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142

시 - 까칠하고 비좁은 욕조 속에서

까칠하고 비좁은 욕조 속에서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 하나요?" -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 『데미안』 욕조는 작다 나는 크다 욕조는 나를 거부하는 미끄럽고 까칠한 물 로 되어있고 그 안에 나를 우겨넣는다 추억 속에 내 몸을 구겨넣는다 조그만 나를 받아주던 부드러운 물은 몇 년 새에 까칠하게 건조한 물이 되었고 나는 눈이 따가워 바둥거린다 벌거벗고 웅크린 몸 균형이 맞지 않는 자신을 구겨버린 웅크린 예술에 인간의 이름조차 붙여줄 수 없어서 희미하게 "무제"라 써붙이고 나는 눈을 뜨지 못한다 작은 욕조보다는 대중 목욕탕이 어울릴 만큼 늘어난 몸뚱아리 이젠 다리를 구부리고 구겨넣을 수도 없는 여기저기 붉게 얽은..

어설픈꿈 2008.01.13

소설 - 파본의 해탈

2005년 여름즈음에 쓴, "쨍!" 그러니까는... 문학상 마감일에 맞춰서 다 써보겠다고 열심히, 열심히 치면서 지금까지 써온 소설들을 마구 짜깁기한... 좋게 말하면 지금까지 작품들의 총체? -_-;;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김수영의 이 선언(?)에 대해서 혹자는 "현실은 참여의 풍자, 무참여의 해탈 사이의 양자 택일을 요구한다"라고 해석하곤 합니다. 풍자가 아니면 자살, 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전 오늘도 풍자해내는 주인공을 만들어내지 못해서 결국 파괴와 죽음의 상태에 이르는, 해탈해서 미쳐버린 주인공을 만들어냅니다... 파본의 해탈 "쨍!" 박살남. 산산조각. 그런 느낌으로 하얗게 흩어지는 조각들. 땅에 널브러진 수박조각. 번지는 물기. 유리 깨지는 소리에 놀란 듯 잠시 멍하니 있던 소녀는 천천히..

어설픈꿈 2008.01.11

시 - 복도

복도 운동화 소리가 달려간다 먼저 간 발작소리를 그 다음 소리가 서둘러 밟는다 발소리는 나무로 된 문을 두드려도 보며 무쇠로 된 창틀을 흔들어도 보며 달려간다 길게 웅크린 복도를 누구와 부딪힐 뻔한 것 같다 아니다 아무와도 부딪지 않았다 저기에서는 누가 풀을 뜯는 듯하다 그래도 뿌리가 삶을 놓치는 소릴 들을 수 없는 발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온 벽을 차며 달음박질친다 화장실을 지나친다 하얀 비상구 표시가 보인다 계단도 지나쳐버린다 막힌 벽으로 빨려 들어간다 막힌 벽은 막히지 않아서, 막힌 벽에 닿으면 발소리는 저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벽에는 거미도 죽은 거미줄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다 끝내 누구의 예술처럼 길어질 순 없는 하루들이 그 껍데기들이 먼지처럼 걸려있다

어설픈꿈 2008.01.11

수필 - 어린왕자, 가방, 짐

어린왕자, 가방, 짐 (2005년 3월에 쓴 "가방, 짐"이라는 수필을 제목만 고쳐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가 자기 별로 돌아가기 위해 버려야 했던 몸뚱이. 긴 여행에 갖고 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인 그 몸. 「어린 왕자」를 처음 읽었을 당시, 그것이 내게는 대단히 인상적인 표현이었던 것 같다. 의식이 있는 것들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짐을 짊어지고 걸어간다. 크리스트교의 「천로역정」에서는 그런 것이 "죄 짐"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꼭 그것을 죄라고 표현할 이유는 없을 터이다. 죄 짐을 벗기 위한 여행은, 불교나 힌두교의 업을 벗고 해탈하기 위한 수행과 비슷해 보인다. 일종의 신비주의적인 사상과 연관지어 볼 때에, 짐을 벗어놓는 비유는 아집을 버리고 근원의 신에게 귀의하는 것을 표현..

