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14.11.15 청소년운동에 영감을 줬던 페미니즘 입문서
  2. 2012.04.20 소위 여성부 관련 루머/비난들에 대해 일일이 반박? 정리? (32)
  3. 2010.10.13 [페미니즘인(in)걸] ‘여성+청소년=여성청소년’이란 공식을 넘어서자
  4. 2010.09.08 [페미니즘인(in)걸?] "부모님 모셔와"가 무섭지 않은 세상을 만들려면?
  5. 2010.08.04 [인권오름] [페미니즘인(in)걸] 납량특집 -공포영화
  6. 2010.07.30 [인권오름] 생식기 차이가 가져온 엄청난 결과 / 『아주 작은 차이』, 알리스 슈바이처 저, 김재희 역, 이프, 2001
  7. 2010.07.07 [페미니즘 인(in) 걸?] 잔혹한 소년만화의 테제 (11)
  8. 2010.06.28 "패륜적 기본소득" 격월간 사람 용으로 수정한 원고 (2)
  9. 2010.02.13 [페미니즘인(in)걸?] 왜 소수자들은, 여성/청소년들은, 오지랖이 넓은가
  10. 2010.02.13 우리 사회가 아직 남자들에게 수컷 역할을 맡겨야 할 만큼 원시적이라는 사실에 고마워하도록 해라! (1)
  11. 2009.10.16 [인권오름] 페미니즘인(in)걸 : 여학생은 성적이 “너무” 우수하다. 도대체 어쩌라고~
  12. 2009.08.22 반차별 웹진 차차차 2호 / 반차별용어사전 "변태" 수록~ (3)
  13. 2009.07.18 2009 밤길되찾기시위(달빛시위)에 청소년들 참가- (3)
  14. 2009.06.25 [인권오름 - 페미니즘인(in)걸] ‘여성’의 이름으로 체벌을 거부한다는 것(2)
  15. 2009.04.07 2009 관악 페미니즘 문화제 후기 -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16. 2009.03.30 페미니즘 박람회 그림 (5)
  17. 2009.02.11 민주노총은 성폭력 하면 안되나여? (낚시성 제목-_-) (4)
  18. 2008.08.26 여성이 남성의 도구인가? - 어느 한나라당 까는 글을 읽고 (1)
  19. 2008.08.19 섹슈얼리티 쟁점 포럼 - 청소녀/년의 자기결정권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발제 원고)
  20. 2008.06.18 페미니즘 미학과 예술 기말 리포트 (1)
흘러들어온꿈2014.11.15 23:43
페미니스트라는 낙인페미니스트라는 낙인 - 10점
조주은 지음/민연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저는 이 책을 2007년에, 나온 직후에 집어들어서 읽게 됐었습니다. 그때도 꽤 깊은 인상을 받았던 걸로 아는데... 제가 갖고 있는 페미니즘에 관련된 관점이나 센스는 이 책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을 받았더군요. ㅎㅎ;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관점도 가지게 됐지만, 이 책에서는 아동이나 청소년에 관련된 내용, 사회운동-노동운동 등에 관한 내용들도 많이 다루기 때문에 그런 것들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또한,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으로 가족 문제를 보고 교육 문제를 보고 청소년인권 문제를 유비추론해보자는 생각도 이 책 덕분에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조주은씨가 청소년운동이랑 굉장히 잘 맞을 거 같단 생각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들은 자녀에게 버릇이라는 것을 가르칠 때가 있다. 아이가 말문이 트여 제법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할 무렵 부모들이 먼저 가르치는 것은 존댓말이다. ˝~하셨어요?˝라는 높임말부터 ˝어른이 무슨 말을 하면 `네`하고 잘 듣는 거야˝처럼 순종적인 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더군다나 한쪽은 반말을 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존댓말을 한다면, 그 관계는 권위로 움직이는 권력관계가 된다. … 우리가 흔히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고 하는 예의 바른 어린이란 곧 어른들의 권위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아이를 의미한다. 가족은 연령에 의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상대적으로 나이가 적은 아동, 청소년(녀)들은 가족 안에서 보호와 숨막히는 통제를 동시에 경험하기도 한다. 혹시 우리는 저항과 비판 속에서 건강하고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하면서도 가정으로 돌아가면 자기 아이를 어른 말 잘 듣는 아이로 키우려는 욕구는 없는가? 또는 말 잘 듣는 자녀이고자 하지는 않는가?˝(89~90쪽)

˝전시 현장에 있는 어린이는 전쟁 반대의 다양한 이유 중 하나가 되지만, 그 논리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또 다른 착취를 빚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아동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아동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동기의 발명으로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분리되었지만, 아동이 어른의 세계에 통합된다면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지 않을까?˝(124쪽)

조주은씨는 아동기 문제를 모성착취, 모성신화와 연관지어서 많이 풀어냅니다. 그리고 가족에 관련해서는 `정상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또, 가족 안에서의 권위나 권력관계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죠. 경험이나 사례에 근거하면서도 이론적인 고민, 일반화된 관점을 놓치지 않기 때문에 잘 와닿습니다.
가족 안에서의 권력에 대해서 어른-아동 문제도 이야기하지만, 역시 페미니즘이니까 남성-여성 문제도 많이 이야길 해요. `사랑`이라는 환상, 성폭력, 불평등한 가사노동이나 양육... 그리고 가족 안에서도 그렇게 폭력이 존재하고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생각을 보여주는데, 저도 그걸 보고 가족 안에서 자식과 부모 사이에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단 아이디어를 얻었던 거 같아요.

˝모순되게도, 단일한 계급이라고 치부되는 한 가족 안에서도 취향은 위계화되어 있다. 남성들이 자신만의 취미생활을 동호회 활동 등을 통하여 우아하게 지속하는 반면, 여성들은 결혼 전에 알았던 음악이 마지막인 경우가 많다. … 계급분류적 문화 행위의 상징성이 궁극적으로 계급구조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는 부르디외의 지적은 의미심장하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계급이 어떻게 차별적으로 재생산되는지는 분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을 남긴다.˝(229쪽)


조주은씨 본인의 논문 주제가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 가정`에 관련된 거였는데, 그래서 그런가 조주은씨는 가족의 문제도 잘 분석해내지만, 노동운동 내부의 문제도 적절하게 지적을 하더라고요. 칼럼을 모은 것 같은 책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여러 이슈들과도 관련지어서 쓴 글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도 읽어볼 만합니다.


다른 활동가 분들이랑 꼭 같이 읽고 싶은 책입니다!


물론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다뤄온 주제인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해서도 좋은 글들이 많습니다.

딱 펼쳐보니까 ˝프리섹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여성 활동가들은 남성들에게 창녀로 이해되고 프리섹스주의자인 남성 활동가들은 섹스 파트너를 선택할 권리를 향유한다.˝(195쪽) 같은 통렬한 서술이 눈에 들어오네요.


다만 다양한 주제들을 간결하면서도 핵심적 문제를 짚으며 다루긴 하는데, 하나하나의 글들이 좀 짧은 편이라서 아쉽기도 합니다. 더 길게 이야기를 해보면 재밌겠다 싶은 게 몇 개 있었습니다.



아, 사소한 단점 하나. 책 편집상 쪽수 표기가 책의 제본 안쪽에 돼있는데요. 그거 때문에 쪽수 찾기가 힘드네요;;; 왜 이렇게 했지...

http://gonghyun.tistory.com2014-11-15T14:43:23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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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지나가는꿈2012.04.20 12:42

활동하는 단체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길래 하나하나 다 반박하고 사실과 다른 건 다르다고 지적질하는 댓글을 달았는데,

단 김에 블로그에 올려봄


수정 : 소스를 달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소스를 링크했습니다.
추신 : http://cafe.naver.com/asunaro/40673 이 글에 대해 하나하나 반박하는 식으로 댓글 단 걸 가져온 거고, 넘버링 등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1. 죠리퐁 : 죠리퐁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이 이야긴 1990년대인가에 YWCA 관련해서 처음 나왔던 소문인 걸로 아는데요. 여성부가 그런 입장을 내거나 정책을 쓴 적이 없습니다. 이런 소문을 만들어낸 작자들이야말로 과자를 보고 그런 상상을 해서 여성단체/여성부 공격하려고 써먹는다는 점에서 저질인 것 같습니다.



2. 군인은 "집 지키는 개" 발언 : 해당 발언은 김신명숙씨가 TV토론에서 했다고 알려진 말인데, 김신명숙씨는 여성운동가이긴 하지만 여성부에 몸담은 적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발언도 허위로 만들어진 것으로, 김신명숙씨는 당시 TV토론에서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김신명숙 망언어록’ 그 실체는? 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164041



3. 게임업계로부터 삥 뜯음 : 여성가족부가 게임업계로부터 게임과몰입예방 기금을 모으려고 한 건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여성부'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분야 업무 쪽의 문제입니다. 이 업무는 과거에는 보건복지가족부 등이 담당했던 일이고, 가족-청소년 부서가 대체로 마인드가 그렇게 생겼습니다. 우울한 현실이죠. 그리고 지금은 교육과학기술부도 추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국 정부의 꼰대들이 X 같은 거지 여성부라는 부서 특성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게임과몰입예방 기금을 정부가 만들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을 수 있어도, 그런 기금이나 활동이 필요할 순 있습니다.


`게임중독법' 법제화?…전방위 규제 우려 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473488&g_menu=020591

이런 자료를 보시면 보건복지가족부가 당시 게임규제, 청소년규제 관련 담당 주무 부처인 걸 알 수 있습니다.


보건복지가족부 - 여성부 에서  ---> 보건복지부 - 여성가족부로 가족 업무 이관에 관해

여성가족부 홈페이지 http://www.mogef.go.kr/korea/view/intro/intro01_03.jsp


"여성특별위원회는 조직과 기능, 인력과 예산 등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어 급격히 변화하는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 여성의 시대를 대비하기에는 미흡하여 정부 각 부처에 분산된 여성관련업무를 일괄해서 관리ㆍ집행할 여성가족부를 신설하였습니다.

(....)

유연하고 창의적으로 일하는 정부를 구축하기 위하여 정부기능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하는 내용으로 정부조직법을 개정(2008. 2. 29)하여 여성가족부가 수행했던 가족 및 보육정책 기능은 보건복지가족부로 이관되었고 여성가족부는 여성정책의 조정ㆍ종합, 여성의 권익증진 등 지위향상 기능을 수행 할 수 있도록 개편하였습니다. 한편, 가족 해체 및 다문화 가족 등 현안 사항에 적극 대응하기 위하여 보건복지가족부의 청소년 및 다문화 가족을 포함한 가족 기능을 여성가족부로 이관하는 내용으로 정부조직법이 개정(2010.1.18)되고, 이에 따라 "여성가족부"는 "여성가족부로 개편되고, 여성ㆍ종합 및 여성의 권익증진 등 지위향상 뿐만 아니라 가족정책, 건강가정사업을 위한 아동 업무 및 청소년의 육성·복지 및 보호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 여성가족부 현재 조직도를 보시면 "청소년가족정책실"은 여성정책과 별도로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청소년 보호 업무, 심의 등의 업무는, 이건 과거에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있다가, "국무총리실 산하 청소년위원회" -> "국가청소년위원회"로 바뀝니다. 그러다가 2008년에 이명박 정부 들어 조직 개편으로 "보건복지가족부 산하 아동청소년정책실"로 흡수됩니다. 그 아동청소년정책실이 여성가족부로 다시 이관되면서 "청소년정책관" 쪽이 됩니다.

사실 청소년 정책 업무는 여러 가지로 복잡합니다. 과거에는 문화관광부-여성가족부-국가청소년위원회 3각 구도로 정리가 한 번 되었다가, 정권 바뀌면서 여성부랑 국가청소년위원회를 통합한다고 했다가... 결국은 여성부-보건복지가족부로 정리하면서 보건복지가족부 밑으로 청소년을 통합시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여성가족부-보건복지부로 개편하면서 가족/청소년 업무는 결국 여성가족부 소관이 된 거죠.

참고) 여성부 청소년위 통합 추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384834



4. 목욕탕 수건 안 주는 게 차별 : 이 문제는 여성부가 아니라 2000년즘에 대통령 직속 여성특위에서 말이 나왔던 문제로 압니다. 차별로 결정하고 시정 권고를 했는데, 무조건 무료 지급하라는 식은 아니었고 유료 지급을 고지하라는 식으로 권고했습니다.

근데 목욕탕 수건 차별은 저도 처음 알았을 때 문제 있을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요? 남탕에만 수건을 쌓아놓고 여자들한테는 수건을 유료로 하는 게 참;; 여성들의 민원을 받아서 문제제기하는 차원에서는 그리 나쁜 활동이었던 것 같진 않네요.


[여성특위] "여탕서만 유료타월은 성차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030612



5. 회식에서 성매매 안 하면 회식비 지급 : 성매매는 실제로 남성들이 여성들의 성 서비스를 구매하는 형태가 비율로 80~90% 이상입니다. 또한 회식 이후에 술에 취한 중장년 남성들이 많이 가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런 타겟팅을 하고 정책을 내놓을 수도 있겠죠.
해당 정책의 실효성이나 현행 성매매 금지 정책에 대한 비판해볼 순 있겠지만, "남자를 전부 다 짐승으로 보는 뜻"이란 건 어떤 해석인지 잘 모르겠네요. 성구매를 하는 게 "짐승"이란 뜻이라면, 대한민국 남성들의 1/2 이상은 "짐승"이 맞을 겁니다 아마도.
저는 어차피 인간은 짐승이라는 쪽이고, "성구매"="짐승"이라고 생각지 않지만.


여성 존중하는 남성은 성구매 안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7&aid=0000000143

한국 남성 10명 중 4명은 지난해 성매매 했다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30900.html



이 위까진 원문에서 "남자를 다 짐승으로 보는 짓"이란 식의 코멘트가 달려 있어서 거기에 대해 쓴 거구요. 수정 보완하면서 좀 더 말을 보태봅니다.

저는 일단 대한민국 사회 아님 최소한 대한민국 주류 남성 커뮤니티 안에서 "성구매"가 심각한 범죄로 얼마나 받아들여지고 있기나 한지 의심스럽기 때문에 이 정책에 대해 반감을 표하는 남성들이 표리부동해 보이긴 합니다. 또 회식 이후 성매매를 안 하겠다고 하면 상금을 주는 정책이 "남성들을 모두 예비범죄자 취급하는 정책"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감시/정보수집/제약/불이익 등이 있다면 명백히 예비범죄자로 보는 정책이 되겠지만, 그런 요소는 없는 것 같으니까요.

이 정책이 그 자체로 남성을 예비범죄자로 본다는 주장은, 마치 과속 사고가 빈발한 지역에서 과속 예방 캠페인을 하거나 공공장소 금연 캠페인을 하는 게 운전자/흡연자를 예비범죄자(교통법규나 경범죄 위반 등)로 취급하는 짓이라는 논리와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해당 정책이 성매매 근절주의로 보더라도 실효성도 없고 별로 깊이 있는 계획을 가지고 나온 정책도 아니며, 철학적으로도 괴상한 정책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게 꽤 어리석은 삽질이라는 데는 동의합니다. 다만 "여성부 폐지해야 할 이유"라면서 길길이 뛸 정도의 문제인진 잘 모르겠습니다.



6. 테트리스 금지 : 죠리퐁과 마찬가지로 테트리스 이야기도 전혀 근거 없는 거짓말입니다. 여성부에서 그런 정책을 내거나 게임에 태클 건 적이 전혀 없습니다. 죠리퐁과 마찬가지로 테트리스를 보고 그런 상상을 한 건 여성부를 욕하는 쪽이겠죠.



7. 애니메이션 수입 금지 : 애니메이션 수입금지 역시 다소 과장되어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등에 대해 규제를 강화한 건 사실이지만 수입금지는 무슨;; 예로 드신 나루토질풍전은 방영 잘 하고 5월에 방영 예정도 돼있던데요...
그리고 뭣보다 이 역시 '여성부'의 문제가 아니라 청소년보호법과 청소년보호정책의 문제입니다. 원래 청소년정책은 보건복지가족부, 문화관광부가 담당했었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여성가족부로 개편되면서 가족분야 업무를 가져왔고, 그 안에 청소년보호, 연령 심의 업무도 딸려온 겁니다. 한국 정부의 청소년 정책 라인이 교육 쪽이든 문화 쪽이든 다 그렇습니다. 한국 정부와 관료 전반의 청소년보호주의와 꼰대성이 문제지, 여성부라는 부처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지하게 불만이 있으시면 아수나로에서 같이 청소년보호주의 반대 활동을 해요 ^_^



8. 셧다운제 :  7번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여성부의 업무가 아니라 '가족부' 업무 쪽입니다. 셧다운제는 과거에는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보건복지가족부 측이 추진했던 정책입니다. 뭐 여성부 자체도 원래 꼰대꼰대 한 면이 있었겠습니다만은, 다른 부처라고 그리 다르진 않습니다. 진지하게 바꾸고 싶으시면 아수나로에서 같이 청소년보호주의 반대 활동을 해요 ^_^

셧다운제 도입,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7년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1/21/2011112100848.html


9. 가요 심의 : 가요 심의도 위의 7, 8번과 동일합니다. "청소년보호법"과 "청소년보호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의 자의적 검열이 가능하게 해둔 법제와 기구들의 문제입니다. 여성부라는 부처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수나로에서 청소년보호법을 개정하거나 폐지하는 활동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9. 쿨링오프제 : (9번이 2개네요;;) 쿨링오프제는 처음 진지하게 도입하려고 말이 나온 건 교육과학기술부 쪽이고 그 맥락도 심지어 "학교폭력 예방"이었다죠. 참 한국 정부가 총체적으로 암울해 보이죠? 여성부만 욕하고 있을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한국 정부를 폐지시켜야 할 판.
한국 정부와 사회를 모두 바꾸려 하는 아수나로 활동을 해보아요 ^_^

이주호 "게임규제 '쿨링오프제' 도입 검토"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20126_0010300196&cID=10201&pID=10200



10. 소나타3 : 죠리퐁, 테트리스와 함께 역시 전혀 사실이 아닌, 거짓말입니다. 여성부에서 소나타3의 전조등이 남성 성기와 닮았다고 했단 이야기인데, 그랬던 적도 없고 소나타에 관련해서 무슨 조치를 취한 적도 없습니다. 죠리퐁, 테트리스와 마찬가지로 전조등을 보고 그게 남성 성기와 닮았다고 상상하고 그걸 여성부 까는 데 이용하는 저질스러운 사람들이 한 거짓말이죠.



