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142

시 - 일상적인 면도

일상적인 면도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가위로 수염을 깎지 STAINLESS STEAL 녹스는 일 없는 서늘한 현실이 벌써 곳곳이 녹슨 내 낯가죽에 와닿지 STAINLESS STEAL은 무정하게도 내 녹을, 나를 깎아가지 눈을 뜨고서, 발가벗은 몸을 씻다보면 코 밑에 부어오른 상처자리 날붙이에 깎이다가 모르는 사이 난 생채기를 모르는 사이 파고 들어온 너 같은 균에 난 그렇게 부어오르지 나처럼 부어올랐다 가라앉았다 여기저기서 또 부풀어오르지 그 생채기들

어설픈꿈 2008.01.30

시 - 깡통을 굴려봐

깡통을 굴려봐 깡통을 굴려봐 붉은색 깡통을 콜라깡통은 말고 너를 안 닮았잖아 깡통소리를 들어봐 깡통이랑 시멘트가 살 부비는 소리 멀어질 듯 멀어질 듯 가까운 소리 무표정한 구세군 종소리는 말고 너를 안 닮았잖아 그래, 엉뚱하게 울리는 자명종처럼 깡통을 굴려봐 저기 오는 검은바퀴를 가진 큰 차가 곧 깡통을 납작하게 밟을 거야 너도 납작해질 거야 깡통을 닮았잖아 시멘트는 너무 울퉁불퉁하고, 오 차는 너무 무겁고 빨라 너는 울퉁불퉁하게 납작해질 거야 그래도 너는 깡통을 굴릴 거야 차 바퀴를 손톱으로 할퀼 때까지 가까워질 듯 가까워질 듯 멀리에서 외면하는 그때까지 굴러가고 살을 부비고 납작해지고 울지 않을 거야

어설픈꿈 2008.01.30

수필 - 나는 조건 있는 사랑을 한다.

나는 조건 있는 사랑을 한다. (2006년 7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람의 인식에 너무나도 분명한 한계가 있는 이상 여기서 ‘당신’이 대체 무엇인지를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의 얼굴인가. 당신의 성격인가. 돈인가. 성적인가. 능력인가. 목소리인가. 혹은…. 당신이라는 총체.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연결고리들. 그런 것들을 모두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Only God Knows”의 영역. 사랑이 지향하는 이상이 추상적인 총체에 대한 것일지라도 실제의 구체적 사랑이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굳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람에 대한 모든 감정에서 마찬가지다. 문제는 누군가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점. 즉, 누군가를 누군가로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특질은 어떤 것이냐는 문제..

어설픈꿈 2008.01.27

시 - 버스의 나비

버스의 나비 버스는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사람은 노약자석에 앉아서 졸음을 가만히 곱씹는다 어느 정류장에선가 탑승한 나비 한 마리 다리지 않은 날개가 휘청거린다 도중에 내리려다가 달려내려가는 버스에 휘청이는 바람을 못 이기고 다시 돌아온다 내리지 못하는 나비는 타이밍을 노린다 새천년을 맞아 새로 페인트칠한 버스에서 내리막길이 끝나기 전에 내릴 타이밍 다음 정류장의 이름을 나비는 알지 못했다 사람은 졸음을 곱씹으며 삼키지 않는다 다리지 않은 치마가 팔랑거린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건 추억 같은 것이 아니고 내리막길을 굴러내려가는 시선들 졸음을 삼킨 시선들 다음 정류장의 이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비가 내릴 곳도 알지 못했다

어설픈꿈 2008.01.26

시 - 꿈의 호흡

꿈의 호흡 매일밤 눈꺼풀 뒤쪽에는 잠든 꿈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잠 못 드는 나에겐 없는 내일이 꿈의 콧날 뒤편에서 부풀어 간다 걸림없이 반복되는 숨소리 속에 잠든 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들이쉬고 내쉬고 숨을 맞춘다 꿈은 3초동안 들이쉬고 꿈은 2초동안 내쉬고 나는 하얀 햇살을 3초동안 들이쉬고 나는 눈물증기를 2초동안 내쉬고 반복되는 숨소릴 훔쳐보려다 호흡이 미끄러진다 걸림돌처럼 앉아있는 딱지들에 넘어진 내 호흡을 추스릴 수 없어서 걸렸던 돌을 뱉어내며 눈을 뜨면 시계는 어제와 오늘 사이에 ------------------------------- & 얼핏 낮에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네 얼굴이 어른거렸다. &&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어떠한 억압 - 말하자면 상처를 드..