어설픈꿈 2008.01.11

시 - 황사주의보

황사주의보 난방비를 아낀다고 창문을 바꿔 달았지 그런데 새 창도 신통치가 않은걸 일기예보에선 별 얘기 없었는데도 황사가 종종 날아 들어오지 복도를 타고 울려오는 계집애도아닌데왜이리조잘대 몰려다니는 남자애들이 흘린 나이스바디미스코리아폭탄엉클장 상표만 없는 알록달록한 별명들 오분만더공부하면남편직업이달라진다 수업 시간의 노신사 분은 모래를 털기도 하지 목구멍에 걸리는 따끔따끔한 황사 먼지들 베란다에선 남자애들이 가래침을 카악대며 먼지를 일으키지 환상이 깨졌다며 눈살을 찌푸리지 햇볕 아래서 조잘대던 우리들 다리에 프라이팬 기름처럼 튀지 그렇게 황사는 계속 심하고 저 선생님은 페미니즘적이라 인기가 없지 그러고 보면 이모는 마흔이 넘게 시집을 안 갔지 어거지로 선을 보는 족족 차버리더니 발톱이라도 깨졌는지 황사에 ..

어설픈꿈 2008.01.11

시 - 편의점

편의점 24시 편의점은 노랗다 거기에서 노란컵라면이나 검은삼각김밥을 사먹을 수도 있다 졸지 못하는 카운터 위에 맴도는 잠이 없는 노릿한 컵라면 냄새가 숨막히게 배고프다 배가 고프지 않던 사람도 노랗게 물든 그 앞을 지나다보면 허기에 물든다 다섯 대의 소방차가 앵앵 언덕을 넘어간다 붉은 사이렌에 아랑곳 않고 편의점은 노랗다 뒤따르는 하얀 앰뷸런스에도 아랑곳 않고 편의점은 노랗다 오늘밤도 가로등 침침한 거리 편의점 노오란 불면증인데 충혈된 간판이 거리를 먹어치우고 있는데 2005년 봄인가, 여하간 초에 썼던 것-

어설픈꿈 2008.01.11

수필 - 전쟁 꿈

전쟁 꿈 어제 밤이던가 그제 밤 정도였다. 꿈에 전쟁을 만났다. 꿈에서 전쟁을 만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명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강 기억나는 것에 약간의 살을 붙여보자면 이렇다. 대체 어디와의 전쟁이었는지, 그런 건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았다. 나는 참전 같은 것은 하지 않았고, 내가 있는 곳은 그저 후방이었을 뿐이었고, 나는 그저 민간인이었을 뿐이었다. 학교는 휴교 중이었고 하늘은 흐렸다. 후방. 전선은 저 멀리 있었고 이곳은 전쟁의 참혹함이나 끔찍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도시. 하지만 전쟁이란 전선에서 총을 쏘고 미사일이 나는 그런 단순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이 도시에는 폭격기가 날지 않았지만, 다른 주요 도시들은 종종 폭격을 받는다고 ..

어설픈꿈 2008.01.10

시 - 닿을 수 없는

닿을 수 없는 아이들이 베란다서 수다를 떨고, 잔디밭에 둘러쳐진 하얀 로프와, 들어가지 마시오! 푯말 화창한 점심시간 벤치에서 소소한 얘기소릴 엿들으며 손톱을 하나하나 깎았어요 잔디 깎기 훑고 간 잔디밭엔 싸한 피 냄새 나른한 한숨 같은 비행기 소리 서서히 주위를 덮었고 손을 뻗어 보았지만 닿지 않았고 공기만 한 움큼 또각또각 물어뜯긴 손톱이 화난 듯 내게 튀어 오르는 날.

어설픈꿈 2008.01.10

시 - 새벽녘, 방에서

새벽녘, 방에서 째깍 얼핏 들었던 잠이 초침 소리에 깼다 꿈속에 떠돌던 귀가 시계에 머문 때문이다 자리에 일어나 앉아 두리번대다 습관적으로 뻗은 손 깜빡대는 형광등 파르르 숨을 떠는 방 창 밖을 본다 북향방도 내일에 설렜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잠겨진 창문으로 내다본 어슴푸레 풍경은 희미한 얼굴에 가려질 뿐 거울이 된 유리창, 방이 흘린 웃음이 나가지도 못하고 잔향만 속삭이며 간질거린다 물러나서 몸을 기대면 등에 닿은 벽이 하얗게 시리다 벽에는 꽃들이 피어 있지만 꽃들도 떨고 있다 내가 잠들던 방은 이 방이 아닌가 내가 한숨을 내쉰 방은 이 방이 아닌가 내가 코를 풀고 뺨을 닦던, 자꾸만 나를 삼키던 그 방은 이 방이 아닌가 내 방은 이제 개미 같은 귀울림과 아련한 기시감에서만 겨우 엿볼 수 있는가 그래서 ..

어설픈꿈 2008.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