생을 한 곳에서 살더라도 그곳을 고향이라 말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렇듯 고향은 주관적인 것이며, 한층 확장되면 고향은 영적이다. ..

어설픈꿈 2008.01.13

수필 - 예쁘지가 않잖아!

예쁘지가 않잖아! (2005년 2월) 내가 중학교 때 같이 돌아다녔던 몇 안 되는 동급생 중 한 사람은, 그 성격이 꽤나 재미있는 녀석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다른 애들에게는 짜증나게 비쳤는지, 종종 구박이나 놀림을 당하곤 했기 때문에 그럴 때면 내가 또 나서서는 다른 사람과 대신 실랑이를 벌였었다. "정말, 좀 애들에게 그렇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좋으련만"이라고 항상 생각했었다. 나도 그런 때로는 애교스럽고 때로는 시끄러운 그를 다소 귀찮아 할 때가 가끔씩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웃으면서 지낼 수 있어서 싫지는 않았다. 만난 지 3~4년은 족히 지난 지금, 나를 기억하고 있으련지? 그가 내게 하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예쁘지가 않잖아!" 이다. 그 말에..

어설픈꿈 2008.01.13

수필 - 두 가지 죽음

두 가지 죽음 (2005년 1월) 눈이 내렸다. 본래 전주는 평야지대치고는 눈이 조금 많은 편인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곳들은 폭설이라고 난리를 치는데 비하자면 눈이 그렇게 많이 오지는 않았다. 눈이 내릴 때면, ‘애들은 좋아하고 어른들은 걱정한다.’라고 종종 말하는 듯한데, 그렇다면 나는 어디쯤 속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에 머리를 긁적여본다. 얼음 가루 같은 눈이 천 원짜리 분홍색 우산에 맞아 튀어 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우산을 치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사실은 눈을 맞으면서 강아지마냥 빙빙 눈 내리는 속을 돌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곧 만날 ‘어른’이 또 눈을 맞고 왔다면서 호들갑을 떨 것 같아서 우산을 쓰고 가야 했던 나는. 누군가가 눈이 쌓였다가 녹은 자리에는 검은 구정물이 나온다..

어설픈꿈 2008.01.13

수필 - 어린왕자, 가방, 짐

어린왕자, 가방, 짐 (2005년 3월에 쓴 "가방, 짐"이라는 수필을 제목만 고쳐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가 자기 별로 돌아가기 위해 버려야 했던 몸뚱이. 긴 여행에 갖고 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인 그 몸. 「어린 왕자」를 처음 읽었을 당시, 그것이 내게는 대단히 인상적인 표현이었던 것 같다. 의식이 있는 것들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짐을 짊어지고 걸어간다. 크리스트교의 「천로역정」에서는 그런 것이 "죄 짐"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꼭 그것을 죄라고 표현할 이유는 없을 터이다. 죄 짐을 벗기 위한 여행은, 불교나 힌두교의 업을 벗고 해탈하기 위한 수행과 비슷해 보인다. 일종의 신비주의적인 사상과 연관지어 볼 때에, 짐을 벗어놓는 비유는 아집을 버리고 근원의 신에게 귀의하는 것을 표현..

어설픈꿈 2008.01.11

수필 - 전쟁 꿈

전쟁 꿈 어제 밤이던가 그제 밤 정도였다. 꿈에 전쟁을 만났다. 꿈에서 전쟁을 만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명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강 기억나는 것에 약간의 살을 붙여보자면 이렇다. 대체 어디와의 전쟁이었는지, 그런 건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았다. 나는 참전 같은 것은 하지 않았고, 내가 있는 곳은 그저 후방이었을 뿐이었고, 나는 그저 민간인이었을 뿐이었다. 학교는 휴교 중이었고 하늘은 흐렸다. 후방. 전선은 저 멀리 있었고 이곳은 전쟁의 참혹함이나 끔찍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도시. 하지만 전쟁이란 전선에서 총을 쏘고 미사일이 나는 그런 단순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이 도시에는 폭격기가 날지 않았지만, 다른 주요 도시들은 종종 폭격을 받는다고 ..

어설픈꿈 2008.01.10

수필 - 성장통

성장통 (2004년에 처음 쓰고 2005년 초에 수정한 글) 사람은 평생을 걸쳐 성장하는 걸까. 여하간, 배우고 자라난다는 것은 평생 동안 이루어지는 일이다. 요즘 유행하는 '평생 교육'이란 게 허언은 아니다. 나는 기껏해야 17년 정도 산 것 뿐이지만, 그 기간이 그렇게 살아온 내게는 결코 짧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국민(초등)학교 입학이 엊그제 같은데."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내게는 어쩐지 이상해 보인다. 그렇게 삶을 헛되이 살아왔단 말인가? 물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추억들만 놓고 보면 지금까지의 삶이란 것도 짧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런 순간적인 상기를 떠나서 곰곰이 되짚어 보면, 아니 그 전에도 내게는 삶이란 가득 찬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소한 일들도 다 나름대로 의미가 ..

