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142

수필 - 성장통

성장통 (2004년에 처음 쓰고 2005년 초에 수정한 글) 사람은 평생을 걸쳐 성장하는 걸까. 여하간, 배우고 자라난다는 것은 평생 동안 이루어지는 일이다. 요즘 유행하는 '평생 교육'이란 게 허언은 아니다. 나는 기껏해야 17년 정도 산 것 뿐이지만, 그 기간이 그렇게 살아온 내게는 결코 짧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국민(초등)학교 입학이 엊그제 같은데."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내게는 어쩐지 이상해 보인다. 그렇게 삶을 헛되이 살아왔단 말인가? 물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추억들만 놓고 보면 지금까지의 삶이란 것도 짧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런 순간적인 상기를 떠나서 곰곰이 되짚어 보면, 아니 그 전에도 내게는 삶이란 가득 찬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소한 일들도 다 나름대로 의미가 ..

어설픈꿈 2008.01.08

시 - 오늘밤은 뜬눈으로 샐 수 있을까

오늘밤은 뜬눈으로 샐 수 있을까 화초에게 늘어놓는 나직한 외롬 그 뒤편에 흐르는 마앍은 달빛 오늘밤은, 뜬눈으로 샐 수 있으려나 달의 바다엔 물도 없다지 때문에 흘리울 눈물도 없어 오직, 투명한 달빛만이 이 빠진 빈 그릇에 고여들 따름이고 오늘밤은, 뜬눈으로 샐 수 있으려나 열린 창가 스치는 은근한 바람 말없이도 즐거운 둘만의 도란댐 전화해도 받을 사람 없는 밤 오래 간 함께 산 화초 하나 무릎 새에 끼우고 중얼거림은 아아 당신 꿈을 꿀까봐 오늘밤은, 뜬눈으로 샐 수 있으려나

어설픈꿈 2008.01.08

수필 - 장래희망

장래희망 (2005.04.) 성장 과정에서 질리도록 받는 질문들로 이름, 나이, 취미, 특기, 그리고 장래희망 등이 있다. 이 중 특히 장래희망 같은 경우는, 대개는 장래에 되고 싶은 직업으로 국한되어 해석하는 듯하지만, 사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한 인간의 인생 설계를 물어보는 포괄적인 질문이다. 그래서 장래희망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쓰는 나 같은 인간도 나오는 것이다. 직업이건 무엇이건 장래희망은 자기 미래에 대한 다짐의 의미가 있다. 아니면 교육당국 입장에서는 지도의 편의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어쨌건, 적어도 '에잇 귀찮게' 하는 심정으로, 대강 칸 채우기로 장래희망란을 채워서 내는 일은 없는 게 좋을 듯싶다. 교육상 지도의 편의를 위해서 장래희망을 조사한다고 하였는데, 이 교육에 관해 생각해보자..

어설픈꿈 2008.01.08

수필 - 함성 바깥에서

이건 예전에 교내 백일장에서 썼던... 역시 2004년인가? 함성 바깥에서 함성의 전제는 ‘함께’이다. 사전을 뒤적거려 보아도 ‘여럿이서’ 같은 말이 그 풀이에 꼭 붙어있다. 喊聲이라는 한자만으로는 그런 의미를 찾기 힘든데도 말이다. 서기 2002년을 떠올려 본다. “아, 참 뜨거웠다”라든가 “굉장했지” 같은 소리나 늘어놓을 생각은 없을뿐더러, 그런 말은 과분하기도 하다. 그저 “참 시끄러웠지” 한 마디로도 족하다. 이 사람 저 사람 몰려다니며 함성을 질러댔던 해였다. ‘축구’가 무엇이기에, 라는 생각보다는 ‘우리’가 무엇이기에, 라고 먼저 물어본다. 텔레비전을 틀 때마다 방 안을 울리던 “필승 코리아”, “대한민국”의 함성, 그 경기장을 뒤덮은 응원소리가 소위 홈그라운드에 선 ‘우리’의 모습이었다. 약..

어설픈꿈 2008.01.08

수필 - 이상(理想) 없는 젊은이들에 고(告)함

그냥 짤막하게... 2004년 여름즈음에 썼던 글인데요. 그 무렵에 나왔던 학교의 학생자치 신문, 혜윰에 기고된 글입니다. 혜윰, 은 생각하다의 고어인 혜다, 에서 나온 말로... 본래 혜염, 이 명사형인데... 혜윰이 되면 잡념이라거나 그런 느낌이라고 하더군요. 본 의도는 혜염, 이었는데 실수로 혜윰이 되었다나 뭐라나... 하지만 혜윰, 잡념도 잡념 나름이라는 게 제작진인 신문부의 변명 (-_-) 낭만주의적인 경향이라거나, 운동의 단초 같은 것도 보이는 글. 이상(理想) 없는 젊은이들에 고(告)함 노벨상을 만든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의 유언장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기준을 이렇게 말했다. “이상(理想)적인 경향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창작한 인물에게 줄 것.” 노벨상이 “인류 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

