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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17.11.05 20:11

그것이 바로 내셔널리즘 아닌가?

※ 〈아이 캔 스피크〉 미리니름(스포일러)이 가득합니다.


추석 연휴 직전에 〈아이 캔 스피크〉를 보았다.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최근 〈리얼〉이나 〈VIP〉나 〈군함도〉로 내려가 있던 한국 상업 영화에 대한 기대치와 상호 작용하여, 상대 평가를 한다면 꽤 높은 평가를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일본군 ‘위안부’ 내용을 다룬 대중적인 영화의 계보 속에서 이 영화가 실현한 미덕이나 진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어쨌건 〈아이 캔 스피크〉가 한국 상업 영화의 역사 속에서 의미 있는 가치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재미있는 것 이후에라도 이 영화의 문제점이나 ‘해로움’을 좀 더 말해야겠다고 느꼈다. 어느 쪽으로든 말하고 싶어지는 욕망을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주변이 온통 〈아이 캔 스피크〉 칭찬 일색이기에 긴 글로 문제점을 다 짚으려고 했지만, 그 사이에 나와 비슷한 관점에서 〈아이 캔 스피크〉의 문제점을 짚은 글들이 몇 편 나왔기에, 단상들을 모아놓은 정도로 적고자 한다.


박민재의 서사


〈아이 캔 스피크〉에서 나옥분이 이야기상으로도 배우의 연기로도 압도적인 주연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이 캔 스피크〉는 상당 부분 박민재(이제훈)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관객이 박민재에게 감정 이입할 것을 기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므로 나옥분 만큼이나 박민재의 서사에 대한 비평이 필요하다.

먼저, 나는 박민재 캐릭터에 대한 일각의 오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예고편이나 포스터에 적힌 것과 달리 박민재는 ‘원칙주의자’가 아니다. 박민재는 초반에 나옥분에 대해 대응할 때 원칙과 절차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했을 뿐이다. 이는 단지 곤란한 민원인에 대한 대처 방침을 선언한 것으로 봐야 한다. 오히려 박민재는 이후 구청장에게 재개발 추진에서 구청이 책임을 벗기 위한 꼼수를 제시하고, 구청장 앞에서는 지금 자기 직급에 만족한다고 겸손한 체하면서도 바로 진급 시험 준비를 하러 가는, 상당히 속물적이면서도 책략가의 일면을 가진 인물이다. 나옥분이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할 때 궤변을 구사하며 일부러 어려운 단어로 시험을 치는 것도 그런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다.

그러므로 박민재에 초점을 맞춘 영화의 서사는, 속물적이며 개인주의적이고 복지부동 자세의 공무원 박민재가 나옥분을 만나면서 변화하고 나옥분을 매개로 열의와 공적 책임감을 갖고 나서게 되는 이야기다. 박민재가 미국까지 가서 의회에 난입할 때가 그 변화의 절정을 찍는 순간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그렇다. 〈아이 캔 스피크〉의 중심 이야기 중 한 축은 〈변호인〉 등 최근 한국 영화에서 여러 차례 변주되었던 ‘소시민의 각성’ 테마를 담고 있다.





공무원과 국가

그런데 기존의 비슷한 이야기들과 박민재의 이야기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바로 박민재가 ‘공무원’이라는 것이다. 박민재는 본래 공적 책임감을 가지고 일해야 할 책무가 있는 국가의 대리인이다. 그럼에도 (현실의 많은 공무원이 그러하듯이) 그가 공적 관심이 별로 없다는 것이 〈아이 캔 스피크〉의 이야기 배후에 숨어 있는 갈등이다.

이런 문제는 나옥분과의 대비를 통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화 속에서 재개발 문제를 비롯해 시장과 거리의 온갖 공적 문제들에 ‘오지랖’ 넓게 개입하고 다니는 것은 그저 한 개인인 나옥분이다. 반면 〈아이 캔 스피크〉에서 개그 장면처럼 지나치는 공무원들의 일상을 보자. 명절 맞이 인사 이벤트를 하고, 계단에 소비 kcal 표시를 (그것도 거꾸로) 붙이는 그런 쓸모없어 보이는 전시성 사업들이나 하고 있다. 중간중간에 다소 뜬금없이 끼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씬들은, 사람들의 삶과 유리된, 공적이지 못한 공무원-국가를 보여 주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박민재가 시장에 가서 법원 판결이 나기도 전인데 행패를 부리는 깡패들을 제지하는 장면에서 비로소 공무원으로서의 박민재는 존재 의의를 찾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이 캔 스피크〉가 공무원–국가의 의미를 회복시키는 것은 바로 민족의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나서는 것을 통해서다. 나옥분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밝혀지고 난 뒤 구청 공무원들은 그가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나서서 서명을 받고, 박민재의 설득으로 구청장도 움직인다. 그래서 〈아이 캔 스피크〉는 국가와 민족, 내셔널리즘에 관한 영화이다.



