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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네가 사는 곳

네가 사는 곳 그날밤 택시 앞유리에 번지는 "빈차"가 반갑고도 아쉬운 별똥이었어 나는 미처 소원을 빌지는 못했지 순식간에 네가 붙들고 가버린 저- 꽁무니만 쳐다보다가 나는 문득 눈 속을 달려보지 네가 사는 별은 어딜까 안경에 눈송이가 달라붙어 눈은 그칠 듯 그칠 듯 그치지 않고 나는 횡단보도에서 넘어져 신호등은 깜빡거리지 그때 나는 주저앉아서 달리기를 멈추고 눈을 감고서야 겨우 아는 거야 너는 내 눈꺼풀 뒤에 산다는 걸

어설픈꿈 2008.02.02

백무산 - 인간의 시간 (1996)

인간의 시간 (1996) 백무산 마른 풀잎 위로 부드러운 빗방울이 깃털처럼 내린다 구름은 산자락까지 내려와 게릴라처럼 주의 깊다 비에 씻긴 바람도 저희들끼리 아주 주의 깊게 착지를 찾는다 개울은 작은 풀씨 하나라도 깨울까봐 뒤꿈치를 들고 걷는다 시간은 자신의 거처를 몰라 머뭇거린다 나무들도 옷을 벗는다 지난 가을에 외투만 벗은 나무는 마지막 단추까지 푼다 소리없이 안으로 옷을 벗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대지에 무슨 음모가 시작되는가 새들도 숨을 죽인다 언제 명령이 떨어지는가 누가 발진을 지시하는가 시간도 순응하는 시간 일사불란한 지휘계통도 없이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순응하는 지휘계통 흙 알갱이 하나하나 수소처럼 가볍다 새들도 숨을 죽인다 대지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을 거역한다 소모와 죽음의 행로를 걸어온..

흘러들어온꿈 2008.01.31

시 - 아침, 욕실, 거울 앞

아침, 욕실, 거울 앞 저녁을 닮은 노란 조명 속 눈 밑부터 번져나는 마른 밤과 에누리 없이 얼굴을 맞대게 된다 검은 무기질 눈동자 위에 방울진 불빛이 미끄러지고 샤워기의 단조로운 흥얼거림에 아래로 아래로 가랁는 머리칼 그러나 아무리 수도꼭지가 더운 숨결을 토하며 곡조를 뽑아도 무기질 눈동자는 젖질 않는다 몸 가운데선 거뭇한 죽음이 흔들거린다 젖을 줄 모르는 건 죽은 고깃덩이일 뿐이다 드러난 갈빗대처럼 앙상한 눈동자가 물 묻는 것은 고작해야 물든 몸뚱아리 그 거죽뿐인 고깃덩이 씻는 풍경을 건조하게 더듬다가 묻는다, 이 고긴 몇 등급이며 누가 사서 먹을 게냐 어머니는 새벽부터 이웃집을 청소하러 가셨다 가버리셨다 렌지로 몇 분을 데워도 속은 데워지질 않는 두부를 씹는다 나도, 어머니도, 다 지울 수 없는 마..

어설픈꿈 2008.01.31

시 - 일상적인 면도

일상적인 면도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가위로 수염을 깎지 STAINLESS STEAL 녹스는 일 없는 서늘한 현실이 벌써 곳곳이 녹슨 내 낯가죽에 와닿지 STAINLESS STEAL은 무정하게도 내 녹을, 나를 깎아가지 눈을 뜨고서, 발가벗은 몸을 씻다보면 코 밑에 부어오른 상처자리 날붙이에 깎이다가 모르는 사이 난 생채기를 모르는 사이 파고 들어온 너 같은 균에 난 그렇게 부어오르지 나처럼 부어올랐다 가라앉았다 여기저기서 또 부풀어오르지 그 생채기들

어설픈꿈 2008.01.30

시 - 깡통을 굴려봐

깡통을 굴려봐 깡통을 굴려봐 붉은색 깡통을 콜라깡통은 말고 너를 안 닮았잖아 깡통소리를 들어봐 깡통이랑 시멘트가 살 부비는 소리 멀어질 듯 멀어질 듯 가까운 소리 무표정한 구세군 종소리는 말고 너를 안 닮았잖아 그래, 엉뚱하게 울리는 자명종처럼 깡통을 굴려봐 저기 오는 검은바퀴를 가진 큰 차가 곧 깡통을 납작하게 밟을 거야 너도 납작해질 거야 깡통을 닮았잖아 시멘트는 너무 울퉁불퉁하고, 오 차는 너무 무겁고 빨라 너는 울퉁불퉁하게 납작해질 거야 그래도 너는 깡통을 굴릴 거야 차 바퀴를 손톱으로 할퀼 때까지 가까워질 듯 가까워질 듯 멀리에서 외면하는 그때까지 굴러가고 살을 부비고 납작해지고 울지 않을 거야

