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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작은 역을 지나친 후

작은 역을 지나친 후 밤, 무궁화호 3호차 어둠에 사로잡힌 눈길 너머로 밤 위로 어렴풋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작은 역 하나 내가 좇던 그대는 바로 그런 역 무궁화호도 서지 않는 그런 역 플랫폼에 앉아 있을 것만 같네 나의 숨결은 점점 가라앉아가는 어느 역 대기의자에 묶이네 나는 숨결을 찾으러 의자 아래 거미집 곁으로 가려네 장화 발자국 위에 핀 꽃잎 곁으로 꿈틀대는 지렁이 곁으로 그대를 찾으러 가려네

어설픈꿈 2008.01.13

시 - 실마리

실마리 자그만 책상 위에 시간이 어지럽고 흩어진 연서 위엔 까실한 당신 숨결 거리에 별들이 불안한 섬들마냥 눈물도 없이 겨우 눈 뜨고 있을 때 우리도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잠못이루어 내일이 없을 때 얼굴을 가리고 쓴 보라빛 편지들 천장을 서성이던 꿈으로 목에서 뛰던 숨결로 쓴 흔들리는 연서들 교과서를 찢어 쓴 연서들 경전을 찢어 쓴 연서들 연필심이 부러지면 또 깎아서 쓰면 된다던 당신 그리고 당신 발등을 밟던 낙엽들 낙엽이 쌓이면 쓸면서 걸어가면 된다던 우리들 어지러운 시간 속에서 부서진 밤 속에서도 그 고백을 들여다보면 그날 밤 당신이 보일까 지상의 별들이 불안하게 술렁일 때면 커튼을 치면 된다던 그도 안 되면 나가서 별을 확 꺼버리면 된다던 당신의 보라무늬 연서 위엔 희미한 어른거림

어설픈꿈 2008.01.13

시 - 새해

새해 들뜬 사람들의 웃음띤 어깨 위로 차갑고 하얀 눈송이가 앉고 날리는 눈 속으로 홀로 나온 난 눈쌓인 화려한 별의 거릴 걸었지 그렇게, 떨어져 나온 채 억지스런 새해인사들을 스치며 그렇게, 나는 홀로인 채 사람 사일 걸으며 노래했지 작년에 즐겨불리던 노래 귓가에 들리는데 해는 벌써 바뀌어 있고 다시 돌이키려 하여도 노랫소린 지나가 하얀 눈만 힘겹게 내릴 뿐 흙발에, 매연에, 네온사인에, 새해인사에, 밟혀가며 추억처럼 힘겹게 내릴 뿐 아마도 2학년 1학기 초에 부기팝 여는 노래인 소나기 한국어판을 가지고서 끄적거려본 시 같다. 이걸 쓰고나서 시에서 음보감이나 운율, 글자수를 맞추려면 노래 하나를 가져와서 글자수만 맞춰나가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나중에 약간 본래의 격을 파괴하며 새로운 내용을 넣거..

어설픈꿈 2008.01.13

시 - 접시

접시 나는 접시 하나를 떨어뜨렸다 어머니가 가족의 땀으로 사주신 손자국난 접시 꽃이 몇 송이 피어있는 퍽 푸른빛 접시 선물 받은 생일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접시 하나를 떨어뜨려 왔다 깨진 조각은 멀리도 멀리도 튀어나갔고 그 조각들을 집어주던 친절한 비둘기들은 날개에 부리에 생채기가 나곤 했다 그렇게 주섬주섬 접시를 맞춰보면 항시 어딘가 이가 빠졌거나 무늬가 이지러져 있곤 했다 언제부턴가 접시는 꿈틀거린다 뜨겁게 꿈틀거린다 나는 뜨겁게 꿈틀대는 접시를 들고 살금살금 가다가 또 접시 하나를 떨어뜨린다

어설픈꿈 2008.01.13

시 - 아이가 울고 있다구

아이가 울고 있다구 벽 밖에서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책 위로는 불개미 몇 마리가 기어가고 나는 지금도 인형이다 인형을 내버리려 장롱에 기어든다 장롱 속은 까맣게 조용하고 나무 냄새와 옷 냄새가 조용한데 조그맣고 빨간 더듬이로 웃고 있는 불개미들이 손등을 기어간다 나는 지금은 창고 속의 인형이다 밖에서는 발정 난 고양이새끼 몇 마리의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가득하다 방은 조용하고 장롱 안도 조용하다 얼룩진 밤 나는 문을 열고 옆집으로, 또 그 옆집으로, 얼룩 너머로 달려가야 함을

