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142

수필 - 창틀에 걸린 꿈들

창틀에 걸린 꿈들 ( 2005년 6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에는 창이 없다."라는 말은 깊은 인상을 주는 말 중 하나이다. 뭐, 모나드(단자)론 같은 복잡한 이야기는 잠시 밀어두고 간단히 비약하자면 "개인은 단절되어 있다"는 소리다. 헌데 모나드에는 정말 창이 없는 것인가? 각자의 꿈이라든가, 이야기라든가 하는 것들은 결국 세상으로 조금씩은 흘러나갈 수밖에 없다. 그건, 창이 아니라 벽을 통해 전달되는 희미한 소리나 울림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인가. 애초에 개인의 영혼 같은 것들이 모나드이기나 한 것인지 모호하다. 개인에게 창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것은 역시 명확히 알 수 없는 영역에 속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인간들이 의사소통하는 데 사용되는 언어들(음성, 문자, 신체…)은 불완전하게나마 창이 되어..

어설픈꿈 2008.01.13

수필 - 지금의 역사를 살며

2005년 5월에 전북중등백일장 전주지역대회 예선에서 그래도 최우수상이라고 받게 된 녀석입니다. 지금의 역사를 살며 방학만 되면 학교란 곳은 방학과제물이라는 성가신 것들을 B4용지 한 장에 정리해서 학생들에게 던져주곤 한다. 그 중 특히 성가신 것으로 방학 동안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문화유적답사 후 기행문쓰기 따위의 것들이 있다. 자녀를 통해 그런 관광산업 진흥을 숨은 목적으로 하고 있는 듯한 과제물들을 받은 부모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스스로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핑계로 본래는 있지도 않던 휴가 계획을 짜서 방학만 되면 여행길에 나서는 부모도 있고, 운 좋게도 집 바로 근처에 있는 문화유적에 자식을 산책 보내는 부모도 있다. 좀더 교육적인 부모의 경우에는 꾸며서 글 쓰는 ..

어설픈꿈 2008.01.13

시 - 양치질

양치질 하루에 두세 번씩 반복되는 습관적인 다소 경박한 의식 왜 거품을 물고 속을 감추려는지 문득 거울에 물어보아도 사각사각 권태롭게 표백된 소리 이에 생긴 검은 흠을 감출 수 있단 듯 레몬향 섞인 흰 것을 잔뜩 묻혀 긁어대다가 붉은 기가 섞인 거품을 삼킨 추억 같은 꿈 어디다 처박아 두었는지 모를 일기장 '오늘은 양치질을 하다 잇몸에서 피가 났다. 치과에라도 가봐야 하나?' 이제는 입을 꾹 다물고 거울도 보지 않고 그저 습관적으로 아무 말도 않는 것 코 뒤로부터 닿아오는 매운 내에 눈살을 찌푸리는 것 나는 내가 왜 이를 닦는지 잊었고 그 사이에 이빨 뒤편에선 벌레구멍이 조금씩 커지고 있고

어설픈꿈 2008.01.13

수필 - 고향

고향 (2005년 5월) 고향이란 단순하게는 태어나서 자란 곳을 의미하지만, 고향이라는 한 마디가 지니는 함축적 의미는 그보다 더 크다. 근원, 원류, 바탕을 둔 땅, 가장 친숙한 곳…. 인간의 고향은 기본적으로는 10개월 가량을 자란 어머니의 자궁일 터이고, 또 자란 집, 자란 고장일 테지만, 사람들이 '고향'을 더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는 점은 곧잘 확인된다. 고향은 주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향을 결정짓는 데는, 거기에서 몇 년 살았노라는 객관적인 문제보다는 내가 그 곳을 어떻게 느끼는지 등, 주관적인 문제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평생을 한 곳에서 살더라도 그곳을 고향이라 말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렇듯 고향은 주관적인 것이며, 한층 확장되면 고향은 영적이다. ..

어설픈꿈 2008.01.13

시 - 발자국

발자국 새벽 가까운 데 서있다 긴 그림자 나무 아래 붉은 땅 위 비치는 발자국 꼭 내 발만 한 발자국 누구의 것일까, 되짚는 새에 발자국은 구두가 되고 손바닥이 얼굴이 되고 목소리가 되고 체온이 되고 어느새 내 발보다 커지고 무릎 꿇고 쪼그리고 손끝으로 핏줄 같은 결을 하나하나 읽어본다 눈을 깜빡이며 읽어본다 검버섯 핀 단풍잎처럼 하얀 곰팡이가 슬어 있는 길게 뻗은 햇살에 곪은 상처처럼 젖어 오는 발자국 얼마 안 있어 데워진 태양이 잠 깬 얼굴로 남중할 테지만 얼마 안 있어 연둣빛 잔디가 붉은 땅을 덮으며 자라올 테지만 구름에 실려온 찬 숨소리 발개진 눈으로 손으로 비치는 발자국을 만지작거리고 그림자가 짧아지도록 잔디에 가리도록 만지작거리고 바싹 말라 가난해진 단풍나무 구름에 가려 자라지 않는데 녹슬고 ..