11. 예산낭비 : 예산낭비는 한국의 여러 부처들이 다들 저지르는 짓입니다. 일례로 과거 국가청소년위원회 때나 청소년기구 때도 예산 남는다고 구성원들 데리고 뷔페 가고 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고 직접 참여했던 사람에게 들은 -_-;; 행정부와 입법부의 국가 예산 남용에 대해 감시와 비판, 견제는 꼭 필요하지만 여성부만 콕 집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산 낭비는 부처 폐지를 주장할 논거가 아니라 시민 참여, 예산에 대한 민주적 통제 등을 어떻게 강화할지 정책적 운동적으로 해결할 문제입니다.
예산 남용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면 참여연대나 주민자치 운동 쪽, 또는 소위 진보정당들에서도 그런 일을 하니까 참여해보심이 어떨까요? ^^



12. 고(故) 장자연씨 사건에 침묵 : 고(故) 장자연씨 사건 관련해서, 여성부는 경찰에 공정한 수사를 촉구했고, 관련 법을 개정해서 소위 '성상납' '성접대' 행위도 처벌 가능하게 하고 실태조사를 하게 하는 등 정책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잘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침묵했다는 건 사실과 다른,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사건은 경찰-검찰이 수사하고 대응하는 역할이죠;; 대형 사기사건이 난다고 기획재정부가 수사하지 않고, 대형 해킹 사건이 난다고 정보통신부가 대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견을 표명하고 정책을 만들 순 있지만 개별 사건에 대해서는 경찰-검찰이 대응하는 게 맞습니다.



[보도자료] 정부 최초로 “성접대 실태조사” 길 열어  http://www.mogef.go.kr/korea/view/news/news03_01.jsp?func=view&funcSUB=&currentPageSUB=0&pageSizeSUB=10&key_typeSUB=&keySUB=&search_start_dateSUB=&search_end_dateSUB=&arg_id=0&bid=24&rbid=0&ridx=0&bidSUB=0&cid1=0&cid2=0&cid3=0&cid4=0&cid5=0&cid6=0&cid7=0&arg_cid1=0&arg_cid2=0&arg_class_id=0&currentPage=0&pageSize=10&key_type=&key=&search_start_date=&search_end_date=&class_id=0&bidx=615377&idx=615377



13. 여성부가 우리를 괴롭혀왔다... : 여성부는 우리를 그리 많이 괴롭히지는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청소년들을 오랜 세월 동안 괴롭혀왔지만요...

그리고 한국의 성평등 지수가 바닥을 치는 상황에서 여성부는 필요 없다느니 남성부도 있어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어떻게 그리 함부로들 하시는지 잘 이해가 안 갑니다.
노동부가 노동부 안 같고 자본가 편에서 삽질을 하고 노동자들을 탄압하더라도, 노동부 폐지하잔 말은 안 나오죠?;; 마찬가지로 여성부가 잘못을 한다고 해서 쉽게 여성부를 없애자고 하는 건 좀 이상한 생각 같습니다. 여성주의나 여성운동 자체를 우습게 보거나 혐오하는 시선이 느껴져요.




여기 쓴 이야기들도... 사실 위키백과만 가봐도 태반은 허위 악성 루머라고 다 나와있습니다 -_-;;


막 낚이지 마시고, 검색 한 번이라도 해보는 성실성과 주체성을 가지시면 어떨까요? 자료선별이 귀찮은 분들을 위해 요샌 위키백과처럼 비교적 양질의 자료를 편집해둔 곳도 적지 않습니다...


어이없는 소릴 보시면 "헐 이렇대!" 하고 퍼나르지 마시고, 진짜 그런가? 하고 뉴스나 위키백과 등 검색 한 번이라도 돌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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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10.13 23:10

[페미니즘인(in)걸] ‘여성+청소년=여성청소년’이란 공식을 넘어서자

복합차별에 대해 아시는지?

발새


사실 페인걸은 매번 복합차별을 다루었었다.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울 것은 없지만 한번 제대로 다뤄보자는 취지로, 이번 페인걸 주제, 복합차별이다.

지하철 난투극

60이 넘은 여성과 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둘이서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이 찍힌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배경이 지하철이라 “지하철 난투극”이란 이름이 붙었다. 처음 동영상이 올라왔을 때는 ‘어린 것이 싸가지 없다’던 네티즌들은 나중에 그 여성청소년이 자신이 실수한 것에 대해 거듭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 많은 여성이 폭언을 한 상황을 듣고 여중생 vs 할머니의 싸움에서 여중생 편을 들었다. 싸움의 발발은 그 여성청소년이 신발의 흙을 실수로 옆의 그 사람의 옷에 묻힌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한 가지 조건을 비틀어 보자. 실수로 옷에 흙을 묻힌 사람이 여성 청소년이 아니라 성인 여성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남성 청소년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조건에서도 그 사람은 폭언을 했고 몸싸움이 일어났을까? 영상 속의 사람은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두 가지 약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틀을 각각 들이대면 보이지 않던 이 상황은 여성-청소년이라는 틀 안에서 제대로 보여 진다. 이렇게 두 가지의 복합된 차별은 합집합이라기 보단 교집합의 문제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




청소년 인권 운동과 여성 운동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여성 청소년이 겪는 문제는 여성운동과 청소년 운동이라는 단일한 틀로 잘 담아 지지 않는다. 청소년 인권 운동의 내부에서도 여성 청소년들은 종종 소외된다. 청소년 인권 운동의 중요 의제인 두발이나 체벌 등은 여성청소년보다는 남성 청소년에게 더 압박스러운 것들이다. 반면 여성 청소년에게 예민한 사안인 외박이나 섹스, 임신 등은 어느새 뒤로 밀려난다.

여성운동 속의 여성 청소년들의 존재는 더욱 미미하다. 결혼, 출산, 취업 등 여성 운동에서 주목해온 의제는 주로 성인 여성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번 더 여성청소년들이 복합차별의 대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청소년운동+여성운동=여성청소년운동’이란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여성 청소년들이 겪는 차별은 여성 청소년 고유의 경험이다.

청소년과 여성의 사이에서

너희는 안 꾸며도 예쁜 나이다. 화장할 시간에 공부나 더 하렴.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교사들한테 가장 많이 듣던 말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청소년기가 안 꾸며도 예쁜 나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얼굴에 여드름 나고 한창 살찌는 신체 나인데 말이다. 이런 어조는 여성청소년에게 ‘여성’보다 ‘청소년’이 되라는 말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연애나 성에는 관심을 갖지 말고 외모를 치장하는데도 신경 쓰지 않는 순종적인 청소년 말이다.

하지만 이런 교사들에게서 조금 시선을 돌려보면 어떤가. 소녀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노골적으로 판매하는 대중매체, 외모로 서열을 매기곤 하는 또래 여자 친구들. 여성 청소년들이 마주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청소년으로서의 이미지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 청소년들은 청소년은 물론 ‘외모에 치장하는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존재하기를 요구받는다.



여성 청소년에게 요구되는 이 두 가지 이미지는 몹시 상반되는 것이라 양쪽의 장단을 맞추기가 힘겹다. 아침 등교 시간에는 학생부의 눈을 피해 긴 치마를 입었다가, 학교에 오면 다시 바느질을 해서 짧은 미니스커트를 만들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공부만 하던 모범생들이라도 수학여행을 갈 때면 탱크 탑에 미니스커트를 입는 센스도 있어야 한다. 이 둘 중 한 가지라도 놓치는 순간 공부밖에 모르는 찌질이와 생각 없이 노는 날라리 중 하나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위 사진:여러번 바느질한 교복치마


언어를 잃어버리다

나도 청소년기를 복합차별의 대상인 여성 청소년으로서 보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글에 담고 싶은 나의 차별 경험담이 없었다. 나의 외모는 지금이나 그때나 성별 구분이 잘 안 된다. 그래서인지 학교를 다닐 때 난 철저하게 청‘소년’이었던 것 같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난 차별받을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차별에 대한 이렇다 할 기억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청소년기에 차별당한 일이 없다고 생각 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사건들을 언어로 바꿔 기억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이다. 경험하는 모든 일은 적절한 언어가 있어야 제대로 기억된다. 감정의 결을 표현하는 데도 사랑, 우정, 동경 등 많은 단어가 동원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단어가 없다면 감정을 언어로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나는 청소년기에 내가 당한 차별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만나지 못했고 나의 경험들은 반편이가 되어 여성이나 청소년으로서 겪은 일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큼직하게 기억에 남는 일이라도 있었으면 그 일을 다시 복합차별을 관점에서 재구성해 볼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복합차별이란 새로운 단어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경험을 기억으로 바꾸는 길목에서 옳은 방향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지금도 교실 곳곳에서 일어나는 복합차별은 복합차별이라는 단어를 만나지 못한 체 당사자들의 언어 뒤로 숨어버리고 있다.

약자들은 자신을 설명할 단어를 잃어버린다고 하는데, 이 글을 쓰면서 그 말이 참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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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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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22 호 [기사입력] 2010년 10월 12일 22:4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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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0.09.08 23:15

[페미니즘인(in)걸]"부모님 모셔와"가 무섭지 않은 세상을 만들려면?

청소년과 여성, 가족 제도에 스크래치 내기

공현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뭔가 규정을 어기거나 학교 눈 밖에 나는 짓을 했을 때 가장 두려운 조치는 뭘까? 그야 당연히 체벌이나 욕설, 또는 퇴학 같은 징계들 모두 다 무섭긴 무섭다. 그런데 내 경험상 가장 손써볼 도리가 없으면서도 껄끄러웠던 것은 “집에 전화하는 것”, “부모님(혹은 집안 어른, 보호자) 불러오는 것”이었다. 뭐 이런저런 집안 사정에 따라 다들 조금씩 느끼는 정도 차이야 있겠지만… 부모/보호자 소환은 공식적인 징계도 아니고 직접 두들겨 패는 폭력도 아니라서 학교 입장에서는 부담될 것 없으면서, 학생 입장에서는 참 대응하기도 어렵고 압박스러운 스킬 중 하나다. 실제로 많은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청소년들이 학교의 탄압은 버텨냈으면서도 이 집안의 압박 ― 가정탄압 앞에 굴복해야 했다.

교사들의 이 “부모님 모셔와” 스킬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청소년들의 일상적인 생활 전반을 모두 규율할 권력이 부모/보호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학교에서 교사의 권한을 정당화하는 주된 논리 중에서 “부모/보호자로부터 교육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부모/보호자에게는 청소년들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또 부모/보호자는 자신들의 가치관에 따라 교육하고 지도할 권리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벌을 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청소년들은 먹고 살 만큼 돈을 벌기가 힘들고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부모/보호자들은 청소년들에 대한 경제적인 지배력도 가지고 있다. 부모-자식 관계에서는 대놓고 대들고 반항하기가 껄끄러운 문화적 심리적 장벽들도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학교에서 집에 전화를 하고 부모/보호자를 부르는 일은 청소년들에게 가장 큰 힘을 행사할 수 있고 청소년들 입장에선 저항하기도 힘든 권력자를 불러들이는 조치인 셈이다. 학교보다 더 강력한 권력은 가족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학교에서라면 문제제기를 할 거리가 되는 일들도, 부모/보호자에 의해 집안에서 이루어지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곤 한다. 예컨대 학교 안에서 교육제도를 비판하는 전단지를 나눠줬다고 해서 징계를 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자식이 그런 전단지를 나눠줬다고 어머니가 자식을 혼내거나 용돈을 깎거나 외출금지를 내리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학교가 학교에 반항적인 학생의 생활을 감시하기 위해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하거나 하면 사회적 논란이 일수도 있겠지만, 부모가 자식을 걱정해서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부모/보호자와 자식/청소년의 관계가 권력관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또 ‘부모’라는 엄마와 아빠가 있는 정상가족 중심적인 용어를 벗어나기 위해서 언제부턴가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 몇몇은 “친권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페미니즘 : 가족 비판의 동지

우리 사회에서 가족은 끊임없이 좋은 곳, 회복되어야 할 곳으로 일컬어진다. 학교에서도 음악시간이면 “즐거운 곳에서 나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내 집뿐”이라는 노래를 배우고, 동요도 엄마, 아빠와의 추억이나 화목한 가정을 소재로 한 게 많다. (“우리 아빠 꿈속에 오늘 밤에 나타나 내 얘기 좀 전해줄 수 있겠니. 먹고 싶은 것이나 놀고 싶은 것이나 모두모두 할 수 있게 해줄래.”라고 노래하는 「피노키오」라거나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른들은 몰라요”라고 하는 「어른들은 몰라요」가 가장 투쟁적일 정도?) 영화에서 공익 광고에서 신문에서 법에서 가족은 계속 건강하게 회복되어야 할 곳, 삭막한 사회에서 마지막 안식처 정도로 묘사되곤 한다. 그런 한편 ‘정상 가족’이 아닌 가족에 속한 청소년들은 ‘정상 가족’을 당연한 걸로 전제하고 있고 가족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있는 사회에서 ‘정상 가족’을 가지기를 소망하고는 한다.

하지만 실제로 청소년들의 삶을 살다보면 과연 가족이 그런 것인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청소년들은 가족에서는 정(情) 같은 것 말고도 생활을 하나하나 규율하고 명령하는 권력도 경험할 수 있다. 가족이 안식처라는 것은 노동에 지친 남성 가부장을 위한 판타지는 아닐까? 청소년에게 가족은 등을 누이고 쉬는 곳이 되기도 하지만 공부하라는 압박을 받는 곳, 또 다른 일터, 친권자에게 잘 보이고 생활비를 받는 곳이기도 하다. 가족에서는 친권자들에 의해 사랑과 교육의 이름을 달고 체벌이나 감금 같은 폭력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때로는 소유욕과 의무감이나 권력의 행사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진로나 생활을 놓고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청소년과 친권자 사이의 갈등은, 가족이 순전한 ‘공동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도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가족 시스템이 흔들리고 있어서 생기는 문제들도 있겠지만, ‘정상적인 가족’ 안에서도 충분히 많은 폭력과 권력관계, 사회적인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가족 비판의 영역에서 청소년운동의 ‘선배’인 셈이다. 페미니즘은 결혼이 불평등한 계약이고 가족이 여성을 억압하고 있으며 여성의 희생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족 안에서 여성들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가족 제도에 의해 여성들의 성은 통제받는다. 페미니즘은 그동안 일터와 사회는 남성들의 공간이고 가족은 여성들의 공간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여성들에게 가사노동, 양육노동, 감정노동 등을 부담시킴으로써 가족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밝혀왔다. 여성들에게 가족은 안식처이자 보금자리가 아니라 일종의 일터이다. 그것도 그 일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처럼 가족이 자연스러운 운명공동체가 아니라 그 안에도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과 권력관계들이 얽혀 있는 사회적인 제도라는 관점이 만들어진 것에는 페미니즘의 기여가 컸다. (사회주의-공산주의나 아나키즘 역시 이러한 관점을 만드는 데 일부 기여했다.)

페미니즘에 따르면 아이를 양육하고 교육할 책임을 어머니-여성에게 떠맡기는 걸 정당화하는 ‘모성’ 역시 자연스러운 게 아닌 사회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이러한 비판은 청소년들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이야기이다. 친권자들이 가진 양육의 책임은 동시에 청소년들의 삶을 지배하고 규율할 권력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성’ 이데올로기 등을 비판하는 것은 청소년들이 가족 안에서 겪는 억압과 갈등을 어느 개인의 문제 또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이야기와 여성들의 이야기는 가족이라는 사회 제도에서 가장 많은 부분 맞물려 있다. 체벌이나 가정폭력,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폭력과 억압 등은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여성과 청소년 모두가 집에 있어야 할 존재로 취급받는다는 점,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에 제약이 따르는 존재라는 점도 동일하다. 양육의 책임과 그 권력의 문제에서는 여성-어머니와 청소년의 경우 서로 입장이 다르지만 같이 극복해야 할 얼키고설킨 굴레가 된다. 여성 청소년들이 남성 청소년들에 비해 가족 안에서 더 많은 억압을 받는 현실에서도 페미니즘과 ‘청소녀니즘’(청소년+이즘ism)이 만나는 교차점을 볼 수 있다.

물론 남성 가부장 역시 가족 제도 안에서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고개 숙인 아버지’ 등의 담론을 보면 지금의 가족 제도가 남성 가부장에게 어떠한 부담을 주고 있고 또 가족의 판타지가 이를 어떻게 은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지금의 가족 제도를 바꾸기 위해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하고 거기에 저항할 동기가 있는 주체는 여성-어머니와 청소년이다. 가족을 비판하고 스크래치를 내고 바꾸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페미니즘 운동과 청소년운동은 동지 관계에 있다.


연대가 가능하든 말든

그러나 현실을 보면 여성-어머니와 청소년이 연대해서 가족을 바꿀 수 있을지, 나는 좀 의문스럽다. 이른바 ‘정상 가족’ 속에서 청소년들은 여성-어머니와 많은 충돌과 갈등을 겪는 일이 많다. 아버지는 좀 더 무게 있는 라스트 보스 급, 권력자로 존재하면서 중요한 순간에만 나서서 권력을 휘두르고, ‘정상 가족’ 안에서는 어머니가 청소년들의 일상생활 속에 권력자로 등장한다.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저항할 때는 청소년과 여성-어머니가 같은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여성-어머니가 연합하여 청소년의 삶을 자기들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려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남성 청소년과 아버지가 여성-어머니를 착취하기도 한다.

