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운동'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17.04.19 ‘이것도 노동이다’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 -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 – 청년 세대의 사회적 노동》
  2. 2016.09.11 『인물로 만나는 청소년운동사』
  3. 2016.02.09 [성명] 누리과정 예산 빵꾸나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 무상교육은 인권이다! 정부는 교육재정을 책임지고 마련하라!
  4. 2015.03.09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소식지 활력소 제6호 (2015.03.07.)
  5. 2015.02.08 [인권오름] ‘2015청소년활동가선언’을 소개합니다
  6. 2014.11.15 청소년운동에 영감을 줬던 페미니즘 입문서
  7. 2014.07.26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3> 기록하고 설명하는 글 : 기획안, 회의록 등
  8. 2014.03.30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소식지 「활력소」 제1호 (2014.03.30.)
  9. 2013.09.02 『파란만장 -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백서』 발간! 신청받습니다~
  10. 2013.08.27 병역거부자인 나는 양심수인가
  11. 2013.08.25 주간경향 특집 : 2008년의 '촛불 청소년'
  12. 2013.08.25 ‘청소년운동론’ 예고편
  13. 2012.03.31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를 위한 탁상공론
  14. 2012.03.08 한고학연(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 해산에 부쳐 (2)
  15. 2011.10.18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받는 질문들 (2)
  16. 2011.09.20 [오늘의교육] 우리 모두, 바동거립시다
  17. 2011.08.31 청소년인권운동, 온라인에서 거리로 (1)
  18. 2011.08.24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2 주장하는 글 : 성명, 논평, 칼럼, 토론문 등
  19. 2011.08.24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1 글쓰기의 일반적인 기본
  20. 2010.09.23 청소년인권운동과 아수나로의 상황에서 - 대중조직이란 무엇인가 (4)
흘러들어온꿈2017.04.19 15:12

이것도 노동이다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 청년 세대의 사회적 노동》(이영롱.명수민 지음, 교육공동체 벗, 2016) 리뷰



운동 사회 안의 해묵은 이야깃거리로, ‘시민사회단체의 상근활동가는 노동자인가?’라는 화제가 있다. 최근에는 열정노동/열정페이 비판 등이 여론에 대두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면 당연히 노동자지!’ 하는 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원론적으로는 맞다. 운동의 과정에서 하는 일들도 노동이다. 단체와 계약하여 정해진 돈을 받고 일을 한다면 더욱 명백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나는 이게 그렇게 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는, 자명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보자. 내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는 재정 상황 상 오랜 기간 상근활동가가 없었다. 그러다가 단체 규모가 커지고 후원금을 모아 상근활동가를 새로 두기로 했다. 기존에 활동하던 회원 중 몇 명이 상근활동가가 되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상근활동가가 그냥 회원이었을 때 통상 참여해 왔던 정기 회의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상근활동가로서 하는 노동인가, 아니면 회원으로서 하는 활동인가? 이런 문제를 따지기 시작하면 좀 더 근본적으로는 상근활동가는 왜 돈을 받고 단체 일을 하는데, 그 외의 회원들은 돈을 받지 않고 무급 봉사로 단체의 일을 하는지부터가 고민스럽게 된다.


  조금 다른 길로 빠져 보자면, 노동자의 임금은 양면적인 성격이 있다. ‘(노동시간 또는 그 성과)에 대한 대가라는 측면과 생존과 노동력 재생산 보장이라는 측면이다. 시민사회단체 상근활동가의 노동과 그에 대한 임금은 후자의 측면이 좀 더 강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다른 많은 자발적인 무임금 노동/활동/운동들 때문에 일에 대한 대가라는 식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체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참여가 모두 대가를 지급받아야 하는 임노동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스럽다.


   상근활동가는 노동자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오자. 사실 이 질문에서 노동자, 문자 그대로 노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라는 역사적 환경 속의 임노동자를 뜻한다. 법과 판례를 참고하면, 노동자는 사용자/고용주의 감독·지휘 하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지급받는 사람이다. 구체적 상황은 단체마다 천차만별이긴 한데, 적지 않은 시민사회단체의 상근활동가들은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노동자라고 하기 어렵다.


   가령 사용자/고용주가 별도로 있지 않은 경우도 있고, 따로 감독이나 지휘를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느 정도 정해진 시간 또는 그 이상의 노동을 단체에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아가는 것은 맞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자율성을 갖고 있거나 자기감독자기착취(꼭 나쁜 의미에서 쓴 말은 아니다.) 식으로 노동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의미 있는 일을 한다.’ 등에 더해서, 이처럼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은 시민사회단체 상근활동가라는 직업을 택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면 자영업자에 가까운 건가 하면, 또 정해진 임금을 받지 단체가 활동이 잘 된다고 해서 돈을 더 가져간다거나 하진 않는다는 점이나, 총회 등 단체의 의결 기구에 그 고용이나 활동이 좌우된다는 점에서 노동자에 가깝기도 하다. 여기에 더해서, 시민사회단체들은 영리 기업과 달리 그 활동의 수혜자나 대면하는 대중이 시민사회단체의 수입처가 되는 곳(후원자들이나, 극단적으로는 정부 및 기업 등 기부처나 프로젝트 발주처)과 다르다는 특징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들도 있다. , 피터 드러커 식 개념으로는 본질적 차이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만.


  내가 잘 알고 있는 시민사회단체의 예를 들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는 단체마다 상황이 매우 다르다.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 등으로 넓혀서 보면 실로 각양각색의 조직 구조와 노동 환경을 갖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영역에서 노동하고 있는 이들의 문제를 단지 노동법 준수의 문제나 노동자의 권리 보장과 같은 이야기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다.

 

 

다각도에서 바라보기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 청년 세대의 사회적 노동청년들의 사회적 노동 경험에 대해 2014년에 진행한 연구를 재가공하여 만들어진 책이다. 여기에서 사회적 노동이란 의미적으로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내려는 의지와 실천, 협상을 동반한노동을 가리키며, 구체적으로는 시민사회단체·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 공익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을 말한다. 그러나 이 책이 가려는 길은 그러한 현장을 기록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은 청년들이 좋은 노동’(공익적이고 가치 있는 노동이라는 의미에서이든, 노동자가 행복한 노동이라는 의미에서이든.)을 기대하며 사회적 노동에 찾아오고, ‘좋은 노동에 대한 질문을 계속 붙들고 고민하며 일하고 있다는 데 주목하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의 노동의 의미나 성격이나 좋은 노동의 요건 자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려고 한다.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 청년 세대의 사회적 노동의 장점은, 시민사회단체·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의 현장을 노동의 문제의식을 갖고 다루면서도, 그 노동조건의 열악함만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인터뷰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중층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이 어떤 경험인지를 살피며 그렇다면 청년들은 왜 이 영역에 남아서 계속 일하고 있는가묻는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책 에필로그 청년들은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가에서 저자들이 던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곧 이 책을 낳은 문제의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그토록 열심히 오랜 시간 일하도록 만들었을까?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그토록 괴롭게 만들고 소진시키고 있을까? ‘그럼에도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는 걸까? 더 좋은 노동과 사회를 향한 어떤 형태의 바람과 기대, 혹은 어떤 열망이 그들을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현장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도 다층적이며 복잡하게 경험되고 있을까?” (240)

 

   그래서인지, 이 책은 청년 세대의 사회적 노동이라는 주제를 시종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려고 한다. 가령 1장에서는 노동, 활동, 운동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사회적 노동의 양태를 파악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시민사회단체·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에서 하는 일은, 노동이기도 하고 (사회적) 활동이기도 하며 (정치적) 운동이기도 한 것이다. 책 속에는 시민사회단체·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이 노동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를 회피한다는 지적도 담겨 있지만, 동시에 활동과 노동을 엄격하게 구분했을 때 문제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고, 사회 변동 속에 운동의 개념이 약화되거나 혹은 불명확해지고 변화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도 읽힌다.


   4모순과 함께 일하기에서는 사회적 노동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순된 가치의 충돌이나 중첩을 보여 준다. 자율성과 타율성, 공동체적 조직 문화와 일의 효율성, 우리 좁히기와 우리 넓히기, 자립과 의존 등 가치 사이에서 느끼는 고민들을 기록한 내용에는, 과연 무엇이 좋은 노동인지, 사회적 노동은 어떠해야 하는지, 당위적 가치 하나를 선택할 수 없는 복합적 경험들이 녹아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 대한 다음과 같은 리뷰는 사실 이 책의 주제와 관점을 이해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작은 운동장 안에 들어와 막상 부딪혀본 세상은 꽃밭이 아니라 또 다른 고난이었다. 선의에 기댄 채 생활의 어려움은 애써 외면해 보려 했으나, 반복되는 삶에 지속적으로 덧대어지는 더께는 결코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들은 결국, 그들의 선택을 후회한다.” “우리의 대한민국은 70년대 산업화의 격랑을 단기간에 거쳐오며, 더 나은 노동을 찾아내는 것에 지속적으로 실패해 왔다. 첫 번째 책인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가 그 증거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11213&CMPT_CD=C1500_mini)


  이 책은 단지 좋은 노동을 찾아서 온 사회적 노동 현장에도 좋은 노동은 없었다라는 서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야말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가 원래 연구 보고서에서 출발해서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인지 읽기 어려운 부분들이 왕왕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책의 내용에서 사회학자의 개념 등을 많이 인용해 오고 있는데 굳이 필요하지 않아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단적인 예로는, 서문에서부터 피로 사회등으로 대표되는 ‘OO사회논의가 이어져왔던 점을 거론하고 있는데, 지난 몇 년간 그러한 논의를 따라오며 읽어오지 않았던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처럼 그러한 논의를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이야기하는 부분은 당혹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축적된 담론이나 개념들을 이미 독자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리라고 예상하는 것 자체가 학문적 영역에서 탄생한 글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더 나은 노동을 위해

 

사회적 노동은 복합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이는 사회적 노동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노동 문제 자체가 복합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하지 않은 문제라고 말하고 그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말을 막고 현상을 유지하자는 소극적인 자세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것인지, 좀 더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역시 막바지에서 우리에게는 완벽한 출구도 섣부른 희망도 남아 있지 않다.”(243)라고 말하면서도,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시도들이 계속될 것임을, 삶을 지속하는 능력을 강조하고 있으니까.


   나는 첫 번째로 시민사회단체·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의 현장에 필요한 변화는 투명성 강화라고 생각한다. 노동 문제에 대해 잘 말하지 않는 문화를 없애고, 노동 조건과 현실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하고 공개하고 소통해야 한다. 이는 1차적으로는 일을 하는 노동자/활동가들에게 진입 과정에서부터 이를 공개하고 솔직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뜻이며, 2차적으로는 사회적으로 이 영역의 현실이 이러함을 열어놓고 문제점을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서로의 기대가 어긋나서 생기는 문제를 줄일 수 있고 개선할 길도 더 빨리 찾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운동 사회’(혹은 사회적 경제 사회/네트워크’)의 문제 인식과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 개별 단체나 협동조합 등의 수준에서는 자원의 한계가 많고 당장의 선택지도 적은 경우가 많다. 비슷한 여건에 놓여 있거나 같은 영역에서 활동하는 단위들 사이의 네트워킹과 연대를 통해서 해결 가능한 문제들이 분명히 있다.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에서 제기하고 있는 개인의 성장에 관한 문제나 세대 간 소통, 조직 문화 및 조직 내 민주주의와 같은 문제들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 변화를 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 번째로 더 문제를 확대하면, 전 사회적 공동 책임을 논의하고 요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회적 노동영역에서의 여러 문제들은 다중적 의미에서 사회적이다. 예컨대,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에서 청년 세대의 문제나 세대 간 문제로 지적하고 있는 여러 지점들은, 단순히 세대 간의 인식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청년 세대가 겪는 사회적·경제적 문제나 전 사회에서 정치적 변화의 전망이 약화된 문제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사회적 노동, 전 사회에 의미와 가치가 있는 공익적인 성격의 일을 하지만 이 때문에 투여되는 노동에 비해서 얻는 경제적 이익은 한정되는 성격이 있다. 시민사회단체·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이 하는 일들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고 가치 있는 공익적 일이라는 합의가 가능하다면, 이에 대해 좀 더 사회적인 공동 책임을 요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제도적인 지원이나 공간 등 인프라 구축의 형태가 되었든, 좀 더 풀뿌리적인 연대의 형태가 되었든.(‘예술인 지원 제도가 가능하다면 활동가 지원 제도는 왜 불가능한가?)


  마지막으로 내가 이 책을 읽고 한 생각은, ‘사회적 노동이라고 해서 우리 사회 전반의 노동의 문제와 별개로 볼 수 없으며, 우리 사회의 경제·교육·주거·문화·복지 등의 문제와도 함께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사회적 노동 영역만을 따로 놓고 이것이 좋은 노동인지 묻는 것은 부적절하다.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역시 그런 식으로 문제에 접근하지 않는다. 사회적 노동 영역에서의 예시들은 문제점과 변화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모델이자 창구이다. 결국 우리가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으며 나 자신에게도 행복한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은, 우리가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꼭 시민사회단체·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에서 일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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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6.09.11 15:38

1995년부터 청소년(인권)운동의 역사를, 참여했던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한
『인물로 만나는 청소년운동사』가 나왔습니다.


많이 읽어주세요. 저와 둠코 님이 공저했습니다.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 청소년운동과 청소년활동가들에 대해 알고 싶은 분들
- 과거에 청소년운동에 참여&관여했던 분들
- 앞으로 청소년운동을 하실 분들
- 학생인권조례 등이 만들어진 맥락과 역사가 궁금하고 조사해야 하는 분들
- 소수자 인권 운동이 만들어지고 발달하는 사례와 과정을 연구하고 싶은 분들


YES24  http://www.yes24.com/24/Goods/31090355?Acode=101

알라딘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91320221





청소년 벗


인물로 만나는
소년운동사


저자  공현, 둠코
펴낸 곳  교육공동체 벗
발행일  2016년 9월 12일
정가  15,000원
쪽수  332쪽
책 크기 신국판(152×225mm)
ISBN  978-89-6880-027-6 (03300)
분류  사회과학 》 사회학





+ 목차


들어가는 글 | 시대를 바꾼 청소년들


1부 인간을 꿈꾸다


청소년운동의 여명기 | 김한울·나정훈
1998년 학생 인권 선언


특이한 청소년들, 세상에 말 걸다 | 박준표
2000년 노컷 운동과 2002년 선거권 운동


상처투성이 첫걸음이 남긴 것 | 장여진
2000~2001년 학생 인권 운동


2부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서


부당함은 본능이 먼저 알지요 | 박정훈
2003~2004년 NEIS 반대·청소년 참정권 운동


자치의 시대, 청소년 정치를 고민하다 | 신정현·김종민
2004년 18세 선거권 운동


기억되지 않는 ‘우리의 촛불’ | 남궁정
2005년 내신등급제 반대·두발 자유 운동


3부 존재감 다지기
 
내 법인 듯 내 법 아닌 내 법 같은 너 | 조만성(따이루)
2006~2007년 학생인권법 제정 운동


청소년이 여기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 한지혜(난다)
2008년 촛불 집회·2010년 기호 0번 청소년 후보 운동


일제고사만 나쁜가요? | 윤가현(꽥쉰내)
2008~2009년 일제고사 반대 운동


학교의 중심에서 인권을 외치다 | 성상영(밤의마왕)
2007~2009년 경남 지역 학생 인권 운동


4부 진도 나갑시다


간도 쓸개도 빼 주고 얻어 낸 학생인권조례를 넘어서 | 전혜원
2010~2011년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 발의 운동


날 도태시키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 김동균(어쓰)
2011년 대학/입시 거부 운동


낮추자 아니, 내놔라! | 정재환(검은빛)
2012년 청소년 참정권 운동


나가는 글 | 청소년이기 때문에


청소년운동 단체 소개
청소년운동사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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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6.02.09 16:15



[성명] 누리과정 예산 빵꾸나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 무상교육은 인권이다! 정부는 교육재정을 책임지고 마련하라!


박근혜 정부의 억지 속에 누리과정(만3~5세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공통으로 운영하는 교육과정) 예산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무상보육 할 테니 낳아만 달라"라고 했던 대선후보 시절의 공약은 온데간데없고,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하지 않은 교육청에는 수사에 감사까지 해가며 압박하고 있다. 막무가내로 교육청에게 예산 돌려막기(?)까지 종용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면, 제대로 교육권을 보장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는 한지 의심스럽다. 정부의 이런 태도 탓에 교육재정과 교육자치 전반이 위협을 받고 있으며 당장 청소년들의 권리에도 악영향이 예상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이미 누리과정 예산을 교육청들에 다 지원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살펴봐도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올해 정부가 교육청들에 분배한 '교부금'은 누리과정이 확대 시행되기 이전과 비교해서 거의 차이가 없다. 법령만 바꿔서 '이 중에 누리과정에 쓰라'고 적어놨을 뿐, 제대로 예산을 지원한 것이 아니다. 정부는 교육청들에 빚이라도 내라고 하고 있지만, 이미 지난 몇 년간 그런 미봉책으로 버텨오다가 한계에 이른 상황이다. 지역 교육청들을 대책도 없이 빚더미에 올라앉게 할 셈인가?

교육청들 중에는 이미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한 곳들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편성한 5곳 중 4곳에서는 대신 방과후 학교 지원 등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지 못했고, 저소득층 지원 예산이나 인건비를 편성하지 못한 곳도 있다. '빵꾸난' 누리과정 예산을 무리해서 마련하다보니 다른 예산들에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교육재정이 부실해지고 청소년들의 교육권 상황이 열악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교육청들이 무리하게 빚을 낸다면 이런 위험성은 더 커질 것이다.

물론 중앙정부와 지역정부(교육청 등)는 누리과정을 포함해서 청소년들의 교육권을 보장할 공동의 책임을 지고 있다. 다만, 현재 제도상 재정에 대한 책임은 중앙정부가 더 많이 지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더군다나 박근혜 정부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대로 된 소통과 협의도 없이 계속해서 막무가내로 교육청을 탓하고 윽박지르고만 있다. 박근혜 정부가 문제를 해결하고 누리과정 등이 잘 시행되게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더 문제가 생기게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정부가 예산에 관해 기초적인 산수도 할 줄 모르고 당장의 문제만 떠넘기려고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악의를 가지고서 교육청들을 괴롭히고 교육자치를 약화시키기 위해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누리과정을 비롯한 각종 공교육은 우리의 권리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제대로 된 공공의 재정 확보가 필수이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은 청소년(어린이)의 양육과 교육에 대해 가능한 한 광범위한 지원이 부여되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으며, 초등교육을 비롯하여 교육 전반을 무상으로 해나가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모든 청소년들이 차별 없이 교육권을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또한 누리과정을 포함하여 교육에 드는 비용을 공적으로 부담함으로써 부모 등 친권자·보호자들은 양육의 부담을 덜 수 있다. 청소년의 교육과 삶이 친권자 개인의 경제력과 의지에 달려 있을수록 청소년은 그들에게 삶을 의존할 수밖에 없고, 친권자 역시 자신이 청소년을 위해 많은 것을 투자하고 희생한다고 느낄수록 청소년들을 더 지배하려 들 위험성이 높다. 그러므로 양육과 교육을 사회가 책임지는 것은 친권자와 청소년 사이의 더 건강하고 평등한 관계를 위해서도 필수 조건이다. 

정부는 먼저 이러한 권리 보장의 의무가 자신에게 있음을 명확히 숙지하고, 진지하게 어떻게 예산을 편성하고 어떻게 무상보육‧무상교육을 실시해나갈지 논의하고 계획해야 한다. 선거 때는 표를 얻기 위해 그럴 듯한 공약을 걸고, 당선 후에 정부는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고 있는 지금 같은 상황은 매우 우려스러우며, 중요한 인권 문제를 왜곡시키는 행태이다. 이 때문에 어린이집·유치원·학교 등의 노동자들, 친권자들, 그리고 청소년들이 불이익을 입고 불안을 느끼고 있다. 지금이라도 남탓하기를 중단하고 누리과정 예산 등 교육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할 책임이 박근혜 정부에게 있다.

 - 정부는 교육청들에 대한 부당한 압박을 중단하고 누리과정 예산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소통과 협의에 나서라!
 - 정부는 무상보육‧무상교육 확대 등 보편적 교육권 보장을 위해 충분한 교육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라!


2016년 2월 9일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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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5.03.09 11:13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소식지 활력소입니다. 수신거부는 hwalgy@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http://cafe.daum.net/Life2010   |   http://hwalg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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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5.02.08 15:02

[벼리] ‘2015청소년활동가선언’을 소개합니다①

검은빛, 공현, 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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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주]

'2015 청소년활동가선언'은 청소년 운동이 지금 놓인 현재와 고민, 그리고 새롭게 청소년 운동을 시작하거나 알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안내가 담겨있습니다. 인권오름에서는 선언에 담긴 내용과 그에 대한 설명과 맥락을 다양한 사람에게 들려주려 합니다. 다만 웹으로 글을 읽을 때의 한계로, 부득이하게 하나의 글을 두개의 글로 나누어 담습니다.

2015년 1월 13일부터 15일까지, ‘청소년활동가마당’이 열렸습니다. 지난 2014년에 처음 ‘청소년활동가마당’을 연 뒤 횟수로 두 번째였습니다. 청소년활동가마당은 청소년운동 단체들이 점점 더 다양해지고 청소년운동의 의제나 활동들도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여러 청소년활동가들이 모여 교류하고 토론하자는 취지로 열린 활동가대회 성격의 행사입니다. <2015 청소년활동가마당 - 여긴 어디? 나는 누구?>는 그 제목 그대로 청소년운동의 현주소와 청소년활동가들의 현재를 함께 확인하는 자리로, 청소년활동가들 30여 명이 각 단체의 활동을 공유하고, 질문과 고민을 나누고 토론을 했습니다. 2015 청소년활동가마당의 마지막 순서는 ‘2015 청소년활동가선언’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2015 청소년활동가마당 셋째날에 기획단이 미리 준비해온 ‘2015 청소년활동가선언’ 초안을 놓고 수정 및 보완하는 토론을 했으며, 참여자 중 자신의 이름이 이 선언에 명기되는 것에 동의한 활동가들의 연명으로 선언을 채택했습니다.

기획단에서 굳이 선언을 제안하고 채택한 취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개별 단체 소속을 넘어 ‘청소년활동가’로서, 함께 청소년운동의 목표와 현재를 명문화된 형태로 발표하자. 둘째, 새로 청소년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청소년운동이 어떤 것인지를 안내해줄 수 있는 자료를 만들자. 셋째, 청소년운동과 부대끼고 있거나 청소년운동을 잘 모르는 다른 운동/활동가들에게 청소년운동에 대한 내용을 좀 더 합의된 형태로 제시하자. 청소년운동의 단체와 흐름들이 다양해지면서, 한 단체의 강령이나 운동원칙 합의 정도로 청소년운동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알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선언은 총 11개의 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청소년운동이 그간 논의해온 수많은 의제들과 고민들을 모두 내용으로 담을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청소년활동가들이 운동적으로 함께 인식해야할 중요성이 있는 내용들을 모아 만들게 됐습니다.

선언의 전반부는 주로 청소년운동이 무엇인지 정리하는 내용입니다. 청소년에 관련된 단체나 활동이 여러 종류가 있고 ‘청소년’ 자체의 개념도 모호한 까닭에 대체 무엇이 또는 어디까지가 청소년운동인지 혼란스러운 점이 있었습니다. 선언을 통해서 청소년운동의 정의와 방법론 등 그 중심에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식들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청소년운동을 바라보는 시선, 또는 청소년운동과 다른 사회운동 사이의 관계 등을 다루는 내용이 있습니다. 운동의 정체성이란 다른 이들과의 관계나 외부로부터의 시선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청소년운동을 보는 잘못된 관점을 비판하고, 청소년운동의 정치성과 독립성, 연대성 등의 원칙과 성격을 적었습니다.

‘2015 청소년활동가선언’은 그 이름 그대로 2015년 시점에서 청소년운동의 문제의식과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앞으로 청소년운동이 변화하고 발전해가면서 새로운 문제의식과 발전한 내용을 담은 선언이 나올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2015 청소년활동가선언’을 통해 청소년운동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게 되길 바라는 한편으로 그런 변화의 여지 또한 염두에 두시길 청합니다.

2015 청소년활동가 선언

지 금 우리의 청소년운동은 새로운 기로에 서있다. 청소년운동은 쌓인 경험과 기억, 그리고 더 깊어지고 다양해진 목소리와 실천을 바탕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청소년운동의 새로운 모습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등과 같은 새로운 과제와 마주하고 있기도 하다. 운동의 존속에만 급급하던 시대를 넘어, 이에 더해 발전과 변화 또한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해방을 위한 경로를 찾기 위해서는 현재 위치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청소년운동이 무엇이며 어디를 향해 있는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청소년운동 안팎으로 알리는 언어가 필요하다. 우리는 <2015 청소년활동가마당 - 여긴 어디? 나는 누구?>에 참여하여 청소년운동에 대한 다양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자리를 마무리하며, 우리들은 각자의 소속 단체를 떠나서, 한 사람의 청소년활동가로서 청소년운동에 대해 생각을 공유하고, 함께 우리의 청소년운동이 서있는 위치와 걸어갈 방향, 그리고 걸음걸이를 밝히고자 한다.

1. (청소년운동의 목표)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의 해방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이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인 억압, 차별, 폭력, 착취에 저항하며, 청소년들이 인간적으로 존중받고 개인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평등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2. (청소년의 정의) 우리가 말하는 청소년은 사회에 의해 ‘미성년’이라고 구분되는 모든 사람들이다. 연령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사회적・제도적․관습적․문화적 구분의 기준이 청소년운동의 당사자를 결정한다. 그 범위는 대개 만18세~20세 미만이 되며, 경우에 따라 더 적은 나이나 더 많은 나이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3. (청소년의 성격) 청소년은 소수자인 동시에 보편적인 집단이다. 현재 청소년인 사람은 사회적으로 억압과 차별을 받는 소수자의 위치에 있으나, 모든 청소년은 언젠가 청소년이 아니게 되며 모든 비청소년은 한때 청소년이었다. 또한 청소년은 청소년이라는 계급성을 가지지만, 그러면서도 속한 가족의 계급의 영향을 받는다. 청소년은 한 마디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온전하게 인정받지 못한 채 유예된 존재이다. 청소년운동은 단지 현재 청소년인 사람들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 투쟁할 뿐 아니라, 특정 연령의 사람들을 ‘청소년’으로 구분하고 억압하는 현상과 사회구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다.
4. (청소년억압의 성격) 이 사회에서 청소년은 국가와 자본을 위한 ‘인적 자원’으로 생각되며,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 이윤을 위한 수단, 또는 미래를 준비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취급받는다. 청소년억압은 신체적・사회적 약자인 청소년들을 억압적인 사회구조에 맞춰 사회화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사회에서 청소년억압의 대표적인 사회구조는 학교와 가족이다. 학교제도는 청소년이 자본주의적인 경쟁 및 차별 논리, 능력주의를 내면화하고, 권력에 복종하는 국민이 되도록 교육하고 있다. 현 가족제도는 청소년을 친권자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들고 양육과 생존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며 계급을 재생산한다. 학교와 가족뿐만 아니라 비청소년 중심의 각종 제도와 문화 역시 청소년억압의 중요한 요소이다.
5. (청소년 안의 다양성) 청소년들은 단일한 존재들의 모임이 아니다. 청소년들은 계급, 성(性), 사상 및 이념, 신체적 상황, 그밖에 다양한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각자 다른 억압을 경험한다. 청소년은 여러 차원의 중첩된 억압을 겪는 존재이다. 따라서 청소년운동은 다양한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형태의 억압에 저항한다.
6. (청소년운동의 주체) 청소년운동은 청소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의 주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청소년운동의 가장 중요한 주체는 청소년 당사자이다. 청소년 당사자가 정치적인 힘을 가진 주체로 나서고 연대를 통해 집단적인 세력이 되는 것은 청소년해방을 위해 가장 중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소수의 엘리트나 ‘선한 어른들’이 청소년해방을 대신 이루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7. (청소년운동과 나이주의) 청소년운동은 ‘나이주의’에 반대한다. 나이주의는 연령에 따른 위계, 나이에 따른 차별 등의 문화와 제도를 가리킨다. 청소년들은 나이주의에 의해 사회 전반에서 차별과 억압을 겪기에 청소년운동은 나이주의를 극복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나이주의는 운동사회에도 존재하며, 그로 인해 청소년활동가들은 동등한 활동가로서 존중받지 못하기도 한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이 나이를 이유로 운동의 참여가 제한되거나 업무에서 배제되는 현상에 문제의식을 갖는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들이 평등하게 참여하고 활동가로서 존중받으며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조직 구조와 문화를 지향한다.
8. (청소년운동의 정치성) 청소년운동은 정치적인 운동이다. 사회를 운영하고 사회적 문제에 대해 결정하는 모든 과정이 정치이고, 따라서 사회의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정치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겪는 일상적 억압과 차별의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이며, 이에 저항하는 청소년운동도 정치적인 운동이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보장을 주장하며, 정치적 활동이 청소년이 접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에 반대한다.
9. (청소년운동의 독립성) 청소년운동은 다른 운동에 종속되지 않은 운동이다. 청소년운동에 ‘배후’가 있다고 여기거나, 청소년활동가들이 다른 비청소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자 거짓이다. 또한 청소년운동은 다른 사회운동의 ‘준비과정’이 아니다. 청소년들은 동등한 사회구성원이므로 청소년의 사회적 참여는 당연한 것이지 특별하거나 대견한 일이 아니다.
10. (청소년운동의 고유성)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운동만의 문제의식과 고유한 영역을 가진다. 청소년억압은 다른 구조의 문제가 해결되면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의 관점에 의한 정세 판단과 가치 기준, 우선순위를 갖고 활동한다.
11. (청소년운동의 연대성) 청소년해방은 인간해방과 분리되지 않는다. 청소년억압은 우리 사회의 각종 억압적인 구조와 제도, 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청소년운동은 우리 사회의 인간해방을 위해 함께 투쟁한다. 그리고 인간해방과 우리 사회 전체의 변화를 위해 청소년운동으로서의 목소리를 내고 행동을 한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청소년운동의 지향을 함께 선언하며,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모든 청소년의 해방을 향해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와 단체에서 청소년운동을 하면서도, 해방을 위한 단결의 필요성을 잊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다른 운동과 구별되는 고유한 청소년운동을 하면서도, 청소년해방은 전체 사회구조의 변혁과 함께 온다는 것을 잊지 않고 다양한 사회적・정치적 투쟁에 연대할 것이다. 우리는 청소년활동가이고, 우리의 옆에는 청소년해방을 함께 이루어낼 동료가 있다. 우리는 더욱 많은 청소년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더 많은 청소년들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투쟁할 것이다.