어설픈꿈 2008.01.26

시 - 어느날 국회 앞에서

어느날 국회 앞에서 여의도공원에서 국회로 미끄러지는 잿빛 길 구호조차 미끄러지는 땡땡 얼은 날 잿빛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던 추운 날 미끄러짐 없이 걸리는 건 오직 너의 속삭임 구름은 추락하지 않아 비나 눈이 될 뿐이지 꿈은 추락하지 않고 뭐가 될까 시간은 섬세하게 우리를 손질하고 마모되는 감촉에도 손길은 무심하고 그래도 우리는 비명을 지르지 미끄러짐 없는 비명을 지르려 하지 국회 잔디밭은 푹신한 팬케잌 껍질 같지만 비벼보면 까끌하겠지 담벼락처럼 달콤한 건 검은 벽의 막막함 씁쓸한 건 살자는 속삭임 저 멀리 구름이 보이던 날 꿈은 추락하지 않고 뭐가 될까 -------------------------------------------------- 이 뒤를 쓸 수가 없어. 뭐가 될지 모르겠어. 번개가 될까?..

어설픈꿈 2008.01.19

시 - 닫히는문

닫히는문 그대 방 앞에서 닫히는문을 만났다 문은 매순간 쾅하는 소릴 내며 눈앞에서 닫혔고 그때마다 속부터 몸살이 번져버려 꿈틀대는 내장은 남에겐 안 들리는 금가는 소리를 까진 무르팍 딱지새로 흐르는 피처럼 흘렸다 닫히는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어 문틈으로라도 그대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다시 문이 닫힐 때 내가 얼른 오른손을 내밀어 보아도 닫히는문은 그럴 틈도 주는 일 없이 내 마음에 금간 딱지만 더해주었다 나는 한 번도 그대의 방 안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대 방의 닫히는문은 나무로 된 낡은 파란 문은 항상 쾅하는 소리를 내며 닫혔기에 곧 부서지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닫히는문은 나를 다치게 하는데 한편으론 또 누굴 다치게 하는지 그대 방 앞에서 닫히는문을 만났다 나는 계속 닫히는문 앞에서 바랜 ..

어설픈꿈 2008.01.13

시 - 중얼대는 낙서

중얼대는 낙서 벽에는 얼룩뿐이었다 얼룩들은 여기저기 꼬인 채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는내꺼니께건들지말도록-**###♡###나축어->나추워기질특이성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세크레틴스테로이드글로코오스키네틴바르다 마나벤젠탄소화합물한국독립군광주1998미적분sinx'=cosx논리적사고호박개키농문구녕sexy뷩신약후자꽃우비연태싫어十世期딴나라당열대우 림당民主主義여만세개새끼나줄인간제존재의문제현대적주체의비판적고찰SUGAR 낙엽이 벽 위에서 숨결처럼 반짝이는 문자처럼 부스러져도 반응없는 대답없는 독백 낮고도 조용하게 떨림없이 반복되는 중얼댐 일요일 저녁 뉴스 앵커만큼 권태로운 중얼댐 전투기 소리처럼 공허하게 울리는 중얼댐 라디오 주파수 대역 밖의 침묵 같은 중얼댐 대답이란 눈빛이 하는 것이라 나 또한 거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 서..

어설픈꿈 2008.01.13

수필 - 에누리

에누리 (2005년 8월) 요즘 세상은 참 이상하다. 규모가 크고 현대적인 가게에서는 손님들이 에누리를 잘 하지 않는다. 각종 할인 상품이 쏟아져 나오긴 하지만 거기에서 할인이란 손님과 가게 주인 사이의 흥정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가게 쪽의 일방적인 판매전략이다. 반면 시장이나 길거리에 앉아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거래를 할 때는 곧잘 값을 깎는다. 부유한 자들의 물건을 살 때는 값을 깎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물건을 살 때 값을 깎는 셈이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中) 사람들은 때론..

어설픈꿈 2008.01.13

시 - 작은 역을 지나친 후

작은 역을 지나친 후 밤, 무궁화호 3호차 어둠에 사로잡힌 눈길 너머로 밤 위로 어렴풋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작은 역 하나 내가 좇던 그대는 바로 그런 역 무궁화호도 서지 않는 그런 역 플랫폼에 앉아 있을 것만 같네 나의 숨결은 점점 가라앉아가는 어느 역 대기의자에 묶이네 나는 숨결을 찾으러 의자 아래 거미집 곁으로 가려네 장화 발자국 위에 핀 꽃잎 곁으로 꿈틀대는 지렁이 곁으로 그대를 찾으러 가려네

어설픈꿈 2008.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