여성-어머니와 청소년은 지금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직접 체험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도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쉽사리 연대할 수 없다. 하긴 애초에 가족을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보는 이데올로기가 강고한 이 사회에서는, 가족의 문제를 느끼더라도 그걸 가족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결 짓는 사람들 자체가 드문 판이니 이 또한 하나의 탁상공론일 수 있다.

확실한 것은 페미니즘 운동과 청소년운동에게 가족은 같이 넘어야 할 산이라는 것이다. 역사가 짧은 청소년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페미니즘 운동 역시 그동안 우리 사회의 가족을 충분히 비판하고 바꾸는 데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우선은 가족을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포장하는 사회에서 가족을 하나의 상대적이고 사회적인 제도로 보고 그 제도의 문제들을 드러내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족끼리 서로 존중합시다.”, “서로 대화하는 가족을 만듭시다.” 같은 류의 캠페인을 넘어 가족이 사회적인 운동과 정치의 대상으로 생각되기 시작할 때 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청소년들과 여성들의 가족 안에서의 이야기를 공론화하고 우리의 다른 이해관계를 내세워 가족 제도에 스크래치를 내고 태클을 검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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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현 님은 청소년활동가네트워크 활동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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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18 호 [기사입력] 2010년 09월 08일 17: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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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0.08.04 21:16

[페미니즘인(in)걸] 납량특집 -공포영화

그 영화가 무서웠던 더 무서운 이유

발새


이번 페인 걸은 무더위를 식히기 위한 납량특집, 공포영화 속의 여성청소년들이다. 생각해보면 다른 장르에 비해 공포물은 유독 ‘학교’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10년 째 장수중인 <여고괴담>시리즈, 최근에 속편이 개봉한 <고사>시리즈 등이 모두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입시위주로 모든 학생들을 경쟁자·적으로 만드는 ‘학교’라는 공간은 이제 한국에서 공포영화의 단골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포 영화가 이런 학교의 현실을 고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상업 영화의 메커니즘 안에 있는 장르 영화의 하나인 공포영화는 대부분의 경우 사회 비판이라는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때문에 어떤 상황 혹은 공간이 가지는 폭력성은 어떤 인물의 부도덕함이나 싸이코틱함으로 대치되어버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공포 영화 속에 여성 청소년이 등장할 때도 마찬가지다. 여성 청소년들을 사회적인 약자로서 묘사한다고 한들, 이것이 어떤 현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단지 영화적인 재미를 돋우기 위해서 사용되는 장치인 경우가 다반사다.


지못미 소녀들
위 사진: 영화 <아랑> 포스터

그렇다면 여성청소년들은 공포영화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살펴보자. 여성 청소년들은 보호해야 할 존재로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아랑>이란 영화에선 남자 주인공이 짝사랑했던 소녀를 지키지 못해 그녀를 강간하고 죽인 범인들을 연쇄 살인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성 청소년들은 성폭행이나 죽임을 당하여 남은 사람들에게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겨주는 역할을 한다. <러블리 본즈>, <살인의 추억>, <마더> 등등 말이다. 이런 경우 여성 청소년들은 사회적 약자의 대표격인 셈이다. 물론 이런 설정 자체가 여성 청소년을 무기력한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더 아니꼬운 것은 영화가 의도하는 것이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과 영화 밖의 관객들의 ‘순결한 소녀’의 보호에 대한 합의란 것이다. 이 사회에서 순결한 소녀는 당연히 보호받아야할 대상들일 뿐이다. 때문에 이들이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되었을 때, 관객들은 이들의 사건을 수사하거나 이들의 복수를 하는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주로 남성들)에게 더 쉽게 몰입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설정을 가진 영화로 <추격자>를 들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보호의 대상으로 순결한 소녀가 아닌 순결하지 않은 성매매 여성이 등장하는데, 영화는 이 여성을 보호해야한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그녀가 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임을 강조한다.


공포와 에로 사이

이런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여성 청소년은 다른 한편으론 에로틱한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한다. 공포영화는 애초에 비명을 지르고 칼에 찔리는 여성들의 이미지로,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했었다. 여기에 소녀·여고생의 이미지가 덧씌워지면 그 시너지 효과가 엄청나다. 여성 청소년이 등장하는 공포영화는 소녀나 여고생의 순결한 몸을 파괴하는 쾌감을 주는 것이다.
위 사진:<여고괴담4> 중, 끔찍하게 살해당한 여고생의 몸


<여고괴담>시리즈를 보라. 3편부터 5편까지는 본격적으로 난도질당하는 여고생의 몸이 등장한다. <고사>는 좀 더 자극적으로 수조 안에서 죽어가는 여고생이 나온다. 그런데 이런 공포 영화들이 재수 없는 것은 이렇게 보여줄 건 다 보여주면서도 남성들에게 가해자의 편에 서지 않은 것 같은 안정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여고괴담>시리즈에서 여고생들의 몸이 난도질당하고 관절이 꺾이는 것은 외모나 성적에 강박적으로 집착한 여성들 본인의 탓이고, <고사>의 경우 관객은 문제를 풀어서 수조안에서 여고생을 구출하는 입장이다. 앞서 말했듯이 공포 영화는 어떤 사회적인 문제를 재미로 차용하는 것일 뿐 결코 약자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에로 코드의 또 다른 형태로, 성적인 금기를 범하는 여성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것은 주로 임신, 동성애나 사제 간의 사랑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성적인 금기를 어기는 소녀는 성인여성보다 더 도발적인 법이다. 예로 <여고괴담>시리즈의 모든 작품에 등장한 동성애 코드, <여고괴담4>에서 다룬 사제 간의 사랑, <여고괴담5>에서 다룬 임신 등이 있다. 이 영화들은 금기를 어긴 여성 청소년들이 좋지 않은 결말을 맞게 된다고 말한다.


소녀들은 불완전한 존재?

또 하나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청소년의 이미지는 불완전성이다. 여성 청소년은 사회적으로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존재인 여성과 청소년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캐릭터의 극대화를 노리는 공포영화에서 이런 이미지가 얼마나 반갑겠는가.

공포 학원물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 청소년들이 외모나 성적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캐릭터는 주로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초자연적인 무엇과 결탁하거나, 죽어서도 계속 특정한 공간에 머물거나 하는 등의 형태로 공포를 만들어낸다. 드물게 공포영화에서 이성적이고 침착한 역할을 하는 여성 청소년이 등장하더라도 다른 단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로 <4교시 추리 영역>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은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대신 폐쇄적인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다. 남자 주인공이 출중한 외모, 명석한 두뇌 그리고 리더쉽까지 갖춘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또 이런 불완전함의 이미지는 여성 청소년들을 우정과 사랑을 혼동하는 모습으로 묘사하여, 여성 청소년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대부분의 공포영화에 동성애 코드를 남발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주체적인 귀신들

반대로 공포 영화에서 여성 청소년들은 앞서 말한 것과는 다르게 주체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여고괴담>시리즈의 1,2편, <분신사바>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 여성 청소년들이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귀신과 거래를 하거나, 직접 죽어서 귀신이 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여성청소년들이 제 모습을 온전히 가지고선 누구를 죽이거나 괴롭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공포영화는 굳이 사회적으로 형성된 여성 청소년의 이미지를 깨뜨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위 사진:여고괴담> 중 한 맺힌 여고생 귀신



그 영화가 무서웠던 이유

공포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들을 불편하지 않으면서 무섭게 만드는 일이다. <여고괴담>에서 친구들한테 괴롭힘 당하다 죽은 여고생이 귀신이 되어 학교를 떠돈다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여고괴담>의 줄거리가 주인공 여고생이 살아서 자신을 괴롭히고 배신한 친구들을 한 명씩 살해하는 것이라면 과연 이 영화를 편히 볼 관객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또 반대로 만약 <추격자>의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성적인 무능함을 무시한 여성들에게 귀신이 되어 복수하는 내용이라면 누가 이 영화를 재밌게 보겠는가. 이렇듯 공포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관객이 어떻게 여성과 남성을 인식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공포물은 상황이나 공간의 폭력성을 주제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른 장르보다 사회의 병리 현상을 다룰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은 장르라고 생각한다. 여태 그런 공포영화가 잘 없었을 뿐이다, 좋은 예로 <샤이닝>이란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어느 평범한 아버지-남편이 한순간에 폭력적인 살인마가 되는 내용인데 우리가 순간순간 느끼지만 덮어두었던 아버지-남편의 폭력적인 모습을 잘 포착하여 뛰어난 공포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처럼 공포영화는 반드시 이미 구성된 세계관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나는 더 이상 공포영화에서 비명을 지르는 소녀들을 보고 싶지 않다. 그녀들의 캐릭터도 역할도 너무 뻔하다. 그렇다고 신개념 싸이코패스 살인마로 여성 청소년이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여성 청소년들은 청소년으로서 학교 안에서 한 인간으로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하는 상황이고, 여성으로서 가부장사회의 약자란 위치에 있다. 이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포착하여 훌륭한 공포영화로 탄생시킬 수는 없는가? 영화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인가? 바로 영화 속 등장인물이라는 타인의 감정을, 내 것으로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훌륭한 매체가 아닌가. 한 명의 영화팬으로서 공포영화에 여성 청소년이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어서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지못미: 인터넷 용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의 줄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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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새 님은 청소년 인권 활동가 네트워크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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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14 호 [기사입력] 2010년 08월 04일 15:5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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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10.07.30 08:41



[책의 유혹] 생식기 차이가 가져온 엄청난 결과

『아주 작은 차이』, 알리스 슈바이처 저, 김재희 역, 이프, 2001

초코파이

사실 이 책은 그리 딱 손에 잡혔던 책은 아니다. 책을 사고도 한동안 책꽂이에 조용히 전시해 두고 있었던 책이다. 그러다 처음 책을 잡고 보면서는 조금 불편했던 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녀’들의 이야기 속에서 생물학적 남성인 내 모습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년이 넘게 평화 운동, 포르노 반대 운동 등을 펼치며 여성 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애쓰던 저자가 사랑, 성, 일이라는 주제로 13명의 여성들을 만나 취재하고 인터뷰한 내용이다.



1975년 독일에서 처음 출판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 나와 있는 질 오르가즘에 대한 이야기나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가 당시에는 색다른 것이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어느 정도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동성애가 너무 쉽게(?) 드라마에서 다루어지는 것을 본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얼굴을 붉혔듯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내용들은 이미 죽어버린 그 무엇이 아니라 아직도 이 사회 곳곳에서 펄떡거리고 있는 작은 차이들에 대한 것들이다.

이 책에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식기’의 아주 작은 차이가 현실에서는 엄청난 차이와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생식기’의 차이가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의 차이를 낳고 이것이 결국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저자는 ‘8~9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차이’가 ‘엄청나게 큰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 온당하냐고 묻는다.

여성다울 것을 강요하는 사회, 가사와 육아가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는 것은 지금에도 마찬가지이다. 신부수업을 받고 가사와 육아를 자연스럽게 여성의 몫으로 되어가며 그 속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주부 우울증이라 이야기되며 약물이나 정신과 치료 정도로 해결하려 한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여성의 무력감은 남편의 관심과 약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복잡한 무엇이다. 회사에 있으면 육아 문제로 고민하는 여성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렇지만 그만큼 거기에 대해 고민하는 남성들을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주말에 아이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빼앗길까봐 차라리 휴일 근무를 하면서 돈도 벌려고 회사에 나오는 남성들을 찾는 게 더 쉬울 때가 많다. 내 친구는 남편이 ‘애보는 걸 안 도와준다.’고 이야기한다. 그 친구는 대학을 나왔고, 사회의식이 투철한 친구지만 ‘육아’는 자기가 하는 거고 남편은 ‘도와주는’ 거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내뱉는다. 많은 여성이나 남성이 학력이 부족하거나 의식이 없어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일상화된 ‘아주 작은 차이’의 큰 결과이기에 덤덤히 지나가는 듯하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은 맞벌이 부부 가운데 여성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3시간 27분으로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인 42분에 비해 5배가량 높은 것이라고 밝혔다. 부부가 맞벌이를 하더라도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보다 5배 가까이 많은 것이다. 여성 생식기를 타고 났기에 여성이 가사와 육아를 전담해야 한다는 의식은 변함이 없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가사와 육아 못지않게 성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저자는 성해방이라는 것이 결국은 여성의 해방이 되지 못하고 남성 중심의 억압적인 성관계를 강화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성의 성기 삽입을 통한 질 오르가즘이야말로 진정한 오르가즘이라는 전통적인 성의식과 동성애에 대한 혐오는 지금도 계속 된다. 그리고 그러한 페니스(자지) 중심의 사고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의 은근한 변형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남편이 원하면 섹스가 싫어도 해줘야 한다고 알았다.’고 말하는 책 속의 한 인터뷰 여성의 말에서도 그런 모습은 드러난다. 결혼을 한 여성이든 하지 않은 여성이든 인터뷰 내용 중에서 정말 무의식중에 학습된 가부장(남성) 중심의 사회 체제는 정말 견고하다.

책의 서문에서 그녀는 “25년 전에 쓴 책이 아직도 꾸준히 읽히고 있고 여전히 그들이 물어오는 편지에 답변을 보내고 있다. 왜일까? 시간이 많이 지나오면서 상당히 달라졌다고 할 수도 있고,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직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게 느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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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파이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돋움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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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12 호 [기사입력] 2010년 07월 21일 15: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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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07.07 20:14

[페미니즘 인(in) 걸?] 잔혹한 소년만화의 테제

‘소녀’ ‘정규직’ 오타쿠가 본 소년만화 씹어주기

둠코



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굉장히 좋아한다. 특히 일본에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들을 보면 거의 사족을 못 쓴다. 흔히들 말하는 ‘오타쿠’ 이다. 어떤 한 분야에 꽤나 심하게 열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음악 오타쿠, 와인 오타쿠, 이런 식으로도 쓰이지만 그냥 ‘오타쿠’라고 하면 만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일정 장르의 게임(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던가, 애니, 만화를 원작으로 한 게임 같은 것들)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어쨌든 애니메이션에 엄청 빠져서, 하루에 거의 여덟 시간씩 착실히(?) 보는 ‘정규직 오타쿠’ 였다. 지금도 하루에 8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틈만 나면 애니메이션을 본다.

그런데 청소년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러다가 페미니즘을 알게 된 후 마냥 재미있던 애니메이션이 조금씩 불편해졌다. 내가 접하는 많은 만화에서, 혹은 주류라 불리는 많은 만화들에서 여성의 캐릭터는 언제나 비중이 적거나 존재감이 옅다. 정확히 말하면 남성들에게 가려져 있다. 그래서 한동안은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기도 했지만 결국 오타쿠짓은 습관이어서 그런지 금단 증상에 져 버리고 말았다.

보통 만화는 크게 소년만화와 소녀만화로 나뉜다. 소년만화는 초, 중, 고등학생 남성층을 주로 겨냥해 만든 것으로 스포츠만화나 전투만화가 주를 이룬다. 슬램덩크, 테니스의 왕자, 우에키의 법칙, 나루토, 원피스, 블리치, 은혼 등이 있다. 반면 소녀만화는 한국에서는 흔히 순정만화라고 불리고 있는데, 초, 중, 고등학생 여성층을 대상으로 애틋한 로맨스를 통해 심금을 울리는 작품을 떠올리면 된다. 대표작으로 캔디 캔디, 나나, 토라도라 등이 있다. 이렇듯 독자층을 구분한 이 단어들도 여성과 남성의 고정화된 성 역할에 따라 나눠 놓은 것이다.


모에(*)!! 만화 속의 여성 찾기

소년만화에서는 크게 두 가지 캐릭터로 여성이 나온다. 첫 번째는 ‘서비스 캐릭터’이다. 이 때 서비스란 여성캐릭터를 이용한 성적 흥분을 남성에게 서비스 한다는 노골적 의미이다. 실제로 애니메이션, 만화계에서 서비스 캐릭터라는 말이 쓰인다. 이건 거의 모든 주류 소년만화에 빠지지 않는 요소로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보면, 제일 기분 나쁜 캐릭터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부각시키고 많은 경우에 그런 여성 캐릭터가 적게는 두세 명에서 많게는 열 명 가까이 나와서 주 독자층인 남성들의 취향에 따라 ‘고를’수 있게 했다. 독자가 남자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만화에 나오는 여성들이 자신을 따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런 만화로는 『에반게리온』, 『왕도둑 징』(이건 매 화마다 주인공에게 반하는 서로 다른 여자들이 한 번씩 등장하는, 뭔가 본드걸 같은 느낌이긴 한데) 같은 만화들, 많은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들에서 서비스 캐릭터들을 보여주고 있고(이 미.연.시** 같은 경우는 그냥 그 서비스 캐릭터를 즐기는 것 자체가 목표다.) 전투만화 같은 경우에도 여성들이 노출이 많은 복장을 하고 나오게 하거나 가슴, 엉덩이 등을 강조한다. 『절망선생』이라는 만화에는 매번 어떤 일이든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절망하는 선생이 나오는데 그 선생을 좋아하는 열댓 명의 여학생들이 등장한다. 그 여학생들은 제각기 두드러지게 다른 성격을 가지는데 스토커, 귀국자녀, 은둔형 외톨이, 동인녀(***), 초 포지티브 소녀(****), 뭐든 계획적으로 딱 부러지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여자애 등이 나온다. 정작 선생은 그 중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피해 다닌다는 느낌이다. 결국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주인공이 아무도 ‘선택’ 하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이 맘에 드는 여성캐릭터를 고르는 상상의 여지를 남겨둔다는 노림수가 있다.



두 번째는 ‘서포터 캐릭터’이다. 서포터 캐릭터는 스포츠 만화라던가, 전투만화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여성이 주로 남성 주인공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스토리가 진행 될수록 주인공과 여성 캐릭터 사이에 러브라인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전투만화에서는 여성이 적에게 납치되어 남성인 주인공이 여성을 지켜주는 구도이다. 여성들도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보통 남성인 주인공보다 강하지 않다. 여성이 열심히 싸우기는 하지만 최종 승리는 언제나 남성 주연 캐릭터가 독식한다.