2015년 1월 15일
※ 이름 뒤의 단체명은 참여자의 소속 단체를 참고삼아 알리기 위한 것이며,
해당 단체가 공식 입장으로 이 선언에 참여했다는 뜻이 아님을 밝힙니다.
검은빛(관악청소년연대여유), 공현(대학입시거부로삶을바꾸는투명가방끈들의모임․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난다(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델라(관악청소년연대여유), 둠코(청소년활동기상청활기), 루블릿(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마카롱(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목성돼지(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미쁨(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박씨(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별다(청소년활동기상청활기), 선우(노원지역연합청소년인권동아리화야), 윤서(희망의우리학교), 이응이, 자유(대학입시거부로삶을바꾸는투명가방끈들의모임), 쥬리(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쥰(노원지역연합청소년인권동아리화야), 최준호(중고생연대), 치이즈(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플린(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필부(노원지역연합청소년인권동아리화야), 하루유키(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호야(대학입시거부로삶을바꾸는투명가방끈들의모임)
덧붙이는 글
검은빛 님은 관악청소년연대여유 활동가 입니다. 공현 님은 대학입시거부로삶을바꾸는투명가방끈들의모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입니다. 쥬리 님은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활동가 입니다.
인권오름 제 425 호 [기사입력] 2015년 02월 05일 14:20:47


















[벼리] ‘2015청소년활동가선언’을 소개합니다②

검은빛, 공현, 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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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청소년활동가선언'은 청소년 운동이 지금 놓인 현재와 고민, 그리고 새롭게 청소년 운동을 시작하거나 알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안내가 담겨있습니다. 인권오름에서는 선언에 담긴 내용과 그에 대한 설명과 맥락을 다양한 사람에게 들려주려 합니다. 다만 웹으로 글을 읽을 때의 한계로, 부득이하게 하나의 글을 두개의 글로 나누어 담습니다.

선언 해설

먼저, 선언의 앞머리에는 청소년활동가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과 문제의식을 담았습니다. 짧게 보면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청소년운동은, 정치적 권리 부재와 경제적 독립의 어려움이라는 청소년 집단의 특수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지속하고 성장시켜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지 않으면 이 운동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결의로 성장해온 청소년운동은, 이제 불충분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지속가능한 운영과 활동가 재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지금이 앞으로 더 많은 청소년들이 함께할 수 있는 운동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전환이 요구되고 있는 시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문에서는 선언이 나온 그런 현실 인식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1. (청소년운동의 목표)
2. (청소년의 정의)
3. (청소년의 성격)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운동’이라고 하면, 청소년들을 선도․보호․육성하는 종류의 단체들이 많이 떠오르고 ‘청소년단체’라고 하면 여전히 그런 단체들이 주류입니다. 청소년의 인권을 이야기하고 청소년에 대한 억압에 저항하는 우리의 운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고 일부 충돌하기도 합니다. 이는 사실 1920년대에 ‘소년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운동이 청소년에 대한 보호․교육과 청소년 해방, 두 가지 상이한 입장을 함께 안고 있던 것에서부터 예언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선언 1항에서부터 청소년 해방을 운동의 목표로 명시하며, ‘청소년운동’이라는 이름을 재정립하기를 바랐습니다.
청소년운동에서 청소년이 무엇인가 역시 설명할 필요가 있지요. 우리는 그것이 어떤 자연적인 나이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분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청소년운동이 특정한 세대의 성격이나 문화(청소년들은 순수하다, 정의롭다, 충동적이다, 발랄하다 등)로 인한 것이 아니라 청소년 억압이라는 사회구조에 맞서는 지속적인 운동이라는 것도 밝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히 청소년이라는 정체성은 시간이 흐르면 변할 수밖에 없다는 운명적 특수성이 있습니다. 한 시점을 기준으로 보면 청소년 집단은 소수자이며,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는 집단이라는 점에서도 소수자이지만, 청소년기의 경험과 억압은 모든 사람들이 겪고 (보통은 미화되거나 왜곡되곤 하지만) 기억하며 살아간다는 보편적인 성질을 지닙니다.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을 철폐하는 일은 전체 인간의 해방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4. (청소년억압의 성격)
5. (청소년 안의 다양성)
다음 4항에서는 ‘청소년억압’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했습니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억압이 단지 비청소년들의 고정관념이나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논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유교 문화, 신자유주의, 권위주의 문화 등 다양한 것들이 거론되었었지요. 이번 선언에서는 청소년억압의 원인을 국가와 자본에 의해 수단화되어 자본주의적 구조 하에서 자본을 위한 인적 자원으로 청소년기를 희생당하는 것을 핵심으로 꼽았습니다. 나아가서 억압적 사회구조에 맞춰서 사회화시키는 과정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라고 짚어봤습니다.
청소년기는 특히 지배 이데올로기와 구조를 내면화하도록 요구받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청소년들은 기본권을 억압당한 채 권력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고, 경쟁과 차별 등을 내면화합니다. 또한 핵가족단위를 중심으로 한 시스템은 미성년 자녀의 권리를 그 보호자에게 양도하는 친권제도와 청소년의 성과 생활에 대한 통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족제도는 청소년들에게 계급재생산/상승을 위해 사회에 순응할 것을 종용하고, 양육의 책임을 부모 개인에게 떠넘기기도 하며, 여성들은 어머니라는 굴레 속에서 자녀의 삶을 책임지고 관리하느라 가정과 가부장에 종속되게 만듭니다.
5항에서는 청소년들이 여러 다른 조건에 놓여 있기에 여러 중첩된 억압을 겪는다고 적었습니다. 이는 청소년들이 겪는 다양한 억압에 복합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입니다. 즉 청소년들이 겪는 문제들이 단지 청소년억압에 대한 인식 하나만으로는 설명하거나 대처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5항에 관해서는 무엇을 조건의 예시로 나열할지에 대해 토론이 이루어졌는데요. 초안에서는 일단 청소년운동이 지금까지 다루어온 경험이 있는 계급(경제상황)이나 성(성별,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 등)을 나열하자고 제안했고, 이에 더해 몸과 마음의 문제를 대표격으로 넣어서 사상 및 이념과 신체적 조건(예를 들어 장애, 외모 등이 얘기됐습니다.)을 명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6. (청소년운동의 주체)
6항은 청소년운동의 주체를 다룹니다. 준비 과정에서는 청소년운동의 방법론을 다룬 항과 주체를 다룬 항이 따로 있던 것을 논의 끝에 합쳐서 만들어진 항이기도 해서, 방법론에 대한 언급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청소년운동의 주체는 청소년해방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이지만, 청소년 당사자가 주체가 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청소년운동의 가장 중요한 주체는 청소년 당사자인가’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활동가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비청소년으로서 청소년운동을 하고 있으며, 운동에서 늘 가장 중요한 주체가 ‘당사자’인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단체마다 회원 자격이나 운영 방식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청소년 당사자의 주체적 활동은 청소년운동에서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7. (청소년운동과 나이주의)
7항은 ‘나이주의’에 대한 것입니다. 나이주의적 제도나 문화는 청소년이 미성숙·무능력하다는 편견에 따라 많은 억압과 차별을 가하며 보호라는 미명 하에 청소년의 경험과 참여를 차단하기도 합니다. 또한 많은 청소년활동가들이 운동사회 안에서도 이런 나이주의 문제에 부딪히고, 평등하게 대우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동안 청소년활동가들은 이런 문제로 다른 운동에 몇 차례 항의를 하고 사과를 요구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서울교육감 후보를 뽑는 경선과정에서는 청소년들을 배제하는 결정에 반발하여 연대체를 탈퇴했던 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나이주의가 청소년운동이 다른 운동과 함께하는 데 최대의 걸림돌 중 하나라고 보고, 이런 청소년운동의 문제의식을 알리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선언을 기획하던 과정에서부터 반드시 넣어야 할 내용으로 상정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청소년 집단 내의 나이주의에 대해 특별히 더 언급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나이의 차이로 인한 위계가 특히 심각하기도 하니까요. 청소년 집단 안의 나이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한다는 것에 관해서는 대체로 동의가 되었지만, 청소년 집단이 그러한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현상은 나이주의 외에도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며, 나이주의에 관한 항에서만 특별히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는 의견에 따라 따로 담지는 않았습니다. 청소년운동 단체들의 여러 조건상 이를 바로 적용하기 어려운 단체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점도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8. (청소년운동의 정치성)
청소년운동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에 관한 항 중 대표적으로 들어간 것이 정치성에 대한 것입니다. 청소년운동은 종종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제도권의 정치 등에 참여하면 순수성을 잃는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청소년해방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입니다. 넓은 의미의 정치도 그렇고, 좁은 의미에서 정부나 국회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도 그렇습니다. 예컨대 학교에서 벌어지는 체벌 사건 역시 국가의 정책과 법률, 예산 배분 등이 모두 관련된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운동의 정치’를 할 것이고, 또 청소년들이 정치적 활동을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태도에 반대합니다. 또한 청소년운동이 여러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하다고도 봅니다. 여러 단체와 활동가들은 각자 서로 다른 수준과 방식으로 정치적 문제를 다루겠으나, 적어도 청소년운동이 정치적인 운동이며 또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에 합의했습니다.

9. (청소년운동의 독립성)
청소년운동을 바라보는 관점 중에 가장 힘을 얻는 것은 사실 청소년운동을 다른 데 종속된, 독립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는 청소년들이 미성숙하고 어른들에게 의존적이라는 편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보수언론 등 한쪽에서는 청소년운동에 어떤 배후 세력이 있어서 청소년들을 조종하고 있다고 함부로 말하는 일이 많습니다.
또한 이른바 진보적인 운동을 한다고 하는 쪽에서도 사실상 궤를 같이 하여 청소년운동을 마치 다른 운동의 준비과정이고 청소년활동가들은 나이가 든 이후에 당연히 (대학생운동이든 청년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뭐든) 다른 운동을 할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청소년활동가들에 대해 대견하거나 기특하다고 말하며 우리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무례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독립적이고 평등한 사람이라고 본다면 할 수 없는 이야기지요. 우리는 양쪽 모두에 문제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선언 9항에 이와 같은 내용을 넣었습니다.

10. (청소년운동의 고유성)
11. (청소년운동의 연대성)
선언 중 마지막 항들은 청소년운동과 다른 운동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청소년운동이 좀 더 청소년운동 자신의 이슈에 집중해야 하는가, 또는 좀 더 다른 사회운동들과 연대해야 하는가, 이는 청소년운동 내부에서 오랜 논쟁거리였습니다. 사실 하나의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그때그때 다른 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언에서는 청소년운동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을 고유하게 가진다고 했고, 청소년억압의 문제가 독자적인 것이라는 것을 우선 강조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청소년운동이 전반적인 사회의 변혁과 인간해방을 위해 타 운동과 연대해야 할 필요성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선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청소년운동의 고유성과 연대성 중 어떤 것을 조금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활동가마다 판단의 차이가 있었고, 이는 정도의 차이이고 강조점의 차이였기에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선언에서 “청소년운동으로서” 고유한 판단을 토대로 하여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취지로 고유성과 연대성에 관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검은빛 님은 관악청소년연대여유 활동가 입니다. 공현 님은 대학입시거부로삶을바꾸는투명가방끈들의모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입니다. 쥬리 님은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활동가 입니다.
인권오름 제 425 호 [기사입력] 2015년 02월 05일 14:3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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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4.11.15 23:43
페미니스트라는 낙인페미니스트라는 낙인 - 10점
조주은 지음/민연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저는 이 책을 2007년에, 나온 직후에 집어들어서 읽게 됐었습니다. 그때도 꽤 깊은 인상을 받았던 걸로 아는데... 제가 갖고 있는 페미니즘에 관련된 관점이나 센스는 이 책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을 받았더군요. ㅎㅎ;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관점도 가지게 됐지만, 이 책에서는 아동이나 청소년에 관련된 내용, 사회운동-노동운동 등에 관한 내용들도 많이 다루기 때문에 그런 것들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또한,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으로 가족 문제를 보고 교육 문제를 보고 청소년인권 문제를 유비추론해보자는 생각도 이 책 덕분에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조주은씨가 청소년운동이랑 굉장히 잘 맞을 거 같단 생각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들은 자녀에게 버릇이라는 것을 가르칠 때가 있다. 아이가 말문이 트여 제법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할 무렵 부모들이 먼저 가르치는 것은 존댓말이다. ˝~하셨어요?˝라는 높임말부터 ˝어른이 무슨 말을 하면 `네`하고 잘 듣는 거야˝처럼 순종적인 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더군다나 한쪽은 반말을 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존댓말을 한다면, 그 관계는 권위로 움직이는 권력관계가 된다. … 우리가 흔히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고 하는 예의 바른 어린이란 곧 어른들의 권위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아이를 의미한다. 가족은 연령에 의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상대적으로 나이가 적은 아동, 청소년(녀)들은 가족 안에서 보호와 숨막히는 통제를 동시에 경험하기도 한다. 혹시 우리는 저항과 비판 속에서 건강하고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하면서도 가정으로 돌아가면 자기 아이를 어른 말 잘 듣는 아이로 키우려는 욕구는 없는가? 또는 말 잘 듣는 자녀이고자 하지는 않는가?˝(89~90쪽)

˝전시 현장에 있는 어린이는 전쟁 반대의 다양한 이유 중 하나가 되지만, 그 논리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또 다른 착취를 빚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아동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아동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동기의 발명으로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분리되었지만, 아동이 어른의 세계에 통합된다면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지 않을까?˝(124쪽)

조주은씨는 아동기 문제를 모성착취, 모성신화와 연관지어서 많이 풀어냅니다. 그리고 가족에 관련해서는 `정상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또, 가족 안에서의 권위나 권력관계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죠. 경험이나 사례에 근거하면서도 이론적인 고민, 일반화된 관점을 놓치지 않기 때문에 잘 와닿습니다.
가족 안에서의 권력에 대해서 어른-아동 문제도 이야기하지만, 역시 페미니즘이니까 남성-여성 문제도 많이 이야길 해요. `사랑`이라는 환상, 성폭력, 불평등한 가사노동이나 양육... 그리고 가족 안에서도 그렇게 폭력이 존재하고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생각을 보여주는데, 저도 그걸 보고 가족 안에서 자식과 부모 사이에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단 아이디어를 얻었던 거 같아요.

˝모순되게도, 단일한 계급이라고 치부되는 한 가족 안에서도 취향은 위계화되어 있다. 남성들이 자신만의 취미생활을 동호회 활동 등을 통하여 우아하게 지속하는 반면, 여성들은 결혼 전에 알았던 음악이 마지막인 경우가 많다. … 계급분류적 문화 행위의 상징성이 궁극적으로 계급구조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는 부르디외의 지적은 의미심장하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계급이 어떻게 차별적으로 재생산되는지는 분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을 남긴다.˝(229쪽)


조주은씨 본인의 논문 주제가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 가정`에 관련된 거였는데, 그래서 그런가 조주은씨는 가족의 문제도 잘 분석해내지만, 노동운동 내부의 문제도 적절하게 지적을 하더라고요. 칼럼을 모은 것 같은 책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여러 이슈들과도 관련지어서 쓴 글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도 읽어볼 만합니다.


다른 활동가 분들이랑 꼭 같이 읽고 싶은 책입니다!


물론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다뤄온 주제인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해서도 좋은 글들이 많습니다.

딱 펼쳐보니까 ˝프리섹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여성 활동가들은 남성들에게 창녀로 이해되고 프리섹스주의자인 남성 활동가들은 섹스 파트너를 선택할 권리를 향유한다.˝(195쪽) 같은 통렬한 서술이 눈에 들어오네요.


다만 다양한 주제들을 간결하면서도 핵심적 문제를 짚으며 다루긴 하는데, 하나하나의 글들이 좀 짧은 편이라서 아쉽기도 합니다. 더 길게 이야기를 해보면 재밌겠다 싶은 게 몇 개 있었습니다.



아, 사소한 단점 하나. 책 편집상 쪽수 표기가 책의 제본 안쪽에 돼있는데요. 그거 때문에 쪽수 찾기가 힘드네요;;; 왜 이렇게 했지...

http://gonghyun.tistory.com2014-11-15T14:43:23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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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딱딱한꿈2014.07.26 18:10




3년 전에 1번을 쓰고 들어간 글을 겨우 3편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홀가분하다...







운동을 위한 실용글쓰기 1 : 글쓰기의 일반적 기본
운동을 위한 실용글쓰기 2 : 주장하는 글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3> 기록하고 설명하는 글 : 기획안, 회의록 등

 

  설명하는 글이라고 하면, 보통은 ‘설명문’을 많이 떠올리게 된다. 교과서 등에 등장하는 그런 것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운동을 하다가 써야 하는 ‘설명하는 글’은 그런 산문 형태의 글은 아닐 때가 많다. 뭐, “○○라는 개념/제도는 이런 것이다.”라는 설명글을 쓸 일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것에는 인터넷검색이나 자료 편집의 기술이 더 요구될 때도 많다. 여기에서는 기록하고 설명하는 글로 ‘기획안’과 ‘회의록’을 설명하려고 한다. 기획안이나 회의록은 보통 우리가 ‘글쓰기’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글들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이것들이 ‘글’이기는 한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기획안과 회의록이 활동을 하면서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글의 종류라는 점은 분명하다.

기획안과 회의록은 둘 다 회의에 관련된 글이다. 기획안이 회의 등을 하기 전에 자료로서, 함께 보고 논의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라면, 회의록은 회의의 결과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글이다. 둘 다 정보의 전달을 목적으로 쓰는 글인 셈인데, 회의록이 실제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와 결론 등을 정리하고 설명하는 것이라면 기획안은 우리 머릿속의 구상, 계획, 제안하고 싶은 아이디어 등을 설명하는 것이다.


기획안과 회의록 역시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1>에서 제시한 내용으로부터 예외는 아니다. 쓰는 사람, 읽는 사람, 매체. 세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 경우 매체는 기획안이나 회의록이 이용되는 환경, 사용처라고 넓게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읽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정보는 무엇이며 어떻게 써야 읽는 사람에게 정보가 효과적으로 전달될 것인가? 쓰는 사람이 설명하고 전달하고 공유하고자 하는 정보는 무엇인가? 이제부터 이러한 설명하는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것들을 몇 가지라도 설명해보겠다.

 

 

① 기획안

 

기획안은 말 그대로, 일을 기획한 것을 정리한 문서이다. 기획의 대상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대외활동, 워크샵이나 MT, 토론회, 캠페인… 몇 년 이상의 활동을 다루는 기획안도 있을 수 있고 일회성 30분짜리 행사를 다루는 기획안도 있을 수 있다. 하다못해 친구들과 1박2일 놀러갈 때도 어디를 갈지, 몇 명이 가는지, 돈이 얼마나 드는지, 뭘 하고 놀지 등의 계획을 짠다. 기획안이란 본질적으로 그것과 그리 다르지는 않다.


기획안을 어떤 경우에 쓰고 어디에 쓰이는지부터 생각해보자. 기획안은 보통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고자 하는 활동, 할 활동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 설명하고 공유하기 위해서 쓴다. 그리고 그 공유를 바탕으로 여러 논의가 이루어지고 계획을 수정하게 된다. 또한 그렇게 수정한 기획안에 따라 활동이 이루어진다. 다른 단체 등에 기획안을 보냄으로써 활동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기도 한다. 즉 기획안은 ① 논의를 위한 기초 자료 ② 활동할 때 지침 ③ 타 단체나 외부로의 전달 등의 용도로 쓰인다. 이런 용도들을 보면 기획안이 하나의 ‘설명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안의 구성에 정답은 없다. 어떤 활동이냐, 어떤 용도냐에 따라 어느 정도 수준의 세밀함이 요구되는지, 어떤 항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지가 달라진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몇 가지 일반적으로 들어가는 내용들을 제시하겠다.


기획안의 구성은, 일단은 육하원칙을 떠올려보면 된다. “누가, 언제,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왜”. 물론 여기에서 ‘어떻게’나 ‘무엇을’ 안에 다종다양한 정보들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기획안의 항목들은 그 자체로 기획안의 개요가 될 것이다. [1.취지 2.장소 3.내용] 등…. 우선은 뭐, 기획안에는 당연히 활동의 이름이 들어갈 것이다. 이름은 기획안 제목에 들어가기도 하고, 중간에 들어가기도 한다. 우리가 논의하고 활동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이므로 이름을 잘 짓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보통은, ‘왜’이다. 즉 이 활동을 제안하게 된, 이 활동을 하려고 하는 이유 또는 배경. 활동의 취지라는 형태로 표현하기도 하고, 배경 설명을 우선 한 뒤에 활동의 목표를 제시하는 방법을 취하기도 한다.


그리고 ‘언제’와 ‘어디서’, 즉 시간과 장소가 있다. 이는 기획안에 상대적으로 짧게 들어갈 때가 많지만, 그런 주제에 많은 고려를 요구한다. ‘왜’가 우리 내부의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라면, 시간과 장소는 외부의 요건에 가장 많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 부분에는 활동하는 기간을 포괄적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 구체적인 하나하나의 일시를 다 넣는 경우도 있다. 장소 자체가 활동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장소 후보는 몇 개의 안을 마련해두는 것이 좋다. 집회신고라든지 대관신청이라든지 날씨라든지 상황에 따라 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장기간 활동을 기획하는 경우는 전체 기획안에서는 별도의 장소 서술을 하지 않거나, 포괄적으로 지역만을 서술하는 경우도 있다.


‘무엇을’과 ‘어떻게’는 활동의 내용과 방법을 뜻한다. 여기에는 참으로 많은 정보들이 들어가게 된다. 행사라면 행사의 구체적인 진행 순서, 토론회라면 담을 주제와 내용 등이 들어가야 한다. 대규모의 기획안이라면 활동 방법에 대한 총론부터 각론까지 요구되기도 한다. 기획안은 실제 활동을 위한 제안이므로, 일의 진행순서나 일정표를 첨부하기도 한다. 예산이나 재정에 관한 항목도 들어간다. 그러나 동시에 이 항목들은 처음에는 가장 생략할 일이 많은 것이기도 하다. 아이디어 논의를 위한 초안 수준에서 구체적인 진행 순서나 내용이나 일의 진행순서 등을 담을 필요는 없다. 예산을 생략하기도 한다. 이런 내용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조정해서 더 풍성하게 보충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으니, 처음 기획안을 만들어볼 때 너무 겁먹지는 말자. 외부로 보내는 기획안에서는 분량과 가독성, 보안을 위해 일부러 생략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누구’가 있다. 이는 물론 활동을 누가 하는지를 말하며, 기획안을 제안하고 논의하고 실행에 옮기는 우리들 자신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구체적인 행사의 참가자가 누가 될 것인지,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지를 적어줘야 할 때도 있다. 또한 다른 단체에 제안하는 경우, 어떤 단체들이 참여해서 어떤 역할들을 함께하길 기대하고 요청하는지 명확하게 적을 필요가 있다.


아래는 토론회 기획안의 예시이다. 일의 진행 순서 등 좀 더 채워지면 좋을 것들이 눈에 띄는데, 동시에 그런 부분을 생략해서 어떤 내용의 행사를 하려는 것인지는 더 눈에 잘 들어오기도 한다. 이처럼 기획안에서 어떤 부분을 더 세밀하게 하고 어떤 부분을 간략하게 할 것인지는 장단점이 있으므로 그때그때 고려할 문제이다. 여러분이 이런 내용의 행사를 준비한다면 기획안을 어떻게 쓸지 한 번 생각해보시면 좋겠다.

 

<학교 휴대전화 규제 문제 관련 청소년인권 토론회 기획안>

1. 행사명 청소년인권 토론회 <학교, 휴대폰금지압수 괜찮?>

 

2. 행사 취지

학교에서 휴대폰을 금지하거나 압수하는 등의 일은 사실 몇 년 전부터 벌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2007년은 특별히 휴대폰 금지 및 압수 문제가 표면에 드러나고 사회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대전지역 교장단은 <휴대전화 안 가져오기 운동 결의대회>를 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수원 청명고등학교에 대해 휴대폰을 전면 금지하는 교칙 조항이나 휴대폰을 압수하는 등의 행위는 인권침해이니 시정하라는 권고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여 4월 14일에 열렸던 <미친 학교를 혁명하라> 청소년인권 집회도 그 요구사항 중 하나로 “휴대폰 등 소지품 검사 압수 폐지”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한겨레와 방송3사 등의 언론이 학교의 휴대폰 금지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처럼 휴대폰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정작 휴대폰 금지에 대한 논쟁지점의 설정과 내용 있는 토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각 단체들도 뚜렷하게 입장을 내놓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휴대폰 문제에 대한 이 사회의 담론은, 오직 언론에 나온 단편적인 인터뷰와 인터넷 뉴스에 달린 별 내용 없는 덧글들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휴대폰 문제가 명백한 인권의 문제라고 생각, 휴대폰 문제에 대하여 교사단체, 학부모단체를 비롯하여 여러 단체들의 입장을 듣고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3. 행사 일시와 장소

2007년 6월 3일 일요일 오후 2시 (변경될 수도)

??? (미지센터, 청소년문화의 집, 전교조 서울지부, 노동사목회관, 대학교 등 검토 중)

 

4. 토론회 패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1인 (참교육실장이나 학생생활국장으로 요청)

참교육학부모회 1인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1인 (청소년)

인권단체나 사회단체 활동가 1인 (인권운동사랑방, 문화연대 등에 요청)

 

5. 진행

◎ 사회자가 5분 정도 학교 휴대폰 문제에 관한 올해 상황을 정리하고 행사를 열게 된 취지를 설명. (5분)

◎ 청소년 -> 교사 -> 학부모 -> 인권사회단체 순으로 약 3분씩 자기 입장을 간단히 정리하여 발제. (15분)

◎ 사회자가 발제 내용에 따라 쟁점을 하나나 둘 뽑아 패널들에게 질문을 하여 토론을 시작하고 각 패널들이 자유롭게 주고 받는 토론. 사회자는 논의를 벗어나거나 이야기가 계속 공전할 때만 개입. 시간이 다 되면 사회자가 짧게 정리. (1시간)

◎ 질의응답 및 플로어 참여 자유토론 (20분~30분)

 

6. 예산

장소대여료 (0원~10만원)

다과 및 음료수 (1만원)

각 패널 토론비 (3만원~6만원 문화상품권 등으로 지급)

약 5만원~17만원 예상됨.

 


기획안의 포인트는 정보의 전달과 공유이다. 그런 점에서 기획안은 내가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또 읽는 사람에게 이것이 어떻게 읽힐지 많은 고려를 해야 하는 글쓰기이다. 내가 이 기획안을 회의 자리에서 받는다면, 이걸로 충분할까? 또 무엇이 궁금할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가면서 쓰는 것이 좋다. 잘 쓴 기획안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나 제안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고 그 사람이 동참하도록 설득하는 아이템이 된다. 그리고 기획안도 혼자 쓴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조언과 의견을 반영하여 함께 완성해간다고 생각하자. 처음 논의를 위한 기획안을 쓴다면, 아예 어떤 항목과 정보가 들어가면 좋을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사람마다 궁금한 부분이나 판단에 필요로 하는 정보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회의에 참여하는 사람들 또는 제안을 받는 사람들에게 맞춤형 기획안을 작성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기획안은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특히 더 독자에 맞춘 글쓰기가 가능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② 회의록

 

회의록이야말로 우리가 활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접하는 종류의 글일지도 모르겠다. 회의에서 나온 발언, 회의의 내용, 결과를 기록한 것을 회의록이라고 한다. 그냥 “회의 기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회의록은 작성하여 이메일로 구성원들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인터넷게시판에 올려두기도 하며, 또는 다음 회의에서 자료로 첨부가 되기도 한다.


회의록은 가장 일상적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회의란 우리가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공통의 의견을 만들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견과 결정을 제대로 기록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기록을 해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각자의 기억력에만 의존을 해야 하고, 기억력이 나쁘거나 건망증이 있는 사람이 활동에 펑크를 내면서 각종 트러블이 발생하고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다.(현실에서는 회의록을 작성해서 공유해도 이런 일이 적지 않다!) 회의록에 잘못 기록된 게 있으면 나중에는 그것이 다툼이나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회의록 작성을 맡는다면 중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회의록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속기형 회의록이고 다른 하나는 요점정리형 회의록이다. 속기형 회의록은 회의에서 나온 발언들을 모두 기록하는 방식이다. 모든 말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말투를 바꾸거나 윤문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건 주된 내용은 모두 담는 것이다. (법원이나 정부기관의 회의록이 이런 방식으로 작성되곤 한다.) 조금 더 덜 힘들게 회의 중에 나온 반복된 발언이나 농담 등은 일부 생략하고 주된 논의의 내용만 따라가며 속기하듯이 작성하는 방법도 있다. 요점정리형 회의록은 각 안건에서 굵직하게 논의된 내용과 결론만 적는 방식이다. 회의록을 쓰는 사람의 취사 선택과 편집 능력이 요구되는 방식이라 하겠다. 여기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안건의 내용과 결론만 적는 간단한 형태가 있는가 하면 각 안건에 무엇이 쟁점이 되었고 이 쟁점이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지까지 설명하는 형태도 있다. 어떤 회의록이든 회의 시간과 장소, 참가자, 무슨 회의였는지 등은 기본적으로 기록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시작해보자.