어설픈꿈 2008.01.30

시 - 버스의 나비

버스의 나비 버스는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사람은 노약자석에 앉아서 졸음을 가만히 곱씹는다 어느 정류장에선가 탑승한 나비 한 마리 다리지 않은 날개가 휘청거린다 도중에 내리려다가 달려내려가는 버스에 휘청이는 바람을 못 이기고 다시 돌아온다 내리지 못하는 나비는 타이밍을 노린다 새천년을 맞아 새로 페인트칠한 버스에서 내리막길이 끝나기 전에 내릴 타이밍 다음 정류장의 이름을 나비는 알지 못했다 사람은 졸음을 곱씹으며 삼키지 않는다 다리지 않은 치마가 팔랑거린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건 추억 같은 것이 아니고 내리막길을 굴러내려가는 시선들 졸음을 삼킨 시선들 다음 정류장의 이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비가 내릴 곳도 알지 못했다

어설픈꿈 2008.01.26

시 - 꿈의 호흡

꿈의 호흡 매일밤 눈꺼풀 뒤쪽에는 잠든 꿈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잠 못 드는 나에겐 없는 내일이 꿈의 콧날 뒤편에서 부풀어 간다 걸림없이 반복되는 숨소리 속에 잠든 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들이쉬고 내쉬고 숨을 맞춘다 꿈은 3초동안 들이쉬고 꿈은 2초동안 내쉬고 나는 하얀 햇살을 3초동안 들이쉬고 나는 눈물증기를 2초동안 내쉬고 반복되는 숨소릴 훔쳐보려다 호흡이 미끄러진다 걸림돌처럼 앉아있는 딱지들에 넘어진 내 호흡을 추스릴 수 없어서 걸렸던 돌을 뱉어내며 눈을 뜨면 시계는 어제와 오늘 사이에 ------------------------------- & 얼핏 낮에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네 얼굴이 어른거렸다. &&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어떠한 억압 - 말하자면 상처를 드..

어설픈꿈 2008.01.26

시 - 어느날 국회 앞에서

어느날 국회 앞에서 여의도공원에서 국회로 미끄러지는 잿빛 길 구호조차 미끄러지는 땡땡 얼은 날 잿빛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던 추운 날 미끄러짐 없이 걸리는 건 오직 너의 속삭임 구름은 추락하지 않아 비나 눈이 될 뿐이지 꿈은 추락하지 않고 뭐가 될까 시간은 섬세하게 우리를 손질하고 마모되는 감촉에도 손길은 무심하고 그래도 우리는 비명을 지르지 미끄러짐 없는 비명을 지르려 하지 국회 잔디밭은 푹신한 팬케잌 껍질 같지만 비벼보면 까끌하겠지 담벼락처럼 달콤한 건 검은 벽의 막막함 씁쓸한 건 살자는 속삭임 저 멀리 구름이 보이던 날 꿈은 추락하지 않고 뭐가 될까 -------------------------------------------------- 이 뒤를 쓸 수가 없어. 뭐가 될지 모르겠어. 번개가 될까?..

어설픈꿈 2008.01.19

시 - 닫히는문

닫히는문 그대 방 앞에서 닫히는문을 만났다 문은 매순간 쾅하는 소릴 내며 눈앞에서 닫혔고 그때마다 속부터 몸살이 번져버려 꿈틀대는 내장은 남에겐 안 들리는 금가는 소리를 까진 무르팍 딱지새로 흐르는 피처럼 흘렸다 닫히는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어 문틈으로라도 그대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다시 문이 닫힐 때 내가 얼른 오른손을 내밀어 보아도 닫히는문은 그럴 틈도 주는 일 없이 내 마음에 금간 딱지만 더해주었다 나는 한 번도 그대의 방 안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대 방의 닫히는문은 나무로 된 낡은 파란 문은 항상 쾅하는 소리를 내며 닫혔기에 곧 부서지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닫히는문은 나를 다치게 하는데 한편으론 또 누굴 다치게 하는지 그대 방 앞에서 닫히는문을 만났다 나는 계속 닫히는문 앞에서 바랜 ..

어설픈꿈 2008.01.13

시 - 중얼대는 낙서

중얼대는 낙서 벽에는 얼룩뿐이었다 얼룩들은 여기저기 꼬인 채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는내꺼니께건들지말도록-**###♡###나축어->나추워기질특이성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세크레틴스테로이드글로코오스키네틴바르다 마나벤젠탄소화합물한국독립군광주1998미적분sinx'=cosx논리적사고호박개키농문구녕sexy뷩신약후자꽃우비연태싫어十世期딴나라당열대우 림당民主主義여만세개새끼나줄인간제존재의문제현대적주체의비판적고찰SUGAR 낙엽이 벽 위에서 숨결처럼 반짝이는 문자처럼 부스러져도 반응없는 대답없는 독백 낮고도 조용하게 떨림없이 반복되는 중얼댐 일요일 저녁 뉴스 앵커만큼 권태로운 중얼댐 전투기 소리처럼 공허하게 울리는 중얼댐 라디오 주파수 대역 밖의 침묵 같은 중얼댐 대답이란 눈빛이 하는 것이라 나 또한 거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 서..

어설픈꿈 2008.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