이런 구도에서는 ‘남자다움’ 혹은 ‘사나이들의 세계’ 같은 것이 굉장히 부각된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나이들의 세계를 좋아한다. 일본의 유명한 만화 잡지 ‘점프’의 3요소는 승리, 우정 사랑으로 모두 ‘남자의’ 승리, 우정, 사랑이다.



『블리치』, 『나루토』, 『원피스』 같은 전투만화와 『테니스의 왕자』, 『슬램덩크』같은 스포츠만화에서 여성들이 주로 서포터로 나온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애처로운, 보고 있으면 화가 치미는 서포터로 등장하는 만화는 『데스노트』라고 생각한다. 『데스노트』에 나오는 아마네 미사는 데스노트를 손에 넣어 사람을 죽이는 라이토가 세계적 탐정인 ‘L’에게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 ‘L’에게 구속되어서도 입을 열지 않고, 자신에게 두 번째 데스노트를 준 사신(*****)과 거래를 해서 수명을 두 번이나 깎아먹는다. 기본적으로 자신은 바보이니 라이토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고 공언할 정도로 의존적인 캐릭터이다.


『미래일기』 분홍머리 여자애 가사이 유노

서비스나 서포터 등 여성을 부차적인 존재로 다루는 캐릭터 외에 예외적인 경우들도 많이 있다. 세 번째는 전투미소녀 캐릭터이다. 이 경우 남성 주인공보다 여성이 강하다. 남성은 주로 여성에게 보호받는다. 하지만 만화의 골자가 전투라고 해도 전투 능력이 높은 여성이 주체적인 캐릭터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전투는 주로 남자 주인공을 지키기 위한 것이거나 절체절명의 위기에 남성주인공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다는 패턴이다. 결국 정신적으로 남성에게 기대고 있다는 식의 전개로 이어진다. ‘예쁜데다 강하기까지하다’ 는 식의 외모지상주의는 기본으로 깔려있다.

『웨딩피치』, 『세일러 문』, 『카드캡터 체리』, 『울트라매니악』, 『신풍괴도 쟌느』 같은 변신물은 대부분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적들과 싸우지만 위기일 때 달려오는 건 남성들이다. 『미래일기』 같은 경우 각자 고유의 능력을 지닌 일기의 소유자들이 서로를 죽여서 승자를 가리는 게임을 하게 되는 내용이다. 일기를 이용한 일종의 능력자 배틀물의 형식이다. 남자 주인공은 소심하고 매사에 주눅 들어 있다. 가사이 유노라는 우등생에 역시나 일기의 소유자인 여성이 주인공을 열렬히 좋아해서 위기에 처한 남자주인공을 위해 싸운다. 일기를 파괴해서 상대방을 처치하는 마지막은 남자주인공이 하는 걸 봐서 가사이 유노가 서포터 캐릭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주인공이 너무나 하는 게 없다. 이 마지막 경우가 가장 질이 나쁘다. 여성이 고정된 역할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전면에 내세우다가 결국은 ‘그래봤자 여자’ 라는 메시지가 읽히니까.




언니들이 필요하다

남성 중심의 애니메이션에서 부차적인 존재가 아닌 주체적인 여성캐릭터가 있는데, 이른바 ‘언니 캐릭터’ 이다. 『원피스』(물론 원피스 자체는 굉장히 뜨악할 정도로 마초스럽다.)라는 만화에는 언니 캐릭터가 증장한다. 『원피스』 주연급 캐릭터는 9명인데(지금까지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457화 기준으로) 모두 ‘밀집모자 해적단’의 일원이다. 그 중에 여자 캐릭터는 딱 두 명이다. 참 난감한 성비이다. 한 명이 니코 로빈이고, 또 한 명이 나미이다.

위 사진:『원피스』 그림 순서대로 로빈, Dr.리누, 벨메일


니코 로빈, 벨메일, Dr. 리누. 내가 좋아하는 세 언니의 이름이다. 니코 로빈은 전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고고학 연구가 진행되었던 ‘오하라’라는 섬에서 태어났다. 로빈은 어린 나이에 고고학 자격을 취득했지만 ‘오하라’의 연구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역사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하자 ‘세계정부’가 섬을 통째로 공격해서 멸망시킨다. 유일한 생존자인 그녀는 여러 암흑의 조직에 몸담고 사는데 그 모든 조직들이 그녀 하나를 생존자로 남기고 괴멸한다. 그녀의 특기는 배신, 거짓말, 암살. 그녀는 모든 것을 내다보고, 꿰뚫고 있다. 조직이나 권력을 이용하고 배신할 줄 아는 ‘악녀’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주인공들 ‘밀짚모자 해적단’을 뒤에서 받치고 있다. 벨 메일은 주인공중 하나인 여자애 나미의 의붓 엄마이다. 그녀는 어릴 적에 해병이 되겠다고 마을을 뛰쳐나가 입대하는데,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어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할 때 나미와 누군지도 모를 나미를 어르고 있던 노지코를 발견한다. 두 아이를 살리겠다는 마음에 죽을 각오로 고향에 돌아와서 친딸도 아닌 두 여자애를 강하게 길러낸다. 해적인 아론이 마을에 쳐들어왔을 때도 당당히 맞서 싸우다가 “태어난 시대를 원망해서는 안 돼. 살아있으면 반드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그녀의 자식을 위한 희생은 전통적 ‘모성’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딸들에게 기존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Dr. 리누는 ‘밀짚모자 해적단’의 선의인 쵸파의 스승이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데리고 있던 인간사슴 쵸파를 맡아서, 자신의 의술을 모두 전수한다. 섬 가장 높은 산의 성에 살며 가끔 내려와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러 ‘쳐들어와서는’ 치료를 해 준 후 그 집 재산의 절반을 뜯어간다. “Happy 하냐? 나는 아직도 팔팔한 130대라구!” 라는 말을 달고 사는, “아름다움의 비결이 알고 싶나?” 라고 당당히 외치는 여자. 성격이 괄괄하고 똑부러지지만 쵸파가 정든 고향을 망설이지 않고 떠나게 해 주는 사려 깊음도 있다. 자신의 나이나 외모에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다리가 아픈 아이의 팔을 꾹 눌러서 “봐라, 다리 아픈 거 다 잊었지.”라는 농담을 던질 정도의 넉살과 “내 환자가 침대에서 나갈 때는, 완치 되거나, 죽거나. 두 경우다. 낫지도 않았는데 맘대로 돌아다니면 죽여 버리겠어.”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 괴상하고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다. 다들 어느 정도 롤모델로 삼고 싶은 언니들이다.

위 사진:『은혼』 『가구라』


그것 말고도 『은혼』이라는, 일본의 개화기를 판타지로 바꿔서 그린 만화에도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일본이 서양의 국가가 아닌 우주인들에게 개항했다는 설정. 그래서 우주인들이 (만화 안에서 천인天人이라고 부른다.)사회의 지배층이 된 세계를 그린다. 주인공인 긴토키는 은발의 사무라이이다. 사무라이는 폼도 뭣도 없는, 집세가 5달 정도 밀려있고 당뇨병 위험에 시달리는 뭐든지 해 주는 해결사(결국 돈은 못 버는)이다. 해결사 사무실에 얹혀사는 가구라라는 여자는 우주에서 유명한 전투민족인 야토족 소녀인데 스쿠터 정도는 한 손으로 세울 수 있고 총 맞은 구멍은 좀 있으면 막히는, 엄청난 신체 능력을 지닌 여자애이다. 무기로 총알이 나가는 우산;;을 쓴다. 전기밥솥 째로 밥을 마실 정도로 먹성이 좋고, 엉뚱한 성격이다. 사다하루라는 커다랗고 사람 머리를 덥석 물어버리는 견신犬神을 키운다. 해결사 일행이 범죄사건에 휘말려 경찰에게 심문을 받았는데 조사를 끝내고 풀려나오면서 ‘경찰이 엄청 열 받으니 경찰서 문간에 토해주겠다.’ 는, 만화의 여주인공 이미지가 절대로 아닌 여자애이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조직에 들어가면 짱을 먹자는 게 좌우명이라나. 만화에 나오는 여성 주연급캐릭터는 어느 정도 예쁘고, 도를 넘는 더러운 짓이나 막 되먹은 짓은 하지 않는다는 틀을 확 깨버리는 통쾌함이 있다.


우리는 애니메이션 속에 살고 있다

멋진 언니들이 많지만 애니메이션 전체에서 여성의 위치는 한계가 있다. 기본적으로 소년만화들은 남성들‘만을’ 독자로 지정하고 있다. 이런 장르를 좋아하는 여성 팬 층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좋아하게 되어도 마초 세계관을 수긍하고 내면화하기 전에는 편하게 즐길 수가 없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도가 남성이다 보니 아무리 멋진 여성 캐릭터가 나와 봤자 ‘멋진 조연’일 뿐이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멋진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것으로 만화 안의 성 역할 구분 짓기가 해결될 수 없다. 특정 캐릭터 하나가 남녀의 성역할의 구도를 깼다고 한들, 팔아먹기 위해 만들어 낸 수많은 여성캐릭터들에 대한 면죄부 혹은 변명정도 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좋은 캐릭터가 많이 나오는 것도 좋지만 애니메이션, 만화가 여성의 인기를 위한 수단 혹은 보조물로 대하지 않는 시각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여성이 ‘남성들의 뒤에서 받쳐주는, 남성들이 보기에 좋은’ 캐릭터로 나오는 걸 좋아하는 독자들이 없어져야 하고, 현실에서 성별에 따른 위치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하니 참 어려운 일이로세..;ㅅ;

주류의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는 많이 읽히고 팔리기 위해 사람들에게 가장 전형적인 모습들, 혹은 현실보다 훨씬 현실적인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 중에 가장 부각되는 것이 성역할의 구분인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세계가 그렇다는 것을 과장되게 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이 현실의 복사판이라는 걸 알면 ‘이건 애니메이션이고, 현실이 아니니까 괜찮아’ 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질 것이다. 불편해진 사람들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간다면 언젠가 불편하지 않은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모에: 패티쉬와 비슷한 개념으로 어떤 캐릭터 자체가 아니라 어떤 캐릭터의 특징에 팬덤을 가지는 것. 대개는 아이템이나 성격, 그 사람의 신분, 직업 등이다. 안경모에, 소꿉친구모에와 같이 쓰인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남성 주인공이 등장, 그것이 플레이어가 된다. 주변에 ‘선택’ 할 수 있는 많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특정 캐릭터와 친밀도를 높이기 위한 선택지를 골라 행동하면서 마지막에는 원하는 여성 캐릭터와 맺어지게 되는 것이 목적이다.

*** 동인녀: 만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2차 제작물인 동인지를 만들어 내거나 읽는 여성을 지칭. 만화의 주인공들을 엮어서 BL(남성간의 사랑을 그림)로 만드는 종류의 2차 제작이 주를 이룬다. 다른 말로 야오녀 라고도 한다.

**** 초 포지티브 소녀: 절망선생이 모든 것을 부정적을 생각하는 반면, 이 소녀는 도저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것 조차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 사신과의 거래: 데스노트에 죽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적으면 죽일 수 있다. 단 본인의 얼굴을 알고 있어야 하고 본명을 풀네임으로 적어야 한다. 사신과 거래를 하게 되면 사신의 눈의 능력을 받을 수 있다. 이 능력이 있으면 사람 얼굴 위에 그 사람의 본명이 보이게 된다. 댓가는 남은 수명의 절반.


덧붙이는 글
둠코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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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10 호 [기사입력] 2010년 07월 07일 17: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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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06.28 10:58



격월간 사람에서 기본소득과 청소년 토론회에 쓴 원고를 수정하여 다시 싣고 싶다고 해서 수정한 거예용.





패륜적 기본소득

공현

  “기본소득”이란, 재산이나 소득, 노동 등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회구성원들 개개인에게 균등하게 정기적으로 소득을 지급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의 생계에 필요한 돈을 사회가 균등하게, 무조건적으로 보장하는 보편적 복지 제도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개개인의 계좌에 매달 정부가 30~50만원 정도의 생계비를 입금해준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기본소득은 특히 노동 중심의 사회에서 밀려나고 있거나 차별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욱 의미 있는 제도이다. 한국의 기본소득네트워크에서는 기본소득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밝히며 토론하기 위해 “기본소득과 장애인”, “기본소득과 여성”, “기본소득과 청소년” 등의 주제로 연속적으로 토론회를 열고 있다. 이 글은 6월 19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와 기본소득네트워크가 공동으로 준비해서 연 “기본소득과 청소년” 토론회에서 발제한 원고를 고쳐쓴 것이다.


가정에서의 청소년의 지위

  근대 사회에서 청소년, 아동과 깊은 관련이 있는 제도로 학교와 가정을 꼽을 수 있다.(하루 일과 중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한국은 ‘학원’도 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학교에서의 청소년인권 문제에 비해 가정에서의 청소년인권 문제는 잘 공론화되지 않는다. 이는 학교가 제도화된 공적 공간이며 집단적, 조직적 제도인 반면 가정은 사적 공간,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의 체벌과 가정에서의 체벌, 학교에서의 종교 강요와 가정에서의 종교 강요 등을 비교해보면 이런 차이는 쉽게 알 수 있다. 최근에 전교조 교사들이 정치활동을 이유로 대량 해직을 당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교사의 정치적 자유는 학생들의 미성숙을 이유로 문제가 되지만 아무도 부모나 다른 가족의 정치활동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법 제도부터 보자. 민법에는 친권의 효력으로 친권자가 청소년을 보호, 교양할 권리의무(913조), 청소년의 거주지를 지정할 권리(914조), 징계할 권리(915조), 재산 관리권(916조) 등을 명시하고 있다. 청소년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면 부모, 후견인 등의 친권자가 정하는 곳에서만 살아야 하고, 친권자의 가치관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 하며, 친권자에게 자의적으로 체벌이나 용돈 끊기, 외출금지 등의 징계를 당할 수 있으며, 재산권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에 개정이 되긴 했는데, 민법의 친법 관련 조항에는 “자식은 친권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라는 조항이 있었다.
  이는 단지 법 규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의 문제이다. 극단적인 예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성적이 잘 안 나온다는 이유로 친권자에게 체벌을 당하다가 죽음에 이른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다. ‘모태신앙’을 비롯해서 가정에서 종교나 정치적 견해를 강요하거나 강압하는 경우는 아주 많다. 개인적인 다이어리나 휴대전화 기록 등을 친권자가 함부로 보고 이를 근거로 청소년들을 통제하는 일, 위치추적 등은 ‘부모의 사랑과 걱정’으로 정당화된다. 어느 학교에 진학을 할 것인가, 어떤 진로를 택할 것인가, 학원을 갈 것인가 등의 문제도 거의 다 친권자의 뜻이 많이 반영된 결정을 하게 된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청소년활동가들은 대부분이 가정에서의 반대와 탄압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청소년 자신의 자발성이 없이 100% 전적으로 친권자의 뜻만을 관철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친권자 개개인의 성격이나 가치관에 따라 처우가 많이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청소년의 삶에 대해 친권자가 가지는 지배력은 상당히 강력하고, 그 지배력을 행사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선택은 대부분이 친권자들의 성향에 맡겨져 있다. 제도적․문화적 조건만으로 봤을 때는 청소년들은 ‘친권자의 소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회적 지위에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있어왔다. 아나키즘에서는 근대 사회가 “아동을 부모의 부속물로 바라볼 뿐, 아동 역시 자율적 존재로서 자신의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고 꼬집어 이야기한다. 꽤 유명한 아나키스트인 바쿠닌 또한 “아동은 그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아동은 부모의 소유물도 아니며, 심지어 사회에 소속된 사회적 소유물도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아나키즘과 청소년 해방」. 마크 시버스타인 Marc Siverstein 지음.) 페미니즘 쪽에서도 남성 가부장과 여성 사이의 권력관계에 더해서 아동에 대한 권력관계를 다루는 논의들이 있으며, 우에노 치즈코 또한 세대간의 지배 종료를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 과제 중 하나로 제안했던 적이 있다.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이러한 청소년들의 가정 안에서의 지위는 많은 부분 경제적인 종속성에서 비롯된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것이다. “말 안 들어? 그럼 용돈 없어!”, “내 말 듣기 싫으면 나가. 여기가 니 집이냐? 니가 입는 옷 먹는 거 다 누구 돈으로 산 건데?” 용돈 뿐 아니라 의식주 전체를 친권자에게 의지해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친권자가 사용할 수 있는 압박의 수단이란 무궁무진하다. “내가 너 키우느라 들인 돈이 얼만데” 등 한국 특유의 높은 보육․교육비 때문에 (좀 넓게 잡은) 중산층 이상의 친권자들이 가지는 투자의식과 주도권 등도 크게 작용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의 도입은 가정 안에서 청소년들의 지위를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우선 기본소득은 가족 단위가 아니라 개개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청소년 또한 가정의 경제력의 일부를 담당함으로써 어느 정도 협상력과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기본소득의 액수와 사회적 조건에 따라 구체적인 양상에서는 차이가 있겠으나, 일단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친권자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보다 독립적이고 덜 의존적인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청소년을 투자의 대상으로 보고 미래에 자신들에게 더 많은 부와 명예를 돌려주기를 바라는 친권자들에게는 투자의 부담이 줄어드는 동시에 자신들의 노인 생활이 어느 정도 보장됨에 따라 청소년을 채찍질해서 사회 상층에 쑤셔 넣을 동기가 어느 정도 줄어들게 된다.
  친권자들도 똑같이 기본소득을 받게 되니까 가정 안에서 경제력의 부담 정도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라, 돈이란 같은 액수더라도 어느 정도 있는 자들보다는 없는 자들에게 더 효용이 큰 법이다. 가정 안에서 가지는 경제력의 비율이 0에서 10이 되는 것은 발언권이나 협상력의 측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또한 기본소득 모델에서는 소득이 많은 친권자들은 세금으로 그만큼 더 많은 돈을 내게 되기 때문에 기본소득은 좀 잘 사는 가정 안에서는 경제력의 분배 효과를 가지게 된다.