어설픈꿈 2008.01.13

시 - 양치질

양치질 하루에 두세 번씩 반복되는 습관적인 다소 경박한 의식 왜 거품을 물고 속을 감추려는지 문득 거울에 물어보아도 사각사각 권태롭게 표백된 소리 이에 생긴 검은 흠을 감출 수 있단 듯 레몬향 섞인 흰 것을 잔뜩 묻혀 긁어대다가 붉은 기가 섞인 거품을 삼킨 추억 같은 꿈 어디다 처박아 두었는지 모를 일기장 '오늘은 양치질을 하다 잇몸에서 피가 났다. 치과에라도 가봐야 하나?' 이제는 입을 꾹 다물고 거울도 보지 않고 그저 습관적으로 아무 말도 않는 것 코 뒤로부터 닿아오는 매운 내에 눈살을 찌푸리는 것 나는 내가 왜 이를 닦는지 잊었고 그 사이에 이빨 뒤편에선 벌레구멍이 조금씩 커지고 있고

어설픈꿈 2008.01.13

시 - 발자국

발자국 새벽 가까운 데 서있다 긴 그림자 나무 아래 붉은 땅 위 비치는 발자국 꼭 내 발만 한 발자국 누구의 것일까, 되짚는 새에 발자국은 구두가 되고 손바닥이 얼굴이 되고 목소리가 되고 체온이 되고 어느새 내 발보다 커지고 무릎 꿇고 쪼그리고 손끝으로 핏줄 같은 결을 하나하나 읽어본다 눈을 깜빡이며 읽어본다 검버섯 핀 단풍잎처럼 하얀 곰팡이가 슬어 있는 길게 뻗은 햇살에 곪은 상처처럼 젖어 오는 발자국 얼마 안 있어 데워진 태양이 잠 깬 얼굴로 남중할 테지만 얼마 안 있어 연둣빛 잔디가 붉은 땅을 덮으며 자라올 테지만 구름에 실려온 찬 숨소리 발개진 눈으로 손으로 비치는 발자국을 만지작거리고 그림자가 짧아지도록 잔디에 가리도록 만지작거리고 바싹 말라 가난해진 단풍나무 구름에 가려 자라지 않는데 녹슬고 ..

어설픈꿈 2008.01.13

시 - 우산

우산 빗방울이 머리를 내밀으라며 지붕을 두드리는 날이면 젊은애는 침침한 방 서성이며 천원짜리 분홍빛 우산을 천장 아래 펴들고 돌려본다 액세서리 하나도 달지 않고서 눈 밑도 마르도록 바람 불던 날들에 세 번쯤은 뒤집혔던 우산이지만 공장에서 굴러 나왔을 일천원짜리 분홍빛 우산 하도 뒤집혀서 자꾸 비틀어지는 은빛 살 네 치마폭 속에 손가락을 넣고 네 뼈를 고르고 있을 때면 「천원으로 돌아가는 국가경제」 라는 집 앞 천원샵의 반짝이며 젖어드는 간판 너를 산 곳의 싸구려 간판 그런 것을 떠올리며 웃곤 해 오늘 비가 머리 내라고 부르는 날 젊은애는 머리 내지 못하고 삐걱대는 우산은 방 안에서만 돌아가고 있다

어설픈꿈 2008.01.13

시 - 눈 혹은 장례식

눈 혹은 장례식 「우성수산」에선 하늘에 내동댕쳐진 모습 그대로 입술이 꿰어 매달려 있는 것들 그 뒤론 들쭉날쭉 얼음에 묻힌 바다내음 피내음 찬 살갗들 다들 쌀 한 줌 대신 소금 한 줌 물고 눈도 감지 않은 채 때낀 스티로폼 관에서 자고 있다 「우성수산」 앞 바다 닮아 검푸른 등 위로 어디서 염하는 소리 내려앉아 하얀 관 하얀 얼음 하얀 소금, 하얀 염 소리 깜빡이지 않는 눈 위로 흰 꽃잎 내려앉아 흐르는데 「우성수산」 안엔 갈고리바늘이 낙태시킨 애들을 파는 사람들 애들을 애 밴 여자에게 먹인다며 흰 꽃잎 날리는 장례식 저녁 속을 한 손에 봉지 흔들며 씩씩하게 걸어가는 사람들 죽지 않은 사람들 「우성수산」 앞에선 숨결만 하얗게 검은 하늘로 올라가서 어디선가 소리 없이 하아얗게 염하는 꽃잎이 된다고

어설픈꿈 2008.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