나옥분의 서사

이승한이 비평했듯, 〈아이 캔 스피크〉의 미덕은 일본군 ‘위안부’ 소재를 다룬 영화들의 계보 속에서 피해자인 인물을 입체적이고 인간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나옥분은 ‘도깨비 할머니’이기도 하고, 또한 ‘위안부’ 피해자로서 어머니와 동생 등에게도 외면당하고 자신을 감추고 살아왔다. 나옥분의 사연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광복 후 한국 사회의 적대적인 반응을 간접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참고 : 피해자도 엄마도 아닌 ‘개인’의 초상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812211.html/)

그런데 나는 나옥분을 박민재와 대비되는 면을 통해 해석하고 싶다. 나옥분이 온갖 문제점을 찾아내서 시정하게 하고 민원을 내고 다니는 모습은 공무원들 입장에서는 일을 늘리는 악성 민원인인 것으로 그려지고 시장 상인들 역시 나옥분이 트집이나 잡고 다니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을 한다. 박민재의 동생 박영재는 나옥분의 그런 행동을 ‘외로워서 그러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그 ‘외로움’이 단지 가족 없이 혈혈단신으로 사는 처지의 외로움일까?

극중에서 나옥분이 민원을 제기하고 지적하는 것들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옥분은 재개발 추진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건물을 일부러 훼손하는 행동을 고발하고, 입간판을 치우라고 할 때 역시 간판이 통행을 방해하고 있다고 하며 어린이들이 그 입간판에 부딪혀서 사고가 날 뻔한 사례들을 거론한다. 반면에 미성년자에게 술을 판매했단 이유로 단속을 당한 식당 주인이 “할머니가 신고했죠?”라고 따질 때는 자신을 뭘로 보고 그러냐고 한다. 나옥분은 (적어도 자기 생각에는) 이것저것 다 트집을 잡고 신고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름대로 공공의 복리와 정의를 위해서, 이웃들의 공생을 위해서 필요한 규범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구청에 민원을 제기하여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가 나설 것을 촉구하는 사람이다. ‘공무원’도 아님에도.

다소 과잉의 해석일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상상해 본다. 나옥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경험이 있다. 또한 광복 이후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이를 감춰야 할 ‘사적인 수치’로 부정당하고, 국가로부터도 소극적으로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나서서 공적 규범을 지키고 국가의 적절한 개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재개발을 추진하려는 시장 건물주의 ‘합법적’ 횡포에 맞서서 구청이 나서서 상인들을 지켜줄 것을 요청하는, 그러나 구청은 오히려 건물주의 편인 상황에 좌절하는 나옥분의 모습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겹쳐 보게 된다. 물론 나옥분이 기본적으로 같이 사는 이웃들을 챙기려 하고 정이 많은 인물이라는 것도 분명하지만 말이다.

나옥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수치’를 숨기고 살기를 바란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이를 감추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친구의 설득과 위독함 등 여러 과정을 거쳐 어머니와의 약속을 깨고 증언을 하러 나서기에 이른다. 따라서 나옥분의 서사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남의 일에 오지랖 넓게 나서는 – 공적인 일에만 관심을 갖던 캐릭터가, 자기 개인의 경험과 기억을 돌아보고 화해하고 극복하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다. 박민재가 사적 세계에서 공적 세계로 나아간다면, 나옥분은 공적 세계에만 주로 걸쳐 있다가 숨겨져 있던 사적 세계를 꺼낸다. 그런데 나옥분이 갖고 있던 비밀은 바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것이고 이는 이제 온 민족의, 국가의 이슈가 된 문제였다. 그래서 나옥분의 이야기에서 후반부는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가 통합된다.



‘죄송합니다’에는 무엇이 담겼나

나옥분이 제기해 온 그 많은 민원과 문제들은 그저 ‘악성 민원인의 심술’이라고 무시당하다가, 나옥분이 숨겨 온 개인사를 드러내자 그것은 대단히 공적 사안이 되고 박민재를 비롯하여 국가와 구청이 나서게 되는 것은 참 역설적이다. 시장 상인으로서의 나옥분, 노인으로서의 나옥분의 문제제기는 정당하지 못하게 취급되었지만, 민족이 공격당한 사건으로서 위안부 ‘피해자’인 나옥분의 존재는 갑자기 거대해진다. 나는 이것이 민족-국가의 소유물로서의 여성의 몸과 성이라는 관념이 (과거 민족의 ‘수치’로 생각하고 덮으려 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는다.