  여차하면 가출할 수 있다는 것도 청소년들의 가정 안에서의 지위에 틀림없이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양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출은 자신이 원하는 주거를 요구하는 일종의 투쟁이나 보이콧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가출을 해도 주거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제대로 살 수 없다는 점에서 가출의 리스크가 컸다. 이 리스크는 가출 후에 어디서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하는 막막함과 정해진 레일에서 삐끗하기라도 하면 낙오자가 된다는 두려움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본소득의 도입은 가출의 리스크를 어느 정도 해결해준다. 우선 일차적으로는 최저생계 수준의 소득이 보장되니 가출 후에도 청소년들이 독립적 생활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나아가서 기본소득의 도입은 노동시장에 변화를 일으키고 지금처럼 취업을 위해 죽어라 스펙을 쌓아야 하고 낙오되지 않기 위해 바둥거려야 하는 상황을 개선하게 될 것이며, 가정과 학교의 틀에서 벗어나며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가 훨씬 작아지게 만들어준다. 여차하면 파업이든 태업이든 할 수 있는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듯이, 기본소득은 가출 등 가족의 틀을 벗어난 청소년들에 대한 일종의 사회안전망이 되면서 청소년들의 지위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
  더 적극적으로는 청소년들의 독립 시기가 빨라지는 것도 기대해볼 수 있다. 지금 주로 청소년들, 그러니까 0~19, 20세 정도까지의 ‘미성년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친권자의 경제적 지배력이라는 점은 한국 사회에서는 20대 초중반의 사람들 다수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생계에 필요한 소득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면, 계속 돈을 모아서 주거를 마련하고 친구들과 공동으로 생활하는 방식으로 독립을 시도할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대학 진학의 보편화에 청년실업이니 어쩌니 하면서 점점 늦어지고 있는 독립이 앞당겨진다는 것은 10대, 20대 전반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뜻한다.
  요컨대 기본소득은 더 이상 기존의 부모-자식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내고,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가족 해체’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청소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친권자 말 잘 듣고 나중에는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여 효도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담이 크게 덜어지게 된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게 의존적으로 살던 관계가 좀 더 독립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데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는 가정 안팎에서의 투쟁을 통해서 지금까지 잘 드러나지 않았던 가정에서의 권력관계들을 공론화하면서 변화시키는 청소년들의 실천이 필요할 것이다. 기존의 사회적 윤리를 파괴한다는 점에서는 실로 ‘패륜적’이다.


문화적 어려움들

  물론 이렇게 단순하게 낙관할 수만은 없다. 청소년들의 가정에서의 지위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 외에도 문화적인 문제나 여러 제도적인 문제들에 얽혀 있다. 민법이나 노동법 같은 데부터 넓게 본다면 교육제도나 선거연령, 사회적 인식 등까지도 모두 청소년들의 독립적인 삶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경제적 토대가 달라지면 상층 구조는 다소 오차가 있더라도 변화하게 되어 있다는 식으로 낙관하는 것은 좀 무책임하다. 기본소득 도입 자체에서부터 사회적 인식과 문화적 요인들이 걸림돌이 될 가능성도 높다. 청소년들이 세뱃돈 압수당하듯이 기본소득을 받자마자 친권자들에게 압수당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더 극단적으로 생각해보면, 몇몇 장애인 시설들이 보조금 더 타내려고 장애인들을 데려와서 보조금을 갈취하듯이, 아이 1명을 더 낳으면 그만큼 기본소득을 더 번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낳거나 입양하는 친권자들도 나타날 수 있다. 아니면 학생간 폭력에서 ‘삥’을 뜯는 규모가 커지고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유괴 등의 범죄가 증가하는 일도 상상해볼 수 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본소득 도입 초기에는 청소년들의 경제적 판단능력 등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분명히 청소년들은 (사실은 20, 30대들도 좀 해당) 경제적 주체가 되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상상력을 안 좋은 쪽으로 발휘한다면 기업의 마케팅 전략이나 명품 소비 문화 등에 소득을 다 쓸 수도 있다. 지금도 빈곤층 가정의 청소년에서부터 이런 명품 소비, 신제품 소비 등의 모습들이 보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기본소득이 청소년들의 독립에 기여하기보다는 명품이나 10대 마케팅에 주력하는 기업들의 배를 불리는 데 쓰인다면, 친권자에게 손을 벌려서 그런 소비를 하는 것보다는 낫겠으나, 최선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는 청소년들에게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문화적 변화에 더해 어떻게 경제적 주체로서 소비하는 것에 대해 사회구성원들을 교육할지, 이러한 소비 문화의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계획해야 할 문제이다.


가능성으로서의 기본소득

  기본소득은 액수상으로는 모두에게 같은 돈을 지급하는 것이지만, 모두에게 같은 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다. 더 빈곤하고 더 종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효용이 있는 돈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가정/가족 단위로만 묶여서 생각되어왔고 독립된 경제적 능력을 인정받거나 보장받은 적이 없는 청소년들은 기본소득 도입의 이해당사자 중에 중요한 한 축이 될 수 있다.
  기본소득은 전가의 보도가 아니며, 그 자체로 청소년들을 해방시킨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기본소득의 도입이 청소년들이 친권자로부터 좀 더 자유롭고 독립적인, 지금의 사회적 시선으로 본다면 ‘패륜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 중 하나일 수는 있다. 또한 기본소득의 도입은 사회 전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고 청소년들의 삶이나 교육에도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물론 기본소득이 도입되는 과정 자체, 그리고 기본소득에서 청소년들(0세~19세 정도)이 배제되지 않게 하는 것 자체가 난이도 높은 운동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기본소득 도입 이후에도 청소년들의 경제적 사회적 독립과 인권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역시 청소년들의 주체적인 투쟁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 운동과 제도는 최소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 전까지는 이야기하기도 힘들었던 그런 새로운 사회로 가는 가능성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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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02.13 15:04

[페미니즘인(in)걸?] 왜 소수자들은, 여성/청소년들은, 오지랖이 넓은가

‘그래도...’의 반복

난다


학교를 그만두기 전, 학교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 늘 어느 순간 벽 같은 것에 부딪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신나게 학교 욕, 선생 욕을 하다가도 누군가는 꼭 “너무 우리들 생각만 하지 말고, 선생님 생각도 좀 하자.”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이를테면 체벌에 대해 수다를 떨 때,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때리냐? 진짜 그 선생 너무 심하게 때리는 것 같아.”라고 얘기하면, “에이, 그 선생님이 좀 심하게 때리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체벌은 허용되고 그래야, 우리도 스스로를 통제하고 학교도 잘 굴러갈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리고 친구들의 끄덕거림이 따라온다. 늘 답답했었다. 왜 이 친구들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들에 대해 그냥 그대로 수긍하는 거지?

비슷한 경험은 학교를 그만 두고서 인권활동이라는 걸 하면서도 자주 접했던 것 같다. 인권교육을 가서 학생들의 권리나 인권에 대해 얘기하면 청소년들은 ‘아무리 그래도’ 하면서 ‘선생님들’ 걱정을 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회사 뒷담화를 까다가 내가 발끈하자, ‘그래도’하면서 ‘사장님’을 옹호한다. ‘사장님’도 나름의 고충과 어려움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내가 보기엔 아빠가 훨씬 힘들어 보이는데.


구조적 무감각과 ‘착하게’ 길들여지기

사람들은 쉽게 이 사회의 기준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주류적인 기준을 흔드는 것들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 곧잘 ‘인권’을 이야기하고, ‘차별’을 이야기하고,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어떤 ‘선’을 넘어가지 않으려 한다. 그 ‘선’을 넘어가는 것은 기존 사회의 질서를 흔들고 침범하는 것이라 여긴다.

처음부터 그랬을 것 같진 않다. 청소년들이 “아직 어린 것들이”라는 말에 맞춰 “그래, 우린 아직 어리니까 좀 더 통제 받아야 해.”라고 생각하거나, 여성들이 이 사회 ‘미’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더욱 꾸며내고 혹독한 다이어트를 감행한다거나, 혹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남성들을 먼저 이해하고 배려하는 방식으로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같은 사회적 약자로 닮은꼴인 청소년과 여성, 그리고 약자들은 웃기게도 강자를 먼저 걱정한다. 그러한 여성성과 약자성(먼저 배려하고 먼저 이해하고)은 약자가 강자에게 훨씬 더 많이 잘 발휘되고 있다. 이는 성인/교사/남성-강자 중심 사회에서 그들 중심의 질서가 학생/여성 속에도 깊이 뿌리를 내려, 자신들을 둘러싼 억압마저 그들의 시선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예전부터 ‘남성/비청소년의 이야기’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살며 쌓아온 경험들이 우리들 마음 곳곳에 눌러 붙어 ‘내면화’되었기 때문이다.


생존하기 위해 강자 입장 내면화하기

소수자/약자들이, 권력 있는 자/강자들을 위하도록. 그래서 이 사회가 뒤틀리지 않고, 뒤집어지지 않게 고정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사회는 우리들을 오랫동안 ‘착하게’ 길들여왔다.

그렇게 길들여진 ‘착한’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고 산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착하고 착실했다. ‘야간자율학습’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고, 성적도 그럭저럭 유지했다. 학교의 온갖 규제가 고통스러워도, 선생님들이 우리를 때려도, 나는 그 순간순간을 흘려보냈다. 그런 것들을 그만두라고 말하고도 싶었지만, 그 순간에는 착실하게 참아냈다. 그 순간만 넘기면 되니까. 또는 그 순간에 내 목소리를 내기라도 하면, 눈앞에 징계나 탄압이 떨어질 테니까.

하지만 그런 시간을 보낼수록 선생님들이 우리를 때릴 때마다 그걸 계속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게 괴로웠다. 나는 왜 아무 말도 못하는 거지? 나는 왜 이렇게 힘이 없지? 이런 고민을 하다가, 그냥 거기에 그럴 만한 의미를 부여해버렸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어, 라고. 선생님도 그만한 이유-학생들을 대학에 많이 보내야 할-가 있어서일 테고, 그건 선생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라고.

먹고 사는 것, 여성들의 경우에는 사회적 인식도 그렇고, 학생들은 학교에서의 눈앞에 보이는 탄압이나 징계에 대한 문제 때문에 쉽게 바꿔내야겠다는 생각을 더 못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나의 생존을 위해서 이 체제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편입되는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강자의 입장을 이해해야 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정당화 시켜야 했다. 나한테 고통을 준 사람도 어느 정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고, 이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면 나는 덜 불편할 수 있으니. 그리고 그럴 때에야 나는 이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으니. 그래서 나도 그러한 나 자신과 학교와 체벌하는 교사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창시절을 추억할 때처럼. 대학에 가고 나서, 자유시간이 많아지니, “아 그래도 고딩 땐 할 게 있었는데~”하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수능 보기 전에는 수능공부=쓸모 있는 짓/나머지 전부=휴식이라는 ‘공식’이 있었는데, 수능이 끝나고 이게 허물어지고 나니, 참 허무하더라는 것처럼.

너무 힘든 시절이었지만, 그렇게 힘든 시간만 있었다고 생각하기엔 내가 너무 비참하니까. 그래서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일들을 더 크게 기억하고 추억하면서 그 때는 그래도 좋았지, 그래서 좋았지,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반복되고 반복되어 이 체제를 구성한다.


그래서, 그러니까

이 단단한 구조를 직시하는 것은 여성으로, 청소년으로,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 나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우리를 더욱 ‘착한 아이’로 길들이는 국가의 통제가 점점 더 검은 그림자를 펼쳐오는 이 때, ‘착한 아이’가 아니면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쫓아내버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 때, ‘국가’를 위해서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멈춰야 한다고, ‘모두가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 때. 우리 이제 더 이상 착해지지 않아도 되었으면 좋겠다. 이 커다랗고 단단한 기준을 뒤집을 만한 발칙함과 깐깐함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난다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 입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190 호 [기사입력] 2010년 02월 09일 23: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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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0.02.13 14:06


  수호자들을 가리키는 '여신의 신랑'이라는 칭호는, 혼인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나가의 사회를 놓고 볼 때 매우 기이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나가의 여인은 한 명의 남자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동물과 다름없는 재생산 방식을 선택하고 있는 나가의 사회에서, 이 '신랑'이라는 혼인 제도를 연상케 하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 물론 그 의미는 우리의 혼인 제도와 같다. 여신의 신랑이라는 칭호는 그들 수호자들이 다른 여인이 아닌 단 한 명의 여인인 발자국 없는 여신에게만 충실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렇다면 나가 사회에서 이들 수호자 집단은 동물적인 동료들에 비해 고등한 자들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리의 혼인 제도가 나가들의 난혼보다 고등한 방식이라 믿는 것은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자기중심적인 태도다. 때론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곤 하는 논리적 탐구는 아쉽게도 우리의 혼인 제도가 나가의 난혼보다 별로 우월할 것이 없음을 증명해준다.
  사람들은 동물보다 훨씬 성장이 느리다. 따라서 사람의 여자들은 성장이 빠른 동물들의 암컷에 비해 육아에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 이것이 여자와 미숙한 자손 양자에게 위험한 투자임은 자명하다. 혼인 제도는 수컷에게 이 위험을 분담하게 하는 제도다. 즉 먹이를 구해 오고 적대적 환경에 맞서 투쟁하는 등의 역할을 남자가 담당함으로써 보다 안전한 재생산을 꾀하려는 제도가 우리의 혼인 제도다. 이것은 이를 테면 어미와 새끼라는 기본적인 가족 구조에 수컷이 편입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가들의 경우는 수컷이 담당할 역할을 사회적 체계가 대신하고 있다. 심장 적출법에 의해 나가 여자들은 자손을 충분히 보호할 만큼 강력해졌으며 그들의 땅 한계선 이남에서 나가에게 불리한 거의 모든 요소를 일소했다. 그 시점에서 나가 남자들은 자신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 이상 가족의 기본 구조인 암컷 어미와 새끼의 관계에 수컷이 끼어들 자리가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역할이 감소되면 권력도 감소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나가의 사회는 여성이 지배한다. 나는 '여신의 신랑'이라는 호칭에는 암컷 어미와 새끼의 관계에서 추방되자 더 크고 더 위대한 것에 편입되고자 몸부림치는 나가 남자들의 슬픈 소속 욕구가 반영되어 있지 않나 추측한다.
  그러니 이 때려죽이고 싶도록 사랑스러운 손자 녀석아. 네게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그 '남성미'를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면, 우리 사회가 아직 남자들에게 '남성미에 대한 찬사와 존경'이라는 웃기는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남자들에게 수컷 역할을 맡겨야 할 만큼 원시적이라는 사실에 고마워하도록 해라!

- 독설가로 유명했던 우슬라 사르마크 부인이 혈기방장한 손자에게 들려준 애정 어린 충고 中


(이영도. 2003. 『눈물을 마시는 새 2』.  pp.152-154. 황금가지 출판사)





그냥 어느 모 카페인지 하는 데서, 여성 우월주의자였나 여성상위주의자였나로 찍힌 기념으로 발췌해두는 인용문.


(이영도가 나가 사회를 구상하면서 이갈리아의 딸들 같은 텍스트들을 참조한 것은 분명해보인다.
그리고 우슬라 사르마크라는 이름 자체도, 팬카페 등에 보면 어슐러 르귄에서 따온 것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건 여성 상위일지도 몰라 ㅋㅋㅋ

좀 더 세부적으로 이야기하면, 나가 사회는 사회 구성원을 보호하는 기능을 심장 적출법과 키보렌 등 주변 환경 덕에 개개인이 그다지 부담하지 않는 반면에, 아동을 양육하는 기능은 '가문'에서 여성들이 맡고 있다. 즉 양육, 육아 기능까지도 사회가 상당 부분 부담하게 되면 나가 사회는 여성 상위가 아닌 구조로 변화해갈 수도 있다.

부모(친권자)의 아동에 대한 권력의 문제를 개선할 방안을 고민하기 위해서도, "역할이 감소되면 권력도 감소되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문장은 참조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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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9.10.16 18:59

[페미니즘인(in)걸] 여학생은 성적이 “너무” 우수하다. 도대체 어쩌라고~

한낱


한낱 활동가의 자기 고백

중 고등학교를 다녔던 시절, 나는 ‘모범적인’ 여학생이었다. 민망하지만, 그랬다. 공부도 곧 잘했고, 반장도 몇 번 해봤다.선생님들의 예쁨도 꽤 받았다. 학교 안에서 가끔 짜증나는 상황이 발생하긴 했지만, 그건 그냥 그 날 재수가 없어서 그랬던거였다. 청소년 인권? 그런 거 전혀 몰랐다. 지금의 정신 상태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공부에 매진했다. 그만큼 성과도있었고, 보상도 받았다. 당시에 내가 성차별을 받았던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학업성적과 임원직 수행으로 '여성'이라는 핸디캡을뛰어넘은 나는 여느 찌질한 남학생들보다 훨씬 인정받았다.

차라리 객관적인 점수로 평가받았던 그 시절이 여성인 나에게 더 행복한 시간이었던 걸까? 요즘 국방부가 군가산점 부활을 운운하는걸 보면 처참한 느낌마저 든다. 아무리 졸업성적이 좋아도 '용모준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군필자 우선' 앞에서 고개를숙여하는 학교 밖보다는 균형 잡힌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건가? 그렇기 때문에 여학생들의 우세가 학교 안에서는 가능한 거고,여남평등은 학교 안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평할 수 있을까?