어설픈꿈 2008.01.13

시 - 우산

우산 빗방울이 머리를 내밀으라며 지붕을 두드리는 날이면 젊은애는 침침한 방 서성이며 천원짜리 분홍빛 우산을 천장 아래 펴들고 돌려본다 액세서리 하나도 달지 않고서 눈 밑도 마르도록 바람 불던 날들에 세 번쯤은 뒤집혔던 우산이지만 공장에서 굴러 나왔을 일천원짜리 분홍빛 우산 하도 뒤집혀서 자꾸 비틀어지는 은빛 살 네 치마폭 속에 손가락을 넣고 네 뼈를 고르고 있을 때면 「천원으로 돌아가는 국가경제」 라는 집 앞 천원샵의 반짝이며 젖어드는 간판 너를 산 곳의 싸구려 간판 그런 것을 떠올리며 웃곤 해 오늘 비가 머리 내라고 부르는 날 젊은애는 머리 내지 못하고 삐걱대는 우산은 방 안에서만 돌아가고 있다

어설픈꿈 2008.01.13

시 - 눈 혹은 장례식

눈 혹은 장례식 「우성수산」에선 하늘에 내동댕쳐진 모습 그대로 입술이 꿰어 매달려 있는 것들 그 뒤론 들쭉날쭉 얼음에 묻힌 바다내음 피내음 찬 살갗들 다들 쌀 한 줌 대신 소금 한 줌 물고 눈도 감지 않은 채 때낀 스티로폼 관에서 자고 있다 「우성수산」 앞 바다 닮아 검푸른 등 위로 어디서 염하는 소리 내려앉아 하얀 관 하얀 얼음 하얀 소금, 하얀 염 소리 깜빡이지 않는 눈 위로 흰 꽃잎 내려앉아 흐르는데 「우성수산」 안엔 갈고리바늘이 낙태시킨 애들을 파는 사람들 애들을 애 밴 여자에게 먹인다며 흰 꽃잎 날리는 장례식 저녁 속을 한 손에 봉지 흔들며 씩씩하게 걸어가는 사람들 죽지 않은 사람들 「우성수산」 앞에선 숨결만 하얗게 검은 하늘로 올라가서 어디선가 소리 없이 하아얗게 염하는 꽃잎이 된다고

어설픈꿈 2008.01.13

시 - 유령

유령 하얗게 차가운 시멘트벽을 더듬자 톡 튀어나온 모난 스위치가 닿았지만 불은 켜지 않았다 형광등 속을 어렴풋이 낮이 뛰놀지만은 불은 켜지 않는다 줄이 맞지 않는 책상들 제멋대로 구석에 쌓인 빗자루와 대걸레 약간은 검고 약간은 흰, 동강난 분필들 녹색으로 흔들리는 비상구 표시 하얀 사람이 그 속에서 달리지만 뛰쳐나오지 못한다 창틀 그림자가 앉는다 멀리서 복도가 울린다 제목은 다 지워지고 푸르스름한 실루엣 색을 알 수 없는 얼룩이 묻어있는 덩어리 형광등 없는 자리에 뛰어든 밤 가로등 복도 우는 소리 다가온다 귀를 막는다 째깍째깍 초침소리도 이내 들리지 않겠지, 그렇겠지 눈을 감고 유령이 앉는다 녹아버린 서리처럼 투명하게 소리 없이 무게 없이 부푸는― 타타탁! 튀기듯 밤이 쫓겨간다 햇볕에 탄 얼굴 낮을 들고..

어설픈꿈 2008.01.13

수필 - 예쁘지가 않잖아!

예쁘지가 않잖아! (2005년 2월) 내가 중학교 때 같이 돌아다녔던 몇 안 되는 동급생 중 한 사람은, 그 성격이 꽤나 재미있는 녀석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다른 애들에게는 짜증나게 비쳤는지, 종종 구박이나 놀림을 당하곤 했기 때문에 그럴 때면 내가 또 나서서는 다른 사람과 대신 실랑이를 벌였었다. "정말, 좀 애들에게 그렇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좋으련만"이라고 항상 생각했었다. 나도 그런 때로는 애교스럽고 때로는 시끄러운 그를 다소 귀찮아 할 때가 가끔씩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웃으면서 지낼 수 있어서 싫지는 않았다. 만난 지 3~4년은 족히 지난 지금, 나를 기억하고 있으련지? 그가 내게 하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예쁘지가 않잖아!" 이다. 그 말에..

어설픈꿈 2008.01.13

수필 - 두 가지 죽음

두 가지 죽음 (2005년 1월) 눈이 내렸다. 본래 전주는 평야지대치고는 눈이 조금 많은 편인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곳들은 폭설이라고 난리를 치는데 비하자면 눈이 그렇게 많이 오지는 않았다. 눈이 내릴 때면, ‘애들은 좋아하고 어른들은 걱정한다.’라고 종종 말하는 듯한데, 그렇다면 나는 어디쯤 속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에 머리를 긁적여본다. 얼음 가루 같은 눈이 천 원짜리 분홍색 우산에 맞아 튀어 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우산을 치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사실은 눈을 맞으면서 강아지마냥 빙빙 눈 내리는 속을 돌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곧 만날 ‘어른’이 또 눈을 맞고 왔다면서 호들갑을 떨 것 같아서 우산을 쓰고 가야 했던 나는. 누군가가 눈이 쌓였다가 녹은 자리에는 검은 구정물이 나온다..

어설픈꿈 2008.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