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142

시 - 종소리

종소리 종은 울리지 않아요 상표를 달지 않은 종 푸른 리본을 빼입은 종 둔탁한 금색 종 문에 달아둔 기다림 3월로 달려나간 당신은 돌아올 생각이 없는 듯 창 틈으로 웃음소리만 찔끔찔끔 흘려 보내고 있더군요 늑장부린 눈 속에서 눈을 쓰는 싸르락싸르락 소리만 귓등을 스쳐가더군요 문에 달아둔 종을 잠옷바람으로 무릎 꿇고서 바라보고만 있어요 사실 오래 전부터 종은 숨도 쉬지 않고 먼지가 굳어진 얼룩 곰팡이만 퇴적되고 있음을 밤이 되고야 별빛 덕에 알아버렸죠 문에 달린 침묵 이젠 멀리서 흩날려오는 소리 보이지 않는 당신의 모습 아직 거기에 있나요? 거기에 있어줄 수 있나요? 발돋움하여 문에 달아뒀던 웃음을 떼어내요 숨을 불어 먼지를 털어내요 지문이 얼룩 위에 남고 긴 잔향이 발자국 위에 맴돌아요 길게 기지개를 늘..

어설픈꿈 2009.07.20

시 - 길이 걸어간다

길이 걸어간다 길 앞에는 신호등이 노란색의 비보호를 깜빡이고 있다 붉은 길은 내 명치를 스치듯이 관통하고 약간 더 붉은 길은 내 가슴을 지나치고 길들은 생일처럼 어느날 주어졌다 빨간신호 횡단보도 그 위로 나의 길들이 비보호를 드리운다 길 곳곳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추억처럼 하얗게 돌출하는 과속방지턱 페인트를 횡단보도를 밟으며 나를 지나쳐간 길들의 속력은 늦춰지지 않는다 길이 걸어간다 길들이 걸어간다 =-------------------------------------- 2005년에 쓴 시. 길과 나의 분리와 비분리.

어설픈꿈 2009.07.13

시 - 구두, 장화, 샌달

구두, 장화, 샌달 이 어깨를 선뜻선뜻 스치는 것은 시간인가 바람인가 빗방울인가 뜨겁게 기침하며 힘들게 빗은 머리칼도 비바람이 드나드는데 계절에 어긋나게 검은 구두엔 비가 젖어오고 발가락이 불어가고 막아보려 해도 네가 스며오고 너는 몸을 던져온다, 모든 방향에서 그래서, 그들은 샌달을 신나보다 비바람 앞에 맨발을 내놓고 시간 앞에 맨살을 드러내고 합성수지 장화로 삶을 가두느니 세계 속에 발톱을 내놓고 걸어가나보다

어설픈꿈 2009.07.04

시 - 소크라테스 파스타

소크라테스 파스타 1 열아홉살 그녀의 그림에는 파스타가 잠을 자네 웅크리고 잠을 자는 순진한 파스타들 키가 크기 싫어서 벽에 기대선 노래를 불러주는 불면 파스타들 몇이서만 미아 같은 눈을 하고는 노크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네 크림소스를 덮어쓰고 쑥쑥 자라려고 잠을 청하던 파스타들이 화를 내고서야 불면 파스타들은 자장가를 부르네 크림처럼 끈적이는 자장가를 부르네 어딘지 방울맺힌 자장가를 부르네 2 어른들이 그녀에게 제목을 물어보자 그녀는 "먹음직스런 파스타"라며, 웃어보이네 노크할 줄 모르는 어른들이, 노크할 줄 모르는 다 자란 파스타들을 먹네 * 이 시는 어쩌면 계몽적으로 읽힐지도 모르고, 저급한 동화로 읽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건 이건 계몽적인 의도를 갖고 쓴 시는 아니다. 이건 오히려 자조적인 시..

어설픈꿈 2009.06.13

수필 - 가로수 아래, 주검을 내려다보다가

2005년 4월에 썼던 수필. 딱 4년 정도 됐구나. 가로수 아래, 주검을 내려다보다가 ‘죽음이란 언제부터였을까’라고 묻게 되지만, 아마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이었을 것 같다. 시체가 굴러다니는 일이 흔한 것이 세계다. 그 진술은 생명이 존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적용 가능하다. 현대를 가리켜 불안의 시대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와 비교해 볼 때 현대가 특히 더 불안한 시대인 것은 아니다. 다만 과학기술에 대한 환상이 깨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실망스럽게 느껴지는 것뿐일 터이다. 병사(病死)가 줄어들고 평균 수명이 연장된 대신에 교통사고와 가스 폭발, 전쟁 등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인구가 증가한 것을 보면 객관적인 수치 면에서는 아마 후자가 전자를 대신했다고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겠다...