조금만 더 내 이야기를 해보자. 어렸을 적 엄마는 내게 “찰흙으로 고추를 만들어 붙여줘야지.” 등등의 농담을 많이 했었다. 내가그다지 ‘여성스러운’ 외모를 갖추고 태어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엄마는 언니에게는 보이지 않는 다른 종류의 기대감을 내게품었고, 나는 내가 집에서 ‘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는 무게를 어릴 적부터 지고 살았다. 지금도 내가 중학교에 올라갈 때 엄마가했던 말이 기억난다. “엄마가 미안하다. 예쁘게 낳아주지 못해서. 그만큼 너는 공부를 잘해야 돋보일 수 있어. 열심히 해.엄마가 밀어 줄게.” 엄마의 진솔한 충고는 나의 처절한 인정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변호사든, 기자든 뭔가 똑똑하고멋져 보이는 직업을 가지려면 공부를 뛰어나게 잘해야 했고, 좋은 대학에 가야만 했다.

물론 이런 경험이 내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탈학교 청소년 활동가는 자퇴를 고민하던 시절 담임교사가 했던 말을 생생히기억하고 있다. “너 자퇴 해가지고, 어디 시집이나 갈 수 있겠니?” 나의 엄마도, 이 담임교사도 여성인 우리가 맞이하게 될쓰디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본인들이 여성으로서 살아오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를 나눠 준 것일 수있다. 비록 그 지혜가 우리가 가진 조건 자체를 성찰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여학생들, 너무 똑똑해서 ‘문제’다?

소 팔아서 장남만 대학 보내던 시절은 이제 지났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여성도 남성과 나란히 취학의 문에 들어설 수 있게되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의무교육이 되었고, 기회 자체만 본다면 성차가 두드러지지 않는 시점에 온 것 같다. 학업 성취도평가 분석이나, 특목고 진학률을 보면 여학생들의 학업 수행 능력이 남학생들을 앞질러 가고 있다고 한다. 남학생 학부모들은 내신에대한 불이익 때문에 남녀공학을 기피하고 있으며, 남고/여고로의 전환 신청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최근까지 일부 학교에서는‘남녀 내신 분리 산출’이 관행이기도 했다. 남녀의 뇌구조 차이를 근거로 남녀공학 폐지론을 주장하는 보수논객들도 활개를 친다.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함을 생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뇌의 크기까지 들먹였던 것이 우생학 아니었던가. 이제는 여성의 생물학적우수함을 거꾸로 반증하고 있는 셈이니 도리어 반가운 일일 수도 있겠다.

사실 이런 분석들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것 자체가 이들의 논리에 말려드는 꼴이 된다. “그 분석에는 문제가 있어. 여학생들이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야.” “우리 여학생들이 너무 공부를 잘하고 있나? 좀 못하도록 노력해 볼게.” 얼마나 우스꽝스런답변인가. 왜 여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높은 것은 ‘문제’가 되는 걸까? 여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되 남학생들 보다는 살짝 못하는오묘한 성적 관리 기술을 익혀야 하는 걸까? 이러한 현상이 정말 ‘문제’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남학생들이 공부를 못하는데 어떤사회적 장벽이나 차별이 있고, 그것이 성적에 영향을 미침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성적으로만 학생의 능력을 판단하는평가제도 자체에 이의제기를 해야 한다. 애꿎은 여학생들의 성적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차별이 낳은 역설적 상황

여 학생들의 학업 성적이 좋은 것은, 그만큼 그녀들이 성적 관리에 필사적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차별의 상황에 놓여있기때문에 성적도 뛰어나다는 거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훨씬 뛰어나야 비로소 출발점에 설 수 있다. 따놓을 수 있는 데서 점수를충분히 따놓지 않으면, 도저히 게임이 안 된다. 비슷한 조건을 가진 상태에서,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잠재적인’ 능력자로인정받는 현실이기 때문에 여성들은 항시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어야 한다. 대학 진학 후, 20대 여성들이남성들보다 어학 공부에 더 많이 열중한다는 통계는 그런 점에서 의미 있다. 여성 할당제 등 여남 간의 실질적 평등을 보완하려는정책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을 해소시켜 줄만큼 든든한 버팀목이 되지는 못한다. 특히나 실업률이높고, 고용이 불안한 시기에는 그마저도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다. 여성들이 공직에 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공무원 시험 합격률이높은 이유는 다른 선택지가 없거나, 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임용고시 합격률이 높은 이유는 암암리에사립학교에서 남교사를 선호하고, 우선 채용하기 때문이다. 씁쓸한 일이지만, 군가산점제가 부활하면 이런 ‘여초 현상’ 조차사라지겠지만 말이다.



정말 여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는가?


다 시 돌아와서, “정말 여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져보고 싶다. 평균이라는 통계의 가장 큰 함정은변량들의 차이를 무화시키고 중간 값으로 환원시켜버린다는 점이다. 모든 여학생들이 공부를 잘하지는 않는다. 다만, 공부를 잘하는일부 여학생들이 있고, 그녀들이 한국 사회의 여학생을 대표한다. 많은 여학생들이 힐러리나 박근혜, 나경원을 동경할 순 있지만모두가 그녀들처럼 소위 ‘성공’하는 여성이 될 수는 없다. 여학생들이 내신관리 능력이 뛰어난 건 학교에서 요구하는 인간형에부합함으로써 생존하려는 전략이다. 그냥 여성이 아닌, ‘똑똑한 여성’들은 사회에서 남성과 비등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우리는그녀들을 ‘명예 남성’이라고 부른다.

어떤 교사들은 ‘참한 여학생이 반장이 되어야 교실이 안정적이다.’라고 말한다. ‘참한 여학생’이 교실을 주도해야 교실 안 폭력도줄어든다는 거다. 참한 여학생은 누구인가? 성격은 기본이고 성적도 좋아야 한다. 학생과 교사의 갈등을 조절하고, 교실 안을침착하게 돌보는 ‘조용한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순간,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훅 느껴진다. 이제는 기술과 가정을 분리하지 않고여남이 함께 배운다고 한다. 출석부에 남학생 이름이 먼저 기재되어 있던 문화도 사라졌다고 한다. 학교가 옛날보다는 많이변화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여학생의 ‘능력’을 바라보는 기준은 획일적이다.


평균을 갉아먹는 존재들의 반란


이 러한 학교 안의 능력주의가 깨지지 않으면, 통계에 보이지 않는 다수의 여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소외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없다. 끊임없는 열등감에 괴로워하는 여학생들, 학교의 기준을 비웃으며 학교가 아닌 거리를 택하는 여학생들에게 “그러니깐, 공부를좀 더 하라니깐!”을 계속해서 외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한 명, 한 명 천천히 빛나는 사람들. 그이들이 자기만의존재감을 인정받을 수 없는 학교에서 성평등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연재 글들이 청소년 인권에 여성주의적 상상력을 불어넣는 시도였다면, 이번 글은 청소년인권을 통해 자칫 페미니즘이 놓치고넘어갈 수 있는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학교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능력주의(성적 제일주의)’다. 학교에서는못생겨도 공부를 잘하면 일단 인정받는다.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고 좋은 성적을 내면 역시나 인정받는다. 소수성에기반한 다양한 차별들이 능력주의라는 거대한 프리즘을 통과해 그 빛깔을 낸다. 여성주의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학교 평균을 갉아먹는존재들’의 반란을 기획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한낱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입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174 호 [기사입력] 2009년 10월 14일 12: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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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9.08.2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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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차별공동행동  차차차 : 차별, 그리고 차마 말하지 못한 차이

[제 2호 // 2009년 8월 22일]

  반차공's 아나토미

 :: 반차별공동행동 연대의의미



반차별공동행동 어떻게 활동하고 있나?이번 호 주제는 바로바로바로 "반차별공동행동 연대의 의미"...이지만!
뭔가 전체적으로 닭살 돋는 고백삘?!
"그이를 만날 땐 왠지 정신줄을 놓게 돼요."  등등 다양한 충격발언, 고백 수록

 상상 더하기

 
:: 반차별운동 주춧돌 놓기     
    안개 속을 더듬으며 나아가듯


사실, 아직도 나는, 반차별운동이 ‘뭔지’를 잘 모르겠다. 그랬기 때문에 반차별운동의 원칙, 반차별공동행동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한 세 번째 상상더하기에 참여하면서, 조금은 이런 막막한 게 덜해질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더보기]

  반차별 용어 사전 : 변태


우리가 새롭게 정립해보는 단어와 생활언어들. 이번에는 변.태.

변태 속에 숨어 있는 정상/비정상 이분법에 저항한다.

우리 모두 '변태'로부터 해방되어 변태가 되자!

[변태]


반차별공동행동은 여러 인권운동단체와 개인들이 모여 '반차별 운동'의 내용을 모색하고, 이것을 새로운 액션으로 펼쳐나가는 연대체입니다. 기존에 각자의 영역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었던 운동의 주제와 방식이 교차되고 변화하며, '새로운 연대'가 아니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웠을 '반차별 운동'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반차별 공동행동]
http://chachacha.jinbo.net



이번 웹진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코너인 '변태' 사전 ^^ 아래에 첨부합니당~~














[반차별 용어사전]

  변태 變態

 

사전적 의미)


1. 본래의 형태가 변하여 달라짐. 또는 그런 상태. ‘탈바꿈’으로 순화.

2. [심리]정상이 아닌 성욕이나 그로 인한 행위. 또는 그 성욕을 가졌거나 그 행위를 하는 사람.

 

예문)


- 저 사람 머리스타일 좀 봐. 꼭 변태 같아.

- 동성애를 인정해야 한다구? 그들은 다 변태라구.

- 지난 번 성교육 시간에 보니까, 너 질문도 많이 하구 아는 것도 많은 것 같던데, 너 변태지?

- 최근 등산로 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등산로를 지키고 있다가 여성들이 내려
오 면 성기를 꺼내는 ‘등산로 족’, 고속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성기를 꺼내놓고 자위를 하
는 ‘고속버스 족’, 버스 정거장에서 사람들이 몰려올 때를 기다렸다 아랫도리를 벗는 ‘정
거 장 족’ 등 변태 짓을 하는 장소도 다양하다고 합니다.

- 아니, 어떻게 그런 곳을 애무해 달래? 변태자식!

 


  "너 변태아냐?" "저런 변태 같으니라구"

 여러분들은 '변태'라는 말을 평소 어떻게 사용하고 있나요? 정상/비정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며 뭔가 정상적이지 않거나 부정적으로 생각되는 행동이나 말, 모양에 대해 '변태'라고 부르지는 않나요? 특히 성에 대해 매우 폐쇄적인 한국 사회에서는 성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 그 자체를 두고도 흔히 '변태적', '변태'라 부르기도 하지요.

그런데 정말 '변태'가 변태인가요? ^^;

위의 사전적 정의처럼 '정상이 아닌 성욕이나 행위'가 변태라면, 무엇이 '정상적인 성욕이나 행위'인가요?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조금 특별한 성욕이나 행위가 '비정상'인가요?
사람들마다 성적인 욕구는 다 다릅니다. 각자 성적인 욕구를 채우는 다양한 방식이 있는 거죠. 이 다양한 방식을 누가 정상/비정상으로 규정하고 나누는 것인가요. 오히려 다양한 방식이 있어 더 즐겁지 않나요? '변태'라는 부정적인 낙인으로 인해 성적 엄숙함에 사로잡혀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은 없나요? 왜 다양한 욕구가 인정되지 않고 '변태적인 것'으로 낙인찍어 죄악시하고 억압해야 하는 것인가요.

 하지만 욕구가 잘못된 방식으로 소통될 때에는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위의 예문 4처럼 다른 사람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욕구만을 강요하는 행위는 '변태'가 아니라 '폭력'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그게 성적인 것을 매개로 하는 것이라면 '성폭력'이 되겠고요. 이러한 성폭력은 처벌되고 없어져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번 반차별 용어사전에서는 '변태'의 사회적 의미가 성적 정상성만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을까? '변태'라는 말의 부정적인 낙인 효과를 통해 다양한 성적 욕구들이 금기시되고 억압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단어를 다루어 보았어요~ 

 우리가 변태라 부르는 경우들 안에 담긴 성적 터부와 차별적 의미를 걸러내고 우리 모두 '변태'로부터 해방되어 다양한 성적 욕구를 즐길 수 있는 자유를 누려보아요. 정상적인 성적 욕구? 이젠 안녕~ 즐!^^

 

 

반차별 용어사전의 사전적 의미)


'변태'

1. 성과 관련된 지식 및 자신의 신체적 특징과 기호에 대해 정확히 알고, 그와 관련된 이
야기를 파트너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

2. 이 사회를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이성애 중심의 사고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
람.

3. '정상적인 성적 욕구' 따위 개나 주라지! 하며 자신만의 다양한 성적 욕구를 즐길줄 아는 사람.

4. 자신의 성적 욕구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성적 욕구를 존중하며 소통할 수 있는 사람.


예문)


- 저 친구 전체적인 스타일이 참 독특한데? 변태 같아. 멋지다!

- 너 동성인 그 친구를 사랑한다고? 그 친구도 널? 부럽다! 니넨 정말 멋진 변태커플이 될 수 있을 거야~

- 지난 번 성교육 시간에 보니까, 너 질문도 많이 하구 아는 것도 많은 것 같던데. 너 같은
변태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

- 내가 애무해 주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 이야기해. 어떤 애무를 받고 싶은 지도. 우리, 섹스에 대해서 좀 더 솔직한 변태가 되자구.

- 그 FTM(트랜스젠더 남성) 멋지지 않니? 전화번호 좀 따주라~

 

 

<당신의 변태성을 체크해 보세요~>

 

항 목

o

x

1)

성적으로 끌리는 상대의 특별한 신체 부위(발목, 손가락, 목선 등)가 있다고 편하게 밝힐 수 있다.

 

 

2)

데이트를 하면서 첫 만남 이후 몇 번 만나야 손을 잡고, 그 다음에 키스를 하고..와 같이 단계별로 진전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3)

자위나 섹스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신체의 어떤 부분에 어떤 자극을 주었을 때 가장 오르가즘을 느끼는지 잘 알고 있다.

 

 

4)

섹스는 누군가에게는 애정을 확인하는 행위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상대가 누군지 상관없는 스포츠이기도 하고, 아기를 낳기 위한 도구적 움직임일 수도 하다. 섹스의 목적과 방식은 세상 사람 숫자만큼 다양하다.

 

 

5)

옷이나 외형적 모습에서 남녀의 성역할이 너무 분명히 구별되는 이성애 커플을 보면 뭔가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6)

동거 시, 가사 일을 분담할 때 각자 맡는 역할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7)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이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8)

결혼이라는 제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할 제도이며 죽을 때 까지 한 사람만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9)

나만이 느끼는 무언가에 광적으로 집착하거나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10)

이 세상이 규정해 놓은 것들에 맞춰서 사는 자신보다는 그것을 깨고 사는 것이 진정 자신답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중 O가 5개 이상이면 당신도 변태! 8개 이상이라면 당신은 진정 훌륭한 변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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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9.07.18 13:12


밤이고 비도 오고 해서 사진이 그리 잘 찍히진 않았습니다. 역시 한 5년 전에 산 삼성 디카라서 그런 듯. 삼성 거는 역시 버려야 했음.(원래 밤에 삼성 게 잘 안 찍히기로 좀 유명.) 하지만 새 거 살 돈이 없음 ㅠ



솔직히 말해 약간 힘들었어요. 비가 와서 좀 그랬던 거 같긴 한데. 행사도 후딱후딱; 한 면도 있고
UCC는 좀 한두 편 빼고는 밍밍...

달빛시위의 백미인 시위-행진도, 비가 와서 그렇게 활기차게 못했어요 ㅠㅠ 원래 행진을 재밌게 해야 하는 건데.

전기화와 방가방가시스터즈의 "싸구려신문" 등의 공연은 좋았습니당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속에서 분투하신 모든 분들에게 박수를.


이날 달빛시위에서는 경기서남부 연쇄 성폭력 살인사건, 고 장자연 씨에 대한 제대로 된 수사 촉구, 삼성전자에서 성희롱 사건으로 몇 년째 싸우고 계신 이야기 등이 주로 이야기 됐습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는 "청소년들에게 밤길을 허하라" "야자, 학원만 허락된 우리의 밤길?" "청소년의 외박할 자유 보장하라" "밤10시 신데렐라, 됐거든!" 등의 내용을 피켓으로 만들어서

청소년들의 밤길 통행의 자유를 외쳤습니다 ㅋ

다음 달빛시위에는 내용에 좀 더 반영되게 고민해봐야겠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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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9.06.25 00:51

[페미니즘인(in)걸] ‘여성’의 이름으로 체벌을 거부한다는 것(2)

조금 덜 아프게 맞은 대가는?

난다


청소년인권활동이란 걸 하고 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불편한 것들’을 인식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미친 학교를 혁명하라’ 라는 집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날의 경험은 나를 흔들어놓았다. 그러다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학교를 그만두면서, 지금과 같은 활동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청소년인권은 어느새 내 삶의 중심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학생인권은 내가 하는 청소년인권운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대부분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어찌 보면 안타깝지만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학생인권은 학교 안 청소년들의 인권을 말하는 것인데, 두발자유나 체벌금지나 또는 강제야자 반대 같은 게 대표적인 목소리이지 않을까 싶다.