속 기형 회의록을 쓰는 것은 보통 회의의 논의가 중요할 때이다. 논의의 흐름이나 누가 어떤 주장을 했는지, 토론의 맥락 등이 중요하고 기록할 필요가 있을 때면 속기형 회의록을 작성한다. 또는 논의가 복잡해서 결론을 간단히 요약하기 어렵고,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논의의 맥락과 결론을 이해시켜야 할 때도 속기형 회의록을 작성한다. 아니면 그냥 그 자리에서 논의를 정리해가며 기록하기가 어려워서 나중에 정리할 목적으로 속기형 회의록을 선택하기도 한다. 구글드라이브 등 공동으로 회의록을 실시간 작성하는 프로그램이 도입되면서 그런 경향도 생겨났다. 속기형 회의록에서 중요한 것은 집중력과 기록 속도, 기억력 등이다. 아무리 속기형이라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속기를 하기보다는 상대의 말을 실시간으로 듣고 취사선택하여 편집해가며 쓰는 성격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논의에 대한 이해와 판단력이 은근히 많이 요구된다.


요 점정리형 회의록은 단체 회의에서 쓰는 일반적인 회의록이다. 또한 역설적으로 우리의 글쓰기 능력이 필요한 회의록이기도 하다. 요점정리형 회의록에 들어가야 할 기본 요소는 다음과 같다. ① 안건이 무엇이었는지, ② 안건에서 주되게 논의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③ 결론은 무엇이었는지. 이 3가지만 잘 기록해도 요점정리형 회의록은 다 쓴 셈이지만, 당연히 말만큼 쉽지는 않다. ②가 특히 어렵다. 무엇이 주되게 논의된 것이며 기록할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사람마다 기준도 다르고 만만치 않은 내공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정 어렵다면 일단은 ③번, 결론만이라도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해보자. 결론 부분에도 역시 육하원칙이 어느 정도 적용된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기로 했는지. 물론 안건에 따라서는 누가라든지 어디서 등을 생략해도 좋은 안건들도 있다. 안건 논의가 끝난 후에 결론이 뭔지 한 번 문장의 형태로 정리를 해보자고 하는 것도 회의록을 쓸 때 정리를 수월하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②의 내용을 판별하는 몇 가지 팁이 있다. 예를 들어 회의 참가자들이 여러 번에 걸쳐 논쟁을 벌인 쟁점 사항은 무엇이 쟁점이었으며 누구와 누구가 어떤 입장 차이로 논쟁을 벌였는지 기록하는 것이 좋다. 쟁점이 아니었어도 ‘우려사항’이라고 지적한 것이나 활동을 진행하면서 ‘염두에 둘 것’으로 언급한 것은 기록하는 것이 좋다. 결론에 이르게 된 핵심적인 논거가 있다면 그것도 적자.


회 의록을 쓸 땐 매체는 크게 신경 쓸 것은 없다. 속기형으로 쓸지, 요점정리형으로 쓸지 정도만 고려하자. 헷갈릴 때는 이를 미리 함께 확인하고 회의를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나의 회의록에서 안건에 따라 어디에는 속기형을, 어디에는 요점정리형을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회의록에서 ‘쓰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나 혼자가 아니라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 모두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회의의 내용을 ‘내가’ 무엇을 선별하여 기록하고 전달할지 생각해야 한다. 내가 무슨 정보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리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회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정보인가,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회의록의 어려운 점이다. 최종적으로 회의록 작성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역시나 ‘읽는 사람’이다. 이 경우 읽는 사람은 회이에 참석하지 않은 제3자이거나 미래의 회의 참석자들이다. 나중에 가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회의록을 보게 될 때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한두 달 뒤에 이 회의의 내용을 다시 본다면 무엇을 궁금해할까, 무슨 정보를 찾으려 할까 상상해가며 쓰는 것도 회의록을 내실 있게 만드는 요령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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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4.03.30 22:48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소식지 활력소입니다. 수신거부는 hwalgy@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http://cafe.daum.net/Life2010   |   http://hwalg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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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3.09.02 01:06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백서  (6년의 활동을 담은)

파란만장

   “‘청소년인권운동’이란 걸 한번 제대로 일궈내보자”
그렇게 시작했던 우리들의 활동.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6년의 활동 역사를 백서 몇 권에 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반짝거림, 벅차오름, 두근거림, 이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전하지는 못해도 우리들의 파란만장함을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자료, 선례, 반면교사, 그리고 든든한 길동무가 되어줄 이 모든 기록들을,
청소년인권운동에 관심이 있고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를 알려는 모든 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무려 5권!  1권 :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역사

               2권 : 학생인권

               3권 :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 (경기도.서울)

               4권 : 여성주의, 노동/빈곤, 보호주의

               5권 : 연대사업,연구보고사업,교육/워크숍/캠프사업



신청 및 문의  |  http://bit.ly/18gwlVA
           010-2540-7245 (목소리 좋은 활기 책임활동가 별다)
신청 기간  |  2013년 9월 1일 ~ 9월 16일
                  (사전 신청을 통해 수량 확인 후 9월 말 발간할 예정입니다)
가격  |  10만원  (5권 1세트, 배송료 포함)
입금할 곳  |  우리은행 1005-802-084005
                    예금주:청소년활동기상청활기  (입금은 9월 17일까지는 해주세요~)


"총 3000여쪽이니까 10만원이더라도 용서할 수 있을 거 같아!!"



파란만장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백서 출판기념회

때 : 9월 26일(목) 오후 7시
곳 : 레드북스 (서대문역 3번출구 걸어서 5분)


청소년활동가들의 만남과 나눔의 자리
알고 있는 분들, 알고 싶은 분들, 모두 초대함!



"네트워크를 기억하는 누구나 놀러오세요~ 홈커밍데이★"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http://cafe.daum.net/Life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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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08.27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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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역거부자인 나는 양심수인가


1.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 소식지를 읽다가, 일본대사관에 트럭을 돌진시켜 재물손괴죄 혐의로 구속재판 중이신 분이 양심수 목록에 추가된 것을 발견했다. 그분은 어느 일본사람의 '위안부 소녀상 말뚝테러'에 항의하는 마음으로 그랬다고 한다. (그 다음번 소식지에선 양심수 목록에 없던걸보니, 아마 재판에서 실형선고를 안받으셨나보다.) 나는 그 소식을 보며 의문이 생겼다. "이분은 '양심수'가 맞는걸까?" 동시에, 병역거부로 재판을 받고 수감이 될 때부터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거리도 같이 떠올랐다. "나는 과연 양심수인가? 양심수란 정확히 무엇인가?"

'양심수'란 단어를 곧이곧대로 풀이해본다면, 대강 마음 속의 '양심'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양심' 때문에"라는 말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우선, 마음 속의 양심, 신념, 사상, 의견, 신앙 등을 이유로, 즉 어떤 생각이나 믿음을 품고 있다는걸 이유로 수감된 경우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자기 마음 속의 생각이나 믿음을 쓰거나 말하거나 표현했다는 이유로 수감된 것도 '양심 때문에'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뭔가 겉으로 표현한게 없이 마음 속의 것을 알아내긴 어려우므로, 대체로 양심수들은 이런 표현의 자유 문제가 연관되어 있곤 하다. 여기에서 좀더 넓혀본다면, 그런 생각이나 믿음에 따라 어떤 행위,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수감된 사람들도 어쩌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한국 상황에서 '양심수' 개념에 가장 잘 들어맞는 것은 예컨대 국가보안법 피해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이적표현물 소지'나 '찬양, 고무' 같은 죄명으로 처벌받는 사람들일듯 싶다. '비전향 장기수' 같은 경우도, 처음에 갇힌 이유가 무엇이든, 마음 속의 신념을 바꾸지 않는다는 이유로 풀려나지 못하고 계속 갇혀있다면 '양심수'에 해당될테고.

그런데 마음 속의 생각이나 믿음에 따라 한 활동 때문에 수감된 경우를 '양심수'에 포함시키는 것에는 모호한 부분이 있다. 한 예로, 얼마전 노르웨이에서 자신의 극우적 신념에 따라 사람들을 죽인 사람을 떠올려보라. 그 사람 역시 자기 마음 속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것이고 그 때문에 수감된 것이니까, '양심수'라고 불러야할까? 같은 질문이 마음 속 깊이 뿌리내린 신념에 따라 테러를 저지른 사람, 학살이나 전쟁을 저지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가능할 것이다. 이에 대해 적합한 대답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 사람은 그 사람 마음 속의 생각이나 믿음 때문에 처벌받은게 아니라, 살인, 학살, 전쟁 등의 행위 때문에 처벌받은 것이다. 즉, 우리는 어떤 사람의 '양심'과 '행위'를 구분하여 다룰 수 있다.

트럭을 일본대사관에 돌진시킨 그분에게도 마찬가지 기준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분의 의견, 신념과 관계없이 오직 그 행위만을 이유로 처벌을 받는다면 말이다. 사실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에서 싣는 '양심수'들의 목록을 보면 이게 '양심수'가 맞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사례들이 간혹 있다. '양심수'라는 개념이 그저 "나(우리)는 그 사람의 수감에 부당한 부분이 있다고 주장한다"라는 이야기를 포장하는 꾸밈말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가 '양심수'가 아니란 말이 그 사람의 수감이 꼭 정당하다느 뜻도 아닐 것이고. 그러니 '양심수'의 개념은 좀 더 정확하게 쓰여야하고, 또 다른 개념들의 발명도 필요해보인다. 자본친화적 법 적용 때문에 수감된 노동자, 철거민 등을 '계급수'라고 한다거나? (물론, 관련해서 '구속노동자'나 '공안수' 등 여러 용어가 있긴 하다)

그리고 나는, 나와 같은 병역거부자 역시 과연 양심수가 맞는건지 잘 모르겠다. 병역거부자들은 자신의 양심, 신념 때문에 갇혀있는 것인가? 국가는 병역거부자들의 양심, 신념, 신앙을 처벌하는 것인가? 내 생각엔(적어도 최근엔) 국가가 병역거부자들을 입대 영장을 받고도 입대하지 않았다는 '행위'만 보고 처벌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병역거부자들의 형량이 1년6월로 줄어든 최근 몇년은 말이다. 탈영이든 항명이든 입영기피이든 다른 '병역법 위반'들도 큰 차이가 나지않는 형벌을 받곤하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나는 나를 재판한 사법부든 형을 집행한 국가든 내 생각이나 주장에는 아주 무관심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이 나(우리?)의 신념이나 주장의 내용에 무관심하다는 것이야말로 내가 '양심수'가 아니라는 증거 아니겠는가?



2.
'양심수', '양심의 자유' 등이 부각되면, 거기에는 볼테르의 저 유명한 논법이 따라붙곤 한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탄압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이다." 여기서 "동의하지 않는다"란 말의 의미는 상관하지도 판단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리라. 한국 사회에서 병역거부자들에 관해 형성되어있는 비교적 우호적인 편인 이야기들 중에도 그런 종류의 것이 많다. 병역거부자들은 어차피 종교적, 정치적 신념을 굽하지 않고 군인이 되기를 거부할 것이므로, 그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 처벌하기보다는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대안을 마련하자는 것 역시 그 중 하나의 변형 논리이다. 병역거부자들의 신앙, 신념에 동의하진 않지만 감옥에 보내는 것보다 나은 길을 찾자는 식의 이야기도 그렇고. (이런 논법의 배경엔 한국의 공고한 군사주의와 병역거부자의 수적 다수가 '종교인'이라는 현실 등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처럼 사람의 신앙, 신념 등을 국가가 강제로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한국 사회의 인권의식은 크게 발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런 논법이 껄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정치적 병역거부자', '정치적 양심수'에 속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상당수의 정치적 양심수들은 자신이 자유를 침해당해 갇혀있다는 것만큼이나 자신이 탄압당하면서도 생각하고 말하려했던 그 내용 역시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사람들이 '부당한 수감'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 이상으로 자신이 수감된 연유, 자신의 주장이나 활동 등에 관심을 가져주길 원할 수도 있다. 수감 사실이 앞에 오고 그들의 '양심'의 내용은 뒤로, 괄호 쳐진 채 판단 밖으로 밀려난다면 그게 꼭 바람직한걸까?

'양심'이라는 개념은 원래 이런 문제를 초래하게 예정되어 있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고유한 '양심'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고, 공유되기도 어렵단 점에서 사회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니 '정치적 양심수'란 말은 이미 모순을 품고있다.

한나 아렌트는 논문 <시민불복종>에서 이런 '양심'의 문제에 대해 이렇게 썼다. "양심은 비정치적"이며, "개인의 자아와 그것의 고결함을 염려"하지, "잘못이 범해지는 세계나 그것이 그 세계의 향후 진로에 대해 갖는 결과에 주목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자기희생적 요소'가 '강렬한 관심'과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진지함 그리고 법에 대한 충실함'을 나타내는 최상의 증거라는 점은 대단히 불행한 것이다. 왜냐하면 외골수적인 광신은 보통 미치광이의 표지이며, 어떤 경우라도 그것은 문제의 논점에 대한 합리적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공화국의 위기>, 한나 아렌트, 김선욱 옮김, 한길사)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정치적 병역거부자들의 목소리, 이야기를 그저 '존중해야할 고유 불변의 양심'이 아니라 대화해볼만한 정치적 관점, 발언으로 받아들여줬으면 한다. 그런 생각을 할때면 나는 '양심수'로 분류되기보다는 '평화수감자', 차라리 '정치범'으로 불리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도 해본다.



3.
이런 논의는 실은 별로 새로운게 없는 것이라서, 병역거부-평화운동에서는 진작부터 '개인의 인권'과 '반군사주의, 평화'운동아리는 서로 긴장관계가 있는 두 축으로 병역거부운동을 분석해왔다. 한편으로 나는, 병역거부운동과 인권의 언어가 '양심의 자유' 말고 다른 만남을 이룰 수도 있을 것 같다.

병역거부가 국제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양심의 자유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은 결국 역사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체로 알려진 바이다. 유럽지역, 미국 지역 등에서 '종교적 양심'을 앞세운 병역거부가 먼저 등장했고, 그러한 종교적 전통이 이어지고 확산되면서 비종교적(정치적) 병역거부가 그 기반 위에서 나탄ㅆ던 것이다. 출발부터 종교적 신앙적 성격이 있었으니 '양심의 자유' 문제로 다루어질 수 있었고, 때문에 지금도 병역거부는 '양심의 자유'의 대표적 의제 중 하나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역사적 맥락 말고도 다른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병역거부가 중요한 인권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이나, 병역거부가 양심의 자유의 본질적인 내용에 속한다는 해석 등은 모두 병역거부에 대한, 정확히는 군대, 전쟁에 대한 가치판단을 깔고있는 것은 아닐까? 요컨대 사람을 살상하는 군대, 전쟁의 성격상 그것들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에 일반적으로 악영향을 미칠 만하다는 공감대가, 병역거부를 인권의 언어로 옹호하게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양심의 자유'가 '양심'의 내용은 따지지 않는다는 전통적 설명과는 안맞겠지만, 그런 공감대가 없었다면 과연 병역거부가 인권의 대표적 의제이자 본질적 내용으로 입주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졌듯이, 인권은 중립적인 체계가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라는 친근한, 편향적 체계이고 언어이다. 역사 속의 인권 구상들 중에는 상비군 또는 국군의 폐지, 축소를 담고있는 것들도 있지 않았는가? 병역거부자가 '양심수'가 아니라고 해도 병역거부운동이 인권과 만나는 다른 조합들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다. 여하간 병역거부운동 역시 '양심수' 너머에서 계속 나아갈 것이고, 병역거부자들 각자의 말들도 운동을 통해 계속 만들어지고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2012. 10. 17.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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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 중일 때 써서, 병역거부자 팀 블로그에 실렸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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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08.25 12:55


[특집| 2008년의 ‘촛불 청소년’]그들은 2013년에 다시 촛불을 들었을까




[특집| 2008년의 ‘촛불 청소년’]촛불 경험이 어떤 영향을 미쳤나




2008년의 촛불 청소년의 현재 2013년의 촛불 집회 참가 여부,

그 청소년들의 현재 상황 등을 추적한 기사.


흥미로운 시도라고 생각한다.

촛불집회가 조직적, 운동적 현상이 아니라 개인적 참여 경험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아, 두 번째 링크한 기사는 연구의 어려움을 토로한 기사이니 참고 삼아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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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08.25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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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 2013년 3․4월호』


‘청소년운동론’ 예고편
지난 호 특집 <연습인 삶은 없다>에 대한 어떤 답변


공현


지난 호 《오늘의 교육》 특집이었던 <연습인 삶은 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용주의 ‘이제는 전교조 교사가 된 한 고등학생운동활동가의 고백’을 읽고 청소년운동에 대해 글을 써야겠단 생각에 펜을 들었다. 오해는 마시길. 이 글은 그 특집의 내용에 직접적으로 대답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 글은 내가 오래전부터 막연하게 품어 오다가 최근에야 구체화된 어느 욕심의 부산물이다. 바로 청소년운동이 무엇이며 어떤 것인지를 제시하는 글, 말하자면 ‘청소년운동론’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다. 여기에서는 그 ‘청소년운동론’에 관한 구상 몇 가지를 보여 드리려고 한다. 따라서 이 글의 어떤 부분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미완성의 밑그림처럼 읽힐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내놓는 것은, 지난 5~6년간 청소년운동에 빠져 살아온 한 사람의 청소년운동에 대한 생각들을 늘어놓는 것이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청소년운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싶기 때문이다. 또, 청소년운동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소개하는 내용도 덧붙임으로써 청소년운동의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약간의 답도 드리고 싶다.


청소년운동? : 독자성, 주체성

기본부터 시작해 보자. ‘청소년운동은 무엇인가?’ 청소년운동론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1980~1990년대 고등학생운동을 빼고 계산하더라도 청소년운동의 역사가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가고 있음에도 청소년운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리가 정식으로 이뤄진 사례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학술 영역에서도 청소년운동을 설명해 줄 만족스런 이론 등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사실 청소년운동에 관해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는 청소년운동에 적대적인 보수 언론 같은 데서 만들어 내는 ‘좌파 세력에 의한 청소년 세뇌의 결과물’, ‘좌경화된 청소년들의 위험한 활동’ 같은 것들이다. 이런 좌우 이분법에 기댄 해석은 광범위한 영향력을 보여 주고 있다. 아마도 청소년운동에 우호적이라는 이들, 또는 보수 언론들의 논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들 속에서도 청소년운동을 교육운동에 딸린 부록 같은 걸로 생각하거나 민주·진보·개혁·혁명·변혁·좌파...... 적 사회운동의 청소년판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청소년운동에 대한 감정은 좀 다르더라도 청소년운동을 더 큰 운동에 딸린 운동, 다른 운동에 의해 정해지는 운동으로 보는 점은 같다.

청소년운동 내부에선 어떨까? 과거 고등학생운동에선 추측건대 ‘변혁운동의 한 주체로서 (중)고등학생, 그리고 그들의 주체적 운동’이라는 답이 주류였던 것 같다. 2000년대에 청소년활동가들은 청소년운동의 주체적, 저항적, 정치적 성격을 명확히 하며 ‘진보적 청소년운동’ 같은 개념을 제안하기도 했다. 국제적으로 확립된 아동인권 규범을 차용하면서, 또 급진적 인권운동의 성격을 부각시키면서 ‘청소년인권운동’이란 개념이 통용되고 있기도 하다.

내가 추구하는 ‘청소년운동론’은 청소년운동을 독립적이면서도 담백하게 정의한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들의 권리와 해방과 행복을 위한 운동이다. 좀 더 말을 붙여 본다면 ‘청소년(아동, 미성년)에 대한 억압, 차별, 배제, 착취, 무권리의 문제에 맞서 청소년들이 더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운동’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청소년운동을 오직 청소년들이 겪는 경험과 청소년들이 사회에서 놓이는 자리에 관련된 것으로, 즉 청소년들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그것에 의해 정의하는 것이다. 굳이 그걸 강조하는 것은, 그래야만 청소년운동이 청소년들의 현실과 이해관계를 더 잘 반영할 수 있고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입장과 관점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하는 사회운동이 곧 여성운동인 건 아니듯이, 장애인운동이 주로 보건·복지 분야의 의제를 다룬다고 해서 복지운동에 딸린 운동이 아니듯이, 청소년운동은 청소년들이 하는 좌파적·변혁적 운동도 아니고, 교육운동에 딸린 운동도 아니다. 청소년운동을 이야기하기 위해 ‘진보성’ 같은 잣대를 갖다 대거나 인권 규범의 보조를 받을 필요도 없다. 청소년운동의 출발점은 청소년들의 현실과 그에 대한 비판적 인식만으로 족하다. 나는 운동의 보편적 가치는 어떤 거대담론 속에 운동을 자리매김함으로써가 아니라, 운동의 고유한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재구성함으로써 생겨난다고 믿는다. 가장 독자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랄까?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운동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 가장 의미 있는 운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쟁점은 청소년운동을 청소년이 하는 운동으로, 즉 주체에 의해 정의하는 방식이 적절한가 하는 점이다. 다르게 말하면 ‘청소년운동은 청소년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요약되는 문제인데, 여기에는 역사적인 맥락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비청소년들이 청소년들을 훈육·선도·선교하는 활동들이 있어 왔고 이들은 ‘청소년운동’이란 표현을 선점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청소년들의 건강한 성장 및 육성’, ‘청소년들을 바람직한 국민/시민으로 길러 내기’ 등을 목표로 하는 청소년지도단체들, 청소년 유해 환경 감시 활동이나 그와 비슷한 일들, 종교적 단체들의 청소년 활동 등이 그 예이다. 지금도 ‘청소년단체협의회’나 ‘청소년계’ 같은 명칭이 가리키는 것은 그런 운동, 그런 단체들인 게 현실이다. 그래서 청소년운동은 발전 과정에서 그런 것들과 선을 긋기 위해 운동에서 청소년들의 주체성 문제를 강조했다. 비청소년과 청소년 사이의 권력관계를 경계하며 청소년만이 청소년운동을 해야 하고, 활동을 하던 사람들도 나이를 먹으면 청소년운동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온 적도 있었다. 비청소년들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직접 주체로서 하는 운동이야말로 진짜 청소년운동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청소년 해방을 위해선 청소년들의 자력화와 조직화가 필요하다. 청소년운동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청소년 대중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 내는 힘이 없어선 안 된다. 비청소년과 청소년 사이의 권력관계가 반복되는 것을 경계하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청소년운동은 청소년만 할 수 있고 비청소년은 해선 안 된단 식으로 받아들이는 건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청소년운동에서 청소년들은 주체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청소년 당사자들이 운동의 핵이 되어야 하나, 그것이 비청소년들을 따돌림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청소년이든 청소년이든 청소년운동에 널리 참여하고 긍정적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은 청소년운동 발전에 필수적이다. 청소년운동은 운동의 내용에 의해 주로 정의되는 것이고, ‘누가’ 하느냐 하는 문제는 의미 있지만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동시에, 청소년운동에서 청소년과 비청소년 사이의 관계 문제, 비청소년들의 적절한 역할 등은 앞으로 ‘청소년운동론’이 풀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청소년? : 나이 대, 계급성, 소수자

내가 만들려는 ‘청소년운동론’이 청소년들의 현실에 그 근거를 둔다면, 다음으로는 ‘청소년’이 어떤 존재인지가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익히 아시다시피 청소년을 정의하는 기준은 ‘나이’다. 만 18세 또는 만 20세 등 그 사회에서 성년으로 인정받는 나이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을 청소년이라 한다. 청소년은 생애 중의 한 시기로, 한 나이 대로 이해된다. 이에 더해 여러 과학들은 청소년을 성장 중이고 발달 중인 존재로 보고, 2차 성징이나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특성들로 설명한다. 사회적으론 청소년에 ‘어른 혹은 본격적인 삶을 준비하는 나이 대’, ‘미래의 꿈나무’ 등의 의미를 씌운다. 이처럼 통시적인 관점에서 생애 중의 한 시기로 청소년을 파악하고 미래에 종속된 존재로 보는 것이 이 사회에선 지배적인 인식이다. 사회운동 안에서도 청소년운동의 활동가들을 예비 청년/대학생활동가로 보거나, 청소년들의 권리 문제를 장래에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훈련 또는 학습의 문제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나는 이러한 통시적인 관점을 벗어나 바로 지금 당장 청소년들이 겪는 경험에 초점을 맞추자고 제안하고 싶다. 미래를 위한 일시적인 나이 대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 청소년을 파악하고, 우리 사회의 한 집단으로 청소년 집단을 분석하자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무시되고 평가절하되고 낭만화되어 온 청소년의 삶을 말하기 위해 먼저 이뤄져야 하는 관점의 전환이다. 이렇게 접근해야 청소년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소수자로 이해할 수 있고 청소년의 계급성이라는 문제도 포착할 수 있다.

이제껏 청소년과 계급 문제를 연관 지을 때는 청소년이 속한 가족의 계급을 곧 청소년의 계급으로 간주하거나, 청소년이 이후에 비청소년이 되었을 때 어떤 계급에 있느냐 하는 문제만 관심을 받아 왔다. 그렇지만 정용주의 글에서도 “청소년은 계급”이란 이야기가 등장하듯이, 청소년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을 살펴보면 청소년들 자체가 계급성을 가지며 청소년들만의 이해관계도 따로 존재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지금 청소년들은 정치적·경제적으로 무권리 상태에 있고 가족에 딸린 존재로서만 사회에서 생존할 자리를 인정받을 수 있는 형편이다. 예컨대 청소년이 친권자로부터 독립적인 삶을 꾀하려 할 때, 혹은 가족의 테두리 밖으로 나오게 될 때 청소년의 계급성은 선명하게 드러나곤 한다. 물론 청소년의 계급성이란 문제는 더 꼼꼼하게 연구되어야 할 주제이다. 가령 성별, 젠더에 따라서 계급성은 다르게 경험될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불안정한 삶의 조건 등 변화하는 사회적 상황 역시 청소년 계급의 현실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청소년이 속한 가족의 계급과 계층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청소년의 계급성, 이해관계가 가족의 계급적인 관계와 어떨 때 일치하고 어떨 때 충돌하는지 등 밝혀야 할 문제들이 많다.

청소년을 ‘소수자’로 보는 것 역시 통시적인 관점을 벗어나야 가능하다. 청소년을 일시적인 나이 대로만 본다면 청소년은 소수자일 수 없다. 누구나 한땐 청소년이었고, 누구든 계속해서 청소년인 사람은 없는 탓이다. 그러나 딱 지금 이 순간 청소년들의 현실을 놓고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수적으로 청소년은 전체 인구의 1/4 정도, 10대로만 좁혀서 보면 1/8 정도에 지나지 않는 소수 집단이다. 청소년들이 정치적으로 과소 대표되는 것이나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것은 청소년들도 우리 사회에서 일종의 ‘소수자’임을 말해 준다. 사회적 소수자로서 청소년들이 위치해 있는 권력관계의 동학動學, 청소년들의 현실을 분석하는 작업이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청소년을 나이 대가 아닌 사회적 집단으로 보게 될 때 우리는 청소년 집단이 영속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사회가 미성년에 대한 구분, 억압, 차별을 계속하는 한 청소년 집단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것은 청소년운동이 계속될 수 있는 근거이고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청소년이 지닌 나이 대로서의 성격도 완전히 간과할 수는 없다. 오늘을 사는 사람으로서 청소년을 강조한다 해도, 그 오늘을 사는 일 중에는 내일의 삶을 생각하고 이어 가는 일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청소년들의 욕구와 관심 중에는 ‘내일’의 일, 장래의 생계, 노동, 진로 등에 관한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게 당연하다. 청소년운동은 이 역시도 운동의 의제로, 조직화 과정의 일부로 적절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덧붙여 청소년 집단은 영속적이더라도 그 구성원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도 청소년운동이 고려해야 할 조건이다.


자본주의? : 청소년 억압의 문제

청소년에 대한 억압, 차별, 배제, 착취, 무권리의 원인과 성격을 해석하는 것도 청소년운동론에서 중요한 논점이다. 과거 고등학생운동은 반민주적 군부독재, 민족 분단, 제국주의, 자본주의와 계급 모순 등의 사회문제에서 청소년에 대한 억압도 비롯된다고 보았던 듯하다. 이는 변혁운동으로서 고등학생운동의 특징이었고, 나는 이런 특징이 시사하는 바가 여러모로 많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성격상 고등학생운동에선 청소년 억압 자체에 집중하여 그 문제를 폭넓게 다룬 이야기를 찾기가 어렵다. 청소년운동의 경우 초기엔 청소년 억압의 원인으로 유교적 문화나 식민지 잔재, 비청소년들의 권위 의식 등 문화적 요인들을 지목하곤 했다. 그러다 청소년운동이 좀 더 이론적 자원들을 흡수하면서 경쟁 중심의 교육 및 사회, 국가주의, 신자유주의 등에 청소년 억압의 구조적 원인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가 발전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청소년 억압에 관해 좀 더 다듬어진 이론은 청소년(아동)을 따로 구분하는 인식이나 핵가족 중심의 제도, 학교 제도 등이 근대 자본주의, 국민국가의 시대에 발명된 것이므로 청소년 억압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산물이라고 본다. 이러한 논의는 자본주의의 지속과 재생산을 위해 경쟁적인 교육 체제 등을 통해 청소년을 억압하고 있다고 보며, 경제 재생산, 문화 재생산 이론 등을 인용하기도 한다.