〈아이 캔 스피크〉의 연출 중에 무엇보다도 박민재와 족발집 사람이 나옥분에게 사과를 하는 시점이 나옥분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이 알려진 이후인 점이 아쉬웠다. 마치 나옥분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서 사과를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특히 박민재가 울먹이면서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장면은 껄끄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재개발에 관한 민원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것이나 폭언을 한 것을 사과하는 것이라면 그런 점에 대해 좀 더 분명하게 해명을 하거나 사과를 하는 게 더 맞지 않을까.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박민재의 “죄송합니다”에,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죄책감을 투영하기를, 관객이 감정 이입하기를 의도하는 것처럼 느꼈다.

(좀 더 나아가면 이는 박민재라는 남성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고 화해를 청하는 장면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구청 공무원들이 대부분 남성이고 박민재 옆자리의 여성 공무원은 거의 역할이 없이 박민재에게 연애 감정을 우스운 방식으로 드러내는 캐릭터로만 소비되는 것이 그저 우연일까? ‘여성부’보다도 구청장이 나서서 일을 처리하라고 박민재가 말하는 것이 단지 설득을 위한 언변일 뿐인가?)

(참고 : "나(I)"는 꼭 '위안부'여야만 하는가.
 https://brunch.co.kr/@like-orwell/35 )


적대와 봉합

많은 사람들이 〈아이 캔 스피크〉가 전반과 후반의 서사가 잘 이어지지 않고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이것이 만듦새의 엉성함이 아니라, 이 영화가 깔고 있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높은 개연성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면?

초반부와 중반부까지 영화가 제기한 갈등 요소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나옥분이 노인으로서 겪는 차별이나 문제들, 재개발을 둘러싼 문제들, 민원인 나옥분과 구청 공무원 사이의 갈등, 박민재와 박영재 사이의 긴장 등. 그러나 후반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그 모든 갈등은 뒤로 물러난다. 아니, 밀려난다. 그리고 주된 갈등은 일본을 대표하는 외교관(인가? 너무 외교관 안 같아서….)과 나옥분을 비롯한 한국인들 사이의 문제로 바꿔치기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미국 의회 장면은 더 극적이어야 했고, 일본 외교관은 더 단순하고 악해 보여야 했을 것이다.

이 ‘외부’에 대한 적대는 내부의 여러 이해관계 문제와 갈등을 봉합해버린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재개발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건물주와 깡패(일명 ‘용팔이’)들을 비롯한 재개발 추진 세력, 구청 공무원들, 나옥분 사이의 대립이다. 문제들 사이에는 위계가 생겼고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아도 괜찮거나 어쩔 수 없는 것이 된다. 재개발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구청이 낸 소송도 전망이 잘 보이지 않는데, 영화가 재개발 문제를 결말부에서 다루는 방식은 무책임할 정도이다. 이럴 거면 굳이 재개발 문제를 왜 플롯 안에 포함시킨 것인가? 첫 장면을 재개발에 관련된 건물 훼손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을 떠올려보면, 속았다는 배신감마저 든다.

그리고 이는 영화 외적으로 확대해 보아도 그렇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정부(박정희든 박근혜든)가 일제 강점기 문제에 대해 잘못된 협상을 한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얽혀 있다. 또한 일본은 총리 명의로 일단은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를 표명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은, 단지 공식 인정과 사과만이 아니라 일본 사회 전반의 반성과 법적 책임 인정 문제 등 더 구체적인 논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아이 캔 스피크〉는 이런 맥락을 축소하고 “일본은 사과하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더 단순화한다. 한국 정부의 책임도 사라지고, 한국인들은 그저 나옥분(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힘을 모아주고 여비를 보태주는 협력자로만 그려진다. 따라서 이 영화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다루는 데서 긍정적 측면이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 그 자체를 다루는 데는 퇴행적인 면마저 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소재를 통해서 공무원-국가의 존재 의의를 보이는 데서 더 가서, 일본에 대한 적대를 바탕으로 한국 내부의 단결을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내셔널리즘, 국가주의-민족주의가 작동하는 고전적인 방식이다. 공무원들은 여전하지만, 나옥분을 서포트함으로써 국가의 공적 일을 하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얻는다(고 착각한다). 영화가 상영시간 전체에 걸쳐 나옥분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어냈음에도, 결국 최종적으로는 나옥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증언자로 단순해지고 만다. 결국 이 영화가 내셔널리즘의 역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이지 않을까?