어설픈꿈 2009.04.26

수필 - 굴 속의 전화번호들

굴 속의 전화번호들 1 살다보니까, 가슴 한켠에 묻어뒀던 것들이 있을 곳을 잃어버리고 더 깊은 속으로 굴을 파고 숨어 버려서, 마음 속에 구멍이 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 구멍은 뚫려 있지는 않아서 시린 바람이 드나들거나 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먹먹하고 허전하긴 하다. 예컨대 몇 년 전에 즐겨가던 식당을 갔는데 식당 대신 부동산 중개업소가 들어서 있을 때, 그와 마지막으로 커피를 마셨던 커피숍이 간판 자국만 남기고 경양식 식당으로 바뀌어 있을 때, 자전거를 타고 달렸던 이 거리가 낯선 간판들로 뒤덮여 있을 때, 유치원 시절 즐겨 봤던 만화책이 절판되어서 구할 수 없거나 제목조차 잘 생각이 안 나서 찾지도 못할 때…. 세상은 참 빨리 변하고 그 속에서 달라져가고 없어져가는 것들은 좀 지나치..

어설픈꿈 2009.04.21

시 - 비의 이유

비의 이유 내 한때 묵묵히 무거운 몸 이끌고 이곳저곳 떠돌면서 햇살과 바람과 발작소리 말소리 웃음소리 울음소리 모두를 내속에 담아두려만 했다 그러나 끝내 끝끝내 후두둑 무너지고 만 것은 무너져내리고 만 것은 어제밤 달무리가 유독 아름답게 번졌기 때문도 아니요 개구리들 그토록 서럽게 서럽게 울었기 때문도 아니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롭게 흔들렸기 때문도 아니요 새들조차 고개 숙인 채 낮게 날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건 단지 내 혈관 하나 하나에 번져있는 누군가의 눈물들 증발한 눈물들 알콜섞인 오줌발로 튀어오르고 거리에서 물대포로 뿜어지고 땅 밑을 흐르며 들어야 했던 소리들 비명소리들 울음소리들 그런 것들이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일 뿐이었으니 후두둑 무너지는 것 그건 단지 다시 무너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떠돌고 ..

어설픈꿈 2009.04.15

시 - 낯선 얼굴 낯선 별

낯선 얼굴 낯선 별 내 곁에 누워 있는 얼굴은 오직 낯선 얼굴 낯선 얼굴 낯선 얼굴 뿐 어떡하면 꿈이 덜 무서워질까 낯선 얼굴은 낯설기에 말이 없다 한구석에 등 댈 땅을 포기하고서 별 하나 없이 불투명한 밤을 헤아린다 하나하나 눈을 뜨는 낯선 별들 어떡하면 꿈이 덜 무서워질까 어떡하면 별들이 덜 낯설어질까 얼굴에 난 머리칼들 헤아린다 머리칼들을 하나하나 뽑아내본다 한움큼씩 뜯어낸다 토끼풀처럼 너의 얼굴 구석에 겨우 낯익은 별 둘이 뜬다 농성장 당번이라서 농성장에서 밤을 보내던 때 초안을 잡은 시. 왠지 마지막이 좀 가학적으로 읽힐지도?; 하지만 그런 의미는 아닌데- 예전에 인터뷰할 때, 표 씨가 관계맺음은 어느 쪽에서인가 먼저 상처를 줄 수밖에 - 그러니까 폭력적인 개입을 감행해야 성립한다고 이야기한 적..

어설픈꿈 2009.03.06

시 - 2월 14일 신도림에서

2월 14일 신도림에서 0 죽음에 달리는 주석들이 지하철 가판대를 장식하고 말이 필요 없는 죽음이란 사치스럽기만 한 어느 날 한 세입자가 신도림역 앞을 걷고 있네 1 검붉은 아스팔트 위에 늘어서 밋밋하게 으르렁대는 차들은 신도림 영등포 노량진을 지나 용산까지 가고 용산에서 으르렁대는 경찰버스들도 검붉게 도열한 전의경들의 구호도 차들을 밟고 밟고 메아리쳐오네 주석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본문보다도 더 길게 외치고 있네 2 구석진 어디는 축축하게 썩어가는 반지하 닫을 수도 없는 창문 너머로 선명한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면 죽은 척하는 매년 2월 말이면 골목골목을 떠도는 세입자 벼룩시장을 기웃거리는 벼룩 같은 삶은 500만원 뚜껑 아래서 폴짝이고 있네 3 여기저기 주석이 달린 죽음들과 검붉은 정체 골목골목을 ..

어설픈꿈 2009.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