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142

12월 14일, 119가 학교에 온 이유

12월 14일, 119가 학교에 온 이유 (이 글은 사건 당사자의 허락을 받고 썼음을 밝혀둡니다.) 2005년 12월 14일 오전, 119 소방차 한 대가 학교에 들어온다. 그리고는 “쟤 수능 못 봤어요?” 같은 이야기를 신관 아래쪽에서 교감 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 몇 명의 아이들과 주고받더니 소방관 아저씨 한 분이 멋진 자태로 신관 옥상에서부터 로프를 타고 내려온다. 잘 보니 신관에 투신하면 여기 걸려서 멈추라고 해놓은 듯한, 아니, 창문에 비 들이치지 말라는 의도로 만든 듯한 3층 창문 위쪽 파란 돌출부에 한 학생이 앉아있다. 애초에 그 위에 어떻게 왜 올라간 건지도 수수께끼다. 소방관 아저씨는 그 학생에게 로프 묶는 옷을 입히고 로프를 묶어서 아래로 내려 보낸다. 이런 상황에 대한 가장 상식적인..

어설픈꿈 2008.02.08

수필 - "바라보기만 해도 잘 자랍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잘 자랍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는 잉어가 있다. 학교 뒤편과 도서관 앞에 연못도 서너 개 있고 그 안에는 비싸다고 소문 난 잉어가 산다. 손가락만 한 작은 것에서부터 팔뚝보다 큰 녀석까지, 비록 어종은 그리 다양하지 않은 것 같지만 크기는 꽤 다양하다. 이 잉어들을 너구리가 잡아먹고 산다는 소문이라거나, 몇몇 학생들이 잉어를 잡아먹은 일이 있다거나 하는 잉어가 ‘먹히는’ 이야기는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러나 정작 잉어는 대체 무엇을 먹고 사는가? 뭘 먹었기에 그렇게 컸지? “잉어가 무얼 먹고 살지?”라니, 당연히 길러지는 잉어니까 사료를 먹고 살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상식적인 발상으로는 어쩐지 2% 부족한 감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학생들..

어설픈꿈 2008.02.08

풀날

제 키가 좀 버거운 풀들이 서로 엉킨 들판이 되어있다 풀들은 하늘하늘 누군가를 불렀다 누군가는 하늘하늘 야윈 고양이처럼 풀속으로 들어오다 꼿꼿한 풀날들에 생채기가 하늘하늘 풀독이 올라서 빠알간 눈을 하고 나를 끄집어낸다 나는 들판이 되었었는지 풀날에 묻혀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 2007년 7월 아침 지하철에서 떠오른 하늘거리는 심상

어설픈꿈 2008.02.08

시 - 네가 사는 곳

네가 사는 곳 그날밤 택시 앞유리에 번지는 "빈차"가 반갑고도 아쉬운 별똥이었어 나는 미처 소원을 빌지는 못했지 순식간에 네가 붙들고 가버린 저- 꽁무니만 쳐다보다가 나는 문득 눈 속을 달려보지 네가 사는 별은 어딜까 안경에 눈송이가 달라붙어 눈은 그칠 듯 그칠 듯 그치지 않고 나는 횡단보도에서 넘어져 신호등은 깜빡거리지 그때 나는 주저앉아서 달리기를 멈추고 눈을 감고서야 겨우 아는 거야 너는 내 눈꺼풀 뒤에 산다는 걸

어설픈꿈 2008.02.02

수필 - 순수를 망가뜨릴 때

순수를 망가뜨릴 때 눈의 이미지 중 하나는 순수함이다. 새하얗기 때문일까. 그 눈이 산성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래, 내게 눈은 순수한 시간이다. 특히 조금밖에 내리지 않은 눈은 소중할 수밖에 없는 순수한 순간이다. 더욱이 그것이 몇 줌 남지 않은 첫눈이라면. 눈은 순수하기에 망가져야 한다면 순수하게 망가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애초에 그리 오래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길어봐야 겨울의 한복판 일부에나 머무르는 눈인데, 그나마 있는 눈마저 순수하지 못하게 파괴된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인 것이다. 온전히 순수한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기 어렵단 것, 그리고 그 순수가 세상 속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 자체가 슬픈 일이건만. 눈을 가장 순수하게 망가뜨린다는 것, 그건 바라보고, 생각하는 ..