(참고 : 후 캔 스피크 / 후지이 다케시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4569.html )


세대 간 문제

사족으로, 나는 영화를 본 직후에 〈아이 캔 스피크〉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대표되는 노인 세대와 박민재 등으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 간의 문제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경제적으로도 발전하고 국제적으로도 위상을 가지게 된(영어 실력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현재 젊은 세대가, 이전의 식민지 시기 기억을 가진 세대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관점을 담고 있다. 박민재, 박영재, 나옥분이 이루는 유사 가족 관계도 그런 틀로 생각해볼 면이 있다. 어쩌면 가부장적 국가의 모습은 더 나이 많고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젊고 유능하면서 나옥분에게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나옥분을 돕는 박민재의 얼굴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

이 부분은 공부가 부족하여 아직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이런 관점에서 이야기를 더 풀어간다면 흥미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비슷한 관점으로 읽을 수 있는 다른 영화들과 비교 대조를 해 가며. 그러나 어쨌건, 〈아이 캔 스피크〉에서 나옥분은 스스로 말할 수 있고 과거 자기를 침묵하게 했던 것과 싸울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우리가 더 나아진 구석일 것이다.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7.11.04 08:48

축사 유감

어제 《세상을 바꾼 청소년》 책 출간기념회가 있었다. 축사를 하는 역할로 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 등도 축사를 하였다. 축사를 하는 사람이 6명인가 7명인가 여튼 많아서 나는 나름 신경써서 짧게 말을 줄였는데 조희연 이수호 두 분은 말을 참 길게 하시더라.

말이 긴 것보다도 조희연 이수호 두 분의 축사를 들으면서 내용이 꽤 마음이 거슬렸다. 일단 축사 내내 "여러분"이라는 말이 참 많이 나왔다. 특히 여러분이 ~해야 한다, 여러분이 ~하기 바란다, 여러분이 18세 선거권을 위해 나서야 한다... 그런 말이 적지 않았다. 축하를 하러 온 건지 훈계나 당부를 하러 온 건지 잘 모르겠다.

만약 내가 민교협이나 전교조가 뭐를 해 내서 축하하는 자리에 초대받아 축사를 한다고 상상해 보자. (나를 부를 리는 거의 없겠지만) 내가 그 자리에서 "교수 여러분이 ~를 해야 한다" "교사 여러분이 앞으로 ~하기 바란다", "교사 여러분이 앞으로 정치적 기본권을 위해 나서야 한다"라는 내용으로 축사를 채우면 참 어색할 것이다. 사회적 관례나 인삿말에도 많은 차별과 습관이 작용한다.

무엇보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자신은 1987년의 경험이 자기의 자부심이고 여러분도 2016년 촛불에 참여한 걸 평생의 자부심으로 가지라고 말했는데, 듣자마자 속으로 '그건 자칫하면 꼰대 되는 길이지;'라고 생각했다. 물론 역사적 승리의 경험은 우리에게 자신감이나 자부심으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집합적인 인민의 힘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부심이지, 자기 삶에 대한 자부심이 되어선 안 된다. 사람은 자기의 바로 지금 현재의 모습과 마주하고 그 모습에서 자부심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하지, 과거의 내가 이런 일에도 참여했다는 것을 안고 살면 반성의 동기도 약해지고 현재에 충실하기도 어렵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말이 집합적인 걸 말한 건지 개인적인 걸 말한 건지는 불분명했지만 87년이 자신의 자부심이라고 말했던 것 같아서 아무래도 개인적인 게 더 강하지 않나 싶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과 동년배인 사람들 다수가 1987년에 대해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두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런 사고방식을 전수하고 다닌다 상상하면 더더욱.

조희연이나 이수호 두 분에 대한 어떠한 억하심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 10~15분 남짓하는 축사를 들으면서 든 여러 생각들 중 일부이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에게 축사 외적으로 특별히 불만스러운 게 있다면, 18세 선거권만 자꾸 이야기하지 말고 교육감 권한으로 개입할 수 있는, 학교 안에서의 정치적 권리 보장을 위한 포부나 다짐이나 내실 있는 계획부터 내놓으시길 바란다는 것 정도다.)



Posted by 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