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옛 친구들과의 만남에 대한 두려움

공현 2008. 11. 24. 03:43


 옛 친구들과의 만남에 대한 두려움


  예전에 동창회 가입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글을 쓴 적이 있다. 그간 몇 번 동창회니 동문회니를 오라는 연락이 왔지만 전부 다 가지 않았다. 한 번은 계속 연락을 해오는 담당자(누군지도 모르지만)가 안쓰러워서 어차피 저는 안 가니까 문자를 안 보내시는 게 절약일 듯하다는 답장을 보냈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문자가 오던 걸로 봐선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성격이신가보다. 고등학교 때 친구를 우연히 만났는데 동창회 이야기를 하기에 적당히 벗어나려고 "나도 가고 싶은데, 바빠서 시간이 영 안 나네."라고 립서비스를 한 적이 있는데, 약간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여기에서라도 말해둔다.

  여하간에 동창회야 그렇다쳐도, 내가 예전에 한 번 친한 친구들의 모임이나 내가 친하게 지냈던 동아리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갈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최근에 내가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만화동아리 사람들이 12월에 모인다는 소식을 친구의 블로그를 통해서 봤는데도, 나는 갈지 말지 좀 심란한 마음으로 고민을 하고 있다.

  사실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다고 해도 만화동아리 사람들이 딱 마음, 성격, 사상 등이 맞는 사람들이었던 건 아니었다. 개중에는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사람도 있고,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문제야 뭐 어떠랴. 친구라는 게 딱 나와 마음, 성격, 사상이 맞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닌 게 어쩌면 당연한 것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두려움일 것이다. 내가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때의 친구들 중에서, 만나고 나서 어느 정도 곤욕스럽지 않았던 친구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예외가 있는데, 고등학교 때 친구만 만나지 않고 그 친구와 고등학교 때 친구가 아닌 다른 친구를 같이 만났던 경우, 그리고 비록 나와는 다른 분야이더라도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났던 경우이다.) 그런 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고등학교 때 누구 기억 나냐, 그 누구는 어떻게 산다더라, 삼수한다더라, 군대 갔다더라, 뭐 그런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곤 하는데, 도통 내가 관심 없어 했던 다른 사람들의 삶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나에게는 그런 화제가 지루하기만 하거나 아니면 일방적으로 듣는 입장이 되어버리곤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뭐 그런 이야기들도 주요 화제 중 하나로 오를 텐데, 아무래도 내가 별종 취급받게 될 것 같은 것이다. 별종 취급받는 것은 익숙한 일이지만 그래도 친했던 만화동아리 친구들에게 그런 느낌을 받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미 고등학교 만화동아리 때부터 나는 어느 정도 별종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받게 될 별종 취급은, 굉장히 정치적인 뉘앙스를 띤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인권운동을 시작하고 만화동아리 활동에 덜 관심을 갖게 된 고3 때부터 약간 그런 느낌들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더해서 나 자신도 다소 걱정스러운 것이, 물론 나는 제법 귀차니스트인 탓에 많은 경우에 마음 속에 있는 말들을 숨기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그 자리에서 있을 가능성이 높은 여러 가지 불편한 이야기들에 단 한 번도 시비를 걸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것이다. 군대 이야기라거나 정치적 이야기라거나, "병신"이라는 사소한 장애인 비하적 표현 등등. 그런 자리에 가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 또한 운동의 일부라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친했던 친구들과 그런 식으로 충돌하고 싶지 않은 것이 또 내 소박한 욕망이라면, 평소에 내가 차갑다고 말해온 사람들은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지금에 와서 우리가 공유할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우리가 친했던 옛날 일에 대한 추억이나 그 추억에서 파생되는 인간관계들에 대한 화제들뿐이다. 좀 더 현재의 삶과 고민들을 나누기 위해서는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어야 하는데, 마치 물리학이나 컴퓨터 전문가들의 세계를 비전문가들이 공유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활동가의 삶이란 것도 활동가가 아닌 사람들과는 공유할 부분이 많지 않다. 특히나 활동가라는 족속들은 그 전문성이 일종의 '정치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정치성은 많은 경우에 활동가의 삶 전체에 지배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단순한 직업적 전문성과는 다르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정치적인 전문성은 비정치성의 신화가 횡행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별종 중에서도 특별한 별종으로 취급받을 가능성도 높다.


  같이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적지 않은 수가 동창회 자리나 뭐 옛날의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거리감을 느낀다고들 한다. 내가 특별한 감흥 없이 사람 관계에서 스쳐지나가지 않는 것들이 오히려 소수니까 뭐,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나의 인간관계 방식의 문제인 걸까. 어쨌건 이미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우리가 만나서 어떤 이야길 할 수 있을지, 나는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다. 옛날에 친했던 사람들은 친했던 사람들로 추억 속에 남겨두고 싶다고 하면 너무 이기적인 걸까. 내가 그 자리에 나가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나에 대해 서운한 기억을 가지게 될 것이고, 추억 속에 남겨두네 어쩌네 이야기하는 건 나만의 일일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만나서 으르렁대며 싸우고서도 "우리의 우정은 변함 없어"라고 말할 만큼 끈끈한 인간도 아니고, 하물며 혼자서 속으로 곤욕스러움이나 불편함을 숨겨두고서 그 자리에 웃으며 앉아 있는 걸 자청하고 싶을 만큼 착한 인간도 아니다. 우리의 만남이 기분 좋은 즐거움이 될 거라고 낙관할 만한 낙천가도 아니고. 그래서, 나는 아마도 내가 이번 12월 모임에 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내가 가고 말고 하는 건데 이건 무슨 이상한 표현이냐고? 하지만 스스로를 이정도로 객관화시켜봐야 스스로를 알 수 있을 때도 있다.)

  사실 12월 23일이 일제고사라서 일제고사 거부 투쟁 일정 때문에 빡빡한 12월에 시간이 날지 자체가 미지수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게 가장 큰 이유다. 왜 하필 모임을 12월 20일로 잡아서- 이 역시 일반적인 대학생들의 삶에 맞춘 날짜라고도 할 수 있겠다.)


* 여기까지 쓰고 나니 문득 생각나는 게, 언젠가 모 단체 사무실 벽에서 동창들을 만나서 후원을 받아내자는 뭐 그런 말을 본 적이 있는데, 나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CMS 후원해달라고 브로셔를 내미는 그런 관계가 되고 싶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