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

서구중심주의와 오리엔탈리즘

공현 2008. 1. 10. 15:01
(2004년 12월에 썼던 글)






세계화란 것을 나는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다. 게으른 사람인지라 '배워야 하는 언어가 많아져서' 와 같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이라는 현재의 추세가 썩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지금 이 상태로는 적어도 얼마쯤은 실패한 담론이라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국가 간 차별, 인간성 상실, 고용 없는 경제 성장, 같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20:80의 사회"가 괜히 있는 말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자유주의나 세계화가 모두 거부할 체제라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실패"가 무시할 만한 요소는 아니니까. 다만 상투적인 소리로, "비판적인 수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문화적 세계화 과정에서는 문화적 지배를 막으려고 노력하고, 신자유주의(경제적 세계화)는 지나치게 기업 중심적인 사고를 바꿔줬으면 한다는 것. (이게 다는 아니지만, 요점만 말하자면.)


더군다나 솔직히 현재 사회 안전망도 제대로 없는 한국이 "복지 예산이 너무 많아!" 같은 소리 해봐야 핑계 조로 들린다. 사회 안전망, 복지를 어느 정도는 구축하고 나서 신자유주의 적극 도입을 생각해보면 안될까? (라고 하면 뒤쳐진 사람이려나. 훗.)


세계화라는 논리 뒤에 숨어있는 것이, '서구 중심의 세계 질서', '문화적 제국주의'라는 것은 이제 질릴 정도로 지적 받아온 문제이다. 현실적으로 힘이 없기 때문에 그걸 따라야 한다는 논리는, 무력한 패배주의이다. 어떻게든 발버둥치는 것이 인간 아니었나?




지금까지는 여담이고...




서구중심주의

서구중심주의(西歐中心主義, Eurocentrism, West-centrism)란 것은 강정인 씨에 따르면 "서구인의 입장에서든 비서구인의 입장에서든, 근대에 들어와 전 세계의 패권 문명으로 등장하게 된 서구 문명이 신봉하는 세계관, 가치 및 제도를 보편적이고 우월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오늘이 12월 25일이라 하는 소린데, 한 예로 석가탄신일에는 그렇게 축제 분위기가 아닌데 비해 성탄절에는 축제 분위기가 되는 걸 들 수도 있다. "초파일 특별세일" 같은 것보다는 "크리스마스 특별세일"이 더 흔한 것이다. 물론 이것을 "연말이라서…" 같은 말로 변명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가 불교보다 보편적이라고 인식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외에도 서구중심주의의 사례는 찾아보면 많지만, 워낙 많기 때문에 패스.


서구중심주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우선은 <난 몇 퍼센트 한국인일까>(강정인 이나정 김현아 외 지음)부터 읽어보기를 권한다. 쉽게 입문할 수 있으니까. 그 다음은 <하얀 가면의 제국>(박노자 지음)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강정인 지음) 라든가, 서구중심주의에 포함시킬 수 있는 담론인 오리엔탈리즘에 관련된 책들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서구중심주의를 통한 문화적, 학문적 지배

서구중심주의의 가장 큰 폐해 중 하나는 문화적, 학문적 지배이다. 서구중심주의에 따르면, 서구는 실재이고 그 주변은 서구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떠올려 보자. 플라톤에 따르면, 페노메논의 세계의 것들은 이데아를 닮고자 해야 하고, 본받고자 해야 한다. 이 도식을 서구중심주의에 적용시키면, 서구 외의 지역들은 서구를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서구의 문화적, 정신적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서구적인 것이 꼭 옳은 것인가?' 라고 비판해봐야 한다. 아니, 애초에 서구적인 것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개념 자체가 허구적이거나 기만적이진 않은가?


서구중심주의가 야기한 폭력

서구중심주의적 사고관은 "이민족의 과학적 섬멸"을 유럽이 전통적으로 자행하게 만들었다.

서구중심주의적 사고관은 사회진화론에 힘입어, "열등 인간들을 섬멸하는 일이 우등 인간의 건강과 생기를 증진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박노자씨 책<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에서 인용)

사회진화론이 '힘은 정의다'라는, 논조를 띠면서, 서구중심주의는 힘을 얻었고 또 둘은 함께 작용하면서 소위 "유색인종"을 파괴하는 이론으로 작용했다.

현재에도 있는 인종차별주의, 경제적 차별주의 등은 모두 이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할지도.