어설픈꿈 2008.01.08

수필 - 장래희망

장래희망 (2005.04.) 성장 과정에서 질리도록 받는 질문들로 이름, 나이, 취미, 특기, 그리고 장래희망 등이 있다. 이 중 특히 장래희망 같은 경우는, 대개는 장래에 되고 싶은 직업으로 국한되어 해석하는 듯하지만, 사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한 인간의 인생 설계를 물어보는 포괄적인 질문이다. 그래서 장래희망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쓰는 나 같은 인간도 나오는 것이다. 직업이건 무엇이건 장래희망은 자기 미래에 대한 다짐의 의미가 있다. 아니면 교육당국 입장에서는 지도의 편의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어쨌건, 적어도 '에잇 귀찮게' 하는 심정으로, 대강 칸 채우기로 장래희망란을 채워서 내는 일은 없는 게 좋을 듯싶다. 교육상 지도의 편의를 위해서 장래희망을 조사한다고 하였는데, 이 교육에 관해 생각해보자..

어설픈꿈 2008.01.08

수필 - 함성 바깥에서

이건 예전에 교내 백일장에서 썼던... 역시 2004년인가? 함성 바깥에서 함성의 전제는 ‘함께’이다. 사전을 뒤적거려 보아도 ‘여럿이서’ 같은 말이 그 풀이에 꼭 붙어있다. 喊聲이라는 한자만으로는 그런 의미를 찾기 힘든데도 말이다. 서기 2002년을 떠올려 본다. “아, 참 뜨거웠다”라든가 “굉장했지” 같은 소리나 늘어놓을 생각은 없을뿐더러, 그런 말은 과분하기도 하다. 그저 “참 시끄러웠지” 한 마디로도 족하다. 이 사람 저 사람 몰려다니며 함성을 질러댔던 해였다. ‘축구’가 무엇이기에, 라는 생각보다는 ‘우리’가 무엇이기에, 라고 먼저 물어본다. 텔레비전을 틀 때마다 방 안을 울리던 “필승 코리아”, “대한민국”의 함성, 그 경기장을 뒤덮은 응원소리가 소위 홈그라운드에 선 ‘우리’의 모습이었다. 약..

어설픈꿈 2008.01.08

수필 - 이상(理想) 없는 젊은이들에 고(告)함

그냥 짤막하게... 2004년 여름즈음에 썼던 글인데요. 그 무렵에 나왔던 학교의 학생자치 신문, 혜윰에 기고된 글입니다. 혜윰, 은 생각하다의 고어인 혜다, 에서 나온 말로... 본래 혜염, 이 명사형인데... 혜윰이 되면 잡념이라거나 그런 느낌이라고 하더군요. 본 의도는 혜염, 이었는데 실수로 혜윰이 되었다나 뭐라나... 하지만 혜윰, 잡념도 잡념 나름이라는 게 제작진인 신문부의 변명 (-_-) 낭만주의적인 경향이라거나, 운동의 단초 같은 것도 보이는 글. 이상(理想) 없는 젊은이들에 고(告)함 노벨상을 만든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의 유언장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기준을 이렇게 말했다. “이상(理想)적인 경향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창작한 인물에게 줄 것.” 노벨상이 “인류 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

어설픈꿈 2008.01.08

수필 - 낮은 눈높이

(위의 그림은 아즈망가 ost cd 중 오사카 테마 곡 표지의 그림...?) 낮은 눈높이 (2004.09.) 현대. 자연과학에서는 미시(微示)적인 분야들이 한창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일상과 상식으로 무장된 우리들에겐, 유전자가 어떠니 원자가 어떠니 하는 이야기들이 실감으로 다가오질 않는다. 세포만 해도 실감이 안 날 정도로 작건만, 또 그 안에 들어있는 유전자라니. 차라리 완두콩이 쭈글쭈글하니 하면서 직접 보는 것, 겉으로 드러나는 형질을 관찰하는 쪽이 유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쉽다. 마찬가지로, 사과가 산소와 반응해서 맛이 달라지느니 어쩌니 하는 것보다는 그냥 갈색으로 변해서 맛이 달라졌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아무리 현미경의 성능이 좋아져서 분자, 원자 단위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해도, 사정은 그..

어설픈꿈 2008.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