나도 현재의 청소년 억압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청소년 억압을 자본주의의 문제로 한정 짓는 것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지금과 양상이나 연령의 차이 등은 있겠지만 과거에도 많은 사회에서 성년/미성년의 구별을 두었다. 미성년에 대한 훈육 체제, 차별, 억압 등도 존재했다. 계급, 신분, 성별, 직업에 따른 차이가 두드러지긴 했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청소년 억압은 가부장제―여성 억압만큼이나 긴 역사를 가진 것 아닐까?

모든 사회는 지속과 재생산을 위해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을 기성 사회체제에 맞게 훈육할 필요가 있다. 새로 태어나 성장하는 사람들은 항상 기성 사회에 대해 약자인 동시에 타자의 성격을 가진다. 그들을 기성 사회에 성공적으로 동화시켜야만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특히 기성 사회체제가 차별, 억압, 착취 등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면 동화의 과정은 더욱 억압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청소년 억압의 뿌리라 볼 수 있지만, 청소년들을 일방적인 피해자인 양 묘사하는 건 아마 오류일 것이다. 그러한 동화의 과정은 청소년들의 입장에선 생존을 위한 과정이기도 하며, 청소년들은 다양하게 기성 사회와 협상하면서 동화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청소년 억압을 보편적 문제로 파악한다면, 청소년운동은 반자본주의적 운동이긴 하되 반자본주의운동으로 속하지만은 않는 독자적인 위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 억압 문제를 개선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전망 또한 별도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아직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선 자본주의사회 이외의 여러 사회의 미성년/성년 제도, 훈육 제도 등을 청소년 억압이란 문제의식을 가지고 검토해 봐야 한다. 그런 사례들에 대한 청소년들의 개인적·집단적 저항 사례 역시 분석해 봐야 한다. 이 가설이 설득력이 있는지는 그런 역사학적·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검증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 못지않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청소년 억압이 어떤 것인지 정리하는 것도 ‘청소년운동론’의 중요한 과제이다. 간략히 말해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청소년을 억압하는 가장 대표적인 제도는 가족과 학교로 나타난다.

청소년들은 가족과 학교에 속해 보호받고 교육받는 존재로서만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가족과 학교는 대다수 청소년들의 생활 전반을 통제하고 결정짓는다. 가족 제도는 개인들에게 사적으로 양육을 부담시키면서 청소년에 대한 친권자의 지배를 가능케 하고, 학교 제도는 청소년들을 ‘학교화’하며 경쟁과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로 차별 및 억압을 정당화한다. 이 둘 ― 가족과 학교 ― 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는 가족으로부터 양육의 책임을 위임받았다는 것으로 여러 권력을 정당화한다. 가족은 학교의 입시 경쟁 등에 참여하고 동조하며 청소년들을 학교에 집어넣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자식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신자유주의적 부모상 등 가족은 학교 제도에 여러 모양으로 참여하는 단위가 되며, 경제적 지위나 여건에 따라서는 학교에서 청소년이 탈락하고 배제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가족과 학교는 서로 밀접하게 얽혀서 청소년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 이런 가족과 학교 제도를 변화시키거나 폐지하는 게 청소년운동의 장기적 과업이다. ‘청소년’ 하면 ‘양육’과 ‘교육’이 항상 같이 따라다니는 것도 극복해야 할 문제일 테다. 그 밖에도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 덜 된 인간으로 간주하는 여러 제도나 관행들이 청소년 억압을 이루고 있다. 노인 차별 등을 포함한 ‘나이주의’ 역시 청소년운동이 싸워 가야 할 문제이고, 불안과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적·경제적 현실도 청소년 억압의 중요한 부분이다. 더 욕심을 내 본다면 청소년 노동착취, 전쟁 동원 등 주된 문제의 양상이 다른 외국의 청소년운동과 연대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다시, 청소년운동?

돌이켜 보면 청소년운동에 대해 이만큼 논의가 가능해진 것 역시 청소년운동이 지금까지 발전해 온 덕분이다. 요즘엔 주류적인 ‘청소년학’이 청소년에 대한 비청소년 중심의 관점 일색인 현실에서 어쩌면 청소년 해방을 지향하는 새로운 ‘청소년주의’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이대로 조금 더 밀고 나간다면 말이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일단은 글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한국의 청소년운동이 어디까지 왔는지 짚어 보려고 한다.

청소년운동은 1990년대 중후반에 학생인권 문제를 비롯해 청소년들의 삶의 문제를 나누는 온라인 모임들로 출발했다. 이런 자생적인 움직임들이 운동의 꼴을 갖추기까진 많은 시행착오와 부침을 겪어야만 했다. 두발 자유 등 학생인권 의제들이나 여러 청소년 억압 의제들은 제기되는데 운동의 중심은 형성되질 못하고 몇 년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청소년운동 조직들이 2~3년을 못 가고 생겼다 없어지기를 반복하는 걸 두고 ‘하루살이운동’, ‘도돌이표운동’ 같은 표현도 나왔다. 그러면서도 한쪽에선 청소년운동 주체들의 의식이 계속 발전하고 변화해 왔다. 여기엔 청소년들의 자생적 투쟁 사례들이나 2002년 이후 몇 차례 있었던 대중적 촛불집회, 진보정당운동의 등장 등 여러 사건들도 영향을 미쳤다. 청소년운동의 정치적 성격에 관한 토론, 운동 방법론 및 ‘대중운동’에 대한 논의, 역사 정리 작업 등도 이루어졌다.

2004년에 ‘청소년인권연구포럼 아수나로’로 시작해 2006년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이하 아수나로)’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한 아수나로는 그런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단체이다. 아수나로는 그 이전의 운동에 대한 평가와 반성 속에서 만들어지고 성장했다. 아수나로의 특별함은 올해로 적어도 만 7년, 포럼 시절부터 따지면 약 9년을 존속하고 있다는 바로 거기에 있다. 내가 청소년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2006년, 배경내 활동가가 내게 아수나로가 10년만 안 망하고 가게 하라고 약속(?)을 시켰을 정도로 오래 살아남는 것 자체가 청소년운동에선 숙원이었던 것이다. 아수나로만큼 긴 시간 활동을 해 온 단체가 그 전에는 없었기에, 아수나로를 통해 축적된 자료와 경험은 청소년운동에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년간 연속성이 담보된 덕에 청소년운동은 이제 겨우 운동의 주체 집단이 형성되고 운동론도 내다볼 수 있을 만한 단계에 이르렀다. 물론 아수나로는 청소년운동의 종착지가 아닌 씨앗에 불과하다. 대중 조직도 활동가 조직도 아닌 어중간한 형태, 넓은 활동 영역 등은 청소년운동의 발달 속에서 아수나로가 맡아야 했던 역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아수나로가 어떻게 발전하고 변해 가느냐도 중요하고, 이후에 다른 청소년운동 조직이나 흐름들이 아수나로가 축적한 자원들을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도 중요하다. 아수나로 말고도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로 이어지는 조직과 사람들 또한 청소년운동의 소중한 자원이다.

의제나 외적 성과의 측면에서도 살펴보자. 청소년운동이 그간 사회적으로 공론화시킨 의제는 주로 학생인권, 그리고 좀 더 쳐 주자면 교육 문제, 청소년 노동,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정도이다. 이 중 학생인권은 1998년 학생인권선언, 2000년 두발자유화운동 이후 적어도 13~15년은 계속되어 온 청소년운동의 핵심의제이다. 현재까지 학생인권운동은 학교에서 학생인권 상황이 개선되는 데 기여하고, 법적으론 ‘때리는 체벌’을 금지시키고, 경기도·광주광역시·서울시에서 학생인권조례 제정, 서울시·경남·충북에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를 성공시키는 등 눈에 보이는 성과들을 내고 있다. 학생들이 학교 현장에서 학생인권 문제에 관한 운동을 좀 더 만들어 가고, 다양한 시민들의 지지와 참여를 조직해 낼 수 있다면 학생인권 문제는 부족하나마 더 의미 있는 변화를 이룰 수 있을 듯싶다. 오랜 기간 끌어온 학생인권 의제에서 성과를 내는 것은 청소년운동의 발전에도 발판이 되어 줄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청소년 중 다수인 초·중·고생들이 좀 더 시간적 자유를 얻고 정치적·문화적 활동을 할 여지를 얻고 탄압의 위험을 줄이는 것도 청소년운동 확대에 필수적이다.

학생인권 외의 의제는 성과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여러 의제들로 운동을 다채롭게 채워 가는 것도 당면 과제다. 교육 문제,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등은 그동안 몇 번 운동이 있었지만 아직 제대로 공론화를 시키지도, 운동으로 만들지도 못한 의제들이다. 이는 청소년 다수가 쉽게 공감하고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이므로 운동으로 잘 다듬어서 폭발력 있는 활동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성소수자, 장애인 등 청소년 안의 소수자 집단에 관한 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운동은 당사자를 조직화하고 다른 소수자운동과 연대하고 교류하는 것을 통해 그 발판을 마련해 갈 수 있겠다. 탈학교, 탈가정, 주거권과 같이 다소 생소할 수 있고 아직 충분히 구체화되지 않은 의제들도 운동으로 만들어 가기 위한 기획이 요구된다.

청소년운동은 앞으로 양적 확대만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양성이 늘어나야만 할 것이다. 여러 방향, 여러 방식의 조직화를 통해 다양한 대중 조직과 활동가 조직들이 생겨나야 청소년운동이 더 활력 있는 운동이 될 수 있다. 이런 조직들은 자생적으로 생겨날 수도 있고, 기획적으로 육성될 수도 있다. 한편으론 청소년운동 연구소, 청소년운동 언론, 청소년 주거 지원이나 협동조합 같은 모임, 청소년운동의 역량을 강화할 교육 기구 등도 만들어져야 한다. 할 일이 참 많아서 몸이 열 개여야 겨우 안심이 될 것 같다.

청소년운동은 지금 많이 잡아 봐야 수백 명 정도의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작은 운동이다. 청소년운동이 운동 외부의 미조직 청소년들과 잘 접촉하고 소통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정용주가 말한 “열광적 진동”도 “운동의 민주성”도 자신하진 못하겠다. 솔직히 말하면 슬슬 청소년운동의 구조 개편이 있어야 운동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든다. 그래도 너무 조급해하진 않으련다. 예전엔 불가능하고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많은 일들이 지금은 구체적인 그림도 그려 볼 수 있게 됐으니까. 이제 씨앗은 만든 것 같으니까. 아마 곧, 본격적으로 ‘청소년운동론’도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몇 가지 싹도 틔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이 씨앗에 양분을 많이들 주시길 부탁드려 본다. 스스로 씨앗이 되시는 것도 물론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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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2.03.31 17:10

호랑이 간담회 때 쓴 내용에 비해 좀 더 개량하고 약간 더 덧붙인 내용입니다. 공현은 2달 동안 활동을 쉬고 있으니까 이런 걸 막 쓰고 앉았습니다....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를 위한 탁상공론

공 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회원 / 오답승리의희망 편집진)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 이미 1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청소년 활동가들이 이야기해왔고, 꿈꿔왔던 과제이다. 청소년들이 사회적․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세력으로 등장하기 위해서, 운동의 힘을 가지기 위해서, 대중조직화 또는 대중조직의 필요성은 숱하게 이야기되어왔다. 친목모임 수준을 벗어나야 한다, 동아리―서클주의를 벗어나야 한다, 소수의 급진적 활동가들만의 운동을 벗어나야 한다, 그 많은 지적과 요구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결국 대중조직화․대중조직의 필요성이었다.


2000년 무렵부터 이미 그 꿈은 어렴풋하게 그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2000년 만들어진 전국중고등학생연합도, 2008년 촛불집회 속에서 만들어진 전국청소년학생연합도, 그리고 어쩌면 전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역시 2000년 무렵 만들어진) 역시도 성격은 서로 다르더라도 전국 청소년운동 대중조직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1980년대에 "자주적 학생회"를 건설하려 하고 여러 조직을 만들었던 고등학생운동 때부터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는 절실한 꿈이었으리라.


그렇다. 분명, 대중조직화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은 있다.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단체가 대중조직화에 나서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 청소년 활동가라고 하더라도, 대중조직화․대중조직이 있으면 좋겠다, 있어야 한다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구체적으로 청소년 대중조직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어지며 운영돼야 하는지, 대중조직화와 대중조직, 대중운동의 개념상의 차이는 무엇인지, 그런 것들이 약간 불분명한 것이 현실이다. 1980년대 노동․통일․대학생․좌파운동 등등을 자기화한 운동론․조직론도 있었고, 이에 따른 성과도 실패도 있었지만, 지금 시점에서 청소년운동에 이를 적용하기에는 사회적 상황이나 청소년운동의 현실 등도 다소 부적합해 보인다. 그리고 개중에는 그 당시 유행하던 이론에 경도되어 지금과는 언어가 맞지 않거나 지나치게 추상적인 것도 있고 말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차원에서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에 대해 정리하고, 또 현재의 청소년운동이 염두에 두어야 할 방법들과 구체적인 목표들을 설정하고자 한다. 물론 이 글은 뭐 면밀한 연구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병역거부로 인한 수감을 며칠 앞두고 잉여로운 시간 동안에 그동안 어렴풋이 생각해왔던 것들을 정리해보려는 것에 불과하다. 대중조직화는 이런 글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직접 발로 뛰고 사람들을 만나고 실천하는 것을 통해 만들어질 것이다. 다만 이 글이 "대중조직화․대중조직"이 막연하고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이 들리는 청소년 활동가들에게 구체적인 생각과 실천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이 글은 탁상공론이므로 이 글에서 이야기한 것 그대로 운동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비판하고 반대하고 부분적으로 지지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논의와 활동이 촉발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랄 뿐이다.



◎ 대중조직․대중조직화에 대한 개념 정리


먼저 가장 기본적인 부분, "대중조직화"란 무엇인지, "대중조직"은 또 무엇인지부터 정리하겠다. 의외로 잘 개념 정리가 안 되어있는 것이다. 먼저 대중조직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을 검색해보니 대중조직은 "각계각층에서 공통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반 대중들로 조직된 사회단체. 노동조합, 소비자 보호 단체, 압력 단체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런 사전적 정의는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맥락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예컨대 우리가 운동에서 "대중조직"이라는 말을 쓸 때, 그 말은 보통 "활동가조직" 등의 말들과 대비를 이루면서 그 의미를 얻게 될 것이다. 즉 소수의 활동가들이 이슈파이팅을 하거나 위험성이 높은 희생적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수의 사람들이 활동하는 조직이 대중조직인 것이다. 이러한 대중조직은 참여하는 사람의 수나 재정, 사회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자원 등 여러 측면에서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사회 변화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대중조직은, 쉽게 말해서, 사람들의 생활의 '현장'에서부터 상당수의 대중들이 조직되어 있는 형태의 조직이다. 여기서 대중은 불특정 다수일 수도 있고, 노동자, 여성, 농민, 청소년, 대학생, 특정 지역의 주민 등 특정 다수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노동조합총연맹 같은 것이다. 지역 당협(과거 지구당)이나 기타의 여러 조직들을 통해서 다수의 대중들을 참여시킬 수 있는 정당들도 일종의 대중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조직이 대중조직이라고 불리기 위한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건을 생각해볼 수 있다.


㉠ 숫자. 조직화된 사람들의 숫자가 어느 정도 이상 되어야 하는 것은 대중조직에서 필수이다. 전체 집단의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5천만 한국 인구를 생각해볼 때 아무리 못해도 수천명 이상 조직화되어 있어야 어엿한 대중조직이라고 불릴 수 있다. 아니면 수천명의 조직화를 구체적인 목표로 두고 이루어나가고 있는 중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작은 지역이나 집단 안에서의 대중조직인 경우엔 수백명 정도 수준이어도 되겠지만, 여하간 전체 집단에 비했을 때 어느 정도의 비율과 숫자는 갖추고 있어야 대중조직이라고 부를 만하다.


㉡ 현장성. 대중조직은 그 대중조직을 이루는 대중들의 삶의 현장에 밀착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조직의 구성원들이 개인화되어서 그냥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입해 있기만 하는 형태의 모임은 대중조직이라고 할 수 없다. 대중들의 삶의 현장에까지 직접 조직화의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있어야만 비로소 대중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일터, 지역, 학교 등 여러 삶의 현장에 그 구성원들을 조직화하는 단위가 꾸려져야 있고, 그 단위가 현장의 목소리와 현실을 대중조직의 운동에 전달, 반영시켜야 한다.


㉢ 목적․의식. 대중조직은 그 조직을 구성하는 대중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대중들 공통의 이해관계나 권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조직은 공통의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의식이라는 것은 뭐 거창한 이론이나 이념이 아니어도 좋은데, 여하간 그 목적을 달성할 방법론이라거나 조직을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해서 구성원들 사이에 어느 정도 동의가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대중조직들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내부에서 많은 논쟁을 하기도 하고 의견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선까지는 동의가 이루어져 있고 아주 이질적으로 갈리지는 않기 때문에 조직이 꾸려지고 운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대중조직은 다음과 같은 성격들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① 대중조직 안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일단 사람들의 숫자가 많으니까 이건 거의 필연적이다. 설령 그 대중조직의 목적과 의식 등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라고 하더라도, 성격이라거나 사고방식이라거나 인간성이라거나 여러 성격들에서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② 대중조직은 대의제․관료적 운영 방식을 일부 취한다. 이 역시 대중조직이 사람 수가 많고 덩치가 큰 조직이기 때문에, 조직을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관료화 등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또한 대중조직의 현장성은 대중조직의 결정 구조가 다분히 단계적인 형태를 가지도록 하기 때문에, 대의제의 도입도 피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대중조직은 관료화되고 상층 간부들의 사조직화 되지 않도록, 민주주의의 원칙과 힘을 잃지 않도록 경계하고, 때로는 견제하는 장치가 필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중조직화"란 어떤 것인가?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은 "대중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조직되어 있지 않은 대중을 조직화하여 대중조직을 만드는 과정, 그것이 바로 대중조직화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중조직화는 여러 개의 현장에서 대중들을 조직화하고 그 조직들을 연합시킴으로써 이루어질 수도 있고, 중심이 되는 대중조직을 지향하는 조직을 먼저 만들고 그 조직을 구심점으로 삼아 여러 현장 조직들을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예컨대 선진적 활동가들의 노력에 의해서나 자생적인 형태로 공장별 민주노조를 만든 후 그 노조들이 연합하여 노동조합총연맹(노총)을 결성하는 경우라거나, 또는 처음부터 산별노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라거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같은 경우)를 건설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조직을 만들어서 대중들을 가입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대중조직화"가 반드시 "대중조직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중조직이라는 형태를 가지지 않더라도 대중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조직되어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 즉 대중을 조직화하는 것 그 자체가 넓은 의미에서 대중조직화일 수도 있다. 대중조직이라는 형태의 필요성이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조직의 중간 단계나 전후 단계로 이러한 포괄적인 대중조직화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적당한 예일지 모르겠는데, 프랑스의 경우 노조 조직률은 한국보다 더 낮은 8~9%를 기록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이 단체행동 등에 참여하는 경향은 한국보다 더 높다. 프랑스의 노조 조직률이 낮아진 것 자체도 긍정적인 현상은 아니겠으나, 여하간 이는 노동조합 같은 통일된 대중조직의 형태로 조직화되지 않더라도 기타 문화적 부분이나 사회의 여러 조건들을 통해 노동자 대중들이 '조직화'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 아닐까. 즉, 하나의 통일된 대중조직의 형태를 가지지 않더라도, 대중은 조직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의 어려움


나는 가능한 한 청소년운동에서도 대중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과제가 대중조직을 바로 만드는 것인지, 또는 청소년 일반의 대중조직이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좀 유보적인 입장이다. 대중조직의 형태라면 청소년 일반의 대중조직이 아니라, 초중고등'학생'들의 대중조직이나, 청소년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같은 식으로, 여러 청소년들의 상황에 따라 다른 대중조직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솔직히 말해서 어떤 형태가 잘 작동하고 좋은 효과를 낼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쿵저러쿵 해도 나는 청소년운동에서 대중조직을 직접 건설하려는 형식이든, 대중조직을 바로 건설하는 게 아닌 다른 방식이든, 여하간 "대중조직화"가 시급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가 여러 어려운 점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려움이란 게 복합적이다. 우선은 대개의 운동들이 한국 사회에서 조직화를 할 때 겪는 문제인데, 탄압이라거나 한국 사회의 보수성이 있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여하간 뭔가 이런 집단을 이루고 활동에 조금이라도 참여하고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학교로부터 가정․친권자로부터 직접적으로 탄압을 받기도하고, 아니면 경쟁교육의 압박 때문에도, 적지 않은 장벽과 위험부담을 가진다. 이런 조직화를 금기시하고, 청소년들의 정치활동 등을 죄악시 하는 사회문화적 풍토 역시 상당한 걸림돌이 된다. 때로는 청소년 조직화에 나선 활동가들이 직접적으로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거나 하는 일도 일어났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대부분의 다른 운동들 역시 한국에서라면 어떤 형태로든 겪게 되는 것이니 뭐 그렇다고 치자. 이제 청소년운동의 특수성을 따져보기 시작하면 아주 그냥, 돌아버릴 것 같다. 가장 먼저, 청소년이라는 정체성은 매우 그 기간이 짧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청소년 정체성은 보통 길어야 10년이면 끝이고, 대개의 경우 청소년운동 같은 것을 알고 활동하기 시작하는 게 10대 후반임을 감안하면 3~4년이 고작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청소년들이 조직화될 절실성이나 필요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몇 년만 참으면 되는데"라는 말이 설득력 있게 먹히는 것이다.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노동자, 주민 등 잘 변하지 않는 정체성의 대중들을 조직화하는 경우가 청소년운동에게는 그다지 참고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이런 점에서 참고할 만한 건 대학생운동 등 몇 가지밖에 없을 것이다.)


직접적인 문제도 있다. 대중조직화 작업은 보통 상당히 긴 기간을 필요로 하는데, 청소년기가 짧다는 것은, 기껏 열심히 조직화해놓은 사람들이 몇년만에 금방 청소년이 아니게 사라져버린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청소년 대중조직화 사업은 양적으로 잘 성장하지 못하고, 한 부분을 조직화해놓으면 그 전에 조직화했던 다른 쪽이 없어지고 하는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곤 한다. 만일 조직화 정도를 "지금 현재 청소년인 사람들 중 몇 명이나 가입되었나" 같은 척도로 판단한다면, 청소년운동은 그 조직화 정도가 자연 감소하는 속도가 매우 빠른 것이다. 물론 어느 운동이든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청소년운동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하다.


두 번째는 돈이다. 한국에서 청소년들의 경제적 생활은 다수가 가정․친권자에게 종속되어 있다. 즉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청소년 대중을 조직화해서 '회비'를 걷는다거나 해서 조직을 운영하기가 쉽지 않다. 설령 회비를 걷더라도 아주 소액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노동조합이 그래도 비교적 조직화를 하면 조합원들의 '조합비'라는 형태로 활동에 필요한 돈을 조금이라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가볍지 않은 단점이다. 청소년들을 위한 보편적인 복지제도나 공공 사회 시설도 열악한 한국 사회에서는 이 단점이 더욱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밖에도 한국 사회에서 변화하는 노동시장 등 경제 구조라거나 청소년들의 시간을 대부분 규율하는 독특한 입시경쟁교육 문화라거나 다른 집단들에 비해서 공식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권리(선거권이든 뭐든)조차도 완전히 부정당하고 있다는 점, 비청소년 사회운동들조차도 청소년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때가 많다는 점 등,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의 어려움은 결코 만만치 않다. (한 번은 우스갯소리로 공장은 위장 취업이 되는데 학교는 위장 입학․전학이 안 돼서 문제라고 한 적도 있다.) 뭐 하지만 생각해보면, 노동자들에게는 당장의 해고 위험이나 자본과 국가의 직접적인 폭력 같은 노동자들 나름대로 고충이 있고, 장애인운동 역시 한국 사회에서 이동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장애인들의 고충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들은 그래서 어떤 형태의 대중조직화가 청소년운동에 적합한지 생각해볼 때 유의해야 할 문제일 뿐, 대중조직화 자체를 포기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대중조직화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더라도, 나는 청소년운동의 이러한 특성을 염두에 둔다면, 당장 대중조직 건설을 시도하는 방식으로 대중조직화에 나서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청소년운동에서 "대중조직"을 성공적으로 건설하는 것은 대중조직을 만들고 참여하는 등 청소년들의 활동의 자유가 좀 더 보장받고 위험부담이 적어진 후에야 가능하지 않을까? 대중조직의 현장성이라는 성질을 생각하면 학교나 일터, 지역(지역으로 들어가면 가정과 무관해지기도 어렵다.)의 상황과 전혀 상관없이 대중조직이 만들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말이다.


일단 긴 시간을 들여 아래에서부터 조직화해내서 연합을 꾸린다는 형태부터가, 청소년운동의 특성상 시간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누군가가 청소년운동의 학교 현장성을 강조하며 몇몇 학교들을 성공적으로 조직화해내고 좋은 운동의 사례들을 만든다고 치자. 이제 그 학교들의 성공사례를 알리고 다른 학교들을 조직화하러 나설 즈음이면, 그 몇몇 학교들의 조직들은 더 이어지지 못하고 상당수가 사라져버릴 것이다. 더군다나 한 학교에서 성공한 방법이라고 해서 다른 학교에서도 성공적이리라는 보증은 거의 없다. 이러한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와중에 학내조직이 일정 수준이상으로 여러 학교에 늘어나고 이 조직들이 연합하여 대중조직을 꾸릴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 오해는 마시라. 그렇다고 해서 학내조직화나 사례를 만들어내고 시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거나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니까. 단지 그 방법을 통해서 곧바로 대중조직 건설을 노리는 코스가 어렵고 다른 우회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지금까지 숱하게 고등학생운동이나 청소년운동 안에서 만들어보려고 시도되어 왔던 학생회연합 같은 형태의 조직이, 아마 지금보다 나아진 조건 없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대중조직의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들로 나는 일단은 대중조직을 직접 만드는 것보다는 포괄적 의미에서 대중조직화를 먼저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대중조직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청소년 대중조직화 장기 목표 : "10대 청소년 1% 조직화"


청소년운동의 경우에 대중조직화를 이루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냐는 의문을 많이들 가지게 된다. 예컨대 현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활동회원 수가 약 140명가량 되는데, 이건 대중조직인가? 아님 500명이 넘어야 대중조직일까? 아님 수십만명? 앞서 말했듯이 어느 정도 숫자 이상이어야 대중조직이라고 말할 만한 정확한 기준은 아무데도 없다. 그런 걸 만들어내기도 어렵다. 다만 나는 여기에서 청소년운동이 앞으로 목표로 삼을 만한, 의미있고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해보려고 한다.


현재 한국의 10~19세, 10대 인구는 약 660만명이다. 나는 일단 이 10대 인구의 1%, 6~7만명을 조직화하는 것을 청소년운동의 장기적 대중조직화 목표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1%라는 수치는 계산과 기억을 편하게 하기 위해 편의상 잡은 것으로, "1% 운동" 같은 식으로 활동가들이 기억하고 목표로 삼기 쉽게 하려는 의도도 있다.


6만명이라고 하니 매우 많아 보이지만,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정도인데도 그 조직률이 낮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1%는 결코 높은 수치라고 볼 수는 없다. 숫자로만 봐도, 예컨대 우리가 그렇게 자주 욕하곤 하는 전교조의 경우에도, 교사의 수는 전체 10대 청소년의 수에 비하면 아주 적지만 조합원 수는 현재 8만여명이다. '조직화'라는 게 그 인원 모두를 '활동가' 수준으로 만드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한국은 새마을운동 같은 관변적 조직을 제외하면 대중조직화가 잘 돼있는 분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비교해보면 노동조합 쪽의 조직률이 오히려 높은 편일 정도이니까, 앞서 논의한 청소년운동의 여러 걸림돌들을 생각하면 1%라는 수치는 상당히 높게 잡은 목표치라고 볼 수도 있다.


1% 조직화. 이는 곧 10대 청소년 100명 중 1명은 조직화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한 학교를 약 1000명 정도로 생각하면 그 중 10명은 조직화되어 있다는 것이고, 수도권이라면 약 3만명 정도가 조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직화'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감을 잡아볼 필요가 있다. 수만명 전부가 일상적으로 청소년운동에 높은 수위의 참여를 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할 터이다.


조직화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는데, 가장 떠올리기 쉬운 것은 조합원․회원․당원 같은 것으로 가입하는 등의 방식이다. 그렇지만 또 곰곰히 따져보면 형식적으로 가입만 하고 있다고 해서 조직화가 되었다고 하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페이퍼 당원이니, 돈만 내고 노조의 활동에 공감하지도 참여하지도 않는 조합원 같은 존재들은 어디에나 있다. 조직화의 형태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 본질을 찾으라고 한다면 역시 '접촉'과 '교류'일 것이다. 즉 지속적으로 접촉과 교류가 이루어지고, 조직으로부터 구성원에게로, 구성원으로부터 조직에게로 정보와 행위가 오가는 것이 조직화의 본질이다. 즉 조직화가 잘 되어 있다면, 구성원은 자신이 속한 조직과 그 조직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조직에서 제공하는 일정한 통로와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의견이나 정보를 전달하고 반영할 수 있고, 조직 역시 구성원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설득하고 때로는 공동의 행동을 하도록 참여를 이끌어내서 집단적인 움직임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조직 입장에서 볼 때는 '동원 가능한' 사람들, 또는 조직의 운동 과정에서 정보를 전달하고 교육하고 설득하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곧 조직화되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반면, 구성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때로는 자신에게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고, 자신의 의견과 정보, 이해관계 등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공감을 얻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행동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경로가 조직화일 것이다. 물론 이건 단순화시킨 도식이고, 실제로는 조직 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관계 맺기가 일어나고 이런 요소 역시 조직화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요컨대, 청소년운동에 6만명이 조직되어 있다는 것은, 그것이 단일한 대중조직에 그 6만명이 가입되어 있으며 그 6만명의 참여로 활동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일 수도 있으며, 또는 좀 더 느슨하더라도 청소년운동 전반에서 만든 여러 창구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접촉․교류하여 정보와 의견을 주고받고 행동에 참여하도록 해볼 수 있는 청소년의 수가 6만명이라는 의미일 수 있다.


