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학생인권조례, 보호와 인권이 대립되지 않는 교육을 꿈꾸다

공현 2011. 6. 18. 06:27
경희대 교지 고황 81호에 실은 글입니다.  http://www.khkh.net/








학생인권조례, 보호와 인권이 대립되지 않는 교육을 꿈꾸다




차별의 가장 부드러운 얼굴?

혹시 선생님… 당신은 환자를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까…? 약하고 불쌍한 환자들을 정의의 아군인 자신이 지켜주고 있다…. 그 감각이야말로… 바로 차별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차별이란 누군가를 업신여기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환자를 지키려하고 있어요…. 이것도 어떤 의미론 차별입니다…. 즉 당신은 환자를 자신보다 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위선입니다….
- 사토 슈호,『헬로우 블랙잭 9』


  “‘보호’의 반대말은 뭘까요?” 내가 인권교육이나 강연을 나가서 곧잘 던지곤 하는 질문이다. 나오는 대답들은 여러 가지다. “비보호”(교통표지판?), “방임”, “방치”, “책임”, 그리고, “자유”나 “인권”까지. 이 중 뭐가 정답일지 고민하는 것은 부질없다. 애초에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달리 답이 나오기 마련일 질문이기 때문이다. 보호를 하는 입장의 사람인지, 보호를 받는 입장의 사람인지,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보호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지, 여러 입장과 생각에 따라서 ‘반대말’은 다르게 그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질문을 통해 한 번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보호”의 반대말이 “자유”나 “인권”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보호라면, 그건 그리 좋은 보호가 아니라고. 누군가를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보다 못한 존재, 약한 존재, 못난 존재로 생각할 때, 차별은 시작된다. 보호 또한 비슷하다. 보호는 자신보다 못하고 약한 존재에게 해주는 것일 때가 많다. 또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기가 쉽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 보호는 차별의 가장 부드럽고 세련된 얼굴이 된다.

  ‘차별의 가장 부드러운 얼굴로서 보호’는 청소년들의 삶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청소년보호법을 생각해보라. 얼마 전 국회에서는 만16세 미만 청소년들이 밤 12시 이후에 온라인게임을 할 수 없게 강제로 접속을 차단하는 이른바 ‘셧다운제’가 담긴 청소년보호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누가 봐도 분명히 청소년들을 규제하는 형태의 제도인데도 ‘보호’의 이름을 달고서 청소년들을 게임으로부터 보호하겠다, 청소년들의 수면권을 위한 것이다, 라고 입법 이유를 말하는 역설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또한, 2003년 전까지만 해도 청소년보호법은 동성애를 청소년 유해물로 지정하고 성소수자들의 커뮤니티 등에 청소년 접속을 제한했다. 청소년들이 혹시 ‘사고’라도 칠까봐 보호하기 위해서 이성교제를 금지하고 스킨쉽을 처벌하는 학교의 교칙 같은 것들도 ‘보호’가 어떻게 인권침해로 나타나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예이다. 2008년 촛불집회 당시 “광화문 등 촛불시위가 일어나는 일대를 청소년 통행 금지 구역으로 지정해야 한다. 청소년들을 불법 시위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라는 조갑제 씨의 드립 역시 ‘보호’가 ‘차별’이자 ‘규제’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학생인권조례, 존중과 참여로 보호를 넘어

  2010년 10월, 경기도에서는 한국에서 최초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인권의 구체적인 기준과 내용, 그리고 개선 방안을 담은 최초의 법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는 크다. 이후 서울, 광주, 전북, 전남, 강원도, 경남, 충북, 제주 등 여러 지역에서 교육청이나 시민단체들의 주도로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추진되고 있다. 서울에서는 얼마 전 서울시민 1%의 서명을 모은 주민발의가 성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아일보 등 일부 언론에서는 학생인권조례가 미성숙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학생들을 성인과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인권 포퓰리즘이라고 사설까지 써가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동아일보가 2010년 7월 2일에 실은 사설을 보면 마지막 문장이 이렇다. “학부모와 교사들이 실력 열정 도덕심을 가져야만 우리 아이들을 지켜낼 수 있다.” 인권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내야 한단다. 이런 논리는 ‘보호’가 ‘인권’의 반대말, 즉 ‘차별’이 되는 정점을 보여준다.
(덧붙여 말하자면, 동아일보는 같은 사설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방임’이라고 표현하며 오도하고 있지만, 사실 학생인권조례 안에는 학생들의 권리로서 폭력과 차별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학생들이 필요한 상담이나 교육, 복지, 보호를 제공받을 권리 등을 다양한 방법으로 보장하도록 하고 있다.)


  보호가 차별이 되지 않는 경계선, 보호가 인권의 반대말이 아니라 인권의 동반자이자 부분집합이 될 수 있는 그 경계선은 바로 ‘존중’에 있는 것이 아닐까? 보호를 받는 사람을 약하고 못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할 때, 일방적인 규제나 시혜가 아니라 보호받는 사람의 참여 속에서 그 의견과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때, 보호받는 사람이 주체가 되고 권리로서 보호를 누릴 때, 보호는 비로소 ‘차별의 부드러운 얼굴’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학생인권조례에서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차별적인 청소년보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실마리를 본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들의 기본적인 인격을 존중하도록 하는 동시에, 학생들의 표현의 자유 보장, 학생들의 학교 운영 참여 보장, 교육정책에 대한 참여와 의견 반영 보장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학교는 학칙을 개정하거나 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학생들이 참여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학생들은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을 보장받으며 자유롭게 의견을 밝히고 여론을 형성하며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또한 교육청 역시 학생참여위원회 등의 기구를 통해서 교육정책을 결정할 때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

  비록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인권과 교육과 관련된 분야에만 적용되지만, 이러한 제도는 앞으로 한국 사회에 학생들, 청소년들의 실질적 참여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청소년특별회의, 청소년참여위원회 등 이른바 ‘청소년 참여 기구’가 있어왔지만 실질적으로 청소년들의 의견을 반영하기보다는 일부 모범생들의 스펙 쌓기로나 사용되는 등 처음의 취지와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학생들의 참여를 권리이자 (교육청과 학교 등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는, 작은 교육정책에서부터 시작해서 초중고등학생들, 그리고 청소년들이 자신들과 관련된 정책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참여할 수 있게 되는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예측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다. 학생인권조례가 단순히 학생들에게 인권을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주체적인 활동을 촉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이후, 학칙 개정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 반영을 위해 학생들이 직접 나서서 자신들의 의견을 반영하도록 한 사례들이 늘고 있다.

  작년 부천 소사고등학교에서는 학칙개정심의위원회 회의에 학생들의 참관을 거부당하자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연일 시위를 하면서 회의 참관을 관철시켰고 학생들의 입장이 더 많이 반영된 학칙을 이끌어냈다. 최근 남양주 가운고등학교에서는 학칙 개정을 위해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전혀 밟지 않던 학교 측을 상대로 학생회에서 직접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학칙 개정을 하도록 요구하여 학생들의 요구가 반영된 새로운 학칙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인권은 보호와 대립되지 않는다. 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이기 때문에, 인권과 대립되는 보호란 것은 그 사람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보호라는 말이다. 그런 보호는 ‘차별의 부드러운 얼굴’이라는 혐의를 피할 수 없다. 존중과 참여로 보호주의를 넘어서는 길, 보호와 인권이 화해하는 교육, 학생인권조례로 열어가고자 하는 학교와 사회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