어설픈꿈 2008.01.08

시 - 노을로 날아가다

노을로 날아가다 노을이 지는 게 싫어서 두 팔로 구름을 안고서 새들이 지평선으로 날아간다 지평선에 별 하나 겨우 떠오르자 새도 노을도 그 너머로 사라진다 노을을 포기한 도시에서 달에는 못 닿을 소리를 동네 개가 울고 오늘은 교통 체증이 유달리 끈적댄다 검은 아스팔트에 엔진 소리에 경적이 소리치지만 지평선 안쪽, 개도 차도 어디에도 닿지 않고 흩어진다 사람들 끝내 회색 현관을 밀고 들어가 소파 품에 안기고 고삐를 풀고 가방을 내려놓고 실 끊어진 듯 잠이 든다 하얀 별 대신 가로등 아파트 하나하나 켜진다 노을에 물든 가로등이 가로수 잎에 번진다 다들 자기 둥지로 사라지고 나면 주황 별 아래 혼자 깨어 일기를 쓴다 날개 없이 무거운 내 꿈 대신 날린다

어설픈꿈 2008.01.08

요정이야기

콩트 비슷한 것. 우화라고 생각해도 좋고, 동화라고 생각해도 좋긴 하지만. 만화로도 한 번 만든 적이 있던. 요정 이야기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여느 때처럼 엄마 품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요정은, 밤에 숲에서 길을 잃고 외로움에 떠는 아이에게 나타나, 날이 밝을 때까지 말동무가 되어준다고 한단다.” 아이는 달과 별과 숲을 바라보며, 그리고 엄마에게 요정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여느 때처럼 동무들에게 요정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엄마가 요정 같은 건 없다고 했어!” “그래 우리 아빠도 그랬어!” “거짓말하지 마, 이 거짓말쟁이야. 네가 요정을 만난 적이 있어?” “요정이 있다면 우리 공부도 다 해주면 좋겠다. 왜 안 해줘!? 착한..

어설픈꿈 2008.01.08

소설 - 날기를 잊지 않은 거북이에 부침

등장인물 두 명짜리 소설... 이라.자살시도를 안 해보고 썼다는 게 가장 마음에 걸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해볼 수도 없잖아요...;; 날기를 잊지 않은 거북이에 부침 “그럴까?”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좋은 카운슬러인지는 의문이다. “사랑, 이라… 글쎄,” 가끔은 어느 쪽이 상담을 해주는 쪽인지 모르겠다. 그는 마른 사람이었다. “너희와는 좀 세대가 안 맞겠지만 말야,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는, 노래 가사에도 사랑이 사람을 외롭게 만든단 말이 있는데 말야……” 몇 번 만나면서 알았다. 그는 묘한 인용을 즐겼다. 그는 마른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풍성하다는 느낌을 주는 곳은 긴 머리카락뿐이었다. “나도 자살은, 실제로 해본 적은 없거든? 그러니까, 대단하다고 생각..

어설픈꿈 2008.01.08

시 - 가을 아침

가을 아침 찢어지는 비명이 눈꺼풀을 찢어놔 해가 잠결에 뱉은 뿌옇게 흐린 새벽만 살짝 번졌는데 무표정하게 비명을 지르는 짧은 바늘, 형광이네 두들겨 꺼버리곤 몸을 일으켜, 고갤 돌리니 창틀이야 화분에는 아침이라며 활짝 열린 꽃봉오리, 난 물을 마구 뿌려버렸어 김치가 좀 시었어 빨간 김칫국물이 묻은 손을 대충 닦아서 주머니에 꽂고 고양이처럼 구부정하게 거리로 나가 손끝에서 보푸라기가 굴러 발끝에서 낙엽들이 굴러 나도 굴러, 굴러서 보기가 흉해 호두알 같은 까만 얼굴의 환경미화원이 녹색 비로 쓸어내, 낙엽들을, 끝도 없이 떨어지는 낙엽들을 난 왜 쓸리지 않고 계속 제멋대로 구를까 나도 바싹 마른 다음에야 그만 구를까 살려고 꼬리를 버리는 도마뱀 비늘 같은 타월로 벅벅대도 계속 나오는 때처럼은, 아직은 말야 ..

어설픈꿈 2008.01.08

시 - 밤 기찻간

밤 기찻간 알록달록 등산가방 껴안고 문간에서 잠이 든 청년도 있었고 애를 안아 어르고 또 달래는 주름파인 둥근 얼굴 아줌마도 있었고 술냄새를 살짝 입고 웅크린 할아버지도 있었다. 밤중을 달리는 무궁화호 기찻간, 2호차와 3호차 사이 끼익대며 고무살을 맞비비는 이음샛소리와 바퀴가 자갈에 튀는 소리, 덧붙이자면 담배 냄새만으로도 서울을 뒤로 하고 도망치는 어둑한 기차 객실 사이는 만원 사람들은 그 틈새에 어거지로 몸을 밀어 넣고 있을 뿐이었다. 새우잠을 청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속에 맺힌 이슬은 흐르지 않았다. 웅크렸다 기지개 펴는 야행성 고양이처럼 일어나서 창밖을 본다. 에어컨 바람, 하얀 형광등, 그 아래서는 탄핵, 비리, 병역, 의문사, 불황, KTX… 신문의 검은 활자는 선명한 요원 ―애초에 편..

어설픈꿈 2008.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