어설픈꿈 2008.02.02

시 - 아침, 욕실, 거울 앞

아침, 욕실, 거울 앞 저녁을 닮은 노란 조명 속 눈 밑부터 번져나는 마른 밤과 에누리 없이 얼굴을 맞대게 된다 검은 무기질 눈동자 위에 방울진 불빛이 미끄러지고 샤워기의 단조로운 흥얼거림에 아래로 아래로 가랁는 머리칼 그러나 아무리 수도꼭지가 더운 숨결을 토하며 곡조를 뽑아도 무기질 눈동자는 젖질 않는다 몸 가운데선 거뭇한 죽음이 흔들거린다 젖을 줄 모르는 건 죽은 고깃덩이일 뿐이다 드러난 갈빗대처럼 앙상한 눈동자가 물 묻는 것은 고작해야 물든 몸뚱아리 그 거죽뿐인 고깃덩이 씻는 풍경을 건조하게 더듬다가 묻는다, 이 고긴 몇 등급이며 누가 사서 먹을 게냐 어머니는 새벽부터 이웃집을 청소하러 가셨다 가버리셨다 렌지로 몇 분을 데워도 속은 데워지질 않는 두부를 씹는다 나도, 어머니도, 다 지울 수 없는 마..

어설픈꿈 2008.01.31

수필 - 최선을 다하는 것

최선을 다하는 것 우리는 종종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쓴다. 그 말이 언급되는 것은 삶의 지혜를 말하는 자리에서일 때도 있으며, 어떤 일에 대해 변명하는 자리일 때도 있다. 최선을 다한다. ― 이는 실로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모호한 말이지만, 고3 교실에서 사용될 때는 종종, 고상하게 말하면 현재를 희생하고 미래에 투자하는 것, 대놓고 말하면 사회적․유희적 인간으로서의 여러 가지 욕망들을 최대한 죽이고 입시용 공부에 전념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3 교실에 앉아서 속으로는 죽어라 욕을 해대며 작년 모의고사 문제를 풀어주는 세계사 선생님을 노려보고 있다 보면 "어문 데 신경 쓰지 말고 지금 최선을 다해야 나중에 후회를 안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최선을 다하는 것에 대한 이와 같은 해..

어설픈꿈 2008.01.30

수필 - 내가 바라는 세상

내가 바라는 세상 (2005.08.) 사회를 바꾸고 싶어한다지만 그렇게 바꾸어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세상은 대체 어떤 것인가. EBS에서 제작한 드라마, "지금도 마로니에는"에서 나오는 말처럼 억울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상인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바라는 사회, 그건 평소에 누누히 말해왔듯이 '모든 존재가 행복할 수 있는 사회' 다. 사회의 범위가 인간사회라면 모든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다. 행복한 사회가 아니라 행복할 수 있는 사회다. 나는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그런 천국을 꿈꾸진 않는다. 그런 세상이라면 오히려 살 의미가 없는 걸지도 모른다. 그건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것처럼 마약을 돌려도 될 일 아닐까? 행복할 수 있는 사회란 한 마디로 희망이 있는 사회다. 물론 지금도 희망은..

어설픈꿈 2008.01.30

어느 파본 이야기

어느 파본 이야기 구석진 골목길 가로등 아래나 공터 등에는 저절로 조그만 쓰레기장 같은 것이 만들어지곤 한다. 그래서 때로는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맙시다”와 같은 내용의 조잡한 간판이 나붙기도 하지만, 그런 것을 만들어 줄 사람도 없는 버려진 곳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쓰레기장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놓여있곤 한다. 음식물. 비닐. 깡통. 유리병. 휴지. 구멍 난 양말. 깨진 유리조각. 컵라면 용기. 책. 분리수거 같은 것은 무시한 채 널려있던 쓰레기들 속에서 문득 네모난 무엇이 일어섰다. 검고 수수한 표지에 먼지가 묻어있다. 책장 틈에는 생선뼈다귀가 끼어 있다. 싸구려 종이로 만들어진, 제법 두께 있는 책이다. 그것은 파본이었다. 파본. 인쇄·제책이 잘못되거나 파손되거나 하여 온전하지 못한 책을 이른..

어설픈꿈 2008.01.30

기차에 대한 단상들

기차에 대한 단상들 2005.07. KTX에 탈 때면 꼭 역방향석에 ‘이제 돈으로 시간을 사는 시대일까.’ 역에서 KTX표를 사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것이 특별히 나쁘다거나 좋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그럴 수도 있지.’ 정도로 넘길 뿐이다. KTX를 타고 빠르게 다니는 것에 좋은 점도 있고 안 좋은 점도 있을 터. KTX가 시끄럽고 의자는 불편하니 어쩌니 하고 또 어느 정도는 사실이긴 하지만, 내가 KTX에서 좋아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역방향석이다. 내가 역방향석에만 타는 것은 비행기만큼 널찍하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새마을호 좌석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역방향석을 꺼려서 역방향석 좌석이 곧잘 남는 탓도 있지만 역방향석에 앉아서 뒤쪽을 보며 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정방향석..

어설픈꿈 2008.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