차별적 담론, 서구중심주의

서구중심주의의 기본은 서양과 동양의 구분이다. 이것은 동양을 유럽 등의 서양이 아닌, 페르시아부터 시작되는 아시아 쪽으로 구분하면서 시작되는데, 유럽 기준의 시각으로 서양우월주의, 동양비하주의 등을 포함한다. 그 시작은 고대 그리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기독교 문화의 "이교도" 구분과도 같은 맥락이다. (사실은 모습만 살짝 바꾼 동일한 내용이다.) 애초에 서양과 동양이라는 구분부터가, 유럽 쪽에서부터 발생한, 서구중심적인 개념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 서구중심주의의 차별은 꽤 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박노자 씨 말처럼, "세계를 동양과 서양으로 보면 아프리카와 남미는 어디"에 속하게 되는 건가? 이 동양과 서양이라는 구분은, 애초에 유럽 등의 서구는 우월, 그 옆의 동양은 문화나 국가가 있기는 하지만 열등, 나머지는 제대로 된 문화조차 없어서 세계로 인식할 필요도 없는 미개인, 이라는 삼단 구성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원형은 여러 형태로 변주되는데, 요즘의 [중심주-준주변부-주변부] 의 경제 질서도 그 변신이라고 볼 수 있다.
(서구중심주의의 이런 단계적 차별에서, 중화주의의 [중화-소중화(조선)-오랑캐] 구성과의 유사점을 발견하는 것이 착각일까? 여하간 모든 중심주의는 이런 식의 차별과 억압을 내포하는 것 같다.)


서구중심주의를 이루는 두 기둥

강정인 씨에 따르면, 서구중심주의는 서구(유럽)예외주의와 오리엔탈리즘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구예외주의는 서구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는 것이고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타자화이다. 풀어서 말하면, 서구예외주의는 서구에서는 고대-중세-근대 하는 식으로 역사가 진행되었고, 서구에서는 산업 혁명이 일어났고, 서구에서는... 하는 식의 것들이다. 다른 지역은 다 못한 일은 서구인들은 해냈다는 것이다. 이런 서구예외주의는 비교적 명확하기 때문에 특별히 더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다른 하나인 오리엔탈리즘은, 서구 외의 지역, 특히 동양에 대한 시각이다. 오리엔탈리즘은 본래 서구에서 단순히 동양학, 동양에 대한 지식, 취미 등을 의미했지만, 근래에는 그것을 뛰어넘어 어떤 "왜곡됨", 혹은 "타자화"를 전제하고 사용되기도 한다. 오리엔탈리즘 자체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동양을 비하하는 것이고 하나는 동양을 신비화하는 것이다. (이승환 씨는 "권력과 낭만화의 이중주"라고 했다.) 동양을 비하하는 것은 "동양은 민주적이 될 수 없는 족속이다."라든가, "우리는 민족성에 문제가 있다."와 같은 발언들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동양을 낭만화하는 것은 고전적으로 마르코 폴로씨의 <동방견문록>을 들 수 있다. <동방견문록>에 정확한 기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중에 신비한 이야기,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이야기들이 상당 부분 있으며, 또 중국인들의 생활을 비현실적으로 기술한 부분들도 몇 곳 눈에 띈다. (꽤나 재미없게, 객관적인 서술과 묘사로 채워져 있긴 하지만 말이다. 요즘엔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가며 마르코 폴로씨의 <동방견문록>이 지어낸 이야기나 짜깁기한 이야기라고 하는 주장도 강력하다.) 이와 같은 것은 현대의 "탐험낭만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동양 신비화와 동양 비하는 꽤 복잡하게 얽힌 문제이다. 역사적으로, 15, 16세기까지도 유럽 지역은 몇 백년 동안 비교적 힘이 약할 때가 많았을 뿐더러, 이슬람권, 인도, 중국 문물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페르시아, 오스만 투르크 등에게 피해를 입기도 했으며, 그 제국들 때문에 그 너머로 가는 길은 막혀 있을 때도 많았다. 즉, 그들에게 동양은 적대와 증오의 대상이면서도, 문화적으로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다른 세상, 신비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소위 '근대'에 들어서면서 "동양은 비과학적인 세계"라는 논리로 귀결하게 된다. 결국 신비화이든 비하이든, 동양을 타자화, 주변화하며 진실을 왜곡한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은 경계해야 할 대상일 것이다.



탈중심의 추세

탈근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풍조가 유행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탈근대주의는 대단히 복합적으로 전개되는 사조라서, '탈근대란 이런 것이다.'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어설프게나마 설명하자면 해체주의와도 몇 가지 비슷한 점이 있는 것인데, 여하간 "근대적인 가치들의 지배"를 부정하는 사조이다. 주로 이성의 지배를 부정하는 것들이 많다.
사실 탈중심주의는 언제나 있어온 사조이다. 페미니즘, 여권주의는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이었으며, 유럽의 르네상스는 기독교신(神)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실학은 성리학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이었으며, 자유시는 정형시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런 식의 해석은 각 흐름들의 성격을 온전히 말해주지는 못한다. 아니, 이런 식의 해석이야말로 대상들을 타자화시킨다. "동양은 서양이 아닌 곳"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들을 그런 식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새로운 경향들은, 기존의 경향들에 반발하는 성격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더 군다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름에서부터 "탈"근대를 표방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세계적으로 기존의 질서에 반발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다. 탈서구중심주의에 대한 관심의 고조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일단은 바람직한 일이다. "비판받지 않는 것이야말로 악"이라는 말도 있으니.