조직화의 방식이나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만일 1% 조직화가 현실화된다면, 청소년운동은 온힘을 쏟아 부었을 때 행동에 나설 수 있는 청소년들의 힘을 수도권에만 1~2만명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전국적으로 움직였을 때도 3~4만 이상의 청소년들이 함께 뜻을 모아 행동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숫자는, 청소년운동이 극소수의 청소년 활동가들에게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청소년 대중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수치이다. 그리고 과거 여러 자발적으로 일어났던 촛불집회나 대중운동의 경험을 돌아보면, 3~4만명이라는 것은 청소년들이 마음을 모아서 행동에 나설 만한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른 조직화되지 않았으면서도 동조하는 청소년들이 큰 부담감 없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심리적 선을 그럭저럭 넘기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1%, 6만이라는 조직화된 인원은, 청소년들 사이에서 기획적으로 어느 정도 영향력 있는 사건과 이야기를 만들어내려 할 때에도 필요한 최소치를 만족시키는 숫자와 비율이다. 적어도 100명 중에 1명 정도 꼴로는 조직화되어 있어야, 두 다리나 세 다리 정도를 건너서 청소년 대중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다.


좀 더 실감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지역별 10대 인구(2012년 2월 기준) 통계를 바탕으로 1% 조직화를 했을 때의 숫자를 표로 만들어보았다. 물론 실제로 활동에 나섰을 때는 운동내외의 우연적 요소나 지역 분위기, 여건 등으로 인해 지역별 편차가 클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표에서 제시한 정도가 각 지역별 조직화의 장기적인 목표로 삼을 만하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이 표를 보면 정말 서울이랑 경기도가 대한민국 지역균형 발전 면에서는 ×새끼라는 걸 절감할 수 있다.


행정구역

 10~19세 인구

10대 인구의 1% (반올림한 천단위명수)

전국

6,630,196

66,302 (6만6천명)

서울특별시

1,192,541

11,925 (1만2천명)

부산광역시

425,476

4,255 (4천명)

대구광역시

348,631

3,486 (3천명)

인천광역시

378,811

3,788 (4천명)

광주광역시

228,820

2,288 (2천명)

대전광역시

216,500

2,165 (2천명)

울산광역시

168,134

1,681 (2천명)

경기도

1,650,374

16,504 (1만7천명)

강원도

195,462

1,955 (2천명)

충청북도

208,288

2,083 (2천명)

충청남도

266,047

2,660 (3천명)

전라북도

251,965

2,520 (3천명)

전라남도

244,833

2,448 (2천명)

경상북도

325,624

3,256 (3천명)

경상남도

444,796

4,448 (4천명)

제주특별자치도

83,894

839 (1천명)



◎ 조직화 방법론 : 외곽조직, 지역․학교 거점, 매체 개발 등


그러나, 다들 실감하고 있겠지만, 6만이라는 수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 6만명이 모두 활동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소 느슨한 조직화를 내다보더라도 그렇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만 해도 지금 당장 200명 조직화도 어려워서 허덕이는데 무슨 만 단위의 조직화를 바라본단 말인가? 물론 나도 당장 짠하고 6만명이 조직화될 마법의 기술을 소개할 능력은 없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저 1% 수준의 조직화가 약간 현실화될 수 있을까 하는 가능성이라도 보일 수 있는 것은, 지금부터 할 수 있는 걸 다 하면서 온힘을 다해 뛰더라도 약 10년 정도 뒤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지금 단계에서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조직화를 위한 방법론들을 몇 가지 제안해보려고 한다.


하나는 '외곽조직'이다. 외곽조직이 무엇인지는 중심에 있는 본 조직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직을 상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를 예로 들어서 생각해보자. 아수나로의 활동회원이 된다는 것은 사실 은근히 까다로운 기준을 만족시켜야 하며, 해야 하는 활동의 양도 많은 편이다. 아수나로의 주장이나 조직 내에서의 감수성을 봐도 진입장벽이 높은 편이다. 그러므로 아수나로에 가입시키는 방식으로 수천명 수만명의 청소년 대중을 조직화해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에 '외곽조직'의 형태로 조직화를 꾀해볼 수 있다. 아수나로로 청소년들을 가입시켜서 조직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수나로 멤버쉽을 가지지는 않더라도 아수나로에서 하는 모임이나 사업 등에 청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청소년들과 지속적인 접촉을 가짐으로써 간접적인 조직화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수나로 지부가 지역에서 청소년 아카데미 사업을 한다면, 거기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청소년들은 아수나로 회원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아카데미 참가자로서의 멤버쉽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아카데미를 통해서 정세에 따라서 청소년들에게 청소년인권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청소년들은 아카데미에서 얻은 정보로 낮은 수준의 참여를 할 수 있고, 아수나로에도 자신들의 인권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아카데미를 예로 들었지만, 학교에 인권․토론 동아리 등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아수나로 회원이 학교 안에 활동의 일환으로 동아리를 꾸린다면, 그 학교 동아리는 아수나로에 속하지는 않지만, 아수나로와 접점을 가지고 교류하는 외곽조직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아수나로에서 특정한 이슈에 대해 활동을 하면서, 그 활동을 하기 위한 별도의 청소년모임 같은 것을 꾸리는 것도 일종의 외곽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밖에 다른 청소년운동 사안에 대한 동의와 상관없이, 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청소년들이 그 활동을 하기 위해서 프로젝트팀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청소년들이 그 활동을 계기로 지속적으로 아수나로와 접점을 가지고 교류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도 외곽조직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외곽조직이라고 하면 뒤에 뭔가가 숨어 있을 것 같고, 뭔가 조종하고 이용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의도를 감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이건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이러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하는 사업이다. 여러분이 아수나로 회원이 되거나 아수나로에 가입할 필요는 없다. 그저 이 활동(아카데미, 캠프, 프로젝트팀, 동아리 등등)에서 여러분이 원하는 걸 얻고, 아수나로는 청소년인권 등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라고 대놓고 이야기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다가 그 중에 청소년운동에 필이 꽂힌 사람은 아수나로에도 가입하고 청소년활동가가 될 수도 있을 터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중조직화를 넓히기 위해서는 어떤 단체․조직에 직접 가입시키는 것 외에도 이런 외곽조직 형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 외곽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면 결국 하나의 단일한 대중조직으로 청소년들을 조직화하는 방향성은 좀 약화되는 셈이고, 포괄적인 의미에서 대중조직화 노선을 선택하는 셈이 된다. 하지만 단일한 대중조직을 꾀한다고 하더라도 중간단계로 외곽조직 방법론을 버릴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외곽조직을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보다 나아가서 더 많은 조직화를 추진하기 위해서, 학교들과 지역에 거점을 설정하고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모여서 생활하는 곳은 이러쿵저러쿵 해도 어쨌건 아직은 초중고등학교이다. 그러므로 동아리를 만들든 아니면 비공식적 소모임을 만들든 학교 안에서 가능한 경우에는 모임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학교 안에 이런 모임 조직을 하기 위해 동아리․소모임을 만들고 운영하는 노하우를 쌓고, 공유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물론 학내 조직화는 만만치 않다. 대학교처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공간이 좀 있는 것도 아니고, 교사들의 간섭이나 학교 측의 탄압, 학교 안에서 쓸 수 있는 자유시간의 부족 등 여러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무조건 학내 조직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조급해하기보다는, 가능한 여건의 학교에서 안정적인 모임을 만들고, 전반적인 학교 안 여건을 개선시키는 데도 힘써야 한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지역 거점을 만드는 것도 꽤 효과적일 수 있다. 구나 동 정도의 작은 단위에서 그 지역 청소년들 수십명 정도를 모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거점을 만들게 되면 조직화는 확실히 현재보다 더 진전을 볼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아카데미나 캠프 등 여러 가지 방식을 실험해볼 필요가 있다. 지역에서 청소년들이 관심 있어 하는 주제나 프로그램을 가지고 청소년들을 모으고, 그 청소년들 중에 적극적인 일부와 계속 관계를 맺으며, 낮은 수위의 활동을 지역 차원에서 넓혀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지역에서 청소년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그 지역에서 지역운동을 하고 있는 여러 시민단체, 풀뿌리단체 등과 협력해야 한다.


특히 최근에는 지방자치를 활성화시키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주민 대상 강좌를 열거나 사업을 하고 이른바 '마을만들기'를 하는 일도 많아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지방자치에서도 아동․청소년들은 대부분 소외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런 루트를 통해서 지역에서 주민들의 청소년인권에 대한 의식․감수성을 높이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은, 그 지역에서 청소년들을 조직화해내고 청소년운동을 전개할 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매체 개발이다. 청소년 대중조직화를 위해서는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수만명의 청소년들을 조직화하고, 그 청소년들에게 효과적으로 접촉․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즉 정보를 전달하고 주고받기 위해서는 매체가 필요하다. 이 매체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청소년들이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되며, 또 지금 청소년운동을 하는 주체들이 청소년 대중에게 좀 더 폭넓게 이야기와 정보를 전달하고 선전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리고 조직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게 되면 홍보․컨텐츠제공․참여활성화 등 조직화의 주요한 도구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매체는 인터넷을 이용한 매체일 수도 있고, 종이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형태일 수도 있다.


이 매체에서 중요한 것은 발간되고 소통되는 주기가 너무 길어서는 안 되고, 생활에 밀착해서 생활 속에서 유통되고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체는 청소년운동을 하는 주체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지고 운영되어야 하겠지만, 많은 부분을 청소년 대중에게 열어둠으로써 단순한 선전이 아니라 쌍방향 교류가 가능해야만 더 효과적으로 청소년들의 조직화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매체를 만들고 운영할 때 가장 문제가 될 것은 역시 재정 문제일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받는 구독료 등은 최소화해야 하며, 적절한 광고나 지원 등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난점이다. 언론이라거나 매체 개발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논의가 되었기 때문에 굳이 더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겠다.



◎ 맺으며 : 몸으로 부딪쳐보자!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아마, 눈치를 채셨을 것이다. 그렇다. 이건 탁상공론이다! 여기 있는 이야기만을 가지고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를 추진할 수는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지역에 따라서, 어떤 지역에서 어떻게 사업을 시작할지, 프로그램도 필요하고, 계획과 시행착오와 경험들도 필요하다. 예컨대 서울에서 1%, 1만2천명을 조직화하려면, 구별로 약 4~500명을 조직화한단 소리다. 아무리 외곽조직과 대중적인 매체 개발 등을 활용한다고 해도 가까운 시일 내에는 택도 없는 얘기다. 또, 저렇게 지역별 학교별 거점을 만들고 조직화를 하기 위해서는 그 조직화를 처음 시작할 활동가 주체들 역시 필요하다. 현재 전체 청소년활동가들의 수를 다 헤아려도 300명이 채 못될 테니 곤란한 조건이다. 6만명을 조직화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못 해도 600명, 아니 1천명 정도는 있어야 한다.


뭐 기왕 탁상공론을 하는 거, 좀 더 해보도록 하자. 당장 있는 어느 정도 적극적인 청소년 활동가들의 수를 100명으로 잡아보겠다. 이 100명이 2년 동안 앞서 말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1000명을 조직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해보자. 2년 동안 100명 중에 50명은 비청소년이 되거나 여러 이유로 활동을 그만둔다. 그리고 새로 조직화된 청소년들 중 5%, 50명은 또 적극적인 활동가가 될 거라 가정해보자.(5%도 너무 크게 잡은 건 아닐까 싶다.ㅠㅠ) 그러면 이제 950명의 조직화된 덜 적극적인 청소년들과 100명의 적극적인 청소년활동가가 있는 셈이다. 그리고 또 …… 보다시피, 수를 늘리는 게 만만치 않다. 어쨌건 2년간 1인 평균 10명의 효율은 넘어서야 좀 더 조직화가 진척을 보일 듯하다. 좀 더 조직화 방법을 연구하고, 시행착오를 통해 노하우를 쌓고, 그리고 적극적인 청소년활동가들을 양성하고 조직하는 것부터도 시작해야 할 판이다. 일단 단기적인 1~2년 계획은 좀 느슨하더라도 조직화된 청소년 1000명, 그리고 적극적인 청소년활동가 200명 정도를 목표로 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식의 숫자놀음은 지겹다고? 나도 지겹다. 그러니까 이제 숫자 이야기는 그만하겠다. 이런 계산을 통해서는 그저 1% 조직화라는 목표라 짧아도 10년, 길면 20~30년은 걸릴 장기적 목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을 뿐이다. 대중조직화라는 게, 이런 산술적인 방식으로 되는 건 분명히 아니다. 오히려 사회 상황에 따라서 어떤 계기가 생기면 폭발적으로 조직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안 될 땐 아주 안 되기도 하는 게 대중조직화다. 조직화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여러 투쟁은 계속 진행될 것이니, 만약 투쟁의 성과로 학교 안에서 조직화하기 용이한 조건을 쟁취하게 되면 더 빠른 속도로 조직화를 늘릴 수도 있을 것이고….


뭐 일단은 5년 이내의 단기적 목표로는 조직화된 청소년 1만명이라도 넘기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조직화를 추진해가는 와중에 '대중조직'을 직접적으로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효과적일 것 같다는 때도 올 것이다. 그럴 때는 "전국청소년권리연대"라거나 "전국중고등학교학생회연합"이라거나 뭐 그런 것을 실질적으로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것저것 방법들을 얘기해보았지만, 어느 정도 활동가들이 확보된다면 그 시점부터는 청소년의 권익을 목표로 한 청소년조합이나 연합 같은 것을 만들기로 결의하고, 그 조합의 모토와 지향과 표어를 간결하게 정하고, 그 다음에는 그 조합에 가입하라고 1년여 동안 가입서를 들고 다니며 직접 학교에서 지역에서 조합원 가입을 시키는 방식으로 대중조직화에 도전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조합에 가입한 청소년들과 학교․지역 차원의 프로그램과 모임을 꾸려서 돌리고, 그러다가 5천명이라거나 1만명 등 목표한 수를 돌파하면 그 대중조직의 출범을 정식 선언하는 것이다. 대중조직화에는 그런 식으로 직접 부딪쳐 보는 게 중요하다.


약간 더 구체적으로, 대중조직화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은 대충 이정도일 것이다. ㉠ 지역 차원에서 지역․학교에 거점을 만들고 조직화하려는 노력 ㉡ 전국․중앙 차원에서 매체를 개발하고 운영하고 배포하려는 노력 ㉢ 지역별 조직화 시도들을 연계시키고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한 노력. ㉣ 전문성이 있는 집단에서 교육 등 운영할 만한 프로그램 개발 및 보급.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지부들이나 여타의 지역에서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존재하는 청소년운동의 주체들은, 활동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조직화 사업을 하나씩은 추가해서 시도해보자. 지역 단위여도 좋고 학내 단위여도 좋다. 아카데미 형태이든 강좌 형태이든 공간 형태이든 프로젝트팀 형태이든 동아리 형태이든 좋다. 지금까지 청소년운동에서 의식적으로 조직화 사업을 벌인 건 그리 많지 않았잖은가? 그리고 그런 조직화 노력의 기록들을 모으고 축적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보자. 좀 더 효과적인 조직화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청소년운동에서 적극적인 활동가들은 매체 개발 준비를 시작해보자. 청소년운동의 대중적 매체가 제대로 만들어지고 보급되기만 해도 조직화나 청소년운동은 한 발 더 크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어느 정도 진전이 되면, 바로 앞에서 말한 대로 대중조직을 만들기 위해 직접 회원을 모으고 다니면서 출범을 준비하는 것도 괜찮고.


글을 쓰면 쓸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라는 목표가 얼마나 달성하기 어렵고 무거운 것인지 실감하게 된다. 숫자 하나 단어 하나를 치면서 그 무게가 점점 더해지는 듯한 기분이다. 하지만 청소년운동은 이제 적극적인 소수의 청소년활동가들의 이슈파이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성과도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지역이나 이슈에 따라서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들도 적지 않게 남아 있지만,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는다면 5년 10년 후에는 청소년운동은 정말로 속수무책으로 손 쓸 수 없는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제 곧 수감되어서 1년 반 동안 운동에 보탬도 못 되는 주제에, 이토록 긴 탁상공론 한 번 펼쳐본 이유는 바로 그런 위기의식 때문이다.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 이제 말로만 하지 말고, 구호로만 남겨두지도 말고, 명확한 개념으로 만들어 기획으로 구체적 수치와 행위와 목표로, 그리고 실천으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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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2.03.08 01:03


한고학연(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 해산에 부쳐

(이 글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쓰는 글로, 제가 속한 단체의 입장은 아닙니다.)


지난번, <전청련 해산에 부쳐>라고 쓴 글에 이어 또 이런 글을 쓰게 됐습니다. 서글픕니다. 지난번에는 저보다도 더 늦게 청소년운동에 나타난 단체(전청련)의 해산을 기리는 글을 썼는데, 오늘은 그보다 더 전에 만들어졌던 단체, 한고학연의 해산을 기리는 글을 쓰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어느 단체의 해산에 대해서, 같이 운동을 하는 다른 이들이 무관심하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서글프기도 합니다. 뭐, 저는 애매하게 흐지부지 공중분해 되어버리지 않고 '공식 해산'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단체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단체들에게 동시대에 활동해온 활동가로서 예의를 갖추고 싶은 것입니다만, 그런 것도 어쩌면저의 독특한 성벽일 수도 있겠네요.


제가 시작할 무렵에 출범했던 단체

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한고학연)는 제가 청소년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2005년에 출범했던 단체입니다. 출범 초기부터 학생회 연합이라는 형식이나 명칭 때문에, "한총련의 고등학생 판이냐"라는 식의 언론의 공격에 시달려야만 했죠. 그리고 그때문에 한고학연 초기 멤버들이 많은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뭐 저는 그 당시부터 생각했던 게, 패기 있게 "우리는 한총련 같은 것보다 더 대단하고 영향력 있는 조직이 되려는 꿈을 가지고 출범한다!"라거나 "한총련이든 뭐든, 우리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어디 한 번 보든가!" 하고 응수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긴 합니다만.

한고학연을 한총련에 비교한다거나 하는 것은, 조직의 규모든 지향점이든 활동 내용이든, 여러 모로 참 얼토당토 않은 것이었지요. 사실 저는 한고학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비정치성을 비롯해서 운동론에 대한 의견 차이도 있었고, 만들어진 뒤 약 5년간, 한고학연이 했던 활동이라는 게, 학생회 관련 캠프나 워크샵 몇 번을 연 것과, 설문조사를 몇 번 하여 발표한 것 외에는 없었거든요. 저는 적어도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고등학생 조직으로서, 아니, "고등학생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조직, "고등학교 학생회의 권한을 인정"받는 것을 추구하는 학생회 연합 조직으로서 해야만 했고 할 수 있었던 일들이 그 5년간 훨씬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지금 해산을 결정한 한고학연의 구성원들이 아니라 지난 한고학연의 구성원들이 공개적으로 평가하고 논의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고학연의 활동에 대한 저의 평가나 호불호를 떠나서, 한고학연이 해산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저는 마음 찡한 슬픔을 느꼈습니다. 비록 내가 몸 담지는 않았지만, 내가 청소년운동을 시작했을 무렵에 시작되었던 조직. 그 조직이 이제 공식해산 했다는 것이 저를 왠지 감상적으로 만듭니다. 물론 한고학연은 2008년 무렵, 아니면 그 이전부터 활발한 활동은 없긴 했습니다. 그래도 '공식해산'이라는 게 주는 느낌이 그렇군요.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한고학연의 공식해산은 청소년운동에서 나름의 짧은 한 시대가 졌다는 신호 중에 하나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저는 청소년운동에서 저와, 그리고 아수나로 등 제가 몸담고 있는 조직들과 다른 견해와 운동론과 형태를 가진 조직이 꼭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설령 다른 조직들이 서로 욕하고 비판하더라도, 어쨌건 각자가 서로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청소년운동의 발전과 사회 변화를 추구하고 만들어가는 과정들이 운동을 건강하게 만들 거라고 믿습니다. 한고학연의 해산은 '비정치성'이나 '학생회 연합'의 형태를 내세운 운동의 한 형태가 다시 한 번 실패하고 소멸했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비록 제가 동의했던 방식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슬퍼하고 또 쓸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파 하기만 하진 않으시길 바랍니다

한고학연은 '비교적' 역사가 긴 편인 조직이지요. 그리고 대의원 선거 등을 통해 매년 조직을 새로 구성해오던 단체 특성상 한고학연을 거쳐간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지금 한고학연의 해산을 결정한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한고학연을 거쳐간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한고학연을 처음 만들었던 사람들은, 한고학연의 해산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그저 가슴 아파 하며 침묵하거나, 비난하지만은 않길 바랍니다. 한고학연에 실었던 꿈이 단순한 자기만족이 아니라 청소년운동의, 또는 좁게 보더라도 고등학생운동 또는 고등학교학생회의 발전이었다면, 한고학연 활동과 역사와 해산에 대해서 각자의 정리와 평가가 나오길 바랍니다. 저 역시 많은 단체, 모임, 운동들을 만들고 때로는 실패하고 흐지부지되고 사라지는 경험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다짐한 것은, 이걸 단지 나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나와 나 이후에 청소년운동을 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밑거름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정리를 하고 기록을 하고 글을 썼습니다. 한고학연의 공식해산에 가슴이 한켠이 아프신 분들도 많겠지만, 아파 하기만 하지 마시고, 그런 형태로라도 마음을 달래주시길 감히 부탁드려봅니다. 청소년운동을 계속 해나갈 한 사람으로서요.

한고학연을 처음 만드신 분들도, 한고학연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신 분들도, 한고학연의 공식해산이라는 결정을 내리신 분들도, 모두 애쓰셨습니다. 저도 더 애쓸 것입니다. 한고학연 해산 소식에, 서글픔과 쓸쓸함을 느끼지만, 앞으로 저도 더 많은 활동으로 한고학연의 역사에 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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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1.10.18 12:25
어린이책시민연대 회보에 부탁 받고 썼던 글입니다.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받는 질문들


청소년운동을 하고 있다. 좀 더 부연하자면, 청소년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학생인권조례 등등 학생인권 활동도 하고, 교육정책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활동, 청소년 노동자들에 관한 활동도 하고,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활동 등등 여러 가지다. 활동을 하다보면 질문을 많이 받는다.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술자리에서, 운동을 막 시작한 다른 청소년에게서, 등등…. 그런 질문들 중에서 한 번 대표적인 질문 몇 가지에 대한 대답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그게 아마 나에 대해서, 내가 하는 청소년운동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분들에게 가장 좋은 대답이 되지 않을까.



질문 1 : 어떻게 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하게 됐나요?


첫 번째로, 자주 받는 질문은 청소년인권이나 학생인권에 어떻게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흔한 질문이다. 인터뷰 같은 걸 할 때면 누구나 앞부분에 배치할 만한 질문. 그렇지만 나는 그 흔한 질문에 항상 대답하기가 어렵다. 어떤 계기로 자기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느냐고 묻는 사람들은, 인권을 알려면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사건이 필요한 걸까? 굳이 따지자면 청소년으로서의 삶은 매 순간이 그런 '계기'로 가득 차 있는 것 아닐까.

나에게 초면부터 반말을 하는 어른에서부터 나를 오직 성적으로만 측정하는 입시 교육이나 친권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 가족의 시스템까지, 미시적인 데서부터 거시적인 데까지, 청소년들의 일상은 모두 '계기'이다. 나 역시 특별히 뭐뭐가 싫었다기보다는, 그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청소년들이 받아야만 하는 온갖 비민주적인 불합리한 억압과 규제들 전반에 대한 짜증이 쌓여 있었다. 교복, 두발규제, 등교시간 등에서부터 진로나 입시의 문제까지, 모두 모두 모두! 아마 다른 청소년활동가들도 비슷한 사정이었을 것 같다.

오히려 문제는 인권에 대한 인식이나 자기 삶에 대한 불만보다는, '행동'일 것이다. 어떻게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나 불만을 행동으로 표현하게 될까? 여러 가지 심리학적 사회학적 문제가 얽혀 있을 법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어떻게 '운동'을 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어떻게 사람들은 그냥 개인적인 행동이 아니라 의식적인 목표와 계획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집단적 지속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활동을 하는 '운동'을 하게 될까?

나 같은 경우, 일단 '행동'에 나서게 되는 데까지는 별다른 문턱이 없었다. 그냥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이건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여러 가지 단발적이고 개인적인 항의와 행동 등을 학교 안에서 했었다. 그렇게 하면서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았다. 고민이라곤 그저 부모님이 활동하는 것 때문에 불이익이라도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과, 대입 등 진로 문제 정도? 애초에 성적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활동을 하면서 시험 성적이 잘 안 나와도 괘념치 않았다. 교사가 불러서 나무라면 "지금 저한테 중요한 게 뭔지는 제가 결정해요."라고 당돌하게 대답하곤 했다. 원체 고민 없이 사는 스타일이라서 그렇다.

그러다가 '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건 2005년, 고3이 되고난 후였다. 2005년 5월 7일, 혹시 아직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까 모르겠다. 내신등급제에 반대하며 청소년들 1000여명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그 1주일 뒤인 14일에는 '두발자유'와 학생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청소년 집회가 열렸다. 2주일 연속으로 열리는 청소년들의 거리집회에 언론도 인터넷도 술렁거렸다. 나도 신문으로 인터넷으로 그런 소식들을 접하면서, 두발자유 집회에 참가하러 광주에 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런 단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것을 '알고 난' 후부터 비로소 '운동'이라고 할 만한 걸 의식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친구들을 모아서 소모임을 만들고, 모임에서 같이 공부도 하고 토론도 하고, 계획을 짜서 활동도 하고, 지역에서 두발자유, 학생회 법제화 등을 요구하는 작은 집회를 준비했다. 말하자면 '운동'이라는 걸 남들이 하는 걸 보고서 "오 저런 방법이!" 하면서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 내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인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를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맨땅에 헤딩하듯이 두발자유, 학생회 법제화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준비할 때(결과적으로는 한 20명이 왔고, 소나기까지 내려서 망했다.) 아수나로에서 도와주겠다고 온라인으로 연락을 해왔다. 그 이후에 꾸준히 교류를 했고, 그러다보니 어느샌가 가입도 하게 되었다. 아수나로는 원래 "청소년인권연구포럼"으로 과거에 청소년운동을 하다가 20대가 되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연구를 하고 청소년인권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단체였다. 그러다가 2006년부터 이름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로 바꾸고 지역에서 청소년들이 직접 활동하는 활동 단체로 성격을 전환했다. 처음에는 두발자유 운동을 주로 했고,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여러 활동에 함께하고 학교 밖에서는 거리 집회, 서명운동 등을 꾸준히 벌였다. 그렇게 나는 '어느샌가', '자연스레' 청소년인권활동가가 되어 있었다.



질문2 이제 청소년이 아닌데 왜 아직도 청소년운동을 해요?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보다 더 높은 빈도를 자랑할지도 모르는 질문이다. 바로 "이제 청소년이 아닌데 왜 청소년운동을 해요?"이다. 하도 많이 질문을 받다보니 이제는 그냥 웃으면서 "그러게요."라고 대답하고 넘기고 싶을 정도다. 하기사 내 나이도 이제 20대 초반이라고 우길 수도 없는 스물넷.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궁금할 법도 하다. 내가 활동하는 단체 안에서 최고령까지는 아니지만, 일단 주변에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주민등록번호 앞자리가 9로 시작하는 상황에서 앞자리가 8로 시작하는 나는 대단히 노땅 취급을 받곤 한다.

이 질문 역시 대답하기 다소 곤란하다. 대답할 만한 어떤 거창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때는 이런 식으로 대답을 했었다. "청소년인권활동가라서요." "왜 청소년인권활동가죠?"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니까요." "왜 이제 청소년이 아닌데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냐니깐요?" "청소년인권활동가라서요." … 물론 질문한 사람을 만족시켜주는 대답도 아니고, "그건 그냥 관성이잖아!"라거나 "말장난하지 마세요." 같은 비난을 듣기 딱 좋은 대답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게 진실에 가까운 대답인 것을. 나는 내가 청소년인권활동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청소년운동을 한다는 게, 그게 내 삶이고 내 일이니까 한다는 게 그렇게 말장난 같이 들리는 걸까?

그래서 나중엔 이걸 좀 더 그럴 듯하게 포장해보았다. "왜 사는지 이유를 필요로 하진 않잖아요? 청소년운동이 그냥 제 삶이 된 거죠." 그랬더니 사람들이 대충 끄덕끄덕 하는 것 같긴 하던데, 말하는 내가 닭살이 돋는다는 게 문제다. 가장 솔직한 대답은, "아니 뭐 19살까지 청소년운동하다가 스무살 되어서 싹 손 떼는 게 더 얄밉고… 계속 하고 싶고… 어쩌다 보니…"일 것이다. 관심 가지고 있고 배운 게 이것밖에 없어서 그렇다고 해도 좋다. 애초에 아수나로 자체가 과거에 20대가 되면 청소년운동에 딱 발을 끊는 문화를 비판하면서, 비청소년들도 청소년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열어놓고 시작한 단체였기 때문에 단체 안에서의 어려움도 별로 없었다. 사실, 20대 됐다고 해서 청소년운동에 관심 끊고 발 끊는 것, 그건 그것대로 또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나이주의는 여러 가지 난관이 되고 있다. 비록 내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가 나이에 따른 차별이 없는 사회, 나이가 많다고 해서 권력을 가지거나 하지 않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여러 가지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이가 적은 사람들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쉽고, 밖에서 보기에도 편견을 가지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청소년운동 안에서, 단체 안에서 어떤 역할과 위치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할 거리들, 주의할 부분들이 많아져간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다 감수하고라도, 나는 청소년운동을 계속 할 것이다.