성별에 따른 폭력의 강도 차이

이제 1년 조금 넘게 활동을 하면서 그 동안 캠페인이든, 집회든, 청소년의 목소리를 담은 문화제이든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학교가 정해놓은 선 밖으로 나온 청소년들을 꽤 많이 만났다. 처음엔 무조건 많이 만나는 게 중요했다. “청소년들의 직접행동이 중요해요!” 라고 외치면서 여기저기 얘기하곤 했다. 그러다가 요즘엔 점점 어떤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학생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여성 청소년들보다 남성 청소년들의 움직임과 분노가 더 크고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서명을 받거나 캠페인을 하거나 할 때는 적극적인 액션이 다들 비슷비슷하긴 한데, 행동을 고민하고, 불만을 더 크게 터뜨리는 쪽은 남성청소년들이 대부분이었다는 ‘현상’이다. 왜 그럴까? 왜 남성청소년들이 더 적극적이고 더 많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확실히 남성청소년들(앞으로는 남청) ‘신체적인 폭력'에 노출되기가 더 쉬웠던 것 같다. 어렸을 때, 친구끼리(남자애들끼리) 때리고 맞고 하고서 집에 들어오면 "뚝! 울지 마!" 하면서 남자애들은 싸워가면서 크는 거라고 말하곤 하는 상황을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반대로 어느 누구도 여자애들이 서로 치고 박고 때리고 하면서 크는 거라는 얘길 들은 적이 없을 것이고, 그렇게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일들은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교사들이 체벌을 행할 때, 여성청소년들(앞으로는 여청)은 상대적으로 더 살살 때리기도 하고, 봐주기도 한다. 똑같은 잘못-이라고 규정되는 것들-이었는데, 나는 손바닥을 맞고, 나와 같은 반의 남자애는 허벅지를 '거칠게' 맞았다. 왜 그랬을까? 답이 나오긴 한다. 왜냐하면 남자애들은 강하게 커야 하니까. 어릴 때부터 거칠고, 강하게 커야 '진짜' 남자 소리 듣지.

그래서일까, 남청들의 적극적인 액션은? 더 많이 규제 당하고, 더 많이 잡히고, 더 많이 맞기 때문에? 더 불만이 많이 쌓이기 때문에?

 


체벌은 남성청소년들 사안일까

이렇게 보면 학생인권의 주요 이슈 중 하나인 ‘체벌’은 여청들의 이야기라고 하기엔 거리가 있는 것도 같다. 확실히 여청들은 상대적으로 체벌에서 비껴나 있다. 남청들이 100대를 맞는다고 하면 여청들은 40대를 맞는다고나 할까. 그래서 남청들은 여기에서도 불만을 표하곤 한다. "여학생들은 왜 살살 때리냐", "여학생은 왜 덜 잡냐", "남녀 차별이다." 등등. 체벌의 강도나 횟수로만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여청들은 남청들보다 더 나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걸까? 여청들에게는 체벌을 안 당하는 대신, 그 체벌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폭력이 존재한다. 광주의 한 학교에서는 교사가 벌로 한 여학생에게 치마를 벗고 교실을 한 바퀴 도는 것을 시켰다고 한다. 여청들에게는 이처럼 ‘수치심’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벌’을 주곤 한다. 거칠고 강하게 자라기를 요구받는 남자애들과는 달리 착하고 부드럽게 자라기를 요구받는 여자애들을 팰 순 없으니, 몸 처신 잘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끊임없이 존재한다. ‘체벌 대신 성추행을 당한다’, ‘더 많은 통제를 당한다’ 라고 하면 너무 비약일까나.

성별 권력이 인정하기는 싫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한, 더없이 폭력성이 드러나는 공간인 학교에서, 비록 '학교'라는 특수성-교육의 장이라든지, 하는 겉으로만 좋아 보이는 것 때문에 여성/남성이 아닌 '학생'으로써 입시경쟁의 문제가 주로 부각되는-덕분에 묻혀있으면 묻혀있지 그것이 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성역할은 구분되어 왔다. '성'의 구분이 아니라, 성'역할'의 구분이다. 철저하게. 이런 성역할, 거기다 청소년을 연결해볼까? 성역할의 구분뿐만 아니라 그 역할을 잘 수행해내게 하기 위한 기대도 확 커진다. 청소년은 기대 받는 '자원'들 아닌가. 이 사회를 잘 굴러가게 하기 위해 틀에 맞춰진 좋은 여성이, 좋은 남성이 되길 우리는 기대 받는다. 그래서 여청과 남청은 다른 방식으로 통제당하고, 다른 폭력을 몸에 각인하고 살게 된다.



체벌에 다른 성역할 고정과 학생들 간 분리 효과

체벌은 태초부터(!) 폭력이다. 학교 안 남청들에게만 더 많이 가해져서, 차별이어서가 문제인 것이 아니다. 체벌로 신체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 자체가 문제이고, 그런 폭력을 겪으면서 여성성과 남성성의 성역할을 더욱 명확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이다. 뿌리 깊은 가부장제로 먹고 살아온 이 사회를 알게 모르게 유지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학교는 그런 점을 미처 보지 못하게 만들고, 누가 더 맞고 누가 덜 맞았는지 치사한 차별-평등 논리만 오가게 된다. 그래서 더 무시무시하다. 그곳에서 남성청소년들은 여성청소년을 공격한다. “나도 맞았으니, 그리고 나도 걸렸으니, 너도 맞아야 하고 걸려야 해.” 라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이끄는 곳이 학교다.

폭력은 학교 내 권력질서에서 발생한다. 벌을 받는 일은 학교에서 벌어진다. 그렇기에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처럼 똑같이 맞는다고, 벌을 받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당장은 더 맞고 덜 맞는 차이가 보일지 몰라도, 결국 그런 차별 대우(?)의 피해자는 여학생 남학생 모두이다. 벌 받는 건,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건, 어떤 방식이건, 매한가지다. 남청들이여, 여청들과 손을 잡을지어다. 당신들의 고통은 여성들이 그만큼의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청소년들이여, 꾸준히 폭력을 행하고, 벌을 줌으로써 청소년들을 통제해야한다는 생각이 깊이 박힌 낡은 학교에, 성역할을 깨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만들려는 무시무시한 의도를 가진 이 사회에, 함께 손을 잡고 어퍼컷을 날릴지어다.


덧붙이는 글
난다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 입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158 호 [기사입력] 2009년 06월 24일 14: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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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9.04.07 17:25

--- 사실은 이거, '페미니즘의 이해' 수업에서 과제가 여성학 주간 행사 참여하고 감상문 써내는 거라길래 쓰던 거였다.
근데 열심히 쓰다가 다시 안내를 보니까 그냥 여성학 주간 행사가 아니라 "여성학 주간 학술행사"로 되어 있다. 쿠궁!!
난 학술 행사는 하나도 참가 안했다 -_-;;;;;;
그래서 허탈해져서 그냥 과제로 내는 건 포기하고 원래 계획보다 줄여서 2페이지 정도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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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거의 학교 안에 적을 두고 있지 않다고 해야 할 정도로 대학생으로서는 불성실한 내가 오래간만에 학교에서 뭔가를 해볼 일이 생겼다. 3월 30일부터 시작하는 여성학 주간. 서울대학교 여성학 협동과정 10주년 행사라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여성학 협동과정 그 자체의 역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서울대 안의 여성학이랄까 여성주의랄까 그런 것의 흐름이나 현재에는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2월 무렵 관악여성주의자모임(관악여모)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아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페미니즘 문화제>, <페미니스트 박람회> 준비까지 같이 하게 되었다. 내가 관악여모를 같이 하자고 제안을 받아서 하겠다고 한 건지, 페미니즘 문화제 사업을 같이 하자고 제안을 받아서 하겠다고 한 건지, 뭔가 헷갈렸지만 그냥 둘 다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무방할 듯했다.
  하지만 정작 3월 10일로 되어 있던 일제고사가 3월 31일로 미뤄지면서 본업인 청소년인권운동이 3월 31일까지 바빠져 버렸고, 페미니즘 문화제 준비 등은 계속 시간을 쪼개가며 같이 할 수 있었지만, 여성학 주간에는 충분히 참여하지 못했다. 3월 31일에 일제고사가 끝나고 그 여파로 거의 이틀간 부족한 잠을 보충해버렸기 때문에, <페미니스트 박람회> 컨셉으로 진행된 전시와 페미니즘 문화제 자체만 참여하고 그 외의 시간은 잠을 자거나 준비 중인 출판 작업에만 매달리게 됐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결국 여성학 주간 행사 중에서 참여한 건 <페미니스트 박람회>와 <페미니즘 문화제>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여기에 쓸 만한 이야기도 일단은 그것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다.

  한 2년 정도 단절되었던 페미니즘 문화제를 다시 살려보자, 페미니스트 언니들이 아직 이 캠퍼스 안에 있다는 걸 알려보자, 정작 눈에 띄는 페미니스트는 없이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야기들만 무성한데, 그 이야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페미니스트 우리들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페미니스트 박람회>라는 컨셉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은, 준비하는 내내 우리는 우리가 대체 뭘 해야 하는지가 명확하게 잡히지 않아서 허우적거렸던 것 같다. 사회대여성주의연대(사연)에서는 과거에 사연에서 활동했던 페미니스트들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해서 영상을 만든다고 한다. 난리부르스에서는 ‘해피엔딩의 조건’으로 상처를 이야기한다고 한다. 우리는? 서울대 안에 있는 ‘페미니스트들’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또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우리에게는 성폭력 같은 선명해 보이는 주제가 있나? 아니, 그런 주제를 찾으려고 하는 게 맞긴 한 걸까?
  <페미니스트 박람회>와 <페미니즘 문화제>를 준비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었다. 퀴어, 연애, 군가산점, 성폭력, 흡연, 옷차림, 가족, 여성가족부…. 이야기할 게 없는 게 아닌데, 마치 주위를 둘러보니 360도 모두 갈 수 있기 때문에 길이 없다고 표현해야 할 상황 같은 그런 느낌. 조금씩 끌리는 것들은 있지만 확 끌리는 건 없는 상태. 굳이 주제를 “페미니스트” 그 자체로 잡았던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야기들과 사람들에 대해 더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명확한 목표가 있어서 미래를 지향한다기보다는, 현재를 점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공들여 만든 전시물들이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전시되었고,(목요일은 문화제 준비하느라 미처 못했다.) 금요일에는 페미니즘 문화제가 치러졌다. 월요일에는 페미니스트들이 모여서 학교 안을 행진하고, ‘말풍선 터뜨리기’ 뭐 그런 캠페인 겸 퍼포먼스 같은 것도 했고… 좀 아쉬운 건 전시에 대한 사람들의 피드백을 많이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무슨 이야기라도 있나 싶어서 스누라이프 같은 곳에 가서 검색을 해봤지만 관련해서 올라온 글은 한 개도 없다. 좀 ‘파문’을 일으켜보고 싶었는데 별 반응이 없다. 킁. 퍼포먼스와 문화제는 재미있었다. 비록 사람은 20명 좀 넘게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만큼의 사람들이 그래도 서울대 안에 있다는 걸 확인했다는 걸 긍정적으로 평가하련다. 문화제 준비하면서 체감하게 된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자유로운 자치적 활동에 걸려 있는 온갖 규제들은 날 짜증나게 했지만. 다음번에 또 준비한다면 좀 더 풍성하게, 그렇게 하고 싶다. 이번에도 충분히 재밌긴 했지만 아무래도 좀 풍성함이 덜했달까.

  요즘 꽂혀서 듣는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우리 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걸어온 거야. 언제나 길의 끝에 서있던 사람들이 우리가 온 길을 만들어온 것처럼. ……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이제는 우리가 빛이 될 차례야. 그렇게 왔잖아, 우리 당당하게. 이제 진짜 우리의 시간이 온 거야.”  (지민경, 「길 그 끝에 서서」 中)
  이번 <페미니즘 문화제>와 <페미니스트 박람회>를 하면서 든 생각이 딱 이런 거였다. 더 이상 대학교 안의 여성주의 단위로서 무슨 활동을 해야 할지 뚜렷하게 보이는 게 없는 건 우리가 길 끝에 서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다. 그리고 이번에 해본 <페미니즘 문화제>와 <페미니스트 박람회>는 그 길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서있는 지금 여기를 살펴본 자리였다.

추신 : 처음에는 여성학 주간 행사로 신청해서 준다고 한 100만원 그거 많아보였는데 포스터 좀 뽑고 이젤 좀 사고 해보니까, 절대로 돈이 여유 있는 게 아니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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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9.03.30 11:02


원래는 아즈망가 대왕이나 와라 편의점 뭐 이런 것들의 형식을 빌린, 일종의 연작 4컷 만화 같은 걸 구상했지만
열심히 그리던 걸 일제고사 반대 홍보 뛰다가 분실해서 ㅠ
급하게 그린 2컷짜리... 끙 너무 메시지 성이 강하고 스토리성이 약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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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9.02.11 12:35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이후에 곧장 쓰려고 했는데, 뭐 어찌어찌 좀 정신 없이 지내다보니...

그렇게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고,,,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을 "좌파/진보진영의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이 되는 문제라거나 뭐 대충 그런 류의 이야기들에 대한 삐딱한 반응이랄까, 그런 것.




그러니까, 민주노총이라고 해서 특별히 성폭력을 해선 안되다, 뭐 그런 윤리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죠.
물론 모든 사람들은 성폭력을 해선 안 되고, 모든 모임들은 성폭력을 은폐하려고 하거나 소홀히 다뤄선 안 된다, 이렇게 보편적인 윤리는 당연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민주노총이건 아니건,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은폐하려고 하거나 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책임을 묻고 바꿔 나가야 할 것들입니다.
(가해자 개인이 아닌 민주노총 또한 책임이 있는 것이, 가해의 맥락이 민주노총이란 조직의 움직임이나 당시 정황과 무관하지 않고, 성폭력 가해자가 조직 중심부의 일원인데 평소의 성차별적 인식이나 성폭력 예방의 미흡함에 대해서도 고려할 필요가 있고, 또 이후 사건 처리에서도 잘못한 것들이 있지요.)

하지만 "진보진영의 대표격인 민주노총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고 이를 은폐하려고 하다니 어찌 그럴 수가!!" 뭐 이런 반응은 좀, 근거가 없달까,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만들어진 이미지에 안주하고 있다고 해야 할지... 보수는 실용이 중요하고 진보는 윤리(명분)이 중요하다. 뭐 그런 류의 만들어진 이미지.
민주노총이니까 더 윤리적이어야 하고, 그러니까 더 까여야 한다- 이런 건 글쎄요;


민주노총은 뭐 단순하게만 분류하면 "노동운동"(또는 노동자/자본가 의미에서의 계급운동)을 하는 조직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노동운동을 하는 조직이니까 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특히 민감하고 윤리적이어야 해"라고 하면 뭔가 - 흠; 민주노총이 성폭력에 더 윤리적이어야 하는지 어떤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예컨대 성폭력상담소나 반성폭력운동을 하는 곳이나 여성주의 단체에는, 성폭력에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도 있겠죠.)

제가 "특히 윤리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건, 민주노총에서도 직장내 성희롱이건, 성차별이건, 그런 것에 대한 운동도 하고, 여성위원회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좀 애매-하단 거죠


제가 애초에 "진보"라거나 "진보진영"이라는 규정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는데,
"진보"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특히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거나 하는 건 별 근거가 안 보여요.

"보수"나 "진보"나, 자기가 주장하는 것 자기가 하는 말에 자기 삶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하고 일관되어야 한다는 뭐 그런 요구는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받을 수 있지만요.

요컨대 진보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거나 더 훌륭해야 한다거나 하는 요구는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부터 이 사회가 그렇게 성폭력에 민감했나 싶기도 하네요. -_-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에 대해 처음 기사를 봤을 때, 솔직히 별로 놀라진 않았어요.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느낌이었달까요.
성폭력이 있을 수 있는 일이란 게 아니라.. 특별히 민주노총이라서 놀라진 않았단 거죠.
(예전에 운동사회 성폭력 100인위 활동 자료집을 구해서 읽은 적이 있는데- 그래서 그럴지도 -_-;)


뭐, 이런 말을 하면 "대중의 인식"이라거나 "조직의 이미지"라거나 기타 등등,
방법론적인 이야기들로 저를 비판할 거리들은 많겠지만
아 성명서나 언론 작업 할 때나 그럴 때는 그런 거 다 고려하고 얼마든지 방법적으로 움직일 테지만
솔직한 심정은 이렇다구요-


어찌 되었건 이번 성폭력 사건의 '해결'을 바랍니다.
그 '해결'이 피해자의 치유이건, 가해자의 변화이건, 민주노총의 반성이건...
민주노총 지도부의 총 사퇴는,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는 의미는 있을지 몰라도 성폭력 사건의 '해결'을 직접적으로 달성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p.s.1 최근에 '반차별공동행동' 워크숍 겸 MT를 갔을 때
남는 시간에 "가치관 경매"라는 게임을 했는데
"가부장제 철폐"가 3700만에 낙찰되었다지요. (1인당 1억씩 쓸 수 있고)
"이명박 퇴진"이 600만이었던 것에 비하면, 가부장제 철폐에 대한 염원은 이명박 퇴진보다 6배는 더 절실한 것 같습니다.


p.s.2 성폭력은 어떤 특별한 사건이 아닌 일상의 연장이고 일상이니까
저부터 갈고 닦아야겠지요.


p.s.3  마찬가지로, "그래도 우리가 인권운동하는 사람들인데"라면서 더 많은 윤리나, 더 많은 소통이나, 더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일종의 특권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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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8.08.26 01:51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차별은 인권의 시각에서 정의되거나 문제화되지 않고, 가족주의, 민족주의 등 남성 공동체의 관점과 이해에 따라 규정되는 경우가 많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中




얼마 전에 

조윤선, 한 여자가 희롱당하는 방법


이라는 글을 올블에서 보고 좀 화가 나서 덧글을 달았었다.


덧글의 내용을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대충,

글 앞부분에서는 한나라당의 성폭력 사건들을 한나라당을 비난하는 근거로 활용하고 있는데, 정작 이 글을 쓴 사람은 전여옥 씨의 외모를 가지고 폄하하거나 "매춘부" "음탕한 관기" 등의 표현으로 여성을 비하하고 차별하는 의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서 화가 난다(또는 불편하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시간이 좀 지났으므로 일부 왜곡이나 편집되었을 수도 있다 ;;; 현재 확인이 불가능하니...



확인 불가능하다는 말에서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는데,

이 덧글을 달아놓고 며칠 잊어버리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찾아 들어가봤는데,

내 덧글이 삭제되고 없었다.