우선 중요한 건, '서구중심주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얼마만큼 서구중심주의에 물들어 있는가, 그래서 좋은 점은 뭔가, 나쁜 점은 뭔가, 그럼 어떻게 고치지?' 와 같은 문제 의식이다.

'다중심적 다문화주의', '다원주의'라고 교과서로 항상 배우면서, '어째서 실천하지 못하는 걸까', 하는 반성도 필요하다.






덧. <압록강은 흐른다>

오리엔탈리즘의 사례로 들기에 좋은 책에는 <압록강은 흐른다>(이미륵 지음)가 있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단 한 가지 생각 밖에 하지 않았다. "내가 이걸 왜 읽었지. 어떻게 이런 책이 양서라고 소개될 수 있는 거냐!"


이 책은 꽤나 담담한 어조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해나가는데, 그 이야기에는 특별히 교훈도 없고 의미도 찾을 수 없었으며, 또 허구적인 면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김 삿갓 전설 같은 경우, 괴상한 전설을 지어내지 말라고!) 아니, 너무 담담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정말 이렇게 살았나보군."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격변의 시기에 이렇게 살았다는 것도 참 어떤 의미에선 대단, 이란 생각도 들 정도로.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한국의 농촌이란 것도 실감이 없고, 몰락한 양반이란 것도 실감 없음. 3.1운동에 부화뇌동 식으로 갑자기 참가한다는 것도 불쑥 튀어나와서 이상하고, 국외 피신도 별로 긴박감이 없다. 이건 글을 쓰는 능력 이전에 살아온 경험의 문제, 라고 생각한다. 나이든 사람으로서의 관록도 느껴지지 않고, 그렇다고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나 젊은 시절의 혈기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뭐 이따위 게 다 있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문학 선생님에게 "제대로 안 읽었구만"이란 질타를 받게 되었다. "이거 상당히 사대주의적이다."라고 하시기에, "사대주의는 무슨, 그런 목적의식도 없고 마냥 쓴 것 같던데요."라고 답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 여러 부분을 지적 받았는데, 그 부분은 나도 보긴 했던 부분들이었다. 다만 그 때는 작가가 참 "개념 없고 의식 없는" 사람, 이라고만 생각하고 넘긴 부분이었다.
'작가가 그런 걸 의도하진 않았다', 는 데에는 선생님도 동의하셨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작가가 그런 경향에 젖어 있었다는 건 사실이다. 더군다나, 이 소설은 독일 교과서에까지 실렸다고 한다.
본문 중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예를 들어보자.



"내가 이 나라의 대통령입니다. 구라파에서는 다른 야만인 나라에서와 같이 주인과 하인이 따로 없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아버지께 해드렸을 때 아버지는 얼마나 좋아하셨던지! "봐라, 구라파 사람들이 그야말로 진짜 사람들이구나!"


"우리가 먹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사이, 구라파 사람들은 금으로 글씨를 썼단다." 그는 내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집으로 가려고 했을 때 그는 내게 파란색 표지에 구라파 이름처럼 보이는 글씨가 적힌 작고 얇은 책 한 권을 주었다. "이 책은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읽는단다. 그걸 네 아버님께 한 번 보여드려라!"


벽시계가 천천히 웅웅거리며 종을 울렸다. 그것은 마치 종소리가 아주 멀리에서부터, 떠가는 구름 사이로 내게 비쳐오는 저 닿을 수 없는 진리의 높은 성에서부터 울려오는 것처럼 들렸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금 전세계에는 여섯 개의 문명국이 있다고 해." 한 번은 용마가 말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래. 사람들이 일본은 당연히 꼴지 자리에 붙여 놓았는데, 그건 일본이 다른 나라들을 그저 흉내내기만 해서 그런 거래."
"우리 나라는 그럼 어디쯤 있는 거야?" 나는 놀라서 물었다.
"우리 나라는 아직도 한참 미개한 나라에 속하는 거지." 그는 힘없이 대답했다. "우리 나라에 아직도 철도가 너무 적기 때문이야."
"그럼 중국은?"
"중국 사람들은 굉장히 보수적인 것 같아."
(중략)
중 국 사람들이 정말로 그렇게 보수적이라면 그건 너무나 안 된 일이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서 중국은 뭔가 아름답고, 부드러우며 훌륭한 것이었다. "양자강"이나 "동정호", "서주" 혹은 "황주"라는 단어들의 울림을 생각만 해도, 아니면 소동파가 도연명의 시를 몇 구절 외우기만 해도 나는 내 앞에 황홀한 세계가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이와 같은 것에서는 오리엔탈리즘 중에 동양 비하적인 모습들을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나"는, 중화주의->서구중심주의로 전향하는 사대적인 지식인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외에도 동양을 신비화하는 모습도 곧잘 나온다. 위에서 말한 김삿갓의 이야기도 사실 유가 사상에 대한 신비화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직접 들려주는 당나라 때의 전설과 야화, 일화 같은 것들이었다. 그 시대에는 그렇게도 많은 불행한 시인들이 있었으며, 그렇게도 많은 외로운 사람들이 그리움에 사무쳐 흐르는 강물의 물결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바위틈에서, 나뭇잎에서 흘러나온 슬픈 곡조가 쓸쓸한 계곡에 젖어들었고, 동정호수의 물결 위에는 슬픈 이별의 노래가 저녁 안개 속에 떠다녔다.