질문3 너무 이상적/급진적이지 않아요?


세 번째로 많이 받는 질문은 청소년운동이 너무 이상적, 급진적이지는 않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질문을 때로는 정말 궁금해서, 때로는 조롱의 형태로, 때로는 걱정의 옷을 입고, 때로는 화를 내며 던진다. 청소년운동은 두발자유 정도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강제로 교복을 입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고, 복지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입시경쟁교육을 없애기 위해 "입시폐지 대학평준화"를 주장하기도 하고, 학생들을 점수로 평가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목적을 시험보기로 만들어버리는 시험을 폐지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학교 교육에 대한 선택권, 더 나아가면 전 사회적인 탈학교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대학 안 나와도 먹고 살 수 있게 하라!", "중간기말부터 수능까지 시험을 폐지하라!" 올해 3월에 우리가 열었던 집회의 주요 요구들이었다.

청소년운동의 이야기들이 교육 영역으로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이야기하며 나이가 몇 살이든 정당 가입, 정치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청소년들에게 온갖 것을 금지하는 청소년보호법을 폐지하고, 청소년들에게 정말 유해한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함께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도 한다.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사랑을 하고 성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하고, 혹시 임신을 하게 되면 비난 받지 않고 잘 낳아서 양육할 수 있도록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부모, 보호자 등 친권자가 자녀에 대해 너무 많은 권력과 책임을 지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며 지금과 같은 가정을 폐지하고, 사회적인 양육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예 '미성년자'라는 차별적 말을 없애자는 것, 사람은 누구나 다 미성숙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이를 기준으로 누구는 미성숙하고 누구는 성숙하다고 나누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 우리가 함께 사회적으로 서로의 인간다운 삶을 책임지자는 것, 그것이 나처럼 청소년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꿈일 것이다.

이런 요구들은 물론 지금 현실에 비추어봤을 때 '급진적'이고 '이상적'이다. 그러나 한 번 역으로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 주장들을 놓고 말도 안 된다고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들은, 과연 이런 얘기들이 '급진적'이어서 반대하는 걸까 아니면 이것 자체에 반대하는 걸까? 만일 그 이야기 자체에는 동감하지만 바꾸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함께 조금씩조금씩 바꾸어가면 될 것이다. 청소년운동의 이야기들은 이런 것들이 청소년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하니, 우리 사회를 이런 방향으로 바꾸어 나가자는 제안인 것이다.

2005년에 두발자유 운동을 할 때, 그 당시에는 두발자유를 이야기하더라도 염색/파마의 자유까지 주장하는 것이 너무 급진적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물론 그런 경향은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2011년 8월 초, 주민발의에 성공한 서울 학생인권조례안은 원칙적으로 염색/파마 등의 자유까지 완전히 보장하고자 하고 있다. 최소한 염색/파마 등 머리카락의 색깔과 형태를 바꾸는 게 너무 급진적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점점 약해져 가고 있다.

차별금지, 체벌금지, 두발복장자유, 학생의 학교 운영 참여 등을 대표적인 내용으로 세워두고 거리에서 4개월 동안 서울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서명운동을 하면서 두 가지 양면적인 감정을 느꼈다. 어른들은 역시 아직도 학생인권에 대해 무관심하고 거부감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마음, 역시 청소년들이 직접 나서서 해야 겠구나 하는 것이 그 하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래도 6년 전 내가 처음 청소년운동을 하던 때보다 학생인권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다는 인상을 받았고, 우리의 활동이 계속해서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2010년 9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을 때도, 2011년 7월 서울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가 완전히 성사되었을 때도, 그런 안도감을 느꼈다. 처음에 학생인권운동이 시작되었던 1995년에만 해도 학생인권조례라는 게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너무 성급하다. 기다려라."라는 말은 "안 해주겠다."라는 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일 때가 많다. 그 말에 그저 기다리다보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그나마 천천히, 세상이 바뀌어 간다.

무엇이 너무 급진적이라거나 점진적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변화가 급진적일지 점진적일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처럼 군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온힘을 다해 주장하고 부딪쳐야 겨우 약간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곤 한다. 그래서 너무 급진적/이상적이지는 않냐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한 발 물러나서 얘기하지 말고 직접 현실 속에 서서 행동하면서 본다면, 급진적인 것은 없다. 그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고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지 바라는 마음과 의지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걸 만들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게 운동이다. 그것이, 내가 이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청소년운동을 하는 자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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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1.09.20 16:33





http://blog.naver.com/communebut/20138034384
<오늘의교육> 7,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후일담인데...
7월 중순이었나- 평등교육학부모회 사람을 만났는데 제가 범국민교육연대에 저 메일 보낸 거 가지고 안에서 말이 많다고 하더군요. 대충 뭐 저걸 공개하고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느니 어쩌니 하는??
그래서 웃으며 이미 <오늘의교육> 원고에 넣어버려서 공개했는데, 라고 했었다지요. >_<
내가 저거 공개 안 하거나 부끄러워 할 줄 알았나;;
에휴. 부끄러워 해야 할 게 누구인지.


p.s. 다행히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는 최종 성사되었습니다! ^^ 이 글은 6월 말 쯤에 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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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바동거립시다

-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과정에 대한 평가

 

윤종(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gonghyun@gmail.com

 

 

 

왜 곽노현 교육감 놔두고 주민발의를 하려고 했나

2010년 10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를 만들기 위해 활동해 온 지 1년, 아니 학생인권 보장을 위해 활동해 온 지 5년 반 만의 ‘성과’였다. 하지만 특별히 축배를 든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청소년활동가들 사이에는 약간의 당혹감도 감돌았다. 이렇게 쉽게 통과될 조례가 아닌데, 하는 당혹감. 학생인권조례를 만드는 과정에서의 수많은 갑갑했던 순간순간들이 떠올랐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과정은 우리에게 분명히 성과였지만, 일종의 ‘무력감’을 동시에 안겨 주었던 것 같다. 물론, 우리가 자문위원회에서, 학생참여기획단에서, 공청회장에서, 거리에서 그 ‘개고생’을 하고 주먹구구식 교육청 행정과 형식주의에 휘둘리기도 하고, 집회의 자유와 두발 자유 등을 가지고 그렇게 치고받고 했던 과정이 있었기에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발의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기도교육청과 경기도의회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노력은 정말 별 의미가 없는 것만 같은 느낌을, 많은 청소년활동가들이 느껴야만 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상곤 교육감이 집회의 자유를 명시한 조항 등을 흐려 놓은 안으로 발의를 했을 때도 그랬고, 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도의회에서 삽시간에 통과가 됐을 때도 그랬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에도 골치 아픈 일들은 많았다. 가장 대표적으로, 학생인권조례의 내용이 학생들에게, 교사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통과 직후에는 “두발 자유 조례”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 오해도 많았다. 교육청과 학교에서 학생인권조례 내용을 배포하고 교육과 홍보를 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들을 우려해서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전부터 학생들에게 홍보해야 한다고 경기도교육청에 요구했지만, 교육청에서는 아직 제정되지 않은 조례를 홍보할 수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교육청의 입장과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학생인권조례를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학생들이 학생인권조례를 알지 못하는 현실도 답답했다. 교육청과 지역의 여러 단체들 사이에 학생인권조례 정착을 위한 공조와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못한 점도 아쉬웠다.

 

서울에서 학생인권조례를 주민발의로 하고자 한 것은 이런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과정에서의 경험과 현실적 어려움들 때문이었다. 교육청이나 서울시의회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보다 후퇴한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고, 또 서울시민들에게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더 많이 알리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다른 움직임이 필요했다. 두발 완전 자유화 등이 명확하게 들어간 좀 더 나은 학생인권조례의 내용을 만들고자 하는 욕심도 있었다. 조중동문 등을 비롯한 언론들의 학생인권 반대 공세에 대한 고려도 없진 않았다.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가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주민발의는 무엇보다도 운동에 대한 강제였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게을러지지 말고 계속해서 거리에서, 조직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학생인권에 대해 설명하고 설득할 의무를 부여했다. <경향신문> 3월 특집 <아직도 먼 학생인권> 같은 것들도 어떻게든 학생인권을 공론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제안하고 함께 준비한 기획이었다. 또한 주민발의는 학생인권에 대해 소극적으로 찬성한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던 여러 단체와 개인들에게 ‘학생인권 쪽박 차는 꼴 보기 싫으면 서명 모으세요’라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6개월 안에 8만 2천여 명의 서명을 받아야만 한다는 조건을 걺으로써, 각계각층의 지역운동, 시민운동, 종교운동, 노동운동 등이 학생인권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한몫을 하도록 압력(?)을 가했던 셈이다.

 

 

절반의 성공

그래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의 목표는 달성했을까? 일단 거리로 나가서, 여러 행사장에서, 다양한 시민들을 만나서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이야기하고 설명하는 일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본격적으로 거리 서명을 시작한 2월부터 5월까지, 못해도 수십만 명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설명을 했을 것이다.

 

주민발의 과정에서, 어디 서명해 줄 곳 없나 하는 필사적인 마음으로 찾고 연락한 끝에, 이전에는 학생인권운동에 대해 잘 모르고 결합하지 않았던 여러 새로운 단체들, 사람들도 발굴해 낼 수 있었다. 종교의 자유 조항을 보고 종교계 등이 힘을 실어 주었고, 어린이책시민연대 역시 학생인권조례에 열의를 보였다. 온라인에서도 SNS와 블로그 등을 통해서 많은 누리꾼들이 학생인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학생인권을 위해 글을 올리고 서명을 모아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온갖 노력의 결과,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가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무엇보다도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주민발의 과정에서도 제정 이후에도 가장 큰 힘이 되어 줘야 할 교육운동의 움직임이 소극적이었다. 전교조 서울지부는 처음에 회의 과정에서 주민발의를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최대 3만, 최소한 2만 정도를 목표로 세웠으나 서울지부 조합원 숫자만큼의 서명도 모으지 못했다. 또한 서울의 여러 지역에 터를 둔 수많은 ‘풀뿌리’ 교육단체들과 교육시민단체들 중에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에 참여한 단체들은 손으로 꼽을 수 있었다(물론 그 단체의 활동가들이나 간부들은 대체로 서명을 했다. 그러나 단체 차원에서 힘을 실어 주진 않았다).

 

 

안이함과 절박함

이미 짐작하시겠지만 이 글은 어쩌면 교육운동을 좀 까는 글일 수 있다. 하지만 먼저 좀 착해 보이기 위해서 자기반성부터 해 보겠다. 나 역시 2010년까지만 해도 이 주민발의에 대해 다소 안이했다. 뭐랄까, 그래도 교육운동을 비롯해서 이른바 ‘민주·진보·개혁’ 운동 안에서 학생인권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합의와 관심이 있을 거라는 믿음 같은 게 있었던 것이다. ‘학생인권 문제가 공론화된 지가 10여 년이고, 학생인권법이나 학생인권조례 등의 이야기가 나온 게 6년째인데 설마 또 이걸 하나하나 설득을 해야 할까, 여러 단체들의 회원들과 회원들의 지인들 정도만 받아도 반은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러나 되돌아보면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민주노총이나 정당들, 전교조들, 학부모들, 지역단체들을 방문하며 학생인권에 대한 교육과 간담회를 먼저 진행했어야 했다. 학생인권 의제는 설령 그 조직의 간부들이나 활동가들이 동의하고 있더라도 그 조직의 회원들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의제가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해 달라고 하면 해 주겠지, 라고 생각하며 별로 어렵지 않게 수천수만의 서명을 약속했던 큰 조직의 활동가들은 금세 벽에 부딪혔다. 그게 친환경급식조례나 광장조례와는 다른 부분이었다. 학생인권조례를 주민발의로 만들려고 한다면, 자기 조직을 그 조직에서만 알아서 챙기는 게 아니라, 학생인권운동 차원에서 회원들, 조합원들을 적극적으로 만나고 교육하고 간담회, 토론회를 하는 등의 자리를 계속 만들 필요가 있었다.

 

내가 주민발의에 ‘올인’하는 것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데는 만19세 이상만 서명을 할 수 있는 주민발의 방식의 문제도 있었다. 주민발의 서명을 모으는 활동에서 청소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리 서명 외에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법적으로는 수임인도 될 수 없기 때문에 거리 서명을 받더라도 형식적으로는 직접 받을 수 없다. 때문에 초기에 청소년 측의 계획은 홍보 활동을 함께하거나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청소년 서포터즈’ 같은 식으로 학생들, 청소년들을 조직하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좀 모호한 부분이 있다. 나는 지금도 학생인권조례가 청소년들의 힘으로 만들어지고,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에도 지역에서, 학교 안에서 터를 잡고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그런 조직 사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6개월 안에 만19세 이상 유권자들 1%의 서명을 받아 내야 하는 주민발의는 그런 데까지 힘을 쏟을 여유를 주지 못했다. 주민발의에서 청소년들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은 초기 기획 단계부터 있어 왔다. 그런 문제의식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서명은 비청소년 단체들이 모으고 청소년단체들은 청소년들의 행동과 조직을 만드는 사업에 전념한다는 방침을 고수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안이한 마음가짐은 오래 가지 못했다. 2011년 1월 말, 3개월이 지났는데도 서명 수가 1만도 채 되지 않았고, 2010년 9월만 해도 빨리 시작하자고 재촉하던 전교조 서울지부에서는 조합원들 사이에 동의가 되지 않아서, 준비가 되지 않아서 서명을 많이 받지 못하고 있다고 난색을 표했다. 결국 주민발의를 계속할 건지 포기할 건지를 안건으로 놓고 논의하는 자리까지 열렸다. 그 자리에 참가한 청소년활동가들이 이런 식으로 갈 바에는 그냥 주민발의를 포기하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나는 그때 다른 청소년활동가가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여러분들한테는 이게 실패해도 연대 사업 하나가 실패한 것뿐이겠지만 청소년인권운동에게는 5년, 10년을 해 온 운동이 실패하고 크게 후퇴하는 겁니다.”

 

다시 결의를 다져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를 끌고 가기로 결정하고, 2월부터 추운 날씨 속에서도 매일같이 거리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목표는 하루 200명씩. 11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6시간씩. 거리 서명의 주력은 어쨌건 청소년활동가들이었다. 그때 청소년활동가들이 그렇게 매일 거리 서명을 한 동력은, 마음속에 “역시 어른들을 믿으면 안 되는구나”라는 불신과, 겨우 꽃피우려고 하는 학생인권을 위기에 처하게 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었을 것이다. 결국 학생인권조례는 청소년들이, 학생들이 만들어 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 지경이 되어서도 그 ‘절박함’은 몇몇 사이에서만 공유되는 것 같았다. 무상급식 책 출판기념회에 서명을 받으러 갔을 때 남의 행사에 와서 이런 거 하면 욕먹는다고 하지 말라고 했던 활동가의 말은 지금도 내게 상처로 남아 있다. 흥미롭게도, 그 활동가는 1월 말에 주민발의를 끝까지 계속해야 한다고 매우 강하게 주장했던 사람이었다(개인적으로 평가할 때 1월 말 회의 때 적극적으로 주민발의 운동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단체들 중에서 자기 말에 그만큼의 책임을 진 건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흥사단교육운동본부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날, 어이가 없어서 광화문 한복판에서 펑펑 울었다.

 

그밖에도 어차피 안 될 것 같아서 열심히 안 한다는 사람들, 주민발의 실패한다고 망하는 거 아닌데 이거에만 목매달 필요 없지 않냐는 사람들, 딱 1번 거리 서명 나온 건데 ‘다른 할 일도 있었는데 나올까 말까 고민하다가 하도 문자를 보내셔서 나왔다’고 웃으면서 말하던 사람들, 뭐 어차피 안 돼도 교육감 발의나 의원 발의도 있지 않냐던 사람들……. 2월부터 서명 작업이 끝날 때까지 3개월은 그런 수모와 실망의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힘이 되어 준 단체들, 사람들도 많긴 많았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단체였는데 열과 성을 다해서 수백 장, 수천 장을 해 온 곳들도 있었고 마음을 함께하며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를 지탱해 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3개월을 계속 걸어 나간 힘에는, 잘 안 하면서 미안해할 줄도 모르고 초만 치는 사람들이 미워서 보란 듯이 성공시켜 버리겠다는 악과 깡, 그리고 그래도 의외의 곳에서 손을 내밀어 주는 많은 사람들이 고마워서라도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을 것이다.

 

 

운동의 무능함

교육운동은 왜 그렇게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서명에 적극적이지 못했을까? 물론 학생인권 문제는 자기 문제가 아니라고 느껴서 열심히 하지 않은 탓도 클 것이다. 그에 더해서, 처음에는 ‘이 인간들이 학생인권에 반대하거나 떨떠름해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러나’ 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화가 나는 한편으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라. 분회장들 연락처도 다 확인이 안 되고 있고 분회까지 연락이 다 닿지 않는다고 말하는 전교조 서울지부는 얼마나 현장 조직과의 괴리를 보여 주고 있는가. 어차피 안 될 것 같아서 안 한다는 말은 얼핏 들으면 굉장히 비겁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 말 뒤에는 얼마나 큰 무력감과 패배의 상처가 있는가. 지역 풀뿌리 교육단체라고 하는 곳에서 전교조 지회 없이는 자체적인 사업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하는 상황은 또 어떤가. 자식이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수임인 등록하고 자기 인맥으로 단 하루 동안 60명이 넘는 서명을 받아 내는 ‘일반인’에 비해서, ‘40명, 50명도 모으기 어렵다’, ‘학생인권에 대해 말을 꺼내기 두렵다’고 하는 교육운동활동가들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홍세화 씨가 한겨레 칼럼에 쓴 말마따나, 무상급식 주민투표 서명은 80만 명을 모아 내는 상황에서 단 8만 명도 모으지 못하는 그 조직력의 차이는 얼마나 참담한가. 체벌 금지에 찬성한다는 전교조에서는 왜 체벌 금지를 지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현장 실천이나 지침을 전혀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는가. (혁신학교에 바빠서?)

 

우리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운동을 하면서 부딪힌 것은 사람들의 반발이 아니라 운동의 무능이었고 활동가들의 무기력이었다. 내가 화가 났던 것은, 다수의 교육운동활동가들에게서 청소년활동가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 ― 어차피 우리 운동의 현실은 시궁창 밑바닥이고 더 물러설 곳도 없고 아등바등 발버둥 쳐서 어떻게든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그런 마음 ― 를 별로 느낄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교육운동의 현장 조직(학교와 지역)이 모두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현실 때문이었고, 활동가들의 피로감 때문이었으며, 일종의 현실 안주 때문이었다.

 

 

밑바닥에서 바동거리지 않으면……

4월 중순 무렵에 범국민교육연대에서 보낸 메일을 보다가, 2012년 교육혁명연구회를 만들자는 제안서를 보고서 열 받아서 답장을 보냈다.

 

“야, 이 개새끼들아, 하고 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네요.

뭐? 2012년 교육혁명을 연구한다구요? -_-

서울시민 1%의 서명도 조직 못해 내는 교육운동이 어지간히 혁명 잘 하시겠습니다, 그려.

범국민교육연대에서 소식이라고 보낸 이메일 중에서

학생인권조례 서명 조직해 달라는 요청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주간교육동향브리핑에서도 아~주 드문드문 본 것 같네요.

이제 2주 남았습니다.

2주 동안도 학생인권조례에 올인할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학생인권, 청소년인권을 이야기한다는 겁니까?

더 이상 호소하고 부탁하기도 지칩니다.

이제는 협박 컨셉이거든요?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실패하면

교육운동을 아주 가루가 되게 밟아 드릴 테니 각오하고 계세요.”

 

메일을 받아 본 담당자분이나 범국민교육연대 활동가분들의 얼굴이 어땠을지 알 길이야 없다. 지금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서명은 마지막 보정 기간을 앞두고 있다. 1만 장 정도가 부족하긴 하지만, 무효 서명지로 돌아온 것 중에 단순 오타나 이름을 잘못 본 것 등이 많아서 꽤 많은 수를 살릴 수 있을 것 같고 거리 서명/우편 서명도 하루 1,000명 이상을 받아 내고 있어서, 아마도 성공할 것으로 점쳐진다. 일단 교육운동을 가루가 되게 밟지 않아도 되어서 참 다행이긴 하다. 그 밖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주민발의 실패할 경우에 대해 온갖 협박을 해 놔서 뒷감당이 걱정이었는데, 다행이다.

 

하지만 앞의 이메일에 적은 것과 같은 문제의식은 여전하다. 사실 이 문제는 옛날부터 내가 활동하는 청소년단체 안에서도 계속 말이 나왔던 문제였다. 교육운동은 일제고사를 놓고서 “평가를 평가한다”라고 하면서 시험식 평가, 점수 평가 자체를 비판하는 토론회를 열기는 하지만, 정작 그런 주장을 대중화하고 운동과 실천으로 만들어 내는 데는 무관심하다. 입시폐지 대학평준화에 대한 정책적 대안을 만들어서 대학평준화를 이룰 것이라고 하더니 정작 만들어 놓은 입시폐지대학평준화국민운동본부는 2년, 3년 지나니까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연대체 제안은 맨날 메일로 오는데 그 연대체에서 어떤 현장 투쟁과 실천을 조직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교육희망네트워크가 선거용 조직이라고 비판하는 좌파 교육활동가들은 그럼 선거만 바라보고 정책 만들고 토론회하고 세미나 하는 것 외에 무슨 아래에서부터의 운동을 만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성공을 보며 교육운동활동가들은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부끄러움? 감동? 글쎄. 내 작은 소망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과정이 교육운동활동가들에게 자기 운동을 반성하고 되돌아볼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안 될 거라고 했던 운동을 성공시킨 그 감격이 교육운동활동가들에게도 계속 좀 더 적극적으로 밑바닥에서 바동거릴 힘이 되어 줬으면 좋겠다. 4월 중순까지만 해도 4만이 채 넘지 못했던 서명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연대 속에서 1주일에 1만씩 늘어나면서 결국 8만 5천을 넘겼을 때 그 감동을, 이 과정을 함께하고 지켜봤던 활동가들이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4월 초나 3월 말 정도에 그렇게 이슈화시키고 소문을 내면서 했다면 피가 마르는 기분을 좀 덜 느꼈을 텐데!) 입으로 헛약속만 남발하는 몇몇 단체들과 알음알음 정성을 모아서 마음을 담아서 서명지를 수십 장, 수백 장씩 보내 주시는 얼굴도 모르는 시민 여러분들을 자연스레 마음속에서 비교해 보면서 느꼈던 그 씁쓸함과 따뜻함이 나만의 것이 아니면 좋겠다.

 

전교조를 비롯해서 10년, 20년 교육운동을 해 온 분들이 충분히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경험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그건 이제 갓 6년 정도 운동을 한 내가 감히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내 친척 중에도 전교조 해직 교사로서 도피 생활을 해 왔던 분도 계시다. 하지만 그럼에도, 감히 지금 다시 한 번 주문하고 싶다. 교육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청소년들, 학생들과 같이 밑바닥에서 바동거려 보자고. 바동거리지 않는 한, 더 이상의 변화도 뭣도 없기 때문이다.

 

 

 

윤종(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청소년 언론 《오답승리의희망》 편집진. 고등학교 때부터 청소년인권운동을 당사자로서 시작해서 2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코가 꿰어서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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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1.08.31 17:50

어느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청소년들, 중고등학생들의 운동에 관해서 교육해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쓴 글입니다 ^^;;





청소년인권운동, 온라인에서 거리로


  한국의 저항적인 청소년운동의 역사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시대까지도 얘기해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청소년들의 인권과 권익을 주장하는 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운동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온라인에서 모이다

  그 시작은 온라인 PC통신과 인터넷이었다. 첫 발단은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1995년, 강원도 춘천에 사는 "최우주"라는 고등학생이 강제적으로 자율학습․보충수업을 시키는 것이 학생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헌법소원을 준비하고 있다고 게시판에 올리면서, PC통신에서는 학생인권에 관한 뜨거운 이야기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최우주 군의 학교 문제, 함께 따라가봅시다."라는 토론방이 개설되었고 그 자리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인권 문제를 토로하고 토론을 진행해갔다.
  그 결실로 1995년 12월경, PC통신 <하이텔>에 "중고등학생복지회"(학복회)가 만들어졌고 이어 PC통신 <나우누리>에도 학복회가 생겨났다. 학복회는 온라인 모임에서 시작돼, 단체로서의 활동력을 많이 갖추지는 못했지만 학생인권의 이슈를 제기한 ‘최초의 청소년인권 단체’라고 할 수 있다. 학복회는 인권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학생 인권 운동을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학복회는 1998년, 교육부에서 "학생인권선언"을 제정하겠다고 했다가 이를 취소하자 항의하면서 자체적으로 "중고등학생인권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중고등학생인권선언서

인간의 존엄성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 가치입니다.
학생의 인권 역시 보편적 인권 안에 존재하며, 학생은 자신의 삶의 주체로서 자신이 지닌 기본권을 정당히 누릴 권리를 가집니다.
그러나 학생들, 특히 중,고등학생들은 이러한 기본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육 현장인 학교에서, 삶의 현장인 사회에서 교육의 주체인 학생의 인권은 공공연히 침해당하고 있으며, 편견과 인습을 통해 이러한 사실이 암묵적으로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뿐 만 아니라, 학생의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마저 당사자인 학생이 아닌 성년자가 중심이 됨으로써 일방적 보호, 훈육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나아가 이 나라의 왜곡된 정치구조와 맞물려 당국은 학생문제를 투표권자인 성년의 시선으로 일관하는 정책을 남발하여 학생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우리는 학생 또한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지닌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이므로 그에 따른 마땅한 권리를 가짐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학생의 권리와 의무를 학생 스스로 보장하고자 합니다.

1. 학생은 나이, 성별, 학교 성적 등 어떠한 기준으로도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습니다.
2. 학생은 과도기의 세대가 아닌, 인격을 가진 사회구성원으로서 외부에 의한 신체적,정신적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3. 학생은 헌법에 보장된 모든 기본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과 표현의 자유,행동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가집니다.
4. 학생은 쾌적한 환경에서 평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를 지닙니다.
5. 학생은 학교의 방침에 따른 일방적인 교육을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교육을 요구하고 보장받을 권리를 지닙니다.
6. 학교에서 학생의 모든 자치 활동은 교사나 학부모 등 타인에 의해 제한될 수 없습니다.
7. 학생은 자신이 원하는 매체를 접할 수 있고 자유로운 문화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와,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문화공간을 보장받을 권리를 지닙니다.
8. 학생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노동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9. 학생은 자신이 원하는 노동활동을 스스로 판단하여 할 수 있으며 학생이란 신분으로 노동현장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10. 위와 같은 학생의 모든 권리를 부당한 기준으로 제한하지 않아야 합니다.
11. 학생은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고 지킬 책임을 지닙니다.
12. 학교, 가정, 국가를 비롯한 사회는 위의 권리를 보장하며 합당한 여건과 환경을 조성할 의무가 있습니다.
13. 정부는 이와 같은 사항을 법으로 보장할 의무가 있습니다.

일천구백구십팔년 십일월 삼일 학생의날
하이텔 중고등학생복지회, 나우누리 학생복지회



  1990년대 후반, 중고등학생복지회 외에도 인터넷에서 여러 청소년 공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채널텐, 네틴, 원, 아이두, 사이버유스 등이 있다. 공간들에 따라 성격 차이는 있지만, 이들 인터넷 공간들은 주로 청소년들의 문화와 삶에 대해 소통하는 커뮤니티의 성격이 강했다.
  채널텐(Ch.10)은 97년 5월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청소년웹진이었다. ‘청소년을 위한, 청소년에 의한, 청소년의 웹진’이라는 모토를 걸고 청소년들이 직접 운영했으며, 청소년들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로 오갔다. 아이두는 10대들의 포탈 사이트 형식으로 블로그, 게시판, 토론, 일기장, 사전, 기타 등등의 다양한 컨텐츠들을 생산해왔다. 이곳도 청소년들이 직접 서버를 만들고 사이트를 개설하여 만들어진 곳이었다. 사이버유스는 정부(한국청소년개발원)의 돈으로 만들어진 곳이었는데, 사이버유스는 청소년들의 문화와 삶, 인권에 대해 자유로운 소통과 토론을 중시했고. 사이버유스에서 청소년들은 우리SEX(성), 자퇴, 만18세 선거권, 청소년 아르바이트 노동인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할 수 있었고, 또 조금씩 퍼져나가던 청소년인권도 활발하게 이야기되었다.

  2000년, 채널텐, 아이두, 사이버유스의 세 사이트는 함께 “웹연대 위드(WITH)”를 구성하여 두발규제 반대 운동, 노컷운동을 전개했다. 노컷운동은, “자르지마” 배너, 국제행사에 나갔다 온 한 교사가 쓴 한국의 두발규제에 대한 비판 글 등을 매개로 온라인에서 급격히 확산되었다. 두발규제에 반대하는 온라인 서명운동은 2000년 하반기 즘에는 16만 명을 넘어섰다. 이처럼 웹연대 위드는 두발규제 등에 반대하는 청소년들의 여론을 온라인을 통해 형성해가는 역할을 했으며, 서명운동을 통해 청소년들의 의지를 표현했다. 웹연대 위드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이 오프라인에서의 캠페인 활동 등을 하면서 두발자유 운동은 더욱 주목을 받았다.
  온라인서명운동이 중심이 되고 거리 캠페인 등이 결합했던 '노컷운동'은 온라인에서 첫 시작을 했던 청소년인권운동이 현실에 그 모습을 드러낸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노컷운동'으로 교육부에서는 각 학교별로 토론회 등을 통해 학생들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하여 두발규제를 개정하라는 일종의 ‘두발자율화’ 조치를 내리게 되었고, "학생의 인권"이라는 것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다.