또 좀 화가 났다 -_-

혹시라도 전산 오류로 내가 덧글을 등록한 게 저절로 증발해버렸을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자)
하지만 이런 경우에 일단은 블로그 운영하는 분이 삭제했다고 추정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삭제한 것 자체를 가지고 많이 왈가왈부하지는 않겠다.
욕설이나 상업광고를 써놓은 것도 아니었는데 다만 반대 의견을 써놨다고 해서 삭제한 것은 화가 나고 또 전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블로그 주인장으로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삭제한 게 아니라 뭔가 인터넷 오류라면, 이런 억측에 사과드리겠다.)


어쨌건 이번에는 삭제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 블로그에 좀 더 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없는 시간을 쪼개서 글을 쓴다.



----------


그 글을 쓴 사람은 여성인권이나 성폭력 등등의 문제를,
'남성들의 정치'에서의 수단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 무슨 소리냐 하면...
음 좋은 예로,  민주당은 한나라당을 성폭력당이라고 마구 공격하지만, 나는 과거 민주당 당내 성폭력 사건 때 민주당의 주요 인물들(유시민 등을 포함해서)이 보인 태도를 대충 듣고 읽어왔다. -_-
  한나라당을 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한나라당의 숱한 성폭력 전력들은 분명 까기 좋은 소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 대부분은 진정으로 여성주의나 여성인권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 성폭력 운동이나 여성주의에 대해서도 실상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고,
  정작 '자기편'이 그런 문제로 공격을 받게 되면 급방어적이 되기 쉽다.




또한 그 분은 '지적이고(학벌 좋은) 외모가 예쁜 여성'과 '타락한 매춘부(또는 관기)'를 분리시키려 하는, 성녀-창녀 이분법의 변형된 유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나라당의 말도 안 되는 주장과 논리와 자극적인 정치 공세들을 말하는 것을 비하해서 표현하는 게 어째서 '매춘부'나 '관기'라는 표현일까? 왜 한나라당의 말도 안 되는 논리나 자극적인 정치공세를 펴는 것이 "정절을 지키지 못하는 것"인가?
이는 여성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은 아닌가? 여성을 성애의 대상으로 환원하여 보는 지극히 남성중심적인 판단 기준이 아닌가?

이 분이 언급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자극적 정치공세나 욕설들보다,
오히려 이분의 "매춘부"나 "관기", "환향녀" 등등의 언어 폭력이야말로 더 반여성적이진 않은가?





그 분은 한나라당의 성폭력들이나 여성 인권 의식 없음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분은 여성을 '소비'하는 이 사회의 한 남성으로서
'예쁘고 학벌 좋은' 여성이 대변인이 되어서
한나라당의 저급한 논리와 언어(한나라당이 뷁스럽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를 말하는 위치가 되어서
점차 '타락'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문제는, 여기에서 타락의 예로 제시된 것 중에, 여성이 성적인 욕설-용어, 이른바 '음담패설'을 하거나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분은 정말 엘리트주의적이고 여성의 성에 대해 보수적이다.)

(또한 그분에게 전여옥 씨는 그 나이듦과 외모 때문에 남성이 아까워할 가치조차 없는 여성이었다!! 실로 노골적인 여성 상품화/대상화 방식;;)


그리고 그 '안타까워함'의 진짜 목적은 한나라당을 까는 것이었다. ㄷㄷㄷ...




뭐랄까 마치 미군에 의한 성폭력 범죄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여성들의 인권과 상처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이를 "민족의 수치"라고 하며 남성들의 수치이거나 피해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미군 성폭력 범죄나 위안부 문제를 반미 정치나 반일 정치의 수단 정도로만 여기는 사람들

뭐 그런 걸 볼 때 같은 심정이랄까...





여하간 결론은,

참 그랬어요 ㄹㄹ -_-   토나와요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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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8.08.19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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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청소년, 보호주의에 묻힌 성적 자기결정권

난다

시간이 좀 흘렀지만, 촛불집회에서 연행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혹시 아실까 모르겠어요. 그 때 기사가 났었는데, 대부분 기사 내용이 '집에 가고 싶다고 울부짖는 여중생...' 뭐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났어요. 근데 사실 전 집에 가고 싶다고 울부짖고 그런 적 없는데, 그 때 언론들에서는 모두들 '집에 가고 싶어요, 무서워요, 저 보내주세요 흑흑... 한 여중생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런 내용을 담았었죠.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어린 10대 소녀로, 그 기사들은 절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청소년은, 보호해줘야 할 약자, 보호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당사자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에요. 언제부터 나는 누군가가 지켜줘야 했을까요? 왜 나는 보호받아야 할 어린 소녀일까요? 연행당할 때 '미성년자는 풀어줘라!'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10시 이후에는 집회에 남아있지 말고 집에 들어가라고 할 때, 항상 따라오는 건, 내가 '청소년'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청소년이라 못하고, 안되는 게 굉장히 많아요. 일단 술 담배 마음대로 못 삽니다. 찜질방도 10시 이후로는 보호자 없이는 출입 못 하구요. 숙박시설도 보호자가 없으면 마찬가지로 잠 못 자구요. 그래서 청소년들은 밖에 나와도 잘 곳이 없어요. 이 모든 것들은 다 유해환경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 라는 건데, 그 유해환경에 '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선거에서 당선돼 우리가 다시 한숨 쉴 수밖에 없게 만든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관계를 한 학생은 퇴학시킬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청소년은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사회의 시선에서 비롯됩니다. 청소년은 아직 판단력이 미숙하고, 경험이 부족하고, 그렇기 때문에 유해환경에 쉽게 물들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는 약자인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호해주겠다는 말 속에 권력 관계가 있는 거고, 보호라는 말로 포장된 통제나 억압, 지배가 있게 됩니다. 보호라는 말로 차단시켜 놓음으로써 격리시키는 효과도 있는 것이구요.
보호는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보호만 싹 없앤다면 여러 문제들이 생길 수 있지만, 그렇다고 보호만 하는 것이 맞나? 그것은 현상 유지를 위한 방책이지, 해결을 위한 노력이 아니지요. 어느 선에서 차단만 시켜놓는 미봉책입니다. 예를 들면, 청소년 유해 환경이라고 했을 때 뭔가가 유해 하다면 유해 환경 자체에 대한 개선이 필요한 건데 그것을 출입 금지로만 그냥 금기시 해놓는 것. 성을 이야기 하자면, 그러니까 성을 금기시하는 이유는, '너희들, 잘못하면 임신할 수도 있으니까'인데, 지금 사회에서 청소년이 임신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낙태'를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단 청소년들은 비청소년들보다 경제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낳아서 어쩔건데?'가 되어버리는거죠. 또 사회적인 시선들, '아니, 저 어린 것들이.' 하는 비난의 눈길. 하지만 청소년들이 임신 했을 때, 낳아서 양육할 수 있게 하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어야 하는거 아닐까요? 임신을 하면 인생이 불행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을 통제해서 막겠다는 것은 문제를 덮어 놓거나 어느 선에서 눌러버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성을 금지했을 때, 보호하려 했을 때 보다 청소년의 임신율, 낙태율, 이런 것들이 수치상 줄어들 순 있지만 사라지는 것은 아닌거고, 청소년의 행복과도 거리가 멀어지지요. 또 사실 낙태 비율만 놓고 보자면, 기혼 여성의 낙태율이 제일 높다고 해요. 임신을 하고도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해 아이를 지워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양육 문제는 청소년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양육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리고 있는 사회의 문제인거죠.
다시 보호주의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여자니까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습니다. 밤이 위험해지는 환경, 밤에 범죄 위험(성폭행, 납치, 살인 등..)이  높은데, 범죄의 위험성에 대해 CCTV설치 정도로 해결하려는 것이나, 위험하니까 일찍 집에 들어오라고 하는 것들. 그 위험한 상황을 개선하는 게 아니라, 그냥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는 것도 비슷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찌 보면, 밤길 이야기는 '여성에 대한 보호'로도 읽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소년이든, 비청소년이든, 여성이 남성보다 더 쉽게 '보호의 대상'이 됩니다. 비청소년이 되어도, 여성인 경우 집 안에서 외박을 금지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청소년 연행 사건에 대한 기사의 내용도, 실은 그 청소년이 남성 청소년이었다면, 그런 식의 기사는 나오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호'에 있어서, 청소년 사이에서도 성별의 차이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특히 성, 섹스에 관해서는 나이보다 성별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청소년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보호주의'라는 것에 '성적자기결정권'은 묻히게 됩니다.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아직 당연한 얘기가 아닌 것 같아요. 인정받지 못하고, 주위에 숨겨야 될 것만 같은 분위기, 청소년이 섹스하기엔 사실 너무나 열악한 환경,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없는 것들, 등등. 하지만 성에 대한 통제가, 청소년의 성을 금기하는 것도 있지만 비혼이란 범주에 청소년이 속한다고 본다면, 20대일지라도 비혼일 경우는 섹스했다고 하면 그런 분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은 청소년이더라도 비혼부는 없고, 비혼모는 있지요. 임신후 결과에서, 여성 청소년에게만 더 많은 성적 통제가 가해지고, 남성 청소년의 경우는 다른 얘기가 되는 것이구요. 남성 청소년의 성경험이 여성 청소년보다 일찍 시작한다는 통계도 있고 경험에 대한 해석에서도 여성 청소년보다 남성 청소년에게 훨씬 관대하게 적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청소년과 남성 청소년의 차이. 결혼을 중심으로 봤을 때, 결혼하지 않았다는 게 여성 청소년에게 훨씬 크게 적용하지요. 혼전순결에 대한 사회적 강박 같은 걸까요? 
사랑니라는 영화를 보면 여성 학원 교사가 남자 아이와 여관을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모텔 종업원이 비난을 할 때는 그 여성에게 비난을 가합니다. 20대, 30대 남성과 10대 여성이 할 때에도 도덕적 비난의 대상은 일반적으로는 여성에게 가게 됩니다. 그 때는 '저 발랑 까진 어린 것이...'라는 얘기가 되는 거지요.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아직도 쉬쉬하는 사회. 보호를 위한 건가요? 그렇다면, 그 보호를 거부하겠습니다. 이제는 당당히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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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속에서도 권리를 외치다


공현


청소년 성폭력 사건의 그 ‘특별함’

  청소년(아동) 성폭력 사건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분명 웬만한 청소년 성폭력 사건들은 남성과 여성의 성별 권력(물론 구체적 사건에 따라 +a가 있다.) 속에 일어난 여타의 성폭력 사건과 그리 다르지 않은 성폭력 사건일 텐데, 청소년 성폭력 사건이 알려지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온갖 ‘특별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사람들은 아동-청소년이 피해자이고 비청소년-‘성인’이 가해자인 사건(예컨대, 최근에는 혜진 씨 예슬 씨가 피해자였던 사건)이 공론화되었을 때는 천인공노(天人共怒), 인면수심(人面獸心) 등 한자어를 써가며 혀를 끌끌 찬다. 그러면서도 집에서 무슨 변태 성욕의 증거가 발견되었다면서 가해자를 열심히 자신들과 다른 존재로 타자화 한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보호주의를 발동시켜서 성폭력 범죄자들을 더욱 빡세게 처벌하겠다는 법률 개정 검토를 하고, 부모들은 아동 성폭력 피해 예방을 위해 밤길 조심하고 처음 보는 낯선 사람 조심하고 등등의 조심 사항들을 내놓는다.
  아동-청소년이 가해자인 사건(예컨대, 대표적인 것이 2004년에 있었던 밀양에서의 집단 성폭행 사건)이 공론화되면,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가벼운 처벌이 내려지는 것에 대해 사회적인 비난이 커지며, ‘미성년자’들의 ‘충동적인’ 범행에 대해 공격이 가해지고 청소년들의 ‘미성숙’함이 강조된다. 청소년에 대한 음란물 규제와 같은 조치도 항상 따라 다닌다. 최근에 있었던 ‘대구 초등학교 성폭력 사건’에서도, 정부에서 검토한다고 한 조치는 결국 ‘음란물 규제’가 아니었던가?
  분명히 아동-청소년들의 성폭력 사건은 대개 성별 권력이 더욱 강하게 작용한 ‘전형적인’ 성폭력 사건이다. 아동-청소년들의 사회적 약자로서의 지위가 반영된 경우도 많지만, 더 강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성별 권력이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에 대한 책임 전가라거나 사건을 공론화시키는 것을 금기시하는 모습도, 여타의 성폭력 사건들과 비슷한 모습들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아동-청소년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이 사회의 태도는 아동-청소년들의 특수한 위치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아동-청소년 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 청소년의 특성을 고려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청소녀/년의 성적 결정권”이란 이름으로 특별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청소년에게 위험한 성

  그렇다. 청소년에게 성(性)은 위험한 것이다. 이 말은 어쩌면 여성에게 성은 위험한 것이다, 라는 말과도 비슷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여하간 청소년들에게 성은 위험한데, 하나는 아동-청소년 성폭력 때문(가해/피해 모든 면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청소년에게 성행위는 금기시되며 그러다가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난감하기 때문이다.
  성폭력의 위험은 연령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아동-청소년 성폭력에 특히 민감한 이 사회(이게 과연 ‘약자에 대한 폭력에 분노’하는 ‘순수’한 마음일까?)에서는 아동-청소년 성폭력만 특히 강조되기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성폭력은 특히 위험하다. 하나는 ‘자라나는 새싹들’인 청소년들이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충동적’이고 ‘미성숙’한 청소년들이 성폭력의 가해자가 될 가능성 때문이다. 이 인식 안에는 청소년에 대한 이중적인 고정관념들이 이중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청소년들에게 성이 위험한 두 번째 이유는, 청소년들의 성행위는 이 사회에서 금기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성행위를 금기시하는 데는,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신세망친다, 라는 사회경제적 지위의 문제와 더불어 청소년들에게 이 사회가 부여하는 생애주기-나이주의(나이주의라는 말은 여기선 매우 복합적으로 나이에 따른 권력과 위계를 뜻함과 동시에 나이에 따라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생애주기의 의미를 지닌다.)의 문제가 동시에 얽혀 있다. 고등학교 때인가 국어 선생이 “어른”의 어원이 성행위를 경험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청소년들이 성행위를 하는 것은 사회가 정한 청소년들의 틀과 지위를 벗어나는 일이기에 위험하다.
  최근 인기 도서인 『88만원 세대』를 보면 첫 챕터에 “첫 섹스의 경제학, 동거를 상상하지 못하는 한국의 10대”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 10대들이 섹스를 하지 못하는 경제적인 문제를 구구절절 분석해놨는데, 옳은 소리이긴 하지만 청소년들의 성행위를 금기시하는 것이 꼭 경제적 지위의 문제만은 아니다. 30대 기혼 여성이 임신을 했는데 경제적 여건이 매우 곤란한 경우 주변에서는 걱정을 하고 염려스러워 하긴 하겠지만, 10대 미혼(비혼) 여성이 임신을 한 경우에는 비난과 좀 다른 스트레스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청소년 안의 성별 권력

  그런 이야기로 원고의 반절을 쓰고서도, 또 청소년들 사이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청소년’의 특수성을 생각해야 하지만 동시에 청소년들 안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존재한다. 청소년이 가해자인 성폭력 사건들도 충분히 그런 점을 보여주고 있고, 일상적으로는 수업 시간에 남성중심적인 성적 농담을 통해 친밀한 공모 관계를 형성하는 남성 교사와 남성 학생들의 관계를 봐도 그렇다. 최근에 중국으로 수학여행을 가서 성구매를 한 남성 청소년들에 대해 교사가 통제를 잘못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언론이나 사람들을 봐도 남성의 성욕은 통제할 수 없다는 식의 판타지는 계속된다.(물론 거기에는 ‘미성숙한’ 청소년들을 ‘성숙한’ 성인들이 관리해야 한다는 의식도 같이 있다.)
  또한, 바로 요 앞에서 청소년들에게 성이 금기시되고 있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이 또한 남성 청소년의 경우와 여성 청소년의 경우가 다르게 취급되며, 미혼/기혼 기준 또한 여성 청소년들에게 매우 강하게 적용된다. 남성 청소년들의 성행위에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난다의 발제에 충분히 자세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나와 있으니까 이만 줄이겠다.)


청소년의 성적 권리

  그래서, 도대체 논리적으로 이어지는 것 같지 않은 이 토막난 원고의 끝은 청소년의 성적 권리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발제라는 게 원래 시원한 답을 던져주는 게 아니라 함께 토론할 이야기거리를 꺼내보자는 것이니 속 시원하지 않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청소년의 성적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고 인정되어야 한다. 비록 아동권리협약에서도 언급하지 않는 홀대받는 권리이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권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성적 권리라는 것은 성적 자기결정권, 성에 대해 알 권리, 성평등(동성애나 성전환 등을 포함한)에 대한 권리 기타 등등을 의미한다. 비록 청소년의 성적인 자유가 힘 있는 남성 청소년들에게 단순한 자유주의나 프리섹스로 오인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청소년 안에서 성적 권력 관계가 엄존하기에 수많은 고민들이 필요하더라도, 청소년의 성적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
  청소년에게도 자기결정권이 있다, 라고 하면 “그래 당연하지. 하지만…” 정도로 말하는 사람들도 청소년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해 이야기하면 매우 과민하게 반응한다. 왜 이 사회는 청소년들의 성적 권리에 대해서는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할까? 그것이 그토록 위험한가? 그것이 정녕 그리도 위험하다면, 그것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적어도 그 사람들이 18세 이전에 섹스를 하면 자궁에 질병이 생길 확률이 몇 배 높아지고 어쩌구 저쩌구 하는 이유 때문에 ‘위험’하다는 건 아닐 테니까.) 청소년들에게는 성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성을 권리가 아닌 보호와 통제, 위협의 관점에서만 접근할 때 청소년들은 그리 행복하지도 못할 것이고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A4를 3페이지나 낭비했다는 것은 죄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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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딱딱한꿈2008.06.18 14:24


이걸 리포트라고 해야 하는 건지...

흠 자기고백적으로 쓰긴 했는데 --;;

원래 15일까지였는데 3일이나 딜레이해서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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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