저 이야기는 온전히 허구는 아니지만, 어떤 한 모습만 특징적으로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동양을 낭만적으로, 신비적으로 그리고 있다. 조선에 관해서건, 중국에 관해서건 그 서술들은 전체적으로 저런 식이다. 그리고 당시 조선 현실에 대한 주인공의 무지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소작인과 지주의 관계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지은이의 경험에선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밖에 몰랐다면, 시야가 좁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씁쓸한 이야기지만,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인 뿐 아니라 비서구인에게도 만연해있다.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씨가 지었지만 <압록강은 흐른다>는 이미륵씨가 지었다.


우리 자신을 타자화해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한숨을 지으며, 나 자신부터 천천히 반성해본다.







(2005년 1월에 덧붙인 글)



미리 밝혀두는데, 저번 글에서 서구중심주의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다룬 것은, 사실 어떤 정확하다거나 심도 있는 논의가 아니라 개괄적이고 단순화된 논의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뭐, 뭔가 깊이 있게 그것들을 풀어내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대략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니, 사실 그런 지적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이 텍스트의 목적에 맞게, 가장 많이 참조하고 있는 것은 난 몇 퍼센트 한국인일까(강정인 이나정 김현아 외)이다. 몇 부분은 아예 그 책에 나온 것을 요약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정도이니 말이다.


이 글은 저번에 한 논의에 약간 미진한 면이 있다고 생각되어서 쓰는 보충 설명, 부록 같은 것이다.


서구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논하긴 했지만, 사실 서구중심주의에는 장점도 있다. 어떤 것이든 좋은 점이 있고 나쁜 것이 있고,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게 보통이니까는.

이를테면, 근대에 있던 개화파들 같은 경우에, 물론 그 주장이 전면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주장에 이점도 있던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듯이. 홍세화 씨의 프랑스에 대한 이야기를 서구중심주의라고 단순하게 매도해버릴 수 없는 것이.

사실 인권 의식이라거나 하는 것은, 유럽 쪽이 조금이라도 더 발달한 것이 사실이다.(일반적으로는) 그리고 대학교 수준만 봐도 소위 한국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는 서울대는 상위권도 못 된다. 이런 순위를 맹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들 알다시피 한국 교육은 조금쯤 엉망인 면이 있으며 그게 그대로 학문 영역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내신은 부풀려지고 수능은 만점자를 대량 생산하도록 쉽게 나오고 경쟁이라는 가치 속에 교육내용과 방식, 목적은 왜곡되어 있다.

외국에 유학을 갔다 오는 것이 나쁘기만 하다고 할 수는 없다. 외국에 갔다와서 자기 재능을 더 발휘할 수 있다면 무슨 상관이랴, 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억압이냐, 억압이 아니냐, 라는 점이다. 어떤 식으로든 중심성은 그 중심에 대해 주변을 억압하거나 왜곡하기 마련이다. 서구 중심주의가 선택적으로 기능한다고 하면 그 중심성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능하는 것만 골라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매우 좋겠지만, 그렇게 생각대로 되지는 않는 것이다. 주변에 대한 억압, 중심에 대한 맹종이 사람들의 머리엔 어느새 스미게 된다. 어느새 우리는, 서구적인 것이 보편적이고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것이 우리에게 억압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인권 의식 같은 것은 아프리카든 아시아든 유럽이든 아메리카든 오스트레일리아든 옳은 가치로 받아들여지기 쉬운 것 중 하나지만, 경제구조라든지, 하는 것들은 어떤가? 더군다나 인권 의식의 경우도, 단적으로는 이슬람적 의식과 기독교적 의식, 불교적 의식에 차이가 있을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서구 중심주의는 비판받아야 할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