거리로 나서기까지

  2000년대 초중반은 많은 청소년운동 단체들이 새롭게 생겨나고 사라진 시기였다. 그리고 많은 단체들, 개인들이 체벌, 강제적 자율학습, 입시경쟁, 청소년 노동권, 학생회, 청소년 정보인권, 종교의 자유 등 청소년인권의 의제들을 발굴하고 사회적으로 제기하는 시기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청소년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학생회를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하자는 제안, 학교 안에 조직을 만들려는 시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일구어나가려는 움직임, 언론을 통한 이슈화에 초점을 맞춘 활동 등등 여러 가지 운동 방법들을 시도하면서 더 나은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시행착오와 실패 속에서 "청소년인권운동"이 꼴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뒤집어서 말하면 이 시기는 청소년운동이 지지부진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온라인에서 글을 올리고 서명운동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학내 조직을 만드는 일은 학교에서 활동을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번번이 좌절되었다. 일부 사립학교 등에서만 '사학분규'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의 저항이 일어나는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청소년운동을 하는 청소년들이 2년, 3년이 지나면 청소년이 아니게 되어버리면서 모임도 흐지부지 흩어지고 운동의 맥이 끊기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국면 전환의 계기는 '거리'에서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촛불집회' 등 거리시위는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과 미군장갑차 사건 때문에 일어난 여중생 추모 ․ 반미 촛불집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거리 시위에 참여했고, 여러 가지 형태의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청소년들도 많이 있었다. 거리 촛불집회의 흐름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2004년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로 계속 이어졌다. 청소년운동의 주체들 역시 이런 촛불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이런 촛불집회들이 청소년운동으로 직접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었다.
  2005년 5월이 되어서야 청소년들이 청소년들의 이슈를 가지고 모인 자발적인 촛불집회라는 '사건'이 터졌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상대평가 내신등급제 도입을 발표하자 5월 7일, 학생들은 입시경쟁에 반대하며 자살학생 추모 촛불집회에 참가하러 모여들었다. 그 촛불집회는 우발적이었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추모 촛불문화제로 기획했던 자리가, 학생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문자메시지가 돌았고 점점 규모가 커져서 입시경쟁교육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는 자리가 된 것이다. 교육청 장학사들과 학교 교사들의 방해 속에서도, 그날 촛불집회에는 10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교육 정책에 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리집회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2005년 2월부터 2차로 두발자유 운동을 준비해오던 단체들이 바로 일주일 뒤인 5월 14일, 두발자유 집회를 열었다. 낮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2차례 최대 300여명이 참여했던 그날 두발자유 집회에서는 두발자유 뿐 아니라 전반적인 학생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목소리를 냈다.
  그날 거리집회가 바로 청소년운동의 발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학생들은 한 번 모이고 흩어졌고, 지속적인 운동이 이어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거리에서 청소년들의 잠재적인 불만과 힘을 확인한 것은 커다란 성과였다. 거리집회의 힘은 여러 학교 안에서 두발자유를 요구하는 학내시위로 이어지기도 했다.(이러한 거리집회, 촛불집회의 역사는 2008년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로도 연결된다.)
  청소년운동을 해온 여러 단체와 활동가들은 2005년 5월의 그 '사건'을 계기로 반성과 토론을 새롭게 시작했다. 과거 청소년인권운동에 대한 평가와 새로운 청소년인권운동에 대한 여러 방법론들이 제시되고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등의 단체들, 모임들이 생겨났다. 이런 움직임들은 2006년, 2007년에도 연달아서 학생인권을 요구하는 거리집회가 열리고 학교 안에서는 학내시위, 서명운동 등이 계속 일어나는 밑바탕이 되었다.


거리에서, 그 다음은?

  2005년 이후 거리로 나섰던 청소년인권운동은 이제 다시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고 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등의 사건은 청소년인권운동의 성과였지만, 동시에 어떻게 학교 안에서 좀 더 광범위하게 운동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또한 경기도 뿐 아니라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학생인권 보장 조치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역에 뿌리 내린 청소년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청소년들은 한국 사회에서 많은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고, 입시경쟁이나 여러 차별 등 속에서 부당한 대우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면 청소년이 아니게 되어버리는 청소년 정체성의 특성상 거기에 저항하기 위한 운동은 좀처럼 굳건하게 만들어지지 못하는 속성이 있다. 몇 년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도 많고, 또 애써 단체를 만들거나 조직화를 해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청소년이 아니게 되면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온라인에서 시작해서 거리로 나서며 계속되어 온 청소년운동은, 느리지만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그나마 나아졌지만 여전히 미흡한 학생인권, 더 심해지고 있는 경쟁적인 교육, 가족 안에서의 인권,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확보 등등 과제는 많기만 하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운동이 더 많이 필요하다. 청소년들의 행복을 위해서도, 우리 사회가 더 인간적이고 좋은 곳이 되기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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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딱딱한꿈2011.08.24 19:31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2> 주장하는 글 : 성명, 논평, 칼럼, 토론문 등


주 장하는 글은 운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쓰게 되는 글이다. 운동을 한다는 건 어떤 주장을 하며 사회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주장하는 글이라고 다 똑같을 리야 없다. 단체의 입장을 발표하는 글, 개인적으로 쓰는 글, 언론에 발표하는 글, 토론회 때 쓰는 글 등등이 같을 수야 없다. 쉽게 말하면 글을 다 쓰고 나서 제일 밑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라고 붙는 것과 “공현”이라고 붙는 것과, 한 10명 모인 토론회 자리에서 발표하는 것과 수만명이 읽는 신문 지면에 실리는 것이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단 여기에서는 주장하는 글의 종류를 대표적인 3가지로 나누어보았다. 하나는 단체의 입장을 발표하는 성명과 논평이다. 성명과 논평은 단체 회원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단체의 정해진 입장을 알리는 글이며, 동시에 언론 등을 통해 사회에 전달하고 발표하는 글이다. 두 번째는 칼럼이나 언론기고문이다. 이 글은 개인의 명의로 언론에 글을 기고하여 발표하는 형태의 글이다. 가장 전형적인 논설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발제문이나 토론문이다. 발제문이나 토론문은 개인적이라는 점에서는 칼럼과 비슷하지만 발표 방식이 언론에 직접 전문을 싣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성명이나 논평과 비슷한 점이 좀 있다. 주로 토론회와 같은 행사를 할 때 자료집에 실린다.

이제부터 이러한 주장하는 글을 쓸 때 유의해야 할 점이나 자잘한 방법 같은 걸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 중 어떤 글이든 내가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1〉에서 제시한 원칙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은 잊지 않도록 하자.



① 성명/논평


성명/논평에 관해서, 우선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부분부터 짚고 넘어가겠다. 그건 바로, 대체 성명과 논평의 차이가 뭐냐는 것이다. 사실, 어떤 글이 성명이냐 논평이냐 하는 것을 구별할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둘의 성격을 비교하기는 쉬운 편이다. 그러니 일단은 그 정도 설명에서 만족하도록 하자. 성명이 어떤 사안에 대해 더 강하게 주장하고 외치는 거라면, 논평은 어떤 사안에 대해 조금 더 차분하게 분석하고 평하는 것이다. 성명은 요구 사항이 비교적 뚜렷하고 논평은 주장이나 입장은 드러나지만 요구 사항을 그렇게 뚜렷하게 적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성명은 상대적으로 길고 완결된 글이고, 논평은 상대적으로 짧고 간결하다.

성명/논평은 단체의 성격과 색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글이며, 또한 보도자료 등에 첨부하여 주장을 표현하거나 행사에서 주장하는 바를 밝힐 수 있는 글이다. 특정 사안에 대해서 직접 활동을 할 여력이 없을 때는 우선 성명이나 논평으로 입장과 주장을 정리해두고, 그걸로 대충 면피를 하곤 한다.(별로 좋은 관행은 아닐지도 모른다.) 성명/논평은 ‘연명’(성명서 내용에 동의하고 거기에 같이 이름을 올리는 것)하는 단체가 많을수록 영향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연명을 받아서 발표하곤 한다. 하지만 많은 단체들이 연명해서 성명/논평을 내는 것은 그 활동의 주체가 되는 핵심 단체들을 드러내주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다. 열심히 성명 쓰고 제안하고 활동하는 건 1, 2개 단체인데, 언론에 “133개 시민사회단체들은…”이라고 나가면 그 1, 2개 단체 입장에선 좀 억울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사안에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 발표를 해야 할지 역시 생각해볼 문제이다.


성명/논평을 쓸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 “어떤 것을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명/논평은 개인의 생각이나 주장이 아니라 단체의 주장을 발표하는 것이라서 어떤 내용을 쓰거나 쓰지 않는 것이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명/논평은 단체의 개성과 성격을 드러내는 것임을 잊지 말자. 성명/논평을 쓰기 전에 정리해 두어야 하는 질문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이 사안을 우리는 어떤 성격의 사안으로 이해하고 규정할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주장하기로 했는가? 어떤 정책에 대해서라면, 찬성인가, 반대인가, 부분적 찬성/반대인가? 책임을 묻는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반드시 언급하거나 설명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얽힌 복잡한 사안일 경우 각각 비중은 어느 정도로 다루어야 하는가? (심지어 문단의 개수나 분량까지도 생각해가며 써야 할 때도 있다!)

특히 입장이 딱 찬성 반대로 나눠지지도 않고, 다양한 입장들이 다양한 표현과 어법으로 만들어질 수 있으며,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성명서의 입장과 주장을 표현 하나에서부터 분량까지 잘 컨트롤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교원평가제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서, 입장이 현재 안에 대한 찬/반인지 교원평가 자체에 대한 찬/반인지, 대안은 어떤 형태로 제시할 것인지, 전교조의 입장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현재 정세 돌아가는 걸로 볼 때 이런 말은 필요하긴 하지만 비중을 줄이는 게 좋겠다든지, 여하간 이런저런 골치 아프고 미묘한 조정이 필요해지고는 하는 것이다.


성명/논평을 쓸 때 여러분은 얼마든지 창의적인 표현이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성명/논평의 틀을 지나치게 딱딱하게 정해놓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는 읽는 이도 쓰는 이도 재미가 없고, 단체의 개성도 잘 드러나지를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전혀 안 잡혀서 막막한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 여기에서 ‘일반적인’ 성명/논평의 순서 정도는 소개하겠다.

성명서의 첫 머리에는 보통 성명서 전체의 방향과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어떻다.” 거기에서 어떤 말을 사용해서 이 사건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규정하고 있는지를 읽는 이가 알게 하고, 또 이 사건에 대해 대충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밝히는 것이다. 신문 기사의 ‘리드’(리드 : 신문의 뉴스 기사에서 본문의 앞에 그 요점을 추려서 쓴 짧은 문장.)를 떠올리면 어떤 내용을 넣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이 성명서를 쓰게 된 배경, 즉 사건의 개요를 간추려서 넣어줘야 한다. 성명서를 읽는 사람들이 사전에 알아야 하는 정보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앞부분에 들어가 줄 필요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간에 잘 알려진 사건이거나 아니면 생략해도 무방한 정보는 안 쓰기도 하고, 짧은 논평 등에서는 간단한 한 문장 정도로 요약하기도 한다.

그 다음에는 그 사건에 대한 해석과 분석을 쓴다. 즉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을 좀 더 파고들어서 심층적인 분석을 써줘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보충수업을 강제로 하지 않은 교사가 사학재단에 의해 해임당한 사건에 대해서, 이는 학생인권과 진정한 교권이 상충되지 않으며, 억압적인 학교 구조 안에서 교사와 학생이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쓴다거나 뭐, 기타 등등…. 이 분석 속에도 물론 성명/논평을 발표하는 단체의 주장과 입장이 반영될 것이다.

성명의 경우에는 마지막에 주장과 요구사항이 들어가곤 한다. 요구를 하는 대상이나 책임을 묻는 대상을 명확히 해야 하며, 요구의 내용도 구체적이면 좋다. 독자의 편의를 고려한다면, 써주고 나서 다시 한 번 전체 요지를 몇 줄로 정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논평의 경우에는 특별히 요구사항을 정리하기보다는 전체적인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래서 우리의 입장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 보통이다.(“우려를 표한다.”, “다시 한 번 충고한다.”, “지적한다.” 같은 어휘가 자주 사용된다.-_-)

여기까지가 가장 일반적인 성명/논평의 구성 방식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사건의 성격에 따라, 성명/논평의 성격에 따라, 얼마든지 참신한 성명/논평을 만들 수 있다. 성명/논평은 논리적인 글이지만, 꼭 딱딱한 논리적 표현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 비유나 패러디 등을 알맞게 활용하는 것은 성명/논평을 더 널리 읽히게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상대방의 말이나 다른 글 등의 형식을 차용하는 패러디는 성명/논평에 곧잘 사용되는 인기 있는 방법이다.


성 명/논평을 쓸 때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바로 개인의 ‘문체’ 문제이다. 하나의 글은 아무래도 한 명이 쓰는 게 더 나은 경우가 많다. 여러 명이 한 문단씩 써서 글을 조립한다면, 오 내용이 중언부언 겹치게 되고 글이 뒤죽박죽이 되기 일쑤일 것이다. 그러나 성명/논평은 한 사람 개인의 글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인 단체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글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성명/논평을 쓸 때는 지나치게 개인의 문체나 스타일이 반영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성명/논평을 한 개인이 쓰고서 바로 발표하는 일은 별로 없다. 쓰고 나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가며 고치는 작업도 여러 번 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 과정을 거친다면 한 개인의 문체나 스타일이 지나치게 반영되는 것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쓸 때부터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자제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명/논평이 어떻게 발표되고 읽히는지를 염두에 두는 것 역시 성명/논평을 어떻게 쓸지, 성명/논평의 분량을 어떻게 할지 등을 정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성명/논평이 발표되는 방식은 크게 다음의 3가지다. ▲ 언론에 배포해서 보도 ▲ 단체 홈페이지, 이메일 등을 통해 ▲ 직접 인쇄하고 배포.

마지막의 직접 인쇄, 배포하는 방식은 과거 외국에서는 많이 이용된 듯하지만 요즘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는다. 배포용이라면 전단지 형태로 더 알아보기 쉽게 꾸며서 만드는 게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모임 안에서 나눠주거나 돌려 읽기 위해 성명을 인쇄하는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어떤 행사에서는 성명 자체를 낭독하는 경우도 있다. 관련 기관에 성명/논평을 팩스로 보내는 경우도 있고. 그러므로 성명/논평은 그 분량이 2페이지(즉 양면 인쇄했을 때 1장 안에 들어가도록)를 넘지 않는 것이 좋으며, 길어도 3~4페이지 이내의 분량이어야 한다.

성명/논평이 언론에 발표될 때는 성명/논평의 전문이 실리는 경우는 많지 않고 보통은 일부를 인용하여 실리곤 한다. 따라서 성명/논평을 쓸 때 이 점을 고려한다면, 딱 한 문장이나 두 문장으로 이 성명/논평의 핵심적인 주장을 표현할 수 있는 문구를 강조해서 포함시키는 것이 좋다. 때로는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고려하여 일부러 선정적이거나 재치 있는 표현 등을 넣기도 한다. 생각해보라. “입시가 사형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와 “입시가 원인 중 하나가 되어 죽음에 이른 청소년들의 수가 적지 않다.” 중에 어느 쪽이 더 언론에 잘 보도되겠는가? (뻔한 소리지만, 사실과 다른 표현, 억지스러운 표현, 반감을 살 표현을 사용하는 건 무리수이므로 주의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단체 홈페이지나 이메일 등 웹을 통해 배포하는 방식이 있다. 웹의 유연한 특성상 이 방식의 경우에는 별로 고려해야 할 점이 많지는 않다. 여기저기 퍼나르는 게 중요할 뿐이다. 다만 사람들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줄바꿈을 자주 하거나 문단과 문단 사이를 충분히 띄우거나 이미지를 첨부하는 등의 노력을 하는 것, 혹은 웹의 특성을 활용해서 관련된 링크를 함께 삽입하는 것 등은 유효하다.



<성명서> 청소년들을 평등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라!

이 땅에서,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는 오래전부터 무시당해 왔다. 특히 최근의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가 확산되면서 이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과민 반응들은 그런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청소년들의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대해 치사찬란한 태클을 걸고있는 정부와 일부 언론들에게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짜증의 마음을 듬뿍 담아 전달한다.

잠 시 과거를 상기하자면, 2003년에도, 2005년에도 청소년들의 집회에 대해 정부는 까칠하게 반응했었다. 법을 개정해서 ‘미성년자’를 집회에 동원하면 처벌하는 조항을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교육부와 교육청에서는 교사들과 장학사들을 동원해서 청소년들의 내신등급제 반대촛불집회와 두발자유 집회 참가를 봉쇄하려고 했었다. 많은 언론들이 청소년들의 집회 뒤에 배후세력이 있을 거라고 떠들어댔으며, 청소년들이 정치적 발언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왔다.

2008 년, 올해에도 발전은커녕 퇴보한 뻘짓들만 눈에 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해,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여러 정책들에 대해 사람들의 반대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촛불집회가 점점 커지자, 교육부와 교육청은 또 ‘감수성이 예민하고 미성숙한’ 청소년들의 집회 참가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집회 참가를 막도록 하는 지침을 학교로 내려 보내고 있다. 교사들을 동원해서 집회장 주변에 배치하고 학생들이 집회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돌려보내는 괴악한 짓도 여전하다. 몇몇 언론들은 청소년들의 집회 참가를 놓고 “연필 대신 촛불”을 들었네 어쩌네 하면서 배후세력이 있을 거라는 막연하고 무책임한 보도를 일삼고 있다. 또한 연예인들이 몇 마디 하니까 10대 팬들이 무작정 따라 나왔다, 아직 미성숙하고 충동적이어서 인터넷에 떠도는 괴담에 속은 거다, 등등 헛소리를 하며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의 의미를 평가절하하려 하고 있다. 청와대는 한술 더 떠서 놀이문화가 없어서 청소년들이 놀러 나오는 거라는 이상한 분석을 내놓으며 청소년들을 어떻게든 '정치적이지 않은' 존재로 규정하려 애쓰고 있다.

올 해에는 경찰과 검찰까지 가세해서, 5월17일에 휴교시위를 하자는 문자를 얼토당토않게도 “업무방해”니 어쩌니 하면서 수사하겠다고 하고 있다. 정말이지 이런 발언을 하는 인권의식 미성숙한 검찰총장부터 인권교육을 시켜야 한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경찰이 문자메시지를 추적해서 학교까지 찾아가서 학생들을 만나 문자메시지 내용을 확인하고 교장을 만나고 왔다고 한다.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행사를 위축시키는 짓이며, 이미 인터넷에서는 ‘미성년자가 촛불집회 참가하면 사법처리 된다.’라는 식의 사실과는 다른 공포 조성 유언비어가 떠도는 판인데, 이에 대해 경찰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도 대체 경찰이나 교육청, 교육부를 비롯해서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 정권의 하수인 노릇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비롯한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는 것인가? 경찰이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청소년들의 정당한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고 있는 교육청 같은 애들을 막는 것 아닌가 싶고, 만일 정말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교육하고자 한다면 교육부, 교육청, 학교는 오히려 청소년들에게 적극적으로 “여러분에게는 평화적인 집회를 만들고 거기에 참여할 권리, 발언할 권리가 있습니다.” 같은 류의 캠페인이라도 전개해야 하지 않나 싶다. 자신들이 정말 민주 정부이고 인권 경찰이라면 해야 할 일들과는 정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는 저 안타까운 정부기관들은, 정말이지 언제까지 그따위로 할 건지 모르겠다. 답이 안 나온다.

또 한 아수나로는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적 인식들이 비단 정부나 경찰, 일부 언론들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 청소년들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보는 보호주의, 청소년들을 ‘철없는’ ‘충동적인’ ‘미성숙한’ ‘미래로 유보된’ 존재로 보는 인식들은, “학업에 열중해야 할 청소년들조차 거리로 내모는 정부”라는 표현 속에도, “철없고 순진한 아이들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미국산 쇠고기 반대 주장에서도, “어른들이 잘 해야 하는데 잘못해서 어린 학생들이 거리에 나왔다.”라는 탄식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은 광우병이 아닌 미래입니다.”라고 적힌 피켓에서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를 여는 주최측의 “미성년자들은 부모동의서가 없으면 연행당할 수도 있습니다.”, “밤 10시 이후 청소년들은 자진 귀가 조치시킵니다.”라는 안내 문구에서도, 모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 국도 가입한 아동권리협약 등은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의견반영권 등을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지만, 청소년들을 비청소년들과 대등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는 것은 분명 이 사회에 커다란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노무현이든 이명박이든, 열린우리당이든 한나라당이든, 그 문제에 대해서는 별 다른 의견의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이 사회는 전반적으로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에 대해 ‘특별한’ 시선을 보내왔다. 비단 정부나 언론 뿐 아니라 많은 ‘어른들’과 때로는 몇몇 ‘청소년들’ 또한 청소년들을 평등한 정치적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그 결과는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행사를 직간접적으로 억압하고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것, 그리고 청소년들의 행동 자체에 반대하진 않더라도 그 행동의 의미를 뭔가 특별하고 예외적이고 시혜대상인 것으로 위치시키거나 그 행동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 등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 지만 청소년들은 누가 내몰아서 나온 것도 아니고, 학업에만 열중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마냥 철없고 순진하지도 않고, 부모동의서가 없다고 연행당한다거나, 밤 10시 이후에 집회장에서 쫓겨나야 할 이유도 없고, 미래가 아닌 현재에 살고 있다. 청소년들은 비청소년들과 평등하게 연대하는 운동의 주체이지,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거나 사회를 ‘물려받는’ 그런 시혜의 대상이 아니다. 청소년들은 정치적 권리를 가진 인권의 주체이자 정치의 주체이며, 최근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나 학교자율화 조치 등의 정부 정책들에 대해 스스로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경찰, 검찰, 교육청, 교육부를 비롯한 정부와 언론들, 그리고 행사 주최측과 참가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정부와 언론 등은 청소년들의 집회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등 정치적 권리 행사를 위축시키고 깎아내리는 모든 조치와 발언을 취소하고 이에 대한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를 약속하라.

1. 현재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행동 등에 개입하고 있는 주최 측과 참가자들은 청소년들을 보호주의적, 시혜적, 차별적 태도로 대우하지 말고 평등하게 대우하라.

청 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이러한 요구가 실현될 수 있도록, 국가인권위 진정이나 다른 항의/불복종 활동,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대응팀 구성, 청소년들이 평등한 주체로 대우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캠페인과 발언 등을 뜻을 같이 하는 단체들과 함께 적극 조직하고 계획할 것이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2008년 5월 8일


이 성명은 지금까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발표한 성명 중에서도 '그나마' 널리 알려지고 웹에서 ‘펌질’이 된 성명들 중 하나이다. 물론 2008년 촛불 정국이라는 시의적 상황 때문에 여러 촛불모임, 게시판, 아고라 등에 ‘펌질’이 될 수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이 성명 자체로도 촛불 정국에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입장과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는 좋은 성명이라고 할 수 있다. 찬찬히 읽어보며 평가해보자.



② 칼럼 등 언론기고문


칼 럼 등 언론기고문은 글 전문을 언론을 통해 대중에 공개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가장 잘 써야만 하는, 부담 백배의 글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글의 질이 떨어지거나 글의 소재가 별로 주목 받을 만한 내용이 아니면 아예 언론에 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개인의 문체와 발상, 그리고 단체의 주장 등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도 쓰기 어렵다.

하지만 언론기고문이 언론에 실릴 경우에는 그만큼 그 글을 읽는 사람들도 많고 또 주장을 최대한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부담스러움과 어려움에 상응하는 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잘 써야 하고 쓰기 어렵지만 잘 써서 잘 발표할 경우에는 효과가 큰 글”이라는 것이다. 뭐, 언론기고문을 써서 숱하게 언론에 실려도 완전 무반응인 경우들도 많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긴 좀 민망하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화제가 될 수도 있고 또 어떨 때는 욕을 먹을 수도 있는 게 언론기고문이다. 따라서 언론기고문을 쓸 때는 한층 더 꼼꼼하게 주제와 개요를 검토하고 준비해서 써야 할 것이다.


언론기고문은 다른 그 어떤 글보다도 ‘독자’를 고려하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 독자가 가장 많고 독자층이 가장 폭 넓은 글이기 때문이다. 언론기고문을 쓸 때는 우선 우리 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주제에 관해 어떤 예비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라. 웬만큼 많이 공론화가 되어서 대다수가 알고 있는 사안이 아닌 이상은 사안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지 말고, 간단한 설명이라도 넣는 게 좋다. 사람들 대다수의 생각과 어긋나는 주장을 해야 할 때라면 설득력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많은 궁리를 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막연한 ‘일반인’이 아니라 기고하는 언론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성향의 사람들이며 그 사람들은 그 주제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예컨대 「조선일보」 독자와 「경향신문」 독자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일 가능성은 높기 때문이다.(「조선일보」에서 여러분의 글을 실어줄 일도 별로 없겠지만…) 뭐, 「레디앙」처럼 활동가들 좌파들만 주로 읽는 좌파 오타쿠스러운 언론이나 「교육희망」, 「우리교육」처럼 교사들이 주로 읽는 언론의 경우에는 좀 더 독자층을 좁게 상정해도 될 것이다.


또한 언론기고문에서는 매체 특성 역시 고려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분량과 문체이다. 보통 일간지 등 지면에 글이 실리는 언론에서는 원고지 10매 이내(A4로는 1장 이내)로 글을 써야만 한다. 종이 지면이 대단히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문체 역시 간결한 문체를 사용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문에 실리는 글에 간결하고 딱딱한 문체를 요구하는 것이 답답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신문지면의 한정적인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간지나 월간지 등 잡지 형태의 매체의 경우, 일간지와 마찬가지로 한정된 종이 지면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일간지보다는 제약이 적다. 일간지처럼 한 면 안에 글 여러 개를 배치해넣는 방식이 아니라 책자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월간지 등에서는 일간지보다 더 심층적이고 자세한 글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최소한 원고지 20~30매 이상의 글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왠지 모르게 간행물이 나오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더 긴 원고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예컨대 월간지가 원고지 20~30매 이상을 요구한다면 계간지는 원고지 40~50매 이상을 요구하는 식이다.

반면, 인터넷 언론의 경우에는 이러한 분량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인터넷 지면은 지나치게 길거나 지나치게 짧지만 않다면 글의 분량에 크게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글이 A4로 2장 분량이든 4장 분량이든, 그 인터넷 언론의 서버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것이다. 그 결과, 인터넷 언론에서는 문체에 대해서도 다소 관용적인 편이다.

마지막으로, 언론기고문은 글이 언론에 실리고 배포되는 시점을 고려해야 한다. 글이 간행물이 언제 나오고 배포되는지 이것저것 계산해야 할 것이 많다. 이에 관해서는 아예 글 중에서 글을 쓰는 시점을 명확히 밝히거나, 아니면 읽는 사람이 글을 읽는 시점에 맞춰서 쓰는 방법이 있다.


그밖에 언론기고문을 쓰는 법을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 나는 언론기고문은 특별히 표준화된 형식이라는 게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뭐 그냥 일반적인 논설문 식으로 서론 본론 결론이라거나, 두괄식 등 여러 방식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칼럼 등 언론기고문은, 여러 가지 형식이 가능하고 때에 따라 적절한 모양새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여러 가능성을 제한하고 싶지는 않다. 언론기고문은 개인의 이름을 달고 나가는 경우가 많은 만큼 각 개인의 문체와 사상이 잘 드러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다만 언론기고문은 보통 개인의 이름을 달고 발표하더라도 "(단체 이름) (직함) (누구누구)"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 독자들은 이를 단체의 입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므로, 단체의 입장과 개개인의 개성을 적절히 균형을 잡아서 쓰는 것이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단체에서 사업의 일부로 회의를 거쳐서 기획적으로 기고하는 언론기고문의 경우에는 단체의 공식 입장 역시 녹아들어가도록 써야 한다.



③ 발제문, 토론문


발제문과 토론문은 토론회에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야기할 내용과 요지를 정리해서 쓰는 글이다. 이 역시 통상의 주장하는 글과 큰 차이는 없다. 오히려 성명서나 칼럼에 비해서 별다른 제약 없이 쓸 수 있는, 형식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줄글로 써도 되고, 짤막짤막하게 "~임." "~라고 생각함." 같은 문장들을 주욱 이어 붙여서 토론문을 만들어도 된다. 경우에 따라선 자료들과 그 자료에 대한 분석, 해석만 잔뜩 제시한 발제문도 있다. 형식이 자유로운 만큼, 그 안에서 자신이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최대한 충실하게 담아내면 훌륭한 발제문 및 토론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발제문과 토론문 역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다. 현실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그 원래의 의미는 분명히 차이가 있으니 정리해두고 넘어가자. 발제문은 토론을 시작할 때 해당 주제에 관해 정리하고 토론할 거리와 방향을 제시하는 글이다. 그리고 토론문은 그 발제문에서 제시한 자료와 토론 거리 등에 대해서 특정한 의견을 밝히는 글이다. 즉 발제문은 단순히 주장하는 글이 아니라 토론에 필요한 자료, 방향, 내용을 제시하는 글이며, 토론문은 이 발제문을 보고 쓰는 글이다. 상대적으로 발제문이 길이가 더 길고 토론문이 길이가 더 짧을 때가 많다.

발제문을 쓸 때는 지나치게 단정적인 어투는 피하는 것이 좋다. 물론 발제문에서 주장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발제문은 단순히 주제를 설명하기만 하는 글도 아니고, 특정한 입장과 주장이 없이는 좋은 발제문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고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출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입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제문은 어디까지나 토론의 시작을 여는 글이다. 처음부터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이야기를 해버리면 분위기가 좀 그렇지 않겠는가.

토론회는 대개는 발제자 1~2인이 발제를 하고 토론자들이 각자 자기 입장에서 토론을 발표하고 그 다음에 플로어 토론을 하거나, 아니면 소수의 발제자가 발제를 한 뒤에 바로 플로어 토론을 하거나 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발제자가 1~2인일 때야 뭐 어려울 것 없겠으나, 발제자가 여럿일 경우에는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발제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발제자가 여럿일 경우 각각의 발제자들은 어떤 성격의 발제자인지 파악하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교수 등 학계 사람, 정부 관계자, 활동가는 각각 다른 방식과 관점에서 발제를 할 것이다. 또는 한 사안을 놓고도 교사, 학생, 학부모의 입장에서 발제는 다를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고려해서 토론회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에 맡는 발제문을 쓰면 된다. 토론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발제와 토론을 할 때 한 가지 팁을 전하자면, 절대로 토론회를 할 때 발제문이나 토론문을 줄줄 읽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의 문맹률은 세계 최저이고 토론회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을 줄 안다. 시각장애인이나 외국인이나 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런 사람들은 주최 측에 요청해서 점자책이든 컴퓨터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 파일이든 통역이든 요청하면 될 일이다. 여하튼 토론회에서 자기 발제문과 토론문을 줄줄 읽는 것은 토론회를 매우 지루하게, 여러분의 발제/토론 시간을 의미 없는 시간으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토론회에서 발표할 때는 자기 주장에서 중요한 부분만 골라서 압축적으로 하도록 한다. 인상 깊은 일화나 예시를 들면 아주 좋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일부러 발제문 및 토론문에는 쓰지 않고 토론회 현장에서 발표할 이야기를 하나 정도 준비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글을 그대로 읽지 말라는 것은 시간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대개 발제 및 토론을 발표하는 시간은 길어야 20분, 짧으면 5분 정도 주어진다. 20분이라고 해도 A4 용지로 대여섯 페이지 정도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분량이고, 5분이라면 A4 용지로 한 페이지 얘기하면 끝난다. 그러므로 글을 그대로 읽지 말고, 발표할 때 어떤 부분을 강조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할지 미리 생각해두는 것이 좋다.

두 번째 팁. 발제자와 토론자를 3, 4명 이상 요구하는 '그런 류의' 토론회들은 미리 준비된 발표자들의 발제 및 토론만 1시간씩 이어지는 게 부지기수이다. 준비하는 사람들이 어찌어찌 계획을 짤 때 시간을 40분 정도에 맞추더라도, 발제자와 토론자들은 대개 자기 시간을 넘겨 발표하기 때문에 1시간을 넘는 게 다반사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 오는 청중들은 대개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해도 따분해하고 집중력을 잃고 있기 십상이다. 발제문과 토론문을 위트 있고 재미있게 쓰고 발표를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해보자. 아 물론 아주 엄숙한 학자들이 모인 학계 발표회 같은 데서는 역효과가 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뭐든지 독자들과 청중들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발제문과 토론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발제문과 토론문은 그 자리에 온 사람들이 읽으라고 쓰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자들이 읽으라고 쓰는 것이기도 하다. 보통 어떤 토론회를 할 때는 단지 토론회를 여는 게 아니라 기자들이 그 토론회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왔는지 보도하도록 계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명 및 논평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발제문과 토론문 역시 기자들이 뽑아서 쓸 만한 간결하고 핵심적인 문구가 부각되도록 쓰는 것이 좋다. 그 부분은 발표를 할 때도 강조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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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딱딱한꿈2011.08.24 19:26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1> 글쓰기의 일반적인 기본

  이런 상상을 해보자. 여러분은 지금 난생 처음으로 ‘성명서’라는 걸 쓰기 위해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근데 대체 뭐라고 써야 할지 앞이 깜깜하다. 단체의 입장은 회의에서 이미 확인했다. 그래서 결론에 뭐라고 쓸지는 대충 감이 잡힐 것 같다. “이러이런 걸 철폐하라고 하면 되는구나. 대안으로 이런 걸 요구하자고 했지.” 그런데 결론을 먼저 써놓고 나니 할 말이 없다. “아 우리 단체가 이렇게 주장한다고 몇 줄 쓰면 되지 대체 뭘 쓰란 거야?!” 막막한 마음에 회의록을 보자 “~~이런 부분을 짚어야 할 듯.” “A가 B가 아니라는 걸 강조해야 해.” 뭔 놈의 회의록에 요구사항들만 많다. 짚긴 뭘 어떻게 짚으란 거야? ㅅㅂ!
  그런 분들을 위해서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를 시작한다. 이 글은 운동에서 많이 쓰게 되는 몇 가지 유형의 글들에 있어서, 시대의 명문장가 타이틀을 딸 정도로 잘 쓰게 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럭저럭 욕 안 먹을 정도로 쓸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어쨌건 운동을 위한 실용적인 글들도 글은 글이기 때문에,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선 모든 글쓰기에서 공통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문제들을 피해갈 수는 없다. 제1편은 글쓰기의 일반적인 기본에 대해 알아보자.
  글을 쓴다는 건 뭘까? 자아와 개성의 표현이라거나 우주의 영감을 수신하여 원고지에 글자를 심는 일이라거나… 그런 소리는 집어치우고, 지극히 심플하고 평범하게 말하면 그건 문자로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심플한 정의에서부터 글에서 빠질 수 없는 기본적인 3요소를 생각할 수 있다. ① 글을 쓰는 사람 ② 글을 읽는 사람 ③ 매체. 운동을 하면서 쓰는 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까 우선 여기에서는 글쓰기의 기본으로 이 3가지 요소를 고려하며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① 글을 쓰는 사람
  글을 쓸 때는 글을 쓰는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 이 말에 여러분은 “글 쓰는 사람은 나잖아. 바로 여기 있는데 뭘 더 생각해?”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 그렇다. 여러분은 글을 쓸 때 글을 쓰는 여러분 자신을 잘 모른다. 실제로 글을 쓰다보면, 어이없게도 “내가 대체 뭘 쓰려고 한 거지?”라는 의문을 느낄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을 고려한다는 것은 “내가 이 글로 대체 뭘 전달하려고 하는 건지”를 확실히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가 대체 뭣 때문에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쓰는 건지 헷갈려 하며 쓴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난감한 경험을 줄 수 있는 물건이 된다. 쓰는 사람에게나 읽는 사람에게나.
  그래서 이 부분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바로 주제이다. 주제란, 궁극적으로 자기가 이 글을 통해 전달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대략 1~2문장 정도로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다. 물론 한 글 안에 하나의 메시지만 담는 경우는 별로 없고, 주제는 복합적일 때가 많다. 예컨대 아래의 짧은 글만 보아도 글 안에서 전달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단 하나의 메시지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학교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체벌금지 해야 한다」
/ C모님 / 체벌금지 관련 한겨레 신문 기고문 최종안

요 즘 들어 체벌금지에 대해서 얘기가 많이 나온다. 교육감이 새로 뽑힌 탓인지 서울, 경기, 강원도에서는 이미 체벌금지를 추진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체벌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확실히 학교를 다니는 학생의 입장에서 느끼기에 학교에서의 체벌은 문제가 심각하다. 나 같은 경우도 교사들의 체벌이 학교 가기 싫은 이유 중 0순위로 생각하고 있다. 누가 그걸 사랑의 매라고 생각하겠나.
체 벌은 폭력이다. 내 주위 어른들이 학창시절 교사에게 맞은 것들을 생생하게 재현까지 하면서 말하는걸 보면 그런 폭력의 경험이 기억에 오래남긴 남나보다. 최근 서울에서 일어난 ‘오장풍’ 사건을 두고 “아직도 저런 체벌이 있나?”라고들 말하지만, 이런 폭력들이 학교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정말 ‘경찰은 뭐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들이 있을 정도다. 그건 어느 몇 명의 교사들의 일탈 행동이 아니라, ‘청소년/학생들은 때릴 수 있다’라는 생각 자체에서부터 비롯된 문제다. 오장풍처럼 손으로 학생들을 퍽퍽 날려보내지 않더라도, 단 한 대를 때리고 기합을 주는 것에서부터 이미 문제가 있다.
교 육감들이 체벌금지 정책을 내놓으면서 사회에서 학교의 체벌만을 문제 삼고 있는 요즈음에도, 가정에서의 체벌은 잘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학교에서의 체벌도 꼭 없어져야하는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빈번하게 자주 일어나는 가정에서의 체벌도 없어져야 한다. 학교에서의 체벌이 나쁘다는 논리가 가정에 체벌만 비켜갈 순 없다.
공 익광고에서는 가정이 우리의 안식처인 양 이야기하지만, 어떤 학생들에게는 학교보다 더 무서운 곳일 수도 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폭력을 몸으로 깨닫고, 학교에서 맞고 오면 가정에서도 또 맞고, 교사에게 맞고 오면 잘 가르쳐 줘서 감사하다고 오히려 체벌을 부추기는 것도 가정이다. 학교나 가정이나 체벌이 있는 이상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고 폭력을 학습시키는 곳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정에서의 폭력은 해결하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 아동학대 수준까지 가야 폭력으로 인정할까?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체벌을 ‘사랑’이니 ‘교육’이니 하는 게 우리나라인데, 특히 가정에서의 체벌은 학교의 체벌보다 ‘사랑’이라 포장하는 것이 더 심각하다.
학 교에서의 체벌금지는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왜 가정에서의 체벌금지는 이야기조차 되지 않는 것인가. 가정이든 학교든 학원이든, 청소년들을 인간으로 본다면 체벌은 사라져야 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체벌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고 일단 사건 하나 터졌으니 막고 보자는 식으로는 정말 청소년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이 글에서 주제가 뭔지, 전하고 싶은 부수적인 메시지들은 무엇인지 정리해보자. 연습문제다. 킁. 어쨌건 주제를 생각하며 글을 쓰라는 건, 결국에 이 글로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바가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개요’를 짜라는 것이다. 개요는 쉽게 말해 내가 이 글을 어떻게 써내겠다는 계획표 같은 것이다. 논술 학원에서 가르치듯이 “서론 - 본론1 - 본론2 - 결론” 이런 식으로 개요를 짤 필요는 없다. 그런 개요는 논설문에는 적절할 수 있으나 가끔 그런 형식을 벗어난 논설문도 있고, 논설문 외의 글들도 그런 형태를 따를 필요는 없다. 어떤 글은 결론 내용이 제일 앞에 나오기도 하고 어떤 글은 그런 방식의 개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분이 어떤 글을 쓰든, “나는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이런 이야기를 이런 순서로 해서 이렇게 써야겠다.”라는 대략적인 계획은 필요한 것이다.
  글쓰기에 숙련되면 그런 개요를 머릿속에 넣어둔 채로 글을 써내려갈 수도 있지만 아직 미숙할 때는 직접 눈으로 확인 가능한 형태로 메모해두는 게 좋다. 개요를 짜지 않고 일정 분량 이상의 글을 쓰다보면 “어라 내가 뭘 이야기하려고 했더라?” 하며 당황하게 되는 상황을 겪게 될 것이다. 개요가 있다면 그럴 때 개요를 확인해보면 되지만 개요가 없다면 혼란스러운 글이 되고 만다. 물론 글을 쓰던 중에 삘 받아서 짜뒀던 개요를 무시하고 글을 써내려갈 수도 있다. 개요는 자기가 이 글을 어떻게 쓸지 계획을 세워놓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획을 가진 채 써가다가 계획을 수정하는 것과, 애초에 계획도 없이 글을 쓰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② 글을 읽는 사람
  불행한 이야기이지만, 미숙한 글쓴이들은 대부분 글을 읽는 사람들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 당장 눈앞의 하얀 모니터 화면과 깜빡거리는 커서 혹은 하얀 원고지와 씨름하기도 벅찬데 그 너머에 눈에 안 보이는 독자들을 상상하는 건 의외로 만만치 않은 일인 것이다. “글을 어떻게 쓰지?”라는 고민이 궁극적으로는 “이 글은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힐 것인가”라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어떻게 쓰지?”라는 고민이 독자의 존재를 가려버리기 십상이다.
  사실 여러분에게 글쓰기의 일반론으로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항상 “독자를 생각한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이 매우 위대한 예술가이며 작가여서 예술적이며 상식 파괴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은 없다. 이상처럼 “13인의MB가도로를질주하오”라고 써도 된다. (그게 인정받거나 팔릴지는 별개로) 하지만 일단 우리는 실용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실용 글쓰기에서 이상의 시처럼 쓰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실용 글쓰기의 경우에는, 독자를 생각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망한다.
  그럼 독자를 생각하는 글쓰기는 어떤 것인가?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딱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글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예상독자/가능독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 독자들은 어떤 정보를 알고 있나? ▲ 나는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싶은가? 등등.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벗어나 벅차게 사랑할련다.」
/ R모님 / 학생 연애 탄압 관련 언론 기고문 초안

나는 동성애자다. 동성애자지만, 뭐 다를 거 없는 삶을 사는 그런 사람이다. 동성애 혐오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가끔 나를 걸고 넘어진다. 아니 뭐, 그냥 청소년집단을 걸고 넘어진다. 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드 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 경수-태섭 커플을 보고 부러워서 흑흑 했었는데, 이 드라마를 보고 불편하신 분이 있었나보다. 뭐 영화 ‘친구사이?’의 마지막 키스신에서 한 외국인이 ‘하나님의 보편적 세상시청권’을 침해하지 말라고 (‘위에서 하나님이 보고계신데 안 두렵냐’라는 말이었지만, 뭐 나한테는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했었는데 뭐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왜 없을까. 하면서 이야기를 봤는데 세상에 가관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책임져라.’ 아, 어디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는 이 대책없는 구호를 보면 분노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학교는 청소년을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정체성조차 결정할 수 없는 존재로 무성적인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친구가 동성애자임을 알면 써서 내게 하라는 이반검열이 그렇고, ‘불건전한 이성교제’ 처벌이 바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이기 때문에 받는 억압과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이 어우러져 상상도 할 수 없는 억압에 시달린다.
수많은 학교의 징계규정에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징계하는 규정이 있다.
불 건전한 이성교제, 불건전한 이성교제, 불건전한 이성교제. 그 두 어절 뭣도 아닌 단어 때문에 나는 나의 정체성도 부정당하고 (‘이성교제’라는 단어가 바로 그런 거지.), 나의 사랑조차 부정당하고, 나 자신조차 부정당한다. (그래 그게 아니라면 난 게이니까 그래, 학교에서 애인 만들어서 뽀뽀하고 키스해도 상관없는 거지?)
이제 좀 집어치우자 그 단어. 그 이성애중심주의적이고, 연애탄압적이고, 순결이데올로기에 빠져있는 그 단어.
이제는 좀 게이여도, 좀 문란해도 봐줘라.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내 사랑에 대한 결정권은 내가 가진다.
걱정하지마라, 아 걱정된다면 콘돔사용법이나 제대로 알려주고, 제대로 된 성교육이나 해라. 음순 음경 운운하는 그 따위 성교육이 성매매, 성폭력, 성차별을 부르는거니까.
이제 좀 다시 보길 바란다. 100일, 500일, 1000일되서 축복해주지 못할망정 연애도 못하게 하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드는게 뭐하는 짓인가.
이제 내가 연애를 해도, 그게 설상 남자여도 걔랑 성관계를 가져도 상관없는 ‘미성숙한 이성교제’라는 단어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아니 나 뿐만 아니라 연애를 하고 있는 수많은 헤테로 커플들과 게이, 레즈비언 커플도


  이 글은 독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글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글을 쓰게 된 배경이나 여러 용어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마구 던져지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 중 다수가 이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또한 설득하거나 설명하는 내용은 거의 없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거나 긴가민가하고 있던 독자들도 설득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처럼 독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어휘나 정보를 섞어가며 불친절하게 글을 쓰는 경우는 비교적 그 잘못이 명백한 편이다.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서 우리는 ‘독자에게 적합한 글쓰기’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두발자유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학생들이 주로 읽는 매체에 실리는 글과 정부 관계자가 읽을 글, 어른들이 읽을 글은 서로 다른 어조로 서로 다른 내용을 말해야 할 것이다. 학부모들이 주로 읽게 될 매체에 “두발자유를 위해 학생들이 투쟁에 나서야 합니다!”라는 글을 쓰는 것보다는 “학부모들이 두발자유를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편견입니다.”라고 쓰는 게 더 독자에게 적합한 글쓰기일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단체 내부 사람들끼리 읽을 기획서나 제안서를 쓸 때와, 외부의 사람들이 읽을 기획서나 사업 설명을 쓸 때는 다르게 써야 할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는 일부러 불친절하고 막 나가는 글을 쓰기도 한다. 아니면 지면 관계상 자세한 설명을 생략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몇몇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글들은 독자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불친절한 글은 사람들이 잘 읽지도 않을 뿐더러 읽더라도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잘 전달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③ 매체
  매체는 쉽게 말해 글이 어떤 형태로 어떻게 발표되고 전달되는 글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가장 대표적으로 매체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분량이다. 나에게 허락되어 있는 혹은 요구되는 글의 분량은 얼마인가? 분량은 글의 주제와 메시지, 전개 방식 등등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또한 그밖에도 이 글이 인터넷 언론에 실리는 글인지, 신문지면에 실리는 글인지, 책에 들어가는 글인지, 토론회 자료집에 실리는 글인지, 말로 옮겨야 하는 강연이나 연설문인지, 이메일로 보내는 글인지, 첨부할 사진은 칼라인지 흑백인지 등등 여러 가지 매체의 형식들을 고려하는 글쓰기를 해야만 한다.
  매체를 고려하는 글쓰기 또한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예컨대 시의성 있는 사건에 대해 신문 칼럼 형식으로 쓴 글은 “최근의” 등의 표현을 사용하거나 시의성 있는 사건에 대한 소개로 글의 도입부를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몇년 몇십년 동안 간행되고 팔릴 목적으로 만들어내는 책에 실릴 글에 그런 표현이나 도입부를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분량과 발표형식, 전달시기 등이 매체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다. 이런 여러 매체를 고려한 글쓰기는 구체적으로는 기고문(칼럼 등), 성명서, 토론회 발제문/토론문 등등을 설명하면서 함께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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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09.23 15:31



아수나로의 이예반님이 아수나로는 대중조직이 아니냐고 물어보신 글에 대해 답한 글;
혹시 그럼 전에 제가 썼던 '문제는 조직화다'라는 논지의 글이랑 이 글이 서로 상반되지 않냐, 라고 말하실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문제는 조직화다'는 포괄적, 원론적 차원에서 조직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글이었고
또 지금 쓴 이 글은 아수나로가 당장 조직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대중조직적인 모델로 조직화를 하긴 어렵다는 것이지요 @_@;









1. 대중조직이란 무엇인가


대중조직은 단순한 대중화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 것과는 구분되어 다르게 쓰이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참여연대라거나 환경운동연합 등은 대중들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지만 대중조직이라고 하기는 어렵죠. (뭐 그렇다고 딱 활동가조직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지만.)
또,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는 대중조직이라고 하지만, 그 대중조직의 의미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는 의미에서 대중조직이 아닙니다.

대중조직은, 쉽게 말해서, '현장'에서부터 상당수의 대중(여기서 대중은 불특정 다수일 수도 있지만, 특정 다수 - 노동자, 여성, 농민, 청소년, 대학생 등등 - 인 경우가 많습니다.)들이 조직되어 있는 형태의 조직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노동조합들의 총연맹 같은 거겠죠. 일하는 노동 현장에서부터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그 노동조합들이 모여서 총연맹(민주노총, 한국노총 등)을 만듭니다. 금속노조나 전교조 같은 산별노조, 분야별노조들도 대중조직의 모습입니다.

정당들도 원칙적으로는 대중조직입니다. 지역 당협(과거 지구당)을 통해 지역 기반의 조직들을 꾸리지요. 한국의 거대정당들은 대중조직적인 면이 좀 약한 경향이 있고 대중조직보다는 혈연이나 지연이나 학연 등에 더 영향을 받는 부분도 있고, 정당 내적으로는 비민주적이고 상층 정치인 중심적인 면이 있지만... (-_-) 원칙적으로는 정당도 대중조직의 형태이지요.

(※ 글을 쓰다보니, 대중조직과 활동가조직의 중간 어디쯤에 '회원조직'들을 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예를 들어 여성민우회는 활동가조직처럼 움직이지만 다수의 여성 회원들이 있고 또 이 회원들이 활동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 대중조직과 활동가조직, 회원조직 등의 규정은 완전히 엄밀할 수는 없어요. 어느 정도 개념이 있고 그 개념 중 어디에 가까운지, 아니면 어디를 지향하는지를 판단하는 거죠.)

 대중조직의 가장 큰 장점은, 활동을 할 때 그 생활의 현장(일터, 학교, 지역 등)에서부터 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고 또 현장의 조직들을 이용하여 많은 수의 사람들을 활동에 참여시킬 수[동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아수나로가 왜 대중조직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나


청소년(인권)운동에서 대중조직 만들기는 학교 조직이냐 지역 조직이냐 뭐 이런 논의도 있지만, 일단 그 이야기는 패스하고...
일단 제가 왜 아수나로가 대중조직에 적합하지 않다고 이야기했는가, 하는 배경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따이루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① 청소년인권운동으로서의 발달
역설적이지만 청소년인권운동이 발달한 것 자체가 아수나로의 대중조직화를 막습니다. 이건 저번 총회에서 "운동의 성과는 없이 담론만 발전했다."라고 평가했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요.
주장의 수위 자체가 높아진 부분도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더 문제가 되는 건 주장/사고방식의 방대함이나 청소년인권 주장이 포괄하게 된 범위의 문제입니다.
쉽게 말해서, 처음에 아수나로에 들어온 사람이 현재 아수나로에서 잔뼈가 굵은 활동회원들의 청소년인권에 대한 주장이나 사고방식을 쫓아오기 위해서는 꽤 많은 양의 공부나 사고방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청소년인권운동이 주장하는 담론이 학교나 교육에 국한되지 않고 노동, 정치, 가정, 그밖에 사회구조 전반으로 확대되어 있는 현실에서는요.
물론 아수나로는 지금보다 더 이런 주장을 좀 더 대중화시키고, 새로 들어오는 회원들이 더 쉽게 이런 생각들에 익숙해지고 익힐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문턱을 아무리 낮추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추가적인 문제는, '청소년'운동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다수 청소년들은 충분한 여가시간을 가지고 있지도 못할 뿐더러, '청소년기'라는 건 (초등학교고학년대부터 쳐서) 길어야 8년, 짧으면 5-6년 정도입니다. 좀 더 긴 시간을 들여 회원들을 교육할 수 있고 운동에 대한 이해와 생각들을 넓고 깊이있게 공유할 수 있는 다른 운동과는 다른 청소년운동 특유의 문제점이죠 -_-;;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인권)운동이 대중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좀 더 주장을 압축하고 단순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학생인권과 교육정책 문제로만 딱 한정한다거나, 노동이나 정치적 권리로만 딱 한정한다거나 해도 대중조직을 만들기는 꽤 벅차요.


② 운영방식 또는 인적 구성
아수나로의 운영방식이나 인적 구성도 문제가 되는데요. 예를 들어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지향하고 모두에게 활동회원적인 관심과 역량을 요구하는 운영방식은 대중조직에 별로 적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이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런 다소 꼬뮌적/아나키즘적인 운영으로는 대중조직 구성은 쉽지 않아요. 수가 늘어나면 다시 그 조직의 단위를 작게 쪼개고 쪼개서 유지시킬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거대해진 전체 조직을 원활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최소한 대의원 같은 형태의 제도는 필요할 수밖에 없겠지요.

어쩌면 여기서는 인적 구성의 문제가 더 클 수도 있는데, @ 활동회원들의 성향  @ 탈학교 청소년 또는 비청소년 활동가의 비율 이 두 가지가 인적 구성에서는 핵심이 되겠지요.
활동회원들의 성향이라는 것은 운영방식에서 좀 더 개인적이고 수평적이고 탈권위적인 형태를 지향하는 성향 자체라거나, 대중조직화에 적합하기보다는 좀 덜 대중적인 (-_-) 왕따스런 인간들이 많다는 거려나요. 이 활동회원들의 성향은 길게 봐서 개선 가능하지만, 지금 당장은 쉽게 바꿀 수 없는 요소입니다.
그리고 뭐 저는 100% 동의하지는 않는데... 따이루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회원들 중에 탈학교 청소년이나 비청소년 활동가들의 비율이 늘어나는 것 자체가 청소년 대중조직을 만드려고 할 때 어려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슈를 잡는 문제도 그렇고 활동 공간 - 생활 공간의 문제도 그렇고.


③ 지금까지 쌓여온 아수나로의 이미지 등
이것도 장기적으로 볼 때는 개선 가능하지만 바꾸기 어려운 요소 중 하나입니다만-
아수나로가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의 문제가 있겠죠.
여기서 쌓아온 이미지라는 건 운동사회 안에서의 이미지나 대중적인 이미지나 모두를 지칭합니다만- 실질적으로는 운동사회 안에서 이미지가 좀 큽니다. 왜냐면 대중적인 이미지는, 뭐 아수나로가 대중적으로 노출되었던 적 자체가 그리 많지 않고 굉장히 얄팍하고 좀 포괄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거라서, 바꾸려고 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운동사회 안에서의 이미지는, 아무래도 지난 5년 동안 형성되어온 거라서 바뀌기 쉽지 않죠-;
일단 아수나로의 까칠한 이미지, 인권감수성이 높고, 어른들에게 고분고분하기보다는 개기고 발칙한 이미지는, 뭐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지를 받을지 몰라도, 운동사회 안에서도 넓은 지지와 후원을 얻기는 쉽지 않아요. 왜냐면 운동사회 안에도 주류는 꼰대들이거든욬ㅋㅋㅋㅋㅋ ㅠ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촛불 때 있던 전청련이나 10대연합이나 촛불소녀 같은 촛불청소년들의 이미지가 운동사회 안에서 지지나 후원을 얻기는 쉽겠지요. 그리고 대중조직 만들기는 지금으로서는 그런 지지와 후원 없이는 참 난망한 부분이 있습니다.
(돈이라거나, 돈이라거나, 돈이라거나, 장소라거나)


(※ 추가로, 따이루는 전국 조직으로는 일단 현재 대중조직 출발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_@;)



3. 그럼에도 왜 아수나로가 필요하냐구?

이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면, 아수나로가 대중조직으로 바로 발전하기 어렵다면, 대체 아수나로의 역할은 뭘까요?
청소년인권운동의 전국 대중조직을 지향하며 출발했던 아수나로의 현재가 이렇다면, 아수나로의 비젼은 무엇일까요?

먼저 제가 앞서 한 이야기는 아수나로가 지금 바로 대중조직으로 발전/전환하기 어렵다는 것이지, 아수나로가 대중조직 만들기에 보탬이 되거나 대중조직의 기반이 되지 못한다는 건 아닙니다. 사실 아수나로가 지금까지 전국 여러 지역에서 해온 일들이나 활동회원들을 계속 만들고 늘려온 것, 주장하고 청소년인권의 목소리를 내온 것 자체가 청소년인권운동의 대중조직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꼭 필요했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앞으로도, 아수나로 활동을 딛고서 대중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좀 더 길게 한 10년 후를 본다면, 아수나로나 청소년운동의 조건이 여러 모로 달라져서 아수나로가 바로 청소년대중조직으로 발돋움하려고 할 수도 있겠죠. 그건 제가 예측하기도 어려운 영역이고... 예측을 내놓는다고 해도 많은 논쟁이 필요한 부분이니까 여기선 생략;;)

결과적으로 이런 한계들이 있더라도, 저는 아수나로가 지난 5년간 해온 활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아니, 박수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수나로는 첫 시작에서부터 청소년인권운동의 이론과 기반을 다질 것과 전국 대중 조직을 만들 것을 주문받았어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둘 모두를 아수나로가 맡아서 한다는 게 세부적으로는 어떤 부분이 모순적이었고 어떤 부분에 한계가 있었나... 평가해볼 수도 있을 텐데요. 그건 이렇게 혼자서 글을 끄적이기보다는 여럿이서 수다를 떨면서 해보고 싶네요 ^^;;

여하간 아수나로를 대중조직으로 전면 개편하려고 하지 않고 별도로 대중조직을 추진하려고 하는 건, 청소년인권운동에서 아수나로의 역할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겁니다.(제...제가 추진하는 게 아니라서 100% 장담은; 제 견지에서는 이렇다는 거지요.) 청소년인권운동으로서 폭넓고 깊이 있는 관점과 내용들을 유지하고, 적극적이고 활동력 있는 활동가들을 만들어내고, 조직화와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은 계속 누군가가 해야 하니까요.
별도의 대중조직을 추진한다고 해서 그게 아수나로와 충돌하거나 배치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뭐 아니면 대중조직 추진과는 별개로 거기에 자극받아서 아수나로의 대중조직화를 추진해보셔도...(??) 그리고, 그렇게 추진한 대중조직 사업이 실패한다고 해도, 그건 그 나름대로 성과가 남는 거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현재 시점에서 아수나로의 형태는, 직접적으로 스스로 대중조직이 되지는 못하지만, 청소년인권을 대중화시키고, 좀 더 폭넓게 (약간은 대중적인) 회원조직 같은 느낌으로 운영되는 거예요. 너무 활동가조직스러운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아니면 만약 대중조직이 꾸려진다면 그 안의 의견그룹[정파]이 될까요? ㅎㅎ;;;;

물론 이런 구상은 사회적 조건이나 청소년인권운동의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할 거고, 또 아수나로에 대해 다른 회원들이 가진 생각들에 따라서도 달라질 겁니다 ^^;



추신 : 그래서, 여하간, 요컨대, 대중화랑 대중조직화는 다른 문제에요.
민주주의 담론은 대중화되어 있지만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대중조직화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욜 -ㅂ- 환경 담론은 꽤 대중화되어 있는 편이지만, 환경운동을 위한 대중조직화는, 뭐 지역 기반으로 좀 되어 있긴 하지만 그렇게 강하게